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라틴어: Gaius Popilius Laena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조부)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아버지)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형제)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아들)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72년 |
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리구스 |
후임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임기 | 기원전 158년 |
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
동기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후임 |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의 주위에 원을 그리고 협박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2. 생애
포필리우스 씨족은 평민들이 집정관에 한 자리를 무조건 차지하게 한 리키니우스-섹스투스법이 통과된 기원전 367년 이후 집정관에 여러 차례 이름을 올린 노빌레스 가문이다. 코그노멘인 라이나스(Laenas)는 포필리우스 가문 인사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한 별칭이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이 용어는 유피테르 신전의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가 입는 외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반면 19세기 독일의 고고학자 프리드리히 뮌처는 이 이름은 에트루리아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이고 아버지는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라고 한다. 형제로 기원전 173년에 집정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158년에 감찰관을 맡은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있었다.기원전 175년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172년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리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두 집정관이 모두 평민에 속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집정관은 페르세우스와의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군공을 세울 기회를 얻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추첨을 통해 리구리아를 맡았다. 당시 리구리아는 그의 형제인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속주민을 상대로 잔혹행위를 서슴지 않아서 민심이 안 좋았다. 그는 형제의 기소를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원로원의 허락을 받지 않고 포 강 북쪽 땅에 리구리아인 일부를 정착시켜서 그들을 달래려 애썼다가 원로원의 비판을 받았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진행되던 기원전 169년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함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잇따라 방문해 "로마 관료들의 자의적인 강탈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원로원의 결의가 있었으니 페르세우스와 손잡지 마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가이우스 데키무스와 함께 이집트를 침략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를 찾아가 이집트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안티오코스 4세가 페르세우스와 동맹을 맺는 불상사를 초래할 수는 없었기에, 사절단은 델로스에서 얼마 동안 기다렸다.
기원전 168년 6월 페르세우스가 피드나 전투에서 패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포필리우스 등은 이집트로 향했다. 당시 안티오코스 4세는 키프로스와 하이집트 전역을 공략하고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치는 등 이집트를 거의 석권했다. 포필리우스는 그런 왕 앞으로 나아가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4세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그는 지팡이로 왕 주위에 원을 그리고는 답을 하기 전에는 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다고 협박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지난날 로마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로마가 얼마나 강한지 파악했기에,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대신, 셀레우코스 제국이 남부 시리아를 계속 영유하는 건 인정되었다.
기원전 158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두 번째로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의 형제 마르쿠스는 같은 해에 감찰관을 역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두 아들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와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를 낳았다. 가이우스는 기원전 133년 법무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130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13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