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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생년 미상 |
로마 왕국 로마 | |
사망 | 기원전 485년 |
로마 공화국 로마 | |
재임기간 | 고대 로마 집정관 |
기원전 502년 9월 1일 ~ 기원전 501년 8월 29일 | |
고대 로마 집정관 | |
기원전 493년 9월 1일 ~ 기원전 492년 8월 29일 | |
고대 로마 집정관 | |
기원전 486년 9월 1일 ~ 기원전 485년 8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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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집정관. 초기 로마 공화국의 가장 저명한 사람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로마 역사상 최초로 기병장관을 지냈으며, 최초의 농지법의 창시자였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집정관직 이듬해에 그는 그가 제안한 농지법으로 인해 귀족들과 평민들에게 왕의 권력을 노리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고 귀족들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2. 생애
기원전 502년 오피테르 베르기니우스 트리코스투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집정관 시절 사비니족과 전쟁을 벌였는데, 쿠레스(Cures) 근처에서 사비니족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고 한다. 하지만 리비우스는 그가 아우룬치를 공격하고 수에사 포메티아라는 지역을 점령했다고 기록한다.[1]이듬해 사비니족과 라틴족과의 전쟁에 대비해 티투스 라르키우스 플라부스가 독재관에 선임되자 티투스 라르키우스의 권유로 기병장관에 선임되었다. 협상이 실패한 후, 사비니족에 대한 선전포고가 이루어졌지만, 양측이 모두 타격을 가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적대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라틴족과의 전쟁은 기원전 498년 레길루스 호수 전투와 함께 일어났다. 로마가 승리를 거둔 후, 카시우스는 원로원에게 라틴 도시들을 파괴하라고 촉구했다고 한다.
기원전 493년 포스투무스 코미니누스 아우룬쿠스와 다시 집정관이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당시가 평민과 귀족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당시라 그 분야에서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에 그는 라틴 연합과 카시아눔 조약[2] 을 비준함으로써 로마가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게 하였다. 그해 말 그는 케레스, 바쿠스, 프로세르피나 신전을 봉헌했다.
기원전 486년 프로쿨루스 베르기니우스 트리코스투스 루틸루스[3]와 함께 집정관이 되어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지금의 이탈리아 반도에 있던 부족인 볼시와 헤르니치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볼시와 헤르니치의 평화협정으로 무산되었고 동맹까지 맺으며 외교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카시우스는 로마에서 최초의 농지법을 제안하면서 토지를 평민과 라틴 동맹국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동료 집정관인 베르기니우스는 카시우스를 아주 극렬히 비난하였고, 평민들마저 카시우스가 왕의 권력을 노리고 있다고 의심하며 그에게 등을 돌렸다. 기원전 485년, 카시우스는 관직에서 물러나자마자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기원전 502년 동료 집정관이자 베르기니우스의 아버지인 오피테르 베르기니우스 트리코스투스는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화형당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카시우스의 아들들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디오니시우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그들을 살려주었다고 한다.
기원전 159년에 그의 집 자리에 세워진 카시우스 동상이 감찰관들에 의해 무너졌다.
[1] 그는 기원전 495년에 동일한 사건을 언급했는데, 이는 디오니시오스의 것과 일치한다. 따라서 디오니시오스 쪽이 좀 더 신빙성 높다고 평가된다.[2] 로마가 힘들면 라틴 연합이 도와주고, 라틴 연합이 힘들면 로마가 도와준다는 게 이 조약의 요지다.[3] 기원전 502년 당시 집정관 동료였던 오피테르 베르기니우스 트리코스투스의 아들이다. 즉 동료의 아들과 함께 집정관이 된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