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라틴어: Gaius Lutacius Catulus | |
생몰년도 | 미상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키툴루스(조부)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아버지)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형제)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아들) |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42년 |
전임 | 가이우스 푼다니우스 푼둘루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 |
동기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후임 |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아티쿠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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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42년에 선임된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중1명이다.2. 생애
라티움 일대에 광대한 토지를 보유한 부유한 평민 집안인 루타티우스 씨족 출신이지만, 그가 집정관에 오르기 전에는 집정관을 배출한 적이 없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형제로 기원전 241년 집정관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가 있었다.기원전 242년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을 22년간 치르고 있었고, 막대한 인력과 재정을 소비했다. 지긋지긋한 전쟁을 어떻게든 승리로 끝내고 싶었던 원로원은 220척에 달하는 함대를 건조해 시칠리아 내 카르타고 세력의 마지막 보루인 릴리바이움을 해상에서 완전히 봉쇄하기로 했다. 본래 두 집정관이 함께 출진할 예정이었으나, 폰티펙스 막시무스인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알비누스는 마르스 신의 플라멘(flamen)으로서 로마 시 내부에서 마르스를 모셔야 할 의무가 있는데 군대를 맡기 위해 신전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고, 결국 카툴루스가 단독으로 출진했다.
당시 카르타고 정부는 막대한 인력과 전비를 소모한 로마가 조만간 협상을 요청하리라 예상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원주민 반란과 누미디아 등의 침략에 대처하는데 투입하고 시칠리아에는 현 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소규모 병력만 보냈으며,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함대를 대폭 감축했다. 그래서 카툴루스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나타났을 때, 이를 저지할 카르타고 함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카툴루스는 날씨가 허락할 때마다 함선들을 띄워서 적 선박이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고 선원들에게 항해술과 해상 전술을 훈련했다. 또한 선원들이 적절한 식단을 포함해 좋은 대우를 받도록 해, 그들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원로원은 카툴루스의 임페리움을 1년 더 연장해 카르타고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하게 했다.
한편, 카르타고 정부는 로마 측이 200척이 넘는 함대를 새로 건조해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를 봉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칵 뒤집혔다. 그들은 서둘러 함대를 건조하거나 소환하고 수송선을 준비하고, 보급품을 모았으며, 선원과 해병을 서둘러 끌어모았다. 그 결과 250척의 전선과 150 ~ 350척의 수송선을 9개월 안에 마련했지만, 급히 모집한 터라 전투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이들을 이끌 지휘관으로는 한노라는 인물이 선임되었다.
한노는 아이가테스 제도의 서쪽에 있는 히에라 섬에 집결한 뒤, 바람이 유리한 쪽으로 불 때 릴리바이움으로 신속히 이동하여 로마 해군이 저지하기 전에 도착하여 수비대에게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카르타고 함대가 기원전 241년 3월 초에 히에라에 도착하자마자 로마 척후선이 이를 확인한 뒤 카툴루스에게 보고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봉쇄를 풀고 200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시칠리아에서 16km 떨어진 에구사 섬에 정박했다.
기원전 241년 3월 10일 아침, 서풍이 강하게 불기 시작하고 해류도 같은 방향으로 흐르자, 한노는 즉시 릴리바이움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카툴루스는 즉시 적을 저지하기로 하고, 로마 선박에서 돛대, 돛 및 기타 불필요한 장비를 제거해 거친 풍랑에서 배를 제대로 조율할 수 있게 했다. 다만 카툴루스 본인은 이전 교전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고, 부관 퀸투스 발레리우스 팔토가 그를 대신해 아이가테스 해전에 임했다.
