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라틴어: Lucius Cornelius Scipio Asiatic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버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삼촌) 폼포니아(어머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형)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들)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로마-셀레우코스 전쟁(마그네시아 전투)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0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
동기 |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
후임 |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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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와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에 활약한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 출신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으로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압승을 거둠으로써 로마의 영향력이 지중해 동부까지 미치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뇌물 수수 혐의로 몰락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며, 스키피오 가문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명문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루키우스의 증조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는 기원전 298년 집정관을 역임하여 북이탈리아의 켈트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조부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기원전 259년 집정관을 역임해 코르시카에서 카르타고군을 쫓아냈다. 삼촌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는 기원전 222년 집정관을 맡아 인수브레스족을 격파했고, 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기원전 21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한편 어머니 폼포니아는 노빌레스 집안인 폼포니이 씨족의 일원으로, 이 집안 출신인 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와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는 각각 기원전 233년과 기원전 231년에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형은 그 유명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였다. 형제간의 우애는 매우 굳건해, 루키우스는 형의 곁을 항상 지켰고 운명을 함께 하였다.고대 역사가들은 루키우스가 약한 체격을 가졌으며, 용감하고 유능한 형과는 달리 우유부단하고 비 호전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로마의 전통에 따라 형을 따라 군대에 복무했으며, 기원전 214년 또는 213년에 조영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211년 아버지 푸블리우스와 삼촌 그나이우스가 베티스 고지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형 푸블리우스는 히스파니아 전선에 파견되길 희망하여 기원전 210년에 히스파니아로 파견되었다. 그 역시 형을 따라갔고, 기원전 207년 형으로부터 메세스 부족의 영역에 속한 오롱기 시를 공략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0,000명의 보병과 1,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오롱기 시로 향한 그는 처음엔 동맹을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자 즉시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때 그는 시민들을 잘 대우해, 히스파니아인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형의 뜻에 따랐다. 다만 항복하기 위해 요새 성문에서 나온 시민들이 방패로 몸을 덮은 걸 보고 싸우려고 나오는 줄로 오해한 로마군이 공격하는 바람에 2,000명의 시민과 로마군 90명이 죽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형 푸블리우스는 동생의 성공을 칭찬하며, 이 승리는 자신이 카르타고 노바를 공략한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동생을 귀족 포로들과 함께 로마로 보냈고, 루키우스는 돌아와서 형이 이미 아프리카 원정에 착수할 로마군 총사령관을 맡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기원전 206년, 푸블리우스는 일리파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카르타고군을 섬멸하여 히스파니아 전역을 마무리하고, 루키우스를 다시 로마로 보내 승전보를 알리게 했다. 기원전 205년 푸블리우스가 아프리카 상륙을 준비하기 위해 시칠리아로 갔을 때, 그는 형을 따라갔다. 기원전 205년 푸블리우스가 아프리카로 갔을 때, 그는 메세나에 남아서 시칠리아에서의 후속조치를 마무리한 뒤 기원전 204년에 뒤따라 건넜다. 그가 아프리카에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형의 부관으로서 나름대로 활약했을 것이다.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로 승리한 뒤, 그는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마르쿠스 마르키우스 랄라와 함께 평화 조약 초안을 로마로 가져왔고, 원로원과 민회는 기쁜 마음으로 평화 조약을 승인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로마 공화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되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는 '스키피오 당'을 결성했다. 그는 이 당에 가담하여 입지를 다졌다. 이에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장차 참주가 되려 할 지도 모른다며 경계심을 품은 이들이 생겨났고, 대 카토를 위시하여 '반 스키피오 당'을 결성했다. 루키우스는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대대장과 재무관을 역임하였고, 기원전 192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기원전 191년 안티오코스 3세의 발칸 반도 원정에 대항하여 출진한 집정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1]의 휘하에 들어가서 테르모필레 전투 승리에 일조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대 카토였기에, 그가 로마로 돌아가 승전보를 알리는 걸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기원전 190년, 그는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소아시아로 쫓겨난 뒤 절치부심하며 대군을 집결하고 있는 안티오코스 3세에 대항한 원정군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군사적 재능이 미덥지 않은 데다 안티오코스 3세 밑에 한니발 바르카가 있는 점을 우려한 원로원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고문으로서 동생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와 관련해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라일리우스가 동방 원정을 맡아야 하고 루키우스 스키피오는 그리스에 남아서 물자를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에 라일리우스는 제비뽑기를 하지 말고 원로원에 결정을 맡기자고 제안했다. 그때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나서서 항의하자 민심이 격앙되었고, 원로원은 어쩔 수 없이 루키우스 스키피오에게 원정을 맡겼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제비뽑기 결과 라일리우스가 동방 원정을 맡게 되었지만,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의 설득에 따라 루키우스 스키피오에게 원정을 넘겨줬다고 한다. 키케로에 따르면, 제비뽑기 결과 루키우스가 동방 원정을 맡게 되었지만, 원로원은 그를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물이라 여겨 반대했다. 그때 푸블리우스가 나서서 동생을 옹호했고, 결국 그의 뜻대로 관철되었다고 한다.
