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7 08:36:37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기원전 242년 집정관)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0.742em; letter-spacing: -0.35px"
기원전 300년 기원전 299년 기원전 299년 보결 기원전 298년 기원전 297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퀸투스 아풀레이우스 판사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막시무스 켄투말루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기원전 296년 기원전 295년 기원전 294년 기원전 293년 기원전 292년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스카이바
기원전 291년 기원전 290년 기원전 289년 기원전 288년 기원전 287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트레물루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퀸투스 카이디키우스 녹투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비나 가이우스 나우티우스 루틸루스
기원전 286년 기원전 285년 기원전 284년 기원전 284년 보결 기원전 283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포티투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카니나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투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가이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덴테르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막시무스
기원전 282년 기원전 281년 기원전 280년 기원전 279년 기원전 278년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기원전 277년 기원전 276년 기원전 275년 기원전 274년 기원전 273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 가이우스 파비우스 도르소 리키누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게누키우스 클렙시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렌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카니나
기원전 272년 기원전 271년 기원전 270년 기원전 269년 기원전 268년
루키우스 파피리우스 쿠르소르 카이소 퀸크티우스 클라우두스 가이우스 게누키우스 클렙시나 퀸투스 오굴니우스 갈루스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키우스 게누키우스 클렙시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 가이우스 파비우스 픽토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
기원전 267년 기원전 266년 기원전 265년 기원전 264년 기원전 263년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페라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 메살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리보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픽토르 루키우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기원전 262년 기원전 261년 기원전 260년 기원전 259년 기원전 258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메겔루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퀸투스 마밀리우스 비툴루스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가이우스 두일리우스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플로루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테르쿨루스
기원전 257년 기원전 256년 기원전 256년 보결 기원전 255년 기원전 254년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 퀸투스 카이디키우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기원전 253년 기원전 252년 기원전 251년 기원전 250년 기원전 249년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킬루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풀루스
기원전 248년 기원전 247년 기원전 246년 기원전 245년 기원전 244년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부테오 마르쿠스 파비우스 리키누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
기원전 243년 기원전 242년 기원전 241년 기원전 240년 기원전 239년
가이우스 푼다니우스 푼둘루스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 가이우스 마밀리우스 투리누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
기원전 238년 기원전 237년 기원전 236년 기원전 235년 기원전 234년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팔토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
기원전 233년 기원전 232년 기원전 231년 기원전 230년 기원전 229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 마르쿠스 푸블리키우스 말레올루스 가이우스 파피리우스 마소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기원전 228년 기원전 227년 기원전 226년 기원전 225년 기원전 224년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메살라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 풀로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기원전 223년 기원전 222년 기원전 221년 기원전 220년 기원전 220년 보결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기원전 219년 기원전 218년 기원전 217년 기원전 217년 보결 기원전 216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기원전 215년 기원전 215년 보결 기원전 215년 보결 기원전 214년 기원전 213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기원전 212년 기원전 211년 기원전 210년 기원전 209년 기원전 208년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기원전 207년 기원전 206년 기원전 205년 기원전 204년 기원전 203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루키우스 베투리우스 필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기원전 202년 기원전 201년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8px; padding: 0 6px"
}}}}}}}}}}}}}}}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라틴어: Gaius Lutacius Catulus
생몰년도 미상 ~미상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사망지 이탈리아 로마
지위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국가 로마 공화정
가족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키툴루스(조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아버지)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형제)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아들)
참전 제1차 포에니 전쟁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242년
전임 가이우스 푼다니우스 푼둘루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
동기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후임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기원전 242년에 선임된 로마 공화국집정관 중1명이다.

2. 생애

라티움 일대에 광대한 토지를 보유한 부유한 평민 집안인 루타티우스 씨족 출신이지만, 그가 집정관에 오르기 전에는 집정관을 배출한 적이 없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형제로 기원전 241년 집정관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가 있었다.

기원전 242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을 22년간 치르고 있었고, 막대한 인력과 재정을 소비했다. 지긋지긋한 전쟁을 어떻게든 승리로 끝내고 싶었던 원로원은 220척에 달하는 함대를 건조해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 세력의 마지막 보루인 릴리바이움을 해상에서 완전히 봉쇄하기로 했다. 본래 두 집정관이 함께 출진할 예정이었으나, 폰티펙스 막시무스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알비누스는 마르스 신의 플라멘(flamen)으로서 로마 시 내부에서 마르스를 모셔야 할 의무가 있는데 군대를 맡기 위해 신전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고, 결국 카툴루스가 단독으로 출진했다.

당시 카르타고 정부는 막대한 인력과 전비를 소모한 로마가 조만간 협상을 요청하리라 예상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원주민 반란과 누미디아 등의 침략에 대처하는데 투입하고 시칠리아에는 현 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소규모 병력만 보냈으며,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함대를 대폭 감축했다. 그래서 카툴루스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나타났을 때, 이를 저지할 카르타고 함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카툴루스는 날씨가 허락할 때마다 함선들을 띄워서 적 선박이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고 선원들에게 항해술과 해상 전술을 훈련했다. 또한 선원들이 적절한 식단을 포함해 좋은 대우를 받도록 해, 그들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원로원은 카툴루스의 임페리움을 1년 더 연장해 카르타고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하게 했다.

