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라틴어: Marcus Aemilius Scaur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63년/162년 ~ 기원전 90년/8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조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아버지) 성명 미상의 여인(첫번째 아내)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두번째 아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장남)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차남) 아이밀리아 스카우라(딸) |
직책 | 로마 공화정 집정관(기원전 115년) 프린켑스 세나투스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15년 |
전임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게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에부르누스 |
동기 |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
후임 |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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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프린켑스 세나투스.기원전 2세기 코르넬리우스 가문 내 지파인 스키피오 가문과 연합한 메텔루스 가문 연합체를 이끈 실권자로, 로마 공화정 시대의 프린켑스 세나투스 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가장 유명하다.
성씨 아이밀리우스에서 드러나듯이, 명문 파트리키 일족인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이나 다른 지파와 달리 거의 몰락한 집안 출신이다. 하지만 탁월한 성실함과 책임감, 특유의 판단력이 천재적이고 상대 설득 재주가 뛰어난 장점을 살려, 자수성가했다. 이때 그는 메텔루스 가문이 스키피오 가문과 손을 잡고 정무관 직을 연이어 장악하는 과정에서, 메텔루스 가의 딸 중 한명과 결혼해 사위가 된 뒤, 데릴사위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가문과 본인을 이 파벌의 한 축으로 만들었다.
밀비우스 다리와 로마와 갈리아를 연결하는 도로 중 하나를 건설했으며, 원로원 계급이 에퀴테스를 상대로 사법부에서의 권력을 쟁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생애
고대 로마 2대 국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후손을 자처하나, 실제로는 알바롱가 시절부터 권세를 쥐고 로마에 편입된, 오래된 파트리키 씨족인 아이밀리우스 가문의 일원이다.그의 출신 가문인 아이밀리우스 가문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 씨족 가문은 알바롱가에서 왔고 그 기원은 중부 이탈리아와 오스카 지방에서 건너와서 합쳐진 씨족 가문에서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1] 어쨌든, 스카우루스의 집안인 아이밀리우스 가문은 그들 스스로를 늘 누마 폼필리우스 후손이라고 자처했는데, 누마 폼필리우스 딸 혹은 조카딸을 조상으로 둔 확률이 높아서, 동시대부터 마냥 족보 세탁을 했다고 비난은 받지 않고, 누마의 후손이라고 인정은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은 공화정 초기부터 큰 흥미를 끌게 됐다. 왜냐하면 누마 폼필리우스의 차남 칼푸스를 시조로 둔 노빌레스 가문인, 칼푸르니우스 가문을 비롯해,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버지 폼포를 직계로 하여, 누마 형제를 통해 내려온 폼필리우스 가문, 누마의 셋째아들 피누스를 시조로 둔 피나리우스 가문이 멀쩡한 상황에서, 당당하게 이 주장을 펼치는 것은 분명 재밌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밀리우스 가문은 전통적으로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이래, 파푸스, 렌툴루스, 레피두스, 파울루스 등 지파와 이들 지파 가문 여성이 시집을 가게 되면서 이중 가문 성향을 띠게 된 평민씨족 메시우스 가문의 명성이 통상적으로 더 드높았다고 한다. 즉, 그의 집안인 스카우루스 지파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못했다. 단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안티오코스 3세와 로마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로마 함대 일부를 지휘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언급했을 뿐이다. 학자들은 이 인물이 그의 조부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유명한 사람들에 관하여>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몰락귀족이 된 집안을 일으키고자, 스스로 석탄 상인이 되어 석탄 거래에 종사했다. 그는 한평생 온갖 고생을 하면서 검소하게 살아, 아들에게 3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와 6명의 노예를 물려줬다고 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의 집안은 혈통적으로 훌륭했으나 오랫동안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기에, 그는 사실상 신참자(Novus Homo)처럼 갖은 고생을 겪어가며 경력을 쌓아야 했다고 밝혔다.
