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라틴어: Publius Cornelius Scipiō Nasica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아버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히스팔루스(형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1년 |
전임 |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동기 |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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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루시타니아인을 격파했고 북이탈리아에서 보이족을 물리쳤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집안인 코르넬리우스 씨족 스키피오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는 기원전 22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동생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함께 히스파니아 전선으로 파견되어 7년간 본국의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여러 차례 승전하며 로마의 히스파니아에서의 입지를 다졌지만 기원전 211년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동생과 함께 전사했다. 형제로 기원전 176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히스팔루스가 있었다. 그는 코가 오똑한 편이었기 때문에 '뽀족한 코'라는 의미인 나시카(Nasica)라는 아그노멘으로 불렸다.제2차 포에니 전쟁이 진행중이던 기원전 205년, 시빌라 예언서를 관리하던 데켐브리(Decemvir)들은 "이다 신들의 어머니를 로마로 모셔와서 로마를 돕게 한다면 낯선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추방될 것"이라는 예언이 예언서에 적혀 있다고 발표했다. 이에 원로원은 한니발 바르카를 이탈리아에서 축출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키벨레의 상석을 프리기아에서 모셔오기로 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204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의 주관하에 키벨레의 상석을 로마로 가져오는 사절단이 결성되었다.
이때 상석을 직접 대면할 '국가의 가장 합당한 시민'으로 나시카가 뽑혔다. 아직 최하위 행정관인 재무관도 맡지 않았을 정도로 나이가 어린 그가 선출된 이유에 대해,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 경위는 고대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며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밝혔다.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당시 히스파니아 전선을 마무리하고 로마로 귀환하여 집정관에 선출된 뒤 아프리카 원정을 준비하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신들이 이번 원정을 보증한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스키피오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사촌인 나시카가 뽑히도록 유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세속에 때묻지 않은 젊은이가 여신의 상석을 짊어진다면 신께서 용납해주실 거라는 로마인들의 믿음도 한 몫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오스티아로 가서 키벨레의 상석을 직접 가져와 클라우디아 또는 발레리아라는 귀족 여인에게 넘겼다. 그는 훗날 키벨레 여신을 위해 신전을 세웠다.
기원전 200년, 나시카는 식민도시 베누시아의 인구를 보충하기 위해 조직된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의 동료는 전직 집정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였다. 기우너전 197년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와 함께 조영관에 선출되어 로마에서 경기 및 서커스를 3일 연속 개최했다. 그 후 기원전 194년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당시 코르넬리우스 가문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2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그 외에 2명의 코르넬리우스가 법무관을 맡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그는 먼 히스파니아 속주에 부임한 뒤 반란을 일으킨 부족들을 제압해 50개 도시를 항복시켰다.
이듬해 총독의 권한으로 히스파니아에 남은 그는 겨울 동안 함대를 조직했고, 여름에 루시타니아인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일리파 시 인근 지방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귀환하던 루시타니아인들을 중도에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전투 중에 유피테르를 기리기 위해 경기를 주선하겠다고 맹세했고, 그 덕분에 12,000명의 루시타니아인을 사살하는 동안 단지 73명의 로마인이 죽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지만, 그가 대승을 거둔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기원전 193년 말 로마에 돌아온 나시카는 기원전 192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절친한 친구인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와 연합하여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와 대결했으나 낙선했다. 기원전 191년 재차 선거에 출마해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그는 재임 초 민회를 소집한 뒤 발칸 반도에 진출할 야욕을 보이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에 대항하여 원정을 단행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해 승인을 얻어냈다. 그 후 제비뽑기를 한 결과 글라브리오는 발칸 반도로 가서 안티오코스 3세와 대결하게 되었고, 그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로마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보이족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는 북이탈리아로 가기 전에 히스파니아 총독 시절 했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유피테르 신을 기리는 경기를 개최하기로 하고 원로원에 개최 자금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전례가 없고 불공평하다"며 자신의 재산에서 충당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해서 얻은 전리품으로 마련하라고 답했다. 결국 나시카는 재산을 털어서 경기를 치러야 했고, 이후 보이족을 상대하고자 출진했다. 발레리우스 안티아스는 그가 28,000명의 보이족을 사살했다고 기술했지만, 학계에서는 이 역시 과장으로 간주한다. 다만 전투가 끝난 후 보이족이 나시카에게 인질을 주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영토의 거의 절반을 로마에게 넘겨야 했던 것을 볼 때 보이족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하다. 대승을 거두고 로마에 돌아온 그는 개선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호민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시우스가 반대했지만, 원로원은 개선식을 치르는 것을 허락했다. 그 후 기원전 190년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으로 부임해 1년간 통치한 뒤 기원전 189년 로마로 귀환하여 헤라클레스 신전에 헤라클레스 석상을 세우고 원로원 의사당에 마구에 금박을 입히고 여섯 마리의 말이 모는 형태의 전차를 세웠다.
기원전 189년, 나시카는 감찰관 선거에 출마했다. 이 선거엔 그 외에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대 카토,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그리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출마했다.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는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던 글라브리오였으나, 전리품 횡령 혐의로 대 카토에게 고발당하자 사임했다. 대 카토 역시 상관을 고발한 것에 반감을 품은 유권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후 투표 결과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당선되었고, 그는 낙선했다. 이후 스키피오 가문의 위세를 질시한 정적들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형제를 안티오코스 3세에게 뇌물을 받아먹고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평화 협약을 맺은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사촌들을 위해 변호했지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가 유죄 판결을 받고 벌금을 납부하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캄파니아의 소도시인 리테르눔으로 망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기원전 184년, 그는 루키우스 스키피오와 함께 감찰관 선거에 재차 출마했다. 이번에는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대 카토,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가 감찰관 선거에 출마했다. 이 선거에서 스키피오 가문의 정적인 대 카토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아보이자, 카토의 정치적 동지인 플라쿠스를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은 카토를 낙선시키기 위해 연합했다. 당시 카토는 매우 급진적인 정치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에, 상대 후보들은 유권자들에게 온건한 감찰관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카토는 자신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도덕 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선거 결과 카토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가 당선되었고, 그는 낙선했다.
기원전 183년 식민도시 아퀼레이아를 세우고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문제를 다룬 위원회의 일원으로 발탁되었고, 비티니아 왕국의 프루시아스 1세를 찾아가 한니발 바르카를 로마로 인도하라고 요구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기원전 171년 카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와 함께 먼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로마 총독의 속주민 착취 혐의를 조사한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으나, 착취 혐의를 받은 모든 인사가 무죄를 선고받아 그들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의심을 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은 기원전 162년과 155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