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라틴어: Publius Cornelius Lentulus Caudin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형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아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6년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동기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 |
후임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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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는 기원전 275년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피로스 1세의 에페이로스 왕국군에 맞서 싸웠다. 형제로 기원전 237년 집정관, 기원전 236년 감찰관, 기원전 220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역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가 있었다.기원전 236년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북부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보이족이 알프스산맥 너머 갈리아 부족들을 끌어들여 로마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두 집정관은 아르미눔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갈리아 연합군의 수가 워낙 많아서 한동안 전투를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후 보이족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보이족의 왕 2명이 살해당하는 등 격렬한 내전이 벌어지고 알프스 산맥 너머에서 온 부족들은 그들의 땅을 심하게 약탈하면서 연합이 무너지자, 두 사람은 굳이 공격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
바루스는 코르시카로, 그는 리구리아로 가서 지역 부족들을 성공적으로 무찌른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로마의 퀴리날레 언덕에 있는 퀴리누스 신전에 바쳐진 비문 중에는 “P. Corn[elios] L. f. coso[l] proba[vit] Mar [te sacrom]"라고 적힌 비문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리구리아인들에 대한 승리를 거둔 뒤 이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이 비문을 바쳤을 것이라 추정한다.
폴리비오스가 인용한 카일 아크테의 실레노스와 라케다이몬의 소시로스에 따르면, 기원전 218년 한니발 바르카가 9개월간 사군툼 공방전을 벌인 끝에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군툼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우디누스는 카르타고에게 전쟁을 당장 선포하자고 주장했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먼저 정의 회복을 요구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폴리비오스는 이런 상황에서 그런 회의가 열릴 수 없다며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에게는 두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가 있었다.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203년 법무관을 맡아 시칠리아를 다스렸고, 루키우스는 기원전 209년 수석 조영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