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 라틴어: Marcus Aemilius Lepidus Porcina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조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버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37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 |
동기 |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
후임 | 루키우스 푸리우스 필루스 섹스투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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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 씨족인 아이밀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187년과 기원전 175년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들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고대 사료에는 이를 입증하는 내용이 없어서 불분명하며,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맹활약한 트리부누스 밀리툼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레피두스의 자식이라는 설도 제기된다. 아피아노스는 기원전 138년 집정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가 그의 친척이라고 밝혔지만, 정확한 관계는 설명하지 않았다.현대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간격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애 기원전 140년 이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37년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만키누스가 제비뽑기를 통해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에 부임하여 누만티아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는 로마에 남아서 행정을 주관했다. 이때 호민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가 민회의 투표가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을 제시하자,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기원전 137년 가을, 만키누스가 누만티아인들에게 패하고 전군이 궤멸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굴욕적인 평화 협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이에 분노한 원로원은 만키누스를 로마로 소환해 재판을 받게 한 뒤, 그를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로 보내 전후 수습을 하도록 했다. 이후 원로원은 만키누스를 누만티아인들에게 알몸으로 넘기고 협약을 무효로 처리하기로 결의한 뒤 그에게 누만티아와의 전쟁을 재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 더해 먼 히스파니아 총독이며 그의 친척인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의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해서 그를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포르키나와 브루투스는 누만티아를 직접 공격했다가 만키누스처럼 될 것을 우려해 누만티아와 손을 잡았을 것으로 의심되는 바케오스족과 새로운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기원전 136년, 그들은 바케오스 족의 중심지인 팔란티아를 포위 공격했다. 로마에서 파견된 두 사절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는 팔란티아 공격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지만, 두 총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팔란티아가 쉽사리 함락되지 않으면서 장기전으로 흘러갔고, 물자가 완전히 바닥나면서 많은 군인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
결국 브루투스와 포르키나는 퇴각하기로 마음먹고, 야간에 적의 눈을 피해 후퇴했다. 군단병들은 부상자, 병자, 심지어 무기까지 전부 버리고 도주했다. 다음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케오스 족은 이들을 맹렬히 추격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6천 명의 로마 군인이 전사했다고 한다. 원로원은 이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는 즉시 로마로 소환되었고, 기원전 136년 도 집정관 루키우스 푸리우스 필루스가 그 대신 파견되었다. 그는 허가없이 전쟁을 선포했다는 이유로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기원전 125년 감찰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라빌라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그가 지은 집이 너무 호화롭다며 호된 질책을 가했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