스카우루스는 타고난 선동가 기질이 뛰어난 웅변가, 변호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이우스 그라쿠스처럼 형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맞아 죽고, 외가인 스키피오 가문과 척을 진 나머지 독기 오른 웅변가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두 가지 자질이 있었다. 경청 능력이 뛰어나고, 말재주가 없지만 중요 사안을 듣고 빠르게 판단해 상대 생각을 읽고 설득하는 기술이 천재적이었다. 이 두 가지는 그가 성공하고 힘을 키우는데, 큰 힘이 됐다. 그래서 훗날 그를 기억한 키케로는 이렇게 극찬했다.
"그의 말이 없으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재주가 있으나, 그는 집안이 쇠락해 몰락귀족으로 조롱받고, 아버지뻘 세대에겐 신진 세력으로 인식돼 파트리키의 오점으로 의심을 받았다. 더욱이 아버지가 공직 진출의 꿈을 포기하고 성실히 살면서 일평생 모아 물려준 재산도 정치에 진출해 명예로운 경력의 끝인 집정관 자리로 오를 수 없을 만큼 많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스카우루스는 자금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겠다는 꿈을 접고, 정치와 연을 끊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환전상이 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결국 마음을 다잡고 정치에 뛰어들어 가문의 명성을 되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웅변술을 연마했고, 선천적으로 뛰어났던 경청 능력과 일의 핵심을 꿰뚫고 상대의 생각까지 간파한 능력을 키워, 젊은 나이에 훌륭한 웅변가로 명성을 얻었다. 키케로는 그가 웅변가로서 광범위한 경험을 가졌지만 가장 훌륭한 웅변가로 떠받들어지는 영광을 얻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의 연설 기술이 로마의 전통 기법을 따랐고 화려한 수사보다는 상식을 추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키케로 특유의 잘난척, 자기중심적인 성향 등을 떠올리면, 스카우루스의 웅변가적 재주는 동시대에 키케로같은 전문 웅변가로 최고 반열이 되지 못해도, 어떻게든 정무직을 연합해 독점하려는 세도가인 스키피오, 메텔루스 연합에겐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하여 그는 메텔루스 가 출신의 이름미상의 아내로 알려진 첫아내와 결혼할 기회를 얻었고, 이 세도가의 데릴사위이자 책사 역으로 스카우트됐다.
그는 나중에 군대에 복무해 누만티아 전쟁에 참가하여 군공을 세워 월계관을 받았고, 이후에는 총독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의 지휘하에 사르데냐에 복무하면서 당시 재무관으로서 사르데냐에 근무하고 있던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알고 지냈다.
기원전 123년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고 기원전 122년경 조영관을 맡았다. 그는 조영관으로서 행사를 개최하는 것보다 정의를 관철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원로원이 농지 개혁, 이탈리아인들에게 시민권을 분배하는 문제, 빈민들을 이주시킬 식민도시를 카르타고 등지에 건설하는 문제 등 여러 사안을 놓고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을 때, 그는 원로원의 편에 서서 옵티마테스 인사들을 설득해 그라쿠스를 보다 적극적으로 공격하게 했다. 기원전 119년에 법무관을 맡아 누미디아로 보내져서 전임 누미디아 국왕 미킵사의 아들들과 유구르타 왕자간의 분쟁을 조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117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에부르누스에게 패배했다. 이듬해 다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와 함께 기원전 115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이때 상대 후보였던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스카우루스가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나눠줬다고 고발했지만 패소했다. 스카우루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같은 혐의로 고발했다. 스카우루스가 이 재판에서 장부 기록에 적힌 "AFPR"이라는 문자가 "actum fide P. Rutili(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에게로)"를 의미하며 이는 그가 돈을 받아먹은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하자, 루틸리우스는 그 문자는 다음을 의미한다고 답했다.
