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 라틴어: Gnaeus Fulvius Maximus Centumal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플레브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그나이우스 풀비우스(조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아버지)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형제)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아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손자)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98년 |
전임 |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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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독재관.2. 생애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한 풀비우스 가문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그나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299년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는 그의 형제로 추정된다. 기원전 302년 독재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휘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서 에트루리아인들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다.기원전 298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가 집정관으로서 보여준 행적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삼니움으로 쳐들어가 보비아눔과 아우피덴나를 공략했고, 동료 집정관 스키피오는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 테베레강 북쪽의 에트루리아 도시 및 촌락들을 황폐화시켰다고 한다. 반면 프론티누스에 따르면, 그는 루카니아로 행진해 여러 번의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개선장군 목록>에 따르면, 그는 로마로 귀환한 뒤 에트루리아와 삼니움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반면 스키피오의 비문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삼니움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학자들은 리비우스가 자신의 선조의 업적을 부각시키려는 여러 가문의 기록 중 어느 쪽이 사실인지를 파악하는 데 혼란을 겪었을 거라고 추정하며,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기록을 볼 때 켄투말루스가 삼니움과 에트루리아 모두에게 승리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켄투말루스가 삼니움 연맹을 구성한 4개 부족 중 가장 큰 부족인 페트리 족의 수도인 보비아눔을 제3차 삼니움 전쟁이 발발한 첫해에 공략했다는 것은 명백한 과장이라고 간주한다. 다만 켄투말루스가 로마와 전쟁할 준비가 덜 되어 싸우기를 회피한 삼니움족 덕분에 여러 마을과 촌락들을 순조롭게 약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95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와 함께 총독에 선임되어 각기 군단을 이끌고 로마와 에트루리아 사이의 국경지대를 지켰다. 그러던 중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로부터 에트루리아를 약탈해 에트루리아인들을 유인하라는 지시를 받자, 메겔루스와 함께 에트루리아로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움브리아인들과 함께 그를 막으려 달려왔지만 격파당해 수천 명을 상실했다.
그 후 30여년간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다가 기원전 263년 독재관에 선임되어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해군을 창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는 기원전 229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손자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211년 집정관을 맡아 한니발 바르카와 대적했지만 2차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