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라틴어: Caius Aurelius Cotta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조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아버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아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손자)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52년 |
전임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후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킬루스 |
임기 | 기원전 248년 |
전임 |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후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부테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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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기병장관.2. 생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페스투스에 따르면, 아우렐리우스는 태양을 뜻하는 사비니어 '아우셀리우스(Auselius)'에서 파생된 용어라고 한다. 반면에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황금을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 아우레우스(aureus)와 연관지으면서 머리색이 금빛인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라고 추정한다. 그는 이 단어를 씨족 이름으로 삼은 로마 평민 집안에서 최초로 배출된 집정관이었다.기원전 252년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시칠리아 섬 북쪽 해안에 있는 카르타고인들의 마지막 거점인 테르마에 시를 공략했다. 이후 리파리 제도에 상륙하여 리파리 시를 포위 공격했지만 공략이 쉽지 않자 추가 인력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메사나로 떠나면서 대대장이자 친척인 푸블리우스 아우렐리우스 페쿠니올라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페쿠니올라는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포위만 하고 있으라는 그의 지시를 무시하고 군공을 세우기 위해 도시를 공격했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리파리 수비대는 로마 진영을 거진반 점령하고 성벽에 불을 질렀다.
코타는 리파리에 복귀한 뒤 페쿠니올라가 저지른 실책을 알게 되자 몹시 분노했다. 그는 페쿠니올라를 막대로 채찍질하고 졸병으로 강등시켰으며, 가장 천한 일에 배정받게 했다. 이후 리파리 시 공략에 성공한 그는 로마로 귀환한 뒤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48년 또다시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릴리바이움 공방전을 이끌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241년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와 함께 감찰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231년 집정관이 부재한 상황에서 고위 행정관 선거를 대신 이끌기 위해 선임된 독재관 가이우스 두일리우스 휘하 기병장관을 맡았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아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기원전 216년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아 한니발 바르카와의 전쟁에 참전했으며, 또다른 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평민 조영관을 역임했다. 손자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기원전 20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