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라틴어: Gaius Sempronius Tuditanus | |
생몰년도 | 기원전 172년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조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아버지) 셈프로니아(딸)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29년 |
전임 |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
동기 | 마니우스 아퀼리우스 |
후임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티투스 안니우스 루스쿠스 루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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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셈프로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는 기원전 197년 법무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이고, 아버지는 기원전 146년 아카이아 전쟁 이후 그리스 속주 개편에 참여한 사절단 중 한 사람이었던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였다. 학자들은 고위 행정관의 재임 가능 연령을 설정한 빌리우스 법에 의거애 그가 기원전 172년에 출생했을 거라 추정한다.기원전 146년 아카이아 전쟁에서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참여했으며, 기원전 145년 재무관을 맡았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그는 법률이 정한 나이에 아주 쉽게 명예로운 경력을 맡았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그가 기원전 135년에 조영관, 기원전 132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리라 추정한다.
기원전 129년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아퀼리우스가 아시아 속주에 부임하는 동안, 그는 이탈리아에서 행정을 주관했다. 이 시기 로마에서는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 개혁과 관련한 정치 투쟁이 심화되었다. 농지 재분배와 관련된 특별위원회가 동맹시들로부터 잉여 공공 토지를 몰수하기 시작하자, 이탈리아 지주들은 원로원에 청원서를 집단으로 올렸다. 농지 개혁을 적대하는 이들은 이를 이용해 위원회의 권한을 축소하려 했다. 투디타누스는 이에 휘말리기를 원하지 않고, 전쟁을 구실로 일리리쿰 속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이피드족과 맞붙었다. 처음에는 로마군이 패배했지만, 나중에 레가투스를 맡고 있던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 덕분에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128년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키케로는 저서 <브루투스, 그리고 웅변가에 관하여>에서 투디타투스가 새련된 생활 방식과 훌륭한 교육으로 유명한 동시에 우아한 연설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고 평했다. 투디타누스는 생전에 13권으로 구성된 <지휘관에 관하여>를 집필했다. 이 책은 현존하지 않으나, 여러 고대 작가들에 인용되었다. 특히 라티움 원주민의 기원, 로마력의 역사, 법무관의 권한 및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의 전기 등 그의 작품에서 따운 인용문들이 후대 학자들에게 주요 사료로 취급되고 있다.
그에게는 딸 셈프로니아가 있었다. 그녀는 법무관과 시칠리아 총독을 역임한 루키우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와 결혼해 기원전 69년 집정관이자 당대 최고의 웅변가였던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동맹시 전쟁 때 가이우스 마리우스 휘하에서 레가투스를 맡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와 결혼한 호르텐시아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