"아이밀리우스는 해냈고 루틸리우스는 엮었다.(Aemilius fecit, plectitur Rutilius)"
그는 집정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로마 시민의 투표 절차를 정했다고 알려졌으나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저녁 식사에 사용되는 요리 종류를 규제하는 등 사치를 억제하기 위한 법안을 반포했으며, 리구리아인과의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둔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 감찰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는 그를 원로원 의원 중 첫번째라는 의미인 '프린캡스 세나투스'로 선정했다. 한편, 그는 다혈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 번은 법무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수볼로가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고자 지나가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스카우루스는 격노해 데키우스의 옷을 찢고 그가 앉은 의자를 부숴버렸으며, 시민들이 법률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데키우스를 찾아가는 것을 금지했다.
기원전 113년, 유구르타가 누미디아를 자신과 함께 양분하고 있던 아드헤르발을 공격했다. 아드헤르발은 전초전에서 패배한 뒤 키르타 시로 피신했다. 그가 키르타를 포위하자, 아드헤르발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스카우루스는 군대를 보내 유구르타를 응징하자고 주장했지만, 원로원은 외교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기원전 112년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누미디아에 파견된 그는 유구르타가 키르타 포위를 풀 것을 요구했지만 무시당했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에 따르면, 그는 유구르타로부터 뇌물을 받고 철수 요구를 강하게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유구르타가 키르타를 함락시키고 아드헤르발을 살해한 뒤 키르타에 살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상인들마저 학살하자, 로마 민중은 매우 분노했다. 호민관 가이우스 멤미우스는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아 사태를 무마하려는 귀족들의 실상을 폭로해 이러한 여론을 더욱 키웠다. 원로원은 민중의 분노에 두려움을 느끼고 누미디아에 선전포고한 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를 사령관으로 선출했다. 이때 그는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서 베스티아의 원정군에 함께 했다. 베스티아가 누미디아에 상륙하여 여러 마을과 요새를 공략하자, 유구르타는 베스티아에게 찾아가서 30마리가 넘는 코끼리와 상당한 양의 금화를 건넸다. 이에 베스티아는 그와 평화를 이뤘다고 주장하며 로마로 귀환했다. 살루스티우스는 스카우루스가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고 베스티아에게 매우 온화한 조건으로 유구르타와 평화 협약을 맺으라고 권유했다고 주장했다.
호민관 가이우스 멤미우스는 베스티아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고 주장하며 민중을 선동하고, 패한 관리들을 정죄하는 데 도움이 될 증거를 확보하고자 법무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특사로 보냈다. 유구르타는 롱기누스 앞에서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연기했다. 이에 롱기누스는 직접 로마로 와서 재판을 받으라고 요구했고, 그는 이를 따라 심복인 보밀카르와 함께 로마로 향했다. 재판 분위기는 유구르타에게 지극히 적대적이어서,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그가 발언하려는 순간, 호민관 가이우스 바이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시민들은 그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는 걸 눈치채고 격렬한 야유를 퍼부었지만, 재판은 그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는 의심을 받은 베스티아 등을 조사하는 위원회가 창설되었는데, 스카우루스는 이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또한 이어진 베스티아의 재판에서 베스티아 측 변호인을 맡았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유죄였고 베스티아는 추방형에 처해졌다. 많은 학자들은 유구르타 전쟁의 주요 사료를 제공한 살루스티우스가 당시 로마 엘리트를 완전히 타락한 것으로 묘사하고자 상황을 왜곡했다고 본다. 스카우루스가 매수된 것이 사실이라면 부패 혐의를 조사하는 위원회에 들어가고 그에 대한 고발이 들어오지 않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스카우루스가 온건책을 주장한 것은 누미디아는 로마의 오랜 동맹국이고 로마는 당시 여러 지역에서 군사적 패배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일 거라 추정한다.