스키피오 형제는 이탈리아에서 8,000명의 보병과 기병 300명을 모집하였고, 4천 명 이상의 포에니 전쟁 참전 용사들이 자원하였다. 기원전 190년 7월 브룬디시움에서 13,000명 가량의 병력을 집결시킨 그는 일리리아 아폴로니아로 건너갔고,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었던 아이톨리아 연합과 6개월 간의 휴전 협약을 맺었다. 이후 전직 집정관 글라블리오로부터 2개 군단을 인수받은 뒤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오니아와 아이올리스에서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안했지만, 루키우스는 타우루스 산맥까지의 모든 땅을 포기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고, 대규모 회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190년 겨울, 양군은 마그네시아 전투를 치렀다. 리비우스는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가 6만 명에 달했다고 기술했고, 아피아노스는 7만에 달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로마군의 군대는 3만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고대 역사가들이 기술한 안티오코스 3세의 군대 규모가 과장되었다고 본다.
전투 개시 후,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가 이끄는 우익 기병대는 적의 전차를 몰아내고 안티오코스 3세의 좌익 부대를 격파했다. 한편 안티오코스 3세는 친히 우익 기병대를 이끌고 로마군 좌익 기병대를 격파했지만, 눈앞의 성과에 지나치게 고무된 나머지 전장을 이탈하여 로마군 진영까지 질주해버렸다. 왕이 떠나버리자 셀레우코스군은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렸고, 로마군은 이 때를 틈타 전장에 남겨진 중앙의 팔랑크스 부대를 사방에서 에워싸서 섬멸했다. 한편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군 진영을 공격했으나 대대장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항전으로 공략에 실패했고, 뒤이어 적 증원군이 다가오자 전장에서 달아났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53,000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349명만이 로마인과 페르가몬인이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과장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로마군이 완승을 거둔 것만은 분명하다.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대패한 직후,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형 푸블리우스가 직접 나서서 소아시아 해안가에서 타우루스 산맥까지의 영역에서 물러날 것,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것, 한니발을 포함한 로마의 적들을 인도할 것 등을 요구하였고, 안티오코스 3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형제는 안티오코스 3세가 지불한 돈으로 병사들에게 2배의 급료를 지급하고 에게 해를 여행했고, 크레타와 델로스를 방문하여 황금 화환을 기증했다. 그 후 로마에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하였고, 그는 아시아를 정복한 자라는 의미의 '아시아티쿠스'(Asiaticus)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또한 원로원 회의장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으며, 안티오코스 전쟁을 주제로 한 그림을 공개 전시했다.
그러나 스키피오 형제의 정적들은 두 사람의 위세가 너무 강해졌다고 여기고 실각시킬 음모를 꾸몄다. 기원전 187년, 루키우스는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선불금으로 받아낸 500달란트를 횡령했다는 고발을 받았다. 루키우스가 이를 해명하려 할 때, 푸블리우스가 나서서 고발문과 회계장부를 찢어버린 뒤 고발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고발하는 자의 기소 이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로마 시민에게 어울리는 행위라고 생각되지 않소. 이 스키피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 스키피오를 고발하는 자들도 고발할 자유는커녕 육신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자 로마 시민들은 스키피오가 교만해져서 왕처럼 군다며 비난을 퍼부었고, 정적들은 이를 빌미삼아 형제들을 계속 몰아붙였다. 급기야 "안티오코스의 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원로원에 설치되었고, 호민관 가이우스 미누키우스 아우구리누스가 이 문제를 맡아 루키우스에게 막대한 벌금을 매겼다. 루키우스가 벌금을 내길 거부하고 결정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자, 미누키우스는 그를 쇠사슬로 묶으라고 명령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형 푸블리우스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8명의 호민관들에게 선처를 호소했지만 무시당했고, 10번째 호민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만이 거부권을 행사해 루키우스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막대한 벌금을 내야 했다. 원로원은 더 이상의 갈등을 막기 위해 그를 명예 사절로서 동방에 파견했고, 루키우스는 안티오코스 3세와 에우메네스 2세 사이의 협상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로마에 돌아온 뒤, 대 카토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안티오코스 3세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가 있다며 고발했다. 푸블리우스는 재판에 참석하길 거부하고 자신의 영지인 리테르눔으로 낙향하였고, 기원전 183년 그곳에서 쓸쓸하게 사망했다. 루키우스는 기원전 184년 감찰관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뒤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아들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있었는데, 재무관과 대대장을 역임했으나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인 기원전 83년 마리우스파로서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아시아게네스라고도 함)는 이 사람의 직계 후손으로 여겨진다.
[1] 스피키오 당의 일원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