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라틴어: Lucius Licinius Lucull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아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손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손자)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51년 |
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동기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후임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발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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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리키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루쿨루스(Lucullus)라는 코그노멘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페스투스는 이 이름이 일리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이주한 펠리니 족의 지도자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는 로마 인근의 루쿨루스 들판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파스티 카피톨리니에서 그의 조부와 아버지의 프라이노멘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볼 때, 루쿨루스 지파는 리키니우스 씨족에 갓 편입된 플레브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96년 호민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그의 아버지 또는 조부라고 주장했다. 또다른 학자들은 그의 조부는 기원전 202년 조영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이며, 아버지는 기원전 186년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였다고 주장했다. 그의 조상 중에는 집정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였다.
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따라 기원전 154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을 거라 추정한다. 기원전 151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로마는 켈티베리아인들과 어려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기원전 152년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로 부임한 뒤 켈티베리아인들과 전쟁을 벌였지만 쉽게 끝나지 않자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켈티베리아인들이 휴전을 받아들이면서 평화가 곧 성립되는 듯했지만, 원로원 내 마르켈루스의 정적들은 그가 추가적인 영광을 쉽게 얻기 위해 전쟁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적에게 유리한 평화를 맺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이에 따라 메르켈루스에게 전쟁을 이어가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듬해에 그의 지휘권을 갱신하지 않고 집정관 중 한 명을 히스파니아에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151년 집정관에 선임된 그는 제비 뽑기를 통해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로 부임하게 되었고, 병력 모집을 실시했다. 그러나 켈티베리아인들이 매우 용맹해 현지의 군대가 지속적으로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던 로마인들은 징집을 기피했다. 심지어 트리부누스 밀리툼에 지원하는 귀족 자제들도 부족해서 인원이 제때에 맞춰지지 않았다. 여기에 루쿨루스가 징집을 불공평하게 실시하고 있으며, 일부 사람들은 근무하기 쉬운 곳으로 보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로 인해 징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임 재무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자신이 레가투스 또는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히스파니아 속주에 갈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다른 귀족 청년들이 이에 감화되어 앞다퉈 지원하면서 장교들 정원이 채워졌고, 신병 모집은 추첨을 통해 진행하기로 하면서 가까스로 해결되었다.
이렇듯 징집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그는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에 4개월 늦게 출발했다. 한편, 마르켈루스는 새 집정관이 오지 못하는 틈을 타 자기 선에서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그는 아레바키족을 누만티아 시로 몰아붙였고, 뒤이어 아레바키, 벨리스, 티티스 족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들 부족은 600달란트의 배상금을 로마에 지불해야 했으며, 벨리스톼 티티스 족은 로마군에 공물을 바치고 군인들을 공급해야 했다. 이후 속주에 도착한 루쿨루스는 마르켈루스로부터 군대를 인수해 총 30,000명 가량의 병력을 확보했다.
전임자가 진작에 전쟁을 거의 끝내놨지만, 루쿨루스는 군공을 세우기 위해 새로운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그는 로마와 동맹을 맺고 있던 바카이 족이 카페타니족을 습격했다는 것을 구실 삼아 바카이 족을 공격했다. 그는 먼저 코카 시를 공격해 성벽 아래의 전투에서 화살이 부족한 적을 몰아붙어 성내로 몰아낸 뒤 포위했다. 코카 시민들이 평화를 요청하자, 그는 보조병들을 위해 은 100달란트와 기병을 제공하며 로마 수비대를 배치할 것을 요구했다. 코카 시민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성문을 열었지만, 그는 도시에 입성한 뒤 모든 주민을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2만 시민 중 극소수 만이 가까스로 탈출했고, 나머지는 처참하게 살육되었다. 아피아노스는 이에 대해 루쿨루스가 로마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비난했다.
그후 루쿨루스는 진군로 주변에 있는 모든 마을을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22,000명의 군대가 방어하고 있는 인터카티아(Intercatia, 현재 비야누에바 델 캄포) 시를 포위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평화 협상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코카 시의 말로를 전해들었던 그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벌어진 공방전은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고, 양측 모두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러다 로마 군인들이 성벽에 구멍을 뚫고 도시로 돌진했지만, 농성군이 이들을 몰아내고 성벽을 보수했다. 결국 루쿨루스는 도시를 공략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시켜 저들과 협상하게 했다. 그 결과, 일정량의 소와 10,000개의 망토가 로마인들에게 전달되었지만, 금과 은은 받을 수 없었고 로마 수비대가 주둔할 수도 없었다.
그후 루쿨루스는 팔라티아 시를 포위했지만 적 기병대가 후방에서 치고 빠지는 유격전을 전개하는 바람에 식량 부족에 시달리자 퇴각해 투르디타니아(오늘날 타르테소스)로 향했고, 그곳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이때 루시타니아 전쟁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몰아치고 있던 루시타니아인들이 숙영지를 공격해오자 이를 격퇴하여 4,000명을 사살했고, 하데스 해협으로 이동하는 또다른 부대를 공격해 1,500명을 죽이고 생존한 적병들을 생포한 뒤 노예로 팔았다. 기원전 150년 봄, 그는 전직 집정관의 자격으로 먼 히스파니아 총독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함께 루시타니아를 침공해 타요 강 북쪽의 영역을 침공했다. 그 사이 갈바는 타요 강 남쪽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그후 로마로 귀환한 그는 코카 시민들을 상대로 저지른 짓 때문에 비난받았고, 원로원의 승인 없이 무단으로 전쟁을 일으킨 일로도 비판받았지만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다. 이후 히스파니아 속주에 있을 때 행운의 여신을 위한 사원을 건설하겠다고 했던 서약을 지키기 위해 벨라브레에 사원을 건설했다. 이때 그는 사원을 장식하기 위해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에게 코린토스를 함락시켰을 때 포획한 전리품 중 여러 조각상을 잠시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나중에 뭄미우스가 조각상을 돌려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원한다면 여신에게서 제물을 가져가라"고 답했다. 뭄미우스는 감히 여신에게 봉헌된 조각상을 가져갈 수 없다고 보고 그만뒀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기원전 104년 법무관을 맡아 시칠리아에서 발발한 제2차 노예 전쟁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당대 로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노빌레스 가문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일원인 카이킬리아 메텔라와 결혼해 두 아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를 낳았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당대 로마 최고의 전술가로서 명성을 날렸고,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역시 기원전 73년 집정관을 역임하고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한 후 탁월한 군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