기원전 109년, 스카우루스는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피사에서 제노아로 이어지는 리구리아 해안을 따라 도로를 건설했고,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우스 다리를 건설했다. 동료 감찰관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그는 남은 임기를 그대로 유지하려 했지만 호민관의 반대로 인해 사임해야 했다. 기원전 104년, 로마에서 빵 가격이 급등해 빈민들이 곤경을 겪게 되자, 원로원은 곡물을 도시로 운송하는 권한을 그에게 주었다. 당시 이 임무를 맡은 이는 조영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였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사투르니누스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서 원로원이 그의 직위를 박탈했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원로원이 평민들에게 제공되는 빵을 자기들이 통제해 그들로부터 경의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키케로는 사투르니누스가 이 일로 원로원과 귀족들에게 반감을 품고 민중 선동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103년, 호민관으로 선출된 사투르니누스는 당시 집정관에 잇따라 당선되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마리우스는 사투르니누스를 활용해 귀족들에게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정치적 권익을 얻고자 했고,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의 강력한 권위와 권력을 활용하여 평민과 퇴역 군인들에게 농지를 분배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했다. 사투르니누스는 먼저 "로마 인민의 위대함을 모욕하는 것에 관한 법률"(lex Appuleia de maestate)을 채택하여 공화국의 이익을 해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법에 근거해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패를 초래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카이피오를 위해 변호했다가 머리에 돌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결국 카이피오와 막시무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강제 추방되었다.
기원전 100년 두 번째로 호민관을 맡은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이 여러 속주에서 토지를 얻을 수 있는 농지법을 민회에서 강제 통과시킨 뒤 원로원에 민회에서 통과된 모든 법안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지 않으면 20달란트의 벌금을 부과하고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스카우루스를 포함한 모든 원로원 의원은 새 법을 지지하겠다고 밝혔지만,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만은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 의사당에서 메텔루스를 몰아내기 위해 관원들을 보냈다. 메텔루스를 추종하는 이들이 들고 일어나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메텔루스를 끌어내지 못하자, 사투르니누스는 민회에서 메텔루스 때문에 아무도 땅을 받지 못할 거라고 선동했다. 이로 인해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메텔루스는 결국 로마를 떠나야 했다.
기원전 100년 12월 10일, 집정관 선거에서 당선된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사투르니누스 일당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원로원은 즉시 사투르니누스를 암살 배후로 규정하고 원로원 최종결의를 통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 수많은 귀족이 이에 호응해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처단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에 집결했는데, 그 중엔 스카우루스도 있었다. 당시 고령이었던 그는 거의 걸을 수 없었지만 무장한 채 집합 장소에 나타났다. 서기 1세기의 역사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이 이야기를 대폭 부풀리고 왜곡했다. 이에 따르면, 스카우루스는 마리우스에게 직접 찾아가서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토벌해 공화국을 수호할 것을 요청했으며, 마리우스가 이를 받아들이자 노예에게 갑옷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그는 갑옷을 입고 거의 쓰러질 뻔했지만 손에 창을 들고 원로원 입구 앞에 서서 반군과 맞섰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던진 돌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고, 동료들은 이에 분노해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처단했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그 다음 대목에서 죽었다던 스카우루스가 5년 후 전임 호민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의 재판에 참여한 사실을 거리낌없이 기술했다.