한편, 카르타고 정부는 로마 측이 200척이 넘는 함대를 새로 건조해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봉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칵 뒤집혔다. 그들은 서둘러 함대를 건조하거나 소환하고 수송선을 준비하고, 보급품을 모았으며, 선원과 해병을 서둘러 끌어모았다. 그 결과 250척의 전선과 150 ~ 350척의 수송선을 9개월 안에 마련했지만, 급히 모집한 터라 전투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이들을 이끌 지휘관으로는 한노라는 인물이 선임되었다.

한노는 아이가테스 제도의 서쪽에 있는 히에라 섬에 집결한 뒤, 바람이 유리한 쪽으로 불 때 릴리바이움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로마 해군이 저지하기 전에 도착하여 수비대에게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카르타고 함대가 기원전 241년 3월 초에 히에라에 도착하자마자 로마 척후선이 이를 확인한 뒤 카툴루스에게 보고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봉쇄를 풀고 200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시칠리아에서 16km 떨어진 에구사 섬에 정박했다.

기원전 241년 3월 10일 아침, 서풍이 강하게 불기 시작하고 해류도 같은 방향으로 흐르자, 한노는 즉시 릴리바이움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적을 저지하기로 하고, 로마 선박에서 돛대, 돛 및 기타 불필요한 장비를 제거해 거친 풍랑에서 배를 제대로 조율할 수 있게 했다. 다만 카툴루스 본인은 이전 교전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고, 부관 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가 그를 대신해 아이가테스 해전에 임했다.

로마 함대는 적과 마주치자마자 한 줄의 전투 대형을 형성한 뒤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에 맞서 노를 저으며 적 함대에 접근했다. 이에 카르타고 함대는 돛을 내린 뒤 적과 교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카르타고 함대에는 주로 곡물이 담긴 짐이 가득 실려 있었던 반면 로마인들의 선박에는 최소한의 필수품만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카르타고 함선들이 느릿느릿 이동한 데 비해, 로도스의 한니발이 탔던 기함을 본뜬 로마 함대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 해군은 해상 훈련을 착실하게 수행했던 것에 비해, 카르타고 측은 급히 모아서 서둘러 출발한 터라 훈련이 부족했다.

뒤이은 접전에서, 로마 해군은 기동성을 잘 살려서 적 함대의 측면을 충각 전술을 통해 파괴하는 전법으로 압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전함 50척이 침몰하고 70척이 나포되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전함 117척이 침몰했고 로마 전함은 30척이 침몰하고 50척이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두 역사가는 당시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빠진 많은 카르타고인이 익사했기에 로마군에 사로잡힌 포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살아남은 카르타고 함대는 본국으로 퇴각했고, 지휘관 한노는 패배의 책임을 물은 카르타고 당국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카르타고 당국은 로마와는 달리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함대를 새로 건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할당하는 것을 꺼렸다. 지금까지 전쟁을 이어가면서 재정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고, 인력 손실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인데다 설령 함대를 일으켜서 싸운들 승산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시칠리아에서 로마군과 대치하고 있던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로마 정부와 평화 협약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하밀카르 바르카는 아직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가 버티고 있으니 새 함대를 일으킨다면 이길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에 분개해 협상을 이끌기를 거부했고, 히밀코를 대신해서 릴리바이움 수비를 맡았던 기스코가 하밀카르를 대신해 카툴루스와 협상했다. 그 결과 카툴루스의 이름을 딴 '루타티우스 협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2. 카르타고는 전쟁 중에 생포한 모든 로마 병사를 돌려보내며, 로마가 생포한 카르타고 병사를 데려오고 싶으면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3. 카르타고는 20년 동안 2,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이 협약이 민회에 상정되었지만, "겨우 이 정도만 받아내려고 전쟁을 지속했느냐"는 반발을 사는 바람에 부결되었다. 이에 원로원은 카툴루스의 형제이자 당해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를 대표로 삼은 10인 사절단을 시칠리아로 파견해 추가 협상을 벌이게 했다. 기스코는 추가 요구를 즉시 받아들였고, 협약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가까운 여러 섬도 양도한다. 단, 양도해야 하는 섬은 차후에 정한다.
2. 카르타고는 3,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1,000달란트는 즉시 지불해야 하고, 나머지는 10년 안에 지불해야 한다.
3. 양국 모두 상대방의 동맹국을 방해하거나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양국의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을 병사로 모집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방의 영역에서 공공 사업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지 않는다.

이렇게 협약이 맺어지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종식되었고, 카툴루스와 팔토는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신청했다. 이때 개선식의 주인공이 누가 되느냐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다. 카툴루스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났으니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팔토는 카르타고를 최종적으로 굴복시킨 아이가테스 해전을 실제로 지휘한 것은 바로 자신이니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고심 끝에 카툴루스는 카르타고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해 개선식을 거행하고, 팔토는 시칠리아에서의 해전를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해 또다른 개선식을 거행하게 했다. 이후 카툴루스의 행적은 캄푸스 마르티우스 광장에 유트르나(Juturna) 신전을 건설했다는 것 외에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기원전 220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