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 라틴어: Gnaeus Manlius Vulsō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조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아버지)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형제) 아울루스 만리우스 불소(형제) |
참전 | 갈라티아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89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
동기 |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
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가이우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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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갈라티아를 로마에 무력으로 복속시킨 인물이다.2. 생애
기원전 480년부터 정기적으로 집정관을 역임한 파트리키 가문인 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만리우스(Manlius)에 쓰인 'nli' 문자는 라틴어의 특징이 아니며 에트루리아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또한 코그노멘인 '불소(Vulso)'는 에트루리아의 도시인 볼시니(Volsinii)[1]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조부는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이고 아버지는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라고 한다. 독일의 고대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는 그의 할아버지는 기원전 256년과 기원전 250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라고 주장했다. 이 인물은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함께 아프리카 원정을 이끌었다. 고대 기록에는 기원전 256년 집정관 루키우스의 아들로 기원전 218년 집정관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와 기원전 210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만리우스 불소만 언급하지만, 일찍 죽어서 기록에 남지 않은 그나이우스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형제로 기원전 197년 법무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와 기원전 178년 집정관을 역임한 아울루스 만리우스 불소가 있었다.
기원전 197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와 함께 조영관에 선임되어 검투 경기 및 서커스를 3차례 연속 개최했다. 그 규모가 큰 데다 진귀한 동몰들이 많이 등장해 로마 시민들의 열띤 호응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195년 시칠리아의 법무관 겸 총독에 선임되어 델로스 섬에 있는 아폴로 신전에 황금 화환을 바쳤다. 기원전 192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 이 선거엔 그 외에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와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가이우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출마했다. 선거 결과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당선되었고, 그는 고배를 마셔야 했다.
기원전 191년, 그는 2번째로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에게 밀려 낙선했다. 기원전 190년에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의 당선 확률이 매우 높았기에 출마를 거부했다. 기원전 189년 3번째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그는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그나이우스 마닐루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셀라와 경합했다. 선거 결과 노빌리오르만 집정관 당선에 필요한 표를 얻었고 나머지 셋은 각기 표를 갉아먹느라 당선되지 못했다. 이에 노빌리오르는 선거 다음날 불소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추첨 결과, 그는 최근에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을 벌이고 있는 소아시아를 배정받았고 노빌리오르는 에페이로스를 넘겨받았다. 얼마 후, 로마에 도착한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의 사절단이 안티오코스 3세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완패한 뒤 평화를 맺자고 호소하고 있다고 알렸고, 원로원은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구체적인 평화 협상을 추후 논의하기로 했다. 한편, 그는 아시아에 부임하던 중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목표를 다른 곳에 두기로 했다. 이윽고 에페소스에 도착하여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로부터 대략적인 현지 상황을 전해듣고 인수인계한 뒤, 병사들에게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고 마그네시아 전투에 지원군을 보낸 켈트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그들이 모여사는 갈라티아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만리우스는 페르가몬 왕국과 연합한 뒤 소아시아 남서부 전체를 통과하며 각 도시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다. 이후 피시디아 지역으로 가서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셀레우코스 4세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았다. 그런 후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프리기아 남부의 키비라 시에 접근했다. 이 도시의 참주 모아게트는 15달란트의 뇌물을 건네 그를 회유하려 했지만, 그는 500달란트를 요구하며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모아게트의 모든 소유물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모아게트는 지속적으로 흥정을 벌인 끝에 100달란트만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키브라에서 북상한 불소는 갈라티아 서부에 있는 톨리스토보기 족의 영토를 침공했다. 그는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 페시노우스와 고르디온을 공략했다. 적군은 로마군을 피해 아내와 자식들을 올림푸스 산으로 피신시켜 그곳을 요새화했다. 그러나 그는 3면에서 산을 협공해 큰 어려움 없이 적을 물리쳤다. 퀸투스 클라우디우스 콰드리가리우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최대 40,000명의 갈라티아인이 죽었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안티아스에 따르면 10,000명이 죽었다고 하며,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40,000 가량의 갈라티아인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고 한다.