기원전 95년, 스카우루스는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전임 호민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를 고발하면서 열린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노르바누스는 기원전 103년 카이피오와 막시무스를 재판에 회부했을 때 두 호민관 티투스 디디우스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재판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묵살하고 물리적 위해를 가한 혐의를 받았다. 당시 카이피오를 위해 변호했다가 돌을 맞은 적이 있었던 그는 노르바누스를 이번 기회에 몰락시키려 했다. 그러나 노르바누스의 변호를 맡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는 그가 피고인에게 지극히 적대적이어서 증언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증인 체택을 거부했고, 재판관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 후 노르바누스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얼마 후 동방으로 파견된 사절단에 참여한 그는 폰토스 왕국의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 비티니아 왕국의 국왕 니코메데스 3세가 로마의 동맹국인 카파도키아 왕국과 파플라고니아를 향한 침략행위를 중단하게 했다. 그런데 기원전 92년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스카우루스를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뇌물을 받아먹은 혐의로 고발했다. 스카우루스는 지난날 그의 아버지 카이피오를 변호했다가 머리에 돌을 맞아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있을 정도로 세르빌리우스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도 카이피오가 이런 비난을 한 것은 당시 카이피오와 사이가 틀어진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후원한 것에 악감정을 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스카우루스는 카이피오의 주장을 반박했고,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기원전 91년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호민관에 선출된 뒤 원로원 위주의 법정 개혁, 농지 개혁,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분배하는 정책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드루수스의 지지자로서 개혁이 성립되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개혁은 당해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법무관 카이피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 자기들과 같은 시민권을 누리는 걸 원하지 않은 로마 시민들의 심각한 반대에 부딪쳤고, 드루수스는 개혁을 밀어붙이던 중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개혁이 중단되자, 격분한 이탈리아인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면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90년, 스카우루스는 동맹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일으키도록 선동한 혐의로 호민관 퀸투스 바리우스 세베루스 히브리다에게 고발당했다. 이에 그는 재판정에서 배심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수크로의 바리우스는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동맹시를 선동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고 주장하지만 스카우루스는 이를 부인합니다. 누구를 더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바리우스가 히스파니아의 수크로 출신인데 비해 자신은 로마의 파트리키라는 점을 강조해 배심원들의 마음을 자기 쪽으로 돌리려는 계책이었다. 이 전략은 성공했고, 스카우루스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그는 곧 사망했다고 전해지나 사망 날짜는 분명하지 않다. 학자들은 기원전 90년에서 기원전 88년 사이에 사망했을 거라 추정한다.
그는 생전에 3권의 회고록을 집필해 친구이자 변호사였던 루키우스 푸피디우스에게 헌정했다고 전해진다. 키케로는 기원전 46년경에 그의 회고록이 독서에 매우 유용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더 이상 읽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의 회고록은 현존하지 않으나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역사서에 일부 인용되었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처음으로 결혼해 아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를 낳았다. 이 인물은 킴브리 전쟁 시기에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휘하에서 기병 장교를 맡다가 킴브리족에게 패배해 도주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겁쟁이 아들이 남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금지한다"라고 통보했고, 아들 스카우루스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 후 스카우루스는 기원전 119년 집정관, 기원전 115년 감찰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의 딸인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와 결혼해 아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와 딸 아이밀리아 스카우라를 낳았다. 아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는 기원전 56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딸 아이밀리아 스카우라는 기원전 82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결혼했다가 기원전 79년 이혼한 뒤 기원전 67년 집정관인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와 재혼했다. 그의 아내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는 그가 사망한 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재혼했다.
3. 평가 및 여담
- 기원전 115년부터 기원전 89년 말 또는 88년 초까지 오랜 프린켑스 세나투스였다. 이때 스카우루스는 자신의 생애와 명성 중 자신감과 명성의 원천을 이 직책에 임명돼 성실히 수행한 것에 항상 감사했고, 본인의 뛰어난 정치술로 후기 공화정 정국 속에서 명성과 권위로 야심가들을 영리하게 제어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 원로원 안에서는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책에 임명되지 않더라도, 스카우루스에 버금가는 위인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킨나와 술라의 내전 속에서 그 혼란을 명성과 권위로 억누른 원로원 중진들을 보지 못한 원로원 귀족들과, 후대 로마인 그리고 현대까지 스카우루스는 원로원 과두정 체제 아래에서 인정받은 최후의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평가받는다.
