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5 18:52:08

폴리비오스

파일:폴리비오스.png
이름 폴리비오스
(영어: Polybius, 불가리아어: Πολύβιος)
출생 기원전 200년
사망 기원전 118년
직위 히파르코스, 스키피오 가문의 클리엔테스

1. 개요2. 생애3. 《히스토리아》(Ἱστορίαι Historí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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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의 정치인, 역사가. 고대 로마 공화정의 성장기를 다룬 《히스토리아》로 유명하다.

2. 생애

기원전 200년경 아르카디아의 메갈로폴리스에서 리코르타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리코르타스는 메갈로폴리스의 귀족으로, 아카이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총사령관)을 맡은 거물이었다. 그는 부친 밑에서 40여 년간 공직을 맡았고, 승마와 사냥을 취미로 삼았다. 기원전 170년 또는 169년에 히파르코스(기병대 지휘관)에 선임되어 마케도니아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로마 공화정을 지원하는 아카이아 동맹군의 기병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아카이아 동맹은 그리스의 내부 문제에 개입하려고 드는 로마의 진짜 의도를 의심하다가, 나중에는 마케도니아와 연합하여 로마에 대항했다.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왕국군을 섬멸하고 페르세우스 왕을 포로로 잡은 뒤, 로마는 아카이아 동맹에
"1,000명의 인질을 보내면 보호국으로 삼고, 침공하지 않겠다."
라고 제안했다. 이에 아카이아 동맹은 요구에 응하여 인질 1,000명을 보내줬는데, 그중엔 폴리비오스도 있었다. 그는 로마에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클리엔테스가 되었고, 아이밀리아누스를 포함한 스키피오 가문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다. 그는 아이밀리아누스에게 그리스의 정치이론, 문학, 그리스 철학 등을 소개했고,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의 역사와 문물 등을 폴리비오스에게 소개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그에게 자녀인 파비우스와 스키피오의 교육을 맡기기도 했다.

기원전 149년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자, 아이밀리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 의 카르타고를 포위했다. 폴리비오스는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참전했고,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가 함락된 뒤 로마 장병들이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는 아이밀리아누스가 카르타고의 몰락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적의 운명을 애도했다고 기록했다.[1] 이후 지중해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저서에 필요한 사료를 수집하고 유적지를 조사했으며, 참전용사들과 면담하여 필요한 증언을 얻었다. 기원전 133년경 히스파니아 반도의 누만티아 공성전에 군사고문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여행을 마친 뒤 로마에서 저서인 《히스토리아》를 집필했다. 말년에 그리스로 돌아갔고, 기원전 118년경 말에서 낙마하여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3. 《히스토리아》(Ἱστορίαι Historíai)

그는 생전에 여러 작품을 집필했지만 대부분 사라졌고, 오직 로마 공화정의 역사를 담은 《히스토리아》만 전해진다. 그나마 총 39권 중 처음 5권만 온전히 남아있고, 6권의 상당 부분이 실전되었으며, 나머지는 파편적이나마 전해진다. 《히스토리아》는 기원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118년에 걸친 사건들을 다뤘다. 폴리비오스는 제12권에서 자기가 싫어하는 이들을 폄하하는 서술을 남긴 역사가 티마이오스를 비판하면서, 편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역사가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또한 역사는 단순한 흥미거리가 아니라 정치가의 '필수 교재'로, 특정한 사건이 성공이나 실패로 이어진 원인을 규명하여 후대에 교훈을 안기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여겼다.

《히스토리아》는 주로 기원전 220년에서 기원전 167년까지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을 다뤘다. 제1권부터 제5권까지는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를 포함한 지중해 국가들의 정치적 사건들을 다루며, 이 사건들의 상호 연관성을 서술했다. 제6권에서는 로마인들이 성공할 수 있게 해준 정치, 군사, 그리고 도덕적인 제도들을 묘사했다. 폴리비오스는 서문에서
"일개 도시에 불과했던 로마가 어떻게 세계를 포괄하는 대제국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자는 없을 것이다."
라고 전제하면서, 자신이 이 책을 쓴 목적이 로마의 성공 비결을 밝혀내는 것임을 드러냈다.

특히 제6권에서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에게 연이어 참패하고,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 왕국이 동맹을 맺으면서 운세가 최저점에 달했던 로마가 어찌하여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끝내 꺾었고, 수많은 국가, 심지어 그토록 강대했던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과 대왕(메가스) 안티오코스 3세셀레우코스 제국까지 무너뜨리고 대제국이 될 수 있었는지를 분석하면서, 그 비결은 로마군의 우수성과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로마 공화정의 투쟁 정신 덕분이었다고 봤다. 여기에 행운 또한 로마의 성공을 이끌어낸 비결이라고 여겼다. 행운의 여신 튀케(Tyche)는 실수로부터 배우고 지혜롭게 행동하면서, 위대한 과업을 이루기 위해 정진하는 사람을 선호한다며, 로마가 바로 이랬기 때문에 튀케의 총애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폴리비오스는 정치 체제가 왕정과 귀족정, 민주정의 3가지로 나뉜다고 봤다. 그러면서 왕정은 독재로 치닫고, 귀족정은 과두정으로 변질되며, 민주정은 중우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원시 왕정이 있었지만, 왕이 국가의 이익을 자신의 특권에 따르게 하다가 혁명으로 축출되고, 귀족들이 권력을 쟁취한다. 귀족은 다시 과두정으로 타락할 것이며, 대중이 들고 일어나 정권을 뒤엎고 민주정을 세운다. 그러나 민주정 역시 언젠가는 중우정치로 변질되며,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 나타나 혼란스러운 정치를 바로잡고 자신들을 다스려줄 것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체제는 이러한 정치 순환을 겪지 않았다. 군주는 집정관 2명으로 대체되고, 귀족은 원로원 의원이 맡으며, 민회는 민주정을 대표한다. 이 3가지 정치 유형이 혼합된 결과, 변질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 로마의 성공을 이끌어냈다는 것이 폴리비오스의 주장이다[2].

《히스토리아》는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증하고, 객관성을 따진다는 측면에서 투키디데스를 따른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자신이 클리엔테스로 들어간 스키피오 가문을 띄워주는 경향이 강하고, 자신이 인질로 끌려가게 만든 아카이아 동맹의 정치가 칼리크라테스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등 자신의 감정이 들어갔다는 비판도 받는다. 또한 로마에 편향된 시각으로 서술하다보니 그들이 저지른 악행(카르타고, 코린토스, 누만티아 파괴 등)들에 대해서는 두루뭉실하게 넘기거나, 책임을 적대국에게 떠넘긴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고대 지중해 세계의 역사 연구에 필수적인 문헌 자료인 것은 분명하다.


[1] 일설에는 아이밀리아누스가 트로이의 멸망을 예견하는 《일리아스》의 한 구절을 읊으면서 "언젠가는 로마 역시 카르타고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 물론 현실의 로마 공화정은 결국 군사력을 내세운 강한 사람에 의해서 참주정으로 변질되긴 했지만 적어도 폴리비오스가 살던 시기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