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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이로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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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이로스
Ἄπειρος
<colbgcolor=#fab405> 존속 기간 기원전 470년 ~ 기원전 167년
수도 파라손(기원전 330년 ~ 기원전 295년)
암브라시아(기원전 295년 ~ 기원전 224년)
포에니케(기원전 224년 ~ 기원전 167년)
언어 에페이로스/마케도니아/코이네 그리스어
종교 그리스 다신교, 헬레니즘 종교
종족 카오니아인, 몰로시아인, 테스프로티아인, 그리스인
정부 형태 부족연합 군주국
주요 국왕 피로스 1세
주요 사건 피로스 전쟁
마케도니아 전쟁
통화 드라크마(Τετράδραχμο)
성립 이전 그리스 도시국가
멸망 이후 로마 공화국
1. 개요2. 역사
2.1. 초기2.2. 알렉산드로스 1세2.3. 정국 혼란2.4. 피로스 1세
2.4.1. 디아도코이 전쟁2.4.2. 피로스 전쟁2.4.3. 피로스 1세의 최후
2.5. 왕국의 몰락2.6. 후일담: 에페이로스 연맹
3. 역대 국왕4. 관련 매체

[clearfix]

1. 개요

도리아인의 그리스 침공 이후 에페이로스에 정착한 고대 카오니아인, 몰로시아인, 테스프로티아인들이 몰로시아 아이아키다이 왕조를 중심으로 성립한 왕국. 에페이로스의 왕가는 아이아키다이 왕조로 아킬레우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1] 몰로시아의 공주 올림피아스필리포스 2세결혼하여 알렉산드로스 3세를 출생했고,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삼촌이 되는 알렉산드로스 1세 에페이로스 몰로소스가 마케도니아의 에페이로스 왕이라는 칭호로 왕위를 승계할 정도로 마케도니아 왕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2. 역사

2.1. 초기

기원전 470년 무렵, 에페이로스 일대에 거주하던 몰로시아 족의 지도자 아드메토스가 왕국을 건국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 문화를 부족민들에게 소개하고 행정과 입법 체계를 세웠다고 한다. 기원전 471년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테미스토클레스코르기라로 피신하여 몇년 간 그곳에 있다가 아드메토스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얼마 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절단이 테미스토클레스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테미스토클레스를 피드나로 피신시켰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나중에 페르시아 궁정으로 망명하여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휘하에서 사트라프를 지냈다.

에페이로스 왕국은 기원전 429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카니아를 침공했으나 아테네에게 격파당했다. 기원전 423년 아테네에서 체류하다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 타르히파스는 스파르타의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배제하고 그리스 문자를 도입하고 동전을 발행했으며, 헌법을 제정했다. 또한 주변 마을 주민들을 수도에 모았으며, 수도에 석조 건물, 공공 건물, 사원, 견고한 성벽과 요새를 쌓았다. 한편 도도니를 공략한 뒤 그곳에 신전을 세웠는데, 이곳은 훗날 에페이로스에서 명망높은 신탁소가 되었다.

기원전 385년 타르히파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케타스 1세는 모종의 이유로 축출되어 시라쿠사참주 대 디오니시오스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대 디오니시오스는 아드리아 해이오니아 해에서 시라쿠사의 패권을 확보하길 원했기에, 그를 왕위에 복귀시키고 에페이로스를 시라쿠사의 영향권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대 디오니시오스는 2,000명의 그리스 호플리테스와 500명의 기병대를 파견하고, 일리리아 통치자 바르딜리스 1세의 군대와 합세한 뒤 몰로시아를 공격했다. 몰로시아 전체가 약탈당했고, 1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스파르타 왕 아게실라오스 2세가 개입하여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몰로시아와 연합해 일리리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시라쿠사의 후원에 힘입어 복위할 수 있었다.

알케타스 1세는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군인인 테모데오스와 친분을 다졌고, 코르기라, 케팔리아, 아카르나니아가 델로스 동맹에 가입했을 때 그 역시 가담했으며, 아버지 타르히파스의 친 아테네 정책을 지속했다. 한 번은 티모테오스가 반역 혐의로 법정에 선 적이 있었다. 그는 테살리아의 통치자인 이아손과 함께 아테네로 달려가 법정에서 티모테오스를 변호하여 무죄 판결에 기여했다.