전투 3일 후, 앞서 로마에 복속 의사를 밝혔던 테크토사게스 부족장 에포소그나토스가 그에게 앙카라 인근에서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은밀히 노약자들을 할리스(크즐으르마크) 강 너머로 피신시키고 불소를 회담장에 유인한 뒤 암살하려 했다. 별다른 의심 없이 소수의 기병대만을 대동하고 회담장으로 향하던 만리우스는 갈라티아 기병대의 습격을 받고 죽을 뻔했지만 식량을 구하러 나섰던 병사들이 구원에 나선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후 테크토사게스 부족은 마가바 산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또다른 부족인 타비온과 연합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총 5만 가량의 갈리아인들이 결집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로마군은 적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했다. 갈라티아인들이 평화 협상을 요구하는 사절단을 보내오자, 그들을 에페소스로 보내 추가 협상을 하게 한 뒤 가을에 접어들자 군대를 겨울 숙영지로 이끌었다.
기원전 189년 말과 188년 초, 그는 에페소스에서 여러 소아시아 공동체의 사절단을 맞이했다. 그들은 갈라티아인을 물리친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황금 화환을 선물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는 불소에게 2,500달란트의 배상금을 줬고, 카파도키아 왕국의 국왕 아리아라테스 4세는 지난날 안티오코스 3세를 지원하여 로마를 대적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600달란트를 바쳤다. 봄이 되자 군대를 셀레우코스군이 페르가몬 왕국의 영토 내에 유일하게 주둔하고 있던 팜필리아로 진군해 그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압박해 관철시켰다.
이때 페르가몬 국왕이며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의 완승에 크게 기여한 에우메네스 2세와 로마의 사절단이 페르가몬에 도착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서쪽으로 돌아와서 기원전 188년 여름 아파메이아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로마 사절단간의 평화 협약 체결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아시아 총독으로서 새로운 경계를 설정하는 데 참여했다. 그 결과 에우메네스 2세는 안티오코스 3세가 소유하고 있던 리카오니아 전체, 프리기아, 무시아, 리디아, 이오니아, 시필루스, 카리아 지방, 마이안드로스 강 유역에 건친 영토를 얻어내 소아시아 최강국으로 급부상했다.
기원전 188년 가을 막대한 전리품과 군대를 이끌고 10명의 사절과 함께 로마로 이동하던 그는 헬레스폰트에서 갈라티아인에게 평화를 맺기를 원한다면 무장을 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관습을 버리라고 충고했다. 이후 해협 반대편으로 넘어간 뒤 트라키아로 진군했다. 도중에 전리품의 규모에 유혹을 받은 트라키아 부족들이 연이어 급습했고, 이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퀸투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가 전사했다. 그가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 도착했을 때 겨울이 찾아왔다. 이에 겨울철에 바다를 건너는 건 위험하다고 여기고 이듬해 봄이 올 때까지 아폴로니아에 숙영했다. 기원전 187년 초 마침내 브룬디시움에 상륙한 불소의 군대는 로마로 향했다.
기원전 187년 4월 말 또는 5월 초 벨로나 신전에서 원로원 의원들에게 승리를 보고하고 개선식을 치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했던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등 대부분의 사절들은 그가 원로원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갈라티아인들과 전쟁을 벌였고, 페르가몬 왕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으며, 트라키아인들의 급습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아군에게 손실을 입혔다며 개선식은 고사하고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해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그를 공격하는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오랜 논의 끝에 그에게 개선식을 개최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 불소를 따라온 병사들의 개선식 개최 요구가 강력했고, 로마 시민들 역시 볼거리가 가득한 개선식이 열리기를 희망했으며, 많은 의원들이 명문 파트리키 집안인 만리우스 가문과 완전히 척지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기원전 186년 초봄에 개선식이 개최되었다. 이날 212개의 황금 화환과 수많은 귀중품이 로마 거리를 행진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로마인들이 이날 처음으로 청동으로 장식된 연회용 침대, 은제품, 귀한 나무로 만든 테이블 등과 같은 사치품을 보았고, 이때부터 사치 풍조가 극심해졌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184년, 불소는 감찰관 선거에 출마했다. 이 선거에는 그 외에도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대 카토,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가 출마했다. 당시엔 플라쿠스와 대 카토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형제에 대한 소송에서 얻은 명성 덕분에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컸다. 이에 그를 비롯한 상대 후보들은 유권자들에게 카토가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행동한다며 자신들은 온건한 감찰관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카토는 이에 대해 자신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도덕 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선거 결과 플라쿠스와 카토가 감찰관에 당선되었고, 즉시 도덕 정화 정책을 단행했다.
이후 불소는 사료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의 가족 및 후손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1] 오늘날 오르비에토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