로마 함대는 적과 마주치자마자 한 줄의 전투 대형을 형성한 뒤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에 맞서 노를 저으며 적 함대에 접근했다. 이에 카르타고 함대는 돛을 내린 뒤 적과 교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카르타고 함대에는 주로 곡물이 담긴 짐이 가득 실려 있었던 반면 로마인들의 선박에는 최소한의 필수품만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카르타고 함선들이 느릿느릿 이동한 데 비해, 로도스의 한니발이 탔던 기함을 본뜬 로마 함대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 해군은 해상 훈련을 착실하게 수행했던 것에 비해, 카르타고 측은 급히 모아서 서둘러 출발한 터라 훈련이 부족했다.
뒤이은 접전에서, 로마 해군은 기동성을 잘 살려서 적 함대의 측면을 충각 전술을 통해 파괴하는 전법으로 압도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전함 50척이 침몰하고 70척이 나포되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전함 117척이 침몰했고 로마 전함은 30척이 침몰하고 50척이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두 역사가는 당시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빠진 많은 카르타고인이 익사했기에 로마군에 사로잡힌 포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살아남은 카르타고 함대는 본국으로 퇴각했고, 지휘관 한노는 패배의 책임을 물은 카르타고 당국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카르타고 당국은 로마와는 달리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함대를 새로 건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할당하는 것을 꺼렸다. 지금까지 전쟁을 이어가면서 재정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고, 인력 손실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인데다 설령 함대를 일으켜서 싸운들 승산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시칠리아에서 로마군과 대치하고 있던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로마 정부와 평화 협약을 협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하밀카르 바르카는 아직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가 버티고 있으니 새 함대를 일으킨다면 이길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에 분개해 협상을 이끌기를 거부했고, 히밀코를 대신해서 릴리바이움 수비를 맡았던 기스코가 하밀카르를 대신해 카툴루스와 협상했다. 그 결과 카툴루스의 이름을 딴 '루타티우스 협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2. 카르타고는 전쟁 중에 생포한 모든 로마 병사를 돌려보내며, 로마가 생포한 카르타고 병사를 데려오고 싶으면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3. 카르타고는 20년 동안 2,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2. 카르타고는 전쟁 중에 생포한 모든 로마 병사를 돌려보내며, 로마가 생포한 카르타고 병사를 데려오고 싶으면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3. 카르타고는 20년 동안 2,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이 협약이 민회에 상정되었지만, "겨우 이 정도만 받아내려고 전쟁을 지속했느냐"는 반발을 사는 바람에 부결되었다. 이에 원로원은 카툴루스의 형제이자 당해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케르코를 대표로 삼은 10인 사절단을 시칠리아로 파견해 추가 협상을 벌이게 했다. 기스코는 추가 요구를 즉시 받아들였고, 협약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가까운 여러 섬도 양도한다. 단, 양도해야 하는 섬은 차후에 정한다.
2. 카르타고는 3,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1,000달란트는 즉시 지불해야 하고, 나머지는 10년 안에 지불해야 한다.
3. 양국 모두 상대방의 동맹국을 방해하거나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양국의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을 병사로 모집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방의 영역에서 공공 사업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지 않는다.
2. 카르타고는 3,200달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1,000달란트는 즉시 지불해야 하고, 나머지는 10년 안에 지불해야 한다.
3. 양국 모두 상대방의 동맹국을 방해하거나 그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며, 양국의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을 병사로 모집하지 않는다. 또한 상대방의 영역에서 공공 사업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지 않는다.
이렇게 협약이 맺어지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종식되었고, 카툴루스와 팔토는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신청했다. 이때 개선식의 주인공이 누가 되느냐를 놓고 경쟁이 벌어졌다. 카툴루스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났으니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팔토는 카르타고를 최종적으로 굴복시킨 아이가테스 해전을 실제로 지휘한 것은 바로 자신이니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고심 끝에 카툴루스는 카르타고인에 대한 승리를 기념해 개선식을 거행하고, 팔토는 시칠리아에서의 해전를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해 또다른 개선식을 거행하게 했다. 이후 카툴루스의 행적은 캄푸스 마르티우스 광장에 유트르나(Juturna) 신전을 건설했다는 것 외에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가이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기원전 220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