기원전 370년 알케타스 1세가 사망한 뒤 두 아들 네오프톨레모스 1세아리바스'''가 왕위를 놓고 분쟁한 끝에 왕국을 분할하여 공동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기원전 360년 네오프톨레모스 1세가 사망한 뒤 아리바스가 단독 군주로 등극했다. 이 무렵, 일리리아 통치자 바르딜로스가 몰로시아를 공격했다. 아리바스는 자국의 군사력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책략을 쓰기로 했다. 그는 몰로시아를 아이톨리아 동맹에 양도할 거라는 소문을 퍼뜨린 뒤 병사들을 이끌고 매복했다. 일리리아인들은 아이톨리아 동맹의 개입을 두려워해 약탈물을 챙기고 돌아가다가 매복한 적에게 급습되어 막심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다.

아리바스는 형제 네오프톨레모스 1세의 딸 트로아스와 결혼하여 알케타스 2세아이아키데스를 낳았다. 한편 네오프톨레모스 1세에게는 트로아스 외에 알렉산드로스 1세올림피아스 남매도 있었다.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필리포스 2세와 결혼하여 알렉산드로스 3세를 낳았다. 그는 이 결혼을 지지했지만, 필리포스 2세가 아내의 남자 형제를 왕으로 세우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하면서 상황이 위태로워졌다. 기원전 350년 필리포스 2세의 압박에 굴복하여 알렉산드로스 1세를 공동 왕으로 세웠다. 기원전 342년 필리포스 2세의 지원을 받은 알렉산드로스 1세에 의해 축출되어 해외로 망명했다.

2.2. 알렉산드로스 1세

알렉산드로스 1세 에페이로스필리포스 2세의 지원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뒤 몰로시아 영내에 국한되었던 왕국을 에페이로스 전역으로 확장하고 여러 부족을 복종시켰다. 그러던 기원전 337년 올림피아스가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와 함께 마케도니아 왕국을 탈출했을 때 궁정으로 데려왔다. 올림피아스는 그에게 필리포스 2세를 공격하라고 강력히 권했지만, 그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336년,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드로스 3세가 필리포스 2세와 화해하여 마케도니아로 귀환했다. 이때 필리포스 2세는 올림피아스의 딸인 클레오파트라와 그를 결혼시켜 에페이로스 왕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로 했다. 그는 이에 응하여 클레오파트라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필리포스 2세는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경호원을 맡던 오레스테스의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했다.

기원전 334년, 삼니움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던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구원을 요청했다. 그는 이 기회에 남부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로 하고 아드리아 해를 건너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그는 삼니움을 상대로 승리한 뒤 브루티인들과 루카니아인들을 상대로 연전연승하여 시폰툼, 코센티아, 테리나 등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1세가 메타폰툼과 헤라클레아를 점령하자, 이 두 도시에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했던 타라스가 도리어 알렉산드로스 1세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타라스와 에페이로스군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기원전 331년, 타라스와 에페이로스가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에페이로스군에게 패퇴했던 루카니아와 브루티는 인근 부족들로부터 지원군을 모집했고, 다시금 에페이로스군을 대적할 군세를 결집하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에페이로스군이 자신들의 영토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없는 판도시아에 진영을 세웠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200명의 루카니아 망명자들을 길잡이로 삼아 판도시아에서 떨어진 세 언덕에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하필 폭우가 쏟아지면서 강물이 불어나고 만다. 이 탓에 세 개의 언덕에 주둔하고 에페이로스군은 고립되었고, 도도나에서 강을 조심하라는 신탁을 받았던 알렉산드로스 1세는 전율했다. 당장 루카니아와 브루티인들이 주둔한 판도시아가 에페이로스에도 있었고, 지금 불어난 강의 이름 또한 아케론이었기 때문이다.[2]

신탁의 경고와 루카니아 망명자들의 배반을 두려워한 알렉산드로스 1세는 가까스로 포위를 뚫고 루카니아군의 지휘관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신탁이 가리킨다고 여겼던 강과 똑같은 이름의 강물을 건너는 걸 주저했고, 루카니아 망명자가 던진 투창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왕이 전사했으니 메타폰툼에 주둔하고 있던 에페이로스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패전으로 마그나 그라이키아로 대표되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확장에 제동이 걸렸고, 팔랑크스를 상대한 이탈리아 부족민들의 전투 방식은 훗날 로마군의 전술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2.3. 정국 혼란

알렉산드로스 1세가 허망하게 사망한 뒤, 알렉산드로스 1세의 미망인 클레오파트라가 어린 아들 네오프톨레모스 2세의 보호자로서 국정을 잠시 맡았다가 동방 원정을 떠난 알렉산드로스 3세를 대신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을 대리 통치하고 있던 안티파트로스의 궁정으로 자식들과 함께 향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아이아키데스라미아 전쟁에서 활역한 멤논의 딸이자 테살리아 출신인 프티아와 결혼하여 데아다미아와 피로스 1세를 낳았다.