- 스카우루스는 명문귀족 일족 출신임에도, 몰락한 지파 출신이라는 한계가 뚜렷했다. 하지만 그는 부패하긴 했다는 비판 등에도 불구하고, 술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을 내전, 계략으로 죽이지 않고, 모두에게 평화롭게 인정받는 프린켑스 세나투스가 됐고, 죽음의 순간까지 공화정 체제 아래에서 가장 권위있고,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 중 한명으로 인정받았다. 이런 이유로 스카우루스를 롤모델로 여겨 존경하거나,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그 명성을 넘고 싶어한 동시대, 후대 원로원 의원은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이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였다. 키케로는 스카우루스를 자신의 롤모델로 여기면서도, 그를 열렬히 추종하고, 그 정신과 유연함을 대단히 존경했다. 이는 공공의 이익과 가치를 위해, 전쟁터에서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친 아들에게 사실상 자결을 강요한 일화를 가혹한 아버지의 전형으로 맹렬히 비난한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도 비슷했다. 그는 스카우루스가 아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더라도, 이런 공정함을 프린켑스 세나투스로서 필요한 태도를 높이 평했다.
- 키케로로 대표된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존경을 받았지만, 로마의 역사가 살루스티우스가 냉철하게 지적한 것처럼, 스카우루스 역시 당대 로마 원로원 의원 중 청렴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정력이 넘치는 귀족으로 당파, 권력, 명성 그리고 부에 탐욕스럽지만, 그 잘못을 숨기는 데 영리하다"
살루스티우스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가 누미디아의 유구르타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고도,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정도로 부도덕하고 비양심적이었다는 점, 그라쿠스 형제 이후의 로마 정국 상황 속에서 파벌간 다툼 속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맡아 본인의 이익을 최대한 취하는 식으로 해석될 행동을 벌인 점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 평가 중 후자로 거론된 근거는 해석될 여지에 따라서는 되레 스카우루스의 정치력이 그만큼 뛰어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여론이 당대부터 꾸준히 나와서, 현대까지도 논란이 많다.
- 스카우루스는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자서전을 남겨 전통의 시작을 알린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로마 공화정 사람 중 최초로 <De vita sua(나의 인생에)>이라는 자서전을 저술해 출판했다. 이 저서는 로마인이 최초로 1인칭 시점으로 남긴 개인 회고록 겸 자서전이었다. 3권으로 구성된 저서였는데, 스카우루스가 구술하면, 글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이 풍부한 해방노예들이 이를 적은 다음, 스카우루스가 감수하는 식으로 완성한 작품이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시작으로 하면서, 본인이 가난하고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많은 시련 속에서 이를 극복한 이야기를 일화로 적어냈다. 그와 함께 그는 당대부터 논란을 낳은 최대 17번의 정치적 재판에 연루된 혐의를 반박하는 내용 등을 적었다. 하지만 이 자서전은 출판 당시부터 대중들에게 진짜 인기가 없기로 유명했다. 따라서 1세대 만에 구하기 힘든 책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스카우루스의 열렬 추종자였던 키케로처럼 이 자서전을 탐독한 사람도 많고, 스카우루스가 책이 완성된 이후 루키우스 푸피디우스와 같은 인사들에게 헌정 형태로 선물해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서는 프린켑스 세나투스가 병석에서 죽기 전에 준 헌정 형태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동료들의 관심보다 중요한 점은 그 서술 방식과 본인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 내용들이 이후 로마 안에서 성공한 정치가에게 당연시된 관습이 된 부분이었다. 어느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했는지,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이 노예를 거액을 주고 스카우트한 다음에 본인 자서전을 지었고, 스카우루스 반대편의 정치인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는 이를 모방해 본인 자서전을 남겨 출판했다. 술라 역시 비슷했는데, 그는 권력의 정점이던 시절에 이 책을 헌정 형태로 받은 루키우스 푸피디우스에게 구해 읽고 난 뒤, 그 방식을 그대로 따라해, 회고록을 지어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