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라틴어: Quintus Marcius Phylippus | |
생몰년도 | 기원전 229년 ~ 기원전 164년 이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조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아버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아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증손자) |
참전 |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6년 |
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
동기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후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
임기 | 기원전 169년 |
전임 |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
후임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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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군사적 재능은 별로 없었지만 막강한 집안 배경에 힘입어 집정관을 2번 역임하고 감찰관까지 올랐다.2. 생애
처음으로 독재관과 감찰관을 역임한 평민 씨족인 마르키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코그노멘인 필리푸스를 단 첫번째 인물은 기원전 281년 집정관인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였는데, 그의 조부로 추정된다. 아버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이름만 전해질 뿐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기원전 169년에 집정관을 맡았을 때의 그의 행적을 서술하면서, "그는 예순이 넘었다."라고 밝혔다. 학계에서는 이 점을 들어 그의 출생년도가 기원전 229년이었을 것이라 추정한다.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말기에 군복무를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88년 법무관에 선출되어 시칠리아를 통제했다. 기원전 186년 집정관 선거에서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함께 당선되었다. 그해 초, 로마 시내에 바커스를 모시는 비밀 의례인 바카날리아에 가담한 수천 명의 여인과 청년들이 온갖 음란한 행위를 일삼고 유언장과 인장을 위조하며, 중상 모략을 일삼고, 친척을 중독시키거나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원로원은 사회 질서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 바카날리아에 가담한 인사들 처리를 두 집정관에게 일임한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그와 알비누스는 철저한 조사를 실시한 뒤 범죄에 연루된 바커스 신도들을 처형하고 그 외의 신자들을 구금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7,000명 이상이 이 비밀 결사의 회원이었다가 처형되거나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 후 리구리아 전선에 배정된 그는 그 지역에서 로마에 대적하는 아푸아 족을 공격하려 했지만 어느 협곡을 지나던 중 갑작스런 기습을 받고 4,000명을 잃고 도주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숨기려 했지만 실패했고, 연말까지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원전 183년 마케도니아 사절로 파견되어 필리포스 5세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체결된 평화 협약을 준수하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는 왕에게 트라키아 해안의 그리스 도시에서 군대를 철수하도록 강요했으며,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방문해 메시니 시와 아카이아 동맹 사이의 불화를 중재했다. 이후 로마에 귀환하여 원로원에 "왕은 기회가 생기면 로마인에 대한 적대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며 아카이아인들은 오만으로 가득차 있고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한다"라고 보고했다.
기원전 180년, 그는 이 해에 사망한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를 대신하여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는 데켐브리 사크리스 파시운디스(decemviri sacris faciundis: 10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가 되었다. 여기에 속한 다른 구성원들이 향후 몇년 안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몇년 후 가장 권위있는 데켐브리가 되었다. 기원전 174년 오랫동안 가라앉지 않은 전염병 해결을 위해 시빌라 예언서를 읽은 뒤 하루 기도를 명령했다.
기원전 172년, 원로원은 로마에 대한 적대행위를 멈추지 않는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병력을 모집할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그를 사절로 보내 페르세우스와 협상하게 했다. 그는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와 함께 에페이로스, 아나톨리아, 테살리아를 잇따라 들러서 그곳의 주민들에게 로마 편을 들라고 촉구했다. 이후 피네이오스 강에서 페르세우스 왕과 만난 그는 페르세우스에게 평화에 대한 거짓된 희망을 안겨주고 로마로 사절을 보내 협상을 계속하도록 설득했다. 페르세우스는 이를 믿고 로마에 사절단을 보냈고, 로마는 그 사이에 군대를 조직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후 필리푸스와 세라누스는 보이오티아로 가서 그곳의 도시국가들에게 "보이오티아 연맹을 해체하고 로마의 보호를 받으라"고 설득했으며, 뒤이어 에우보이아와 펠로폰네소스를 방문해 로마에게 지지를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 해 겨울에 로마로 돌아온 그는 기원전 171년 초 선봉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건너가 라리사를 급습한 뒤 할키스에 집결한 로마 해군에 합류했다.
기원전 169년 부재 중인 상황에서도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된 그는 페르세우스와의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는 전임 집정관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를 구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브룬디시움에서 친척이자 함대 사령관인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의 인솔하에 아카르나니아로 건너갔고, 만키누스에게 마케도니아로 곧장 진격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어느 산길에서 마케도니아군과 우연히 마주쳤고, 이어진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해졌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페르세우스가 나팔 신호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바위와 협곡 사이에 끼어 있는 로마군 전체를 포획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고, 만키누스는 산길을 강행 돌파한 뒤 마케도니아 계곡으로 내려갔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로마군이 자국의 영토 깊숙이 들어오자 페르세우스는 공황 상태에 빠져 함대를 불태우고 보물들을 바다에 처넣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필리푸스는 더 이상의 공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만키누스와 합류하기 위해 본대를 이끌고 올림푸스 지역을 통과해 마케도니아에 진입했으나 보급로가 수시로 끊기는 바람에 식량이 떨어져 버려서 테살리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아카이아 연맹에서 파견된 사절단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제안받았지만 로마에 동맹이 필요하지 않다며 거절했다. 그 후 그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했고, 일리리아 왕 겐티오스와 에페이로스 연맹은 이에 고무되어 페르세우스와 연합하여 로마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로마인들은 전쟁이 지지부진하자 기원전 168년의 집정관으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아버지이며 당대의 뛰어난 장군이었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를 선출했고, 그는 지휘권을 파울루스에게 넘기고 로마로 귀환했다.
이렇듯 별다른 군공을 세우지 못했지만 집안 배경이 탄탄했기 때문인지 기원전 164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두 감찰관은 인구 조사를 실시해 33만 7452명의 로마 시민을 확인했다. 또한 원로원 의원 자격을 심사해 3명을 추방했으며,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세웠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감찰관 임기 중에 공공 장소에 콩코르디아 여신의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그의 부관으로서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여한 것 외에는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증손자인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기원전 91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