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투스 만리우스 임피레오수스 토르콰투스 라틴어: Titus Manlius Imperiosus Torquat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아울루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조부) 루키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임페리오수스(아버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아들)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손자)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47년 |
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
동기 | 가이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 |
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가이우스 포에텔리우스 리보 비술루스 |
임기 | 기원전 344년 |
전임 | 마르쿠스 파비우스 도르수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루푸스 |
동기 |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
후임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 |
임기 | 기원전 340년 |
전임 | 가이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프리베르나스 |
동기 |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후임 | 티베리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퀸투스 푸블릴리우스 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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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독재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집안인 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아울루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는 기원전 390년, 385년, 383년, 370년에 집정 무관을 맡아 독재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외지에서 적군과 맞서 싸울 때 로마를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버지 루키우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 임페리오수스는 기원전 363년 독재관을 역임했다.그는 어린 시절 언어를 늦게 익히고 정신 능력도 미진한 점이 많았다. 아버지 루키우스 만리우스는 그런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시골로 보냈다. 기원전 362년 호민관 마르쿠스 폼포니우스는 이 일을 빌미삼아 지난해 독재관 루키우스 만리우스를 고발했다. 루키우스 만리우스는 병력을 모집할 때 이에 불응한 시민들을 가차없이 처형해 "독재적이고 위압적이다"라는 뜻의 임페리오수스(Imperiosu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폼포니우스는 그가 시민들을 지나치게 엄하게 대할 뿐만 아니라 어린 아들에게까지 잔인하게 굴고 있다며, 로마에서 당장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골에서 아버지가 처한 상황을 전해들은 티투스는 로마로 상경한 뒤 폼포니우스의 집을 방문했다. 폼포니우스는 그가 아버지의 학대에 대한 추가 정보를 제공할 거라 여기고 맞이했다. 하지만 티투스는 숨기고 있던 단검을 빼들어 그를 위협하며 고발을 당장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폼포니우스는 그의 요구에 따랐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헌신을 높이 평가하고 트리부누스 밀리툼 6명 중 한 명으로 선출했다고 한다.
기원전 361년, 독재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펜누스 휘하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갈리아인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양군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키가 큰 갈리아 전사가 결투를 제안했다. 그는 독재관의 허락을 받고 결투에 응한 뒤 갈리아 전사의 배와 사타구니를 찔러 죽인 뒤 전사가 목에 걸고 있던 토르퀘스(Torques)[1]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펜누스는 그에게 황금관을 수여했다.[2] 그는 이 일로 토르콰투스(Torquatus)라는 코그노멘으로 불렸고,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토르콰투스를 물려줬고, 자신들이 주조한 주화에 자랑스럽게 새겼다.
기원전 353년 독재관에 선임되어 키레 족과 전쟁을 치를 준비를 했지만 그들이 사절을 보내 화평을 청하자 받아들이고 대신 펠리스키 족을 공격했다. 펠리스키족이 험지에 몸을 숨기고 전투를 회피하자, 그들의 농지와 집을 파괴한 뒤 로마로 귀환했다. 기원전 348년 집정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고위 행정관 선거를 주관하기 위한 독재관에 선임되었으며, 기원전 347년 가이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 시기에 로마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돈을 빌리는 조건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344년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지만, 별다른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340년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어 로마를 상대로 봉기한 라틴 연맹과의 전쟁을 치렀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베수비오 기슭에서 전투가 있기 전에 다가올 전투에서 지휘관이 전사한 쪽이 승리할 것이라는 신의 계시를 꿈에서 받았다. 이에 두 사람은 전투 도중 가장 먼저 전열이 무너진 군단의 지휘관이 희생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데키우스가 이끄는 군단의 측면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데키우스는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신이 로마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기를 서원하는 데보티오(Devotio)를 이행해 전사했고, 티투스가 로마군 전체를 이끌고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페르디난트 볼, <집정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가 아들의 참수를 명령하다>, 1661 ~ 1663년
라틴족과의 전투를 벌일 당시, 티투스는 누구도 자신의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기병 정찰대를 지휘하던 그의 아들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적 기병대장 게미누스 메스키우스의 도발에 넘어가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고 결투를 벌였다. 그 결과 메스키우스를 창으로 찔러 죽이고 갑옷을 노획했다. 아들 티투스가 병사들의 환호를 받으며 숙영지에 돌아오자, 아버지 티투스는 집정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많은 이들이 아들 티투스를 위해 탄원했지만 묵살당했고, 아들 티투스는 말뚝에 묶인 채 릭토르가 휘두른 도끼에 목이 베어졌다.
라틴 연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티투스는 여세를 몰아 트리파누스 인근에서 라틴인과 볼스키인 연합군을 격파한 후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후 로마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집정관을 사임하고 자신을 대신하여 로마를 이끌 독재관을 지명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로마로 돌아온 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만 인사를 받았고 젊은이들을 기피했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악덕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리하다가 심한 반발을 사자 집정관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기원전 320년 법무관 선거를 실시하는 독재관에 선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손자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기원전 299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리고 고손자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기원전 235년과 기원전 224년에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214년 고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함프시코라 휘하 샤르데냐인들을 진압하는 임무를 성사시켰다.
[1] 금속선 몇 가닥을 꼬아서 만든 장신구를 가리키는 라틴어 단어로, 켈트 전사들이 목에 차고 다녔다. 또한 켈트 신격 케르눈노스의 도상에서도 토르퀘스는 중요한 지물이다. 영어로는 토크(Torc)라고 표현한다.[2]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이 일은 기원전 358년 독재관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페티쿠스가 집권했을 때 벌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