기원전 317년 폴리페르콘카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을 놓고 내전을 벌일 때, 아이아키데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친척인 올림피아스를 보호하는 폴리페르콘을 지원했다. 올림피아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와 록사나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와 그의 딸 데이다미아를 약혼시켰다. 그는 올림피아스를 적극적으로 도와서 그녀가 필리포스 3세와 에우리디케를 물리치고 마케도니아 왕위에 알렉산드로스 4세를 앉히는 걸 도왔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반도 원정을 떠나 있던 카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로 돌아와서 올림피아스를 공격했다. 그는 올림피아스를 도우러 출정했으나 카산드로스의 부관이 이끄는 적군에 가로막혀 진격하지 못하다가 군영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귀환해야 했다.

이이아키데스가 나라를 떠나 있던 기원전 317년, 에페이로스에서 정변이 일어나면서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정변 주모자들은 카산드로스의 편을 들었고, 카산드로스는 리키코스를 에페이로스로 보내 그를 대적하게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해외로 망명했고, 당시 유아였던 피로스 1세는 아버지의 추종자들과 함께 일리리아의 왕 글라우키아스에게 의탁했다. 이리하여 네오프톨레모스 2세가 입지를 굳혔지만, 실권은 마케도니아 왕국이 쥐었다.

기원전 313년, 마케도니아의 압제에 지친 에페이로스인들이 봉기하여 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몰아내고 아이아키데스를 복위시켰다. 카산드로스는 형제 필리포스에게 군대를 맡겨 에페이로스를 치게 했다. 그는 이에 맞서 항전했으나 첫번째 전투에서 패배했고 자신을 복위시킨 인사 50명이 카산드로스에게 끌려갔다. 그는 아이톨리아 동맹과 연합한 뒤 오이니아데스에서 2번째 전투를 치렀으나, 또다시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에페이로스인들은 아이아키데스의 형제인 알케타스 2세를 새 군주로 내세우고 마케도니아에 계속 항전했다. 카산드로스는 에페이로스인들이 새운 왕이 기반을 굳히기 위해 몰아내기로 마음먹고, 부관 리시코스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다. 알케타스는 이에 맞서 알렉산드로스와 테우크로스를 여러 정착촌으로 보내 군대를 모으게 하고, 자신은 현재 보유한 병력을 이끌고 적군과 대치한 채 아들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에페이로스인들은 리시코스의 병력이 우월한 걸 보고 겁에 질려 항복했고, 그는 에페이로스의 도시 에우리메네스로 피신했다.

리시코스가 에우리메네스를 포위공격하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와 테우크로스가 이끄는 에페이로스군이 도착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리시코스가 불리한 상황에 처했지만, 데이니아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추가로 도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에우리메네스에서 탈출하여 산악 요새로 피신했고, 리시코스는 에우리메네스를 함락한 뒤 철저하게 약탈했다.

알케타스 2세는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본군을 이끌고 에페이로스로 접근하고 있던 카산드로스에게 사절을 보내 앞으로 마케도니아의 봉신이 될 테니 평화 협정을 맺어달라고 호소했다. 카산드로스는 이를 받아들여서 그가 왕위를 계속 이어가는 걸 허락했다. 그 대신, 그의 병력을 차출하여 아폴로니아 공방전에 투입시켰다.

그 후 통치를 몇년간 이어갔으나 백성들에게 잔인한 행위를 일삼아 민심을 잃었고, 결국 기원전 307/306년에 더 이상 참지 못한 백성들의 봉기로 어린 두 아들 헤시오네오스, 니시오스와 함께 살해되었다. 그 후 일리리아 왕 글라우키아스가 11세 또는 12살이었던 피로스 1세를 에페이로스의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기원전 302년 일리리아에서 사귀었던 소꿉친구 한 명이 초대한 결혼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일리리아인들에게 의존하는 왕에게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사촌 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왕위에 앉히는 바람에 권력과 재산을 모두 잃고 당시 중동 최강의 권력자 안티고노스 1세와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3] 진영으로 망명했다.

네오프톨레모스 2세는 복위 후 수 년간 에페이로스 왕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기원전 296년 피로스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로부터 막대한 자금과 병력을 지원받고 에페이로스에 돌아오면서 왕좌를 위협받았다. 그렇지만 네오프톨레모스 2세의 지지자들이 상당히 강력했기 때문에, 피로스 1세는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하다가 두 사람이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두 왕은 각자 세력을 끌어모으고 상대를 실각시킬 기회를 엿봤다.

그러