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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라틴어: Publius Licinius Crassus Dives | |
생몰년도 | 기원전 243년 이후 ~ 기원전 183년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아버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형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05년 |
전임 |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
동기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후임 |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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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폰티펙스 막시무스, 기병장관, 감찰관,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노빌레스 집안인 리키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최초로 '크라수스(Crasus)'라는 코그노멘을 사용한 인물이었으며, 삼촌인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는 기원전 236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형제로 기원전 171년과 168년에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있었다. 그의 아그노멘인 '디베스(Dives)'는 부자를 의미한다. 이는 그가 정치 활동을 원활하게 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갖췄다는 것을 암시한다.학자들은 단 한 명의 크라수스도 60세까지 살지 못했다는 플루타르코스의 주장에 근거해 그가 기원전 243년 이후에 출생했을 거라 추정한다.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으로 인해 무수한 사제들이 죽어나가서 생긴 공백을 젊은이들로 메꾸려는 당국의 뜻에 따라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212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비누스가 죽으면서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공석이 되었다. 이에 그를 포함한 여러 인사가 후보로 나섰는데, 사람들은 당대의 거물인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중 한 명이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투표 결과 젊고 덜 유명했던 그가 당선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이 선거 결과는 모두에게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토르콰투스와 플라쿠스가 서로의 표를 갉아먹는 동안 그가 막대한 부를 잘 활용하여 유권자들의 마음을 샀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 추정한다.
기원전 210년 독재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기병장관이 되어 집정관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선거를 주관했다. 이후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두 사람은 8년 전에 전리품 횡령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로마 정계를 떠났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 원로원으로 복귀하게 했다. 그러나 필로는 얼마 후 사망했고, 그는 감찰관 중 한 명이 죽으면 다른 감찰관은 직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사임했다. 기원전 205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한니발 바르카가 버티고 있는 브루티움 방면에 배정되었지만, 한니발이 별다른 군사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그 역시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기에 별다른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연말에 로마에서 다음 선거를 주관해야 했지만 한니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군대를 함부로 떠날 수 없었기에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를 독재관으로 지명하여 자신을 대신해 선거를 주관하게 했다.
기원전 204년 전직 집정관으로서 한니발과 대치하던 그는 당해 집정관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와 함께 크로톤 인근에서 한니발과 맞붙어서 그를 물러나게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이날 4천 명 이상의 전사자를 남기고 패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계는 이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카르타고군이 패주했다면 그와 투디타누스가 추격하여 완전 섬멸하려 했을 테지만, 두 사람은 한니발을 물러서게 한 것에 만족하며 적을 쫓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203년 로마로 돌아온 그는 20여 년간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의 역할에 전념했다. 기원전 200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시작될 때 전쟁을 수행할 집정관들에게 신들에게 서약하는 절차를 알려줬다. 기원전 194년 바르 세크룸(Ver sacrum. 신성한 샘)[1]을 집행했다. 기원전 189년 법무관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가 퀴리누스 신의 플라멘(Flamen)이니 로마 시를 벗어날 수 없다며 그가 사르데냐 속주로 부임하는 것을 금지했다.
기원전 183년 초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유난히 호화로웠고 참석자 전원은 무료로 다과를 제공받았다고 전해진다. 아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가 이 장례식을 주관했지만 그 외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결성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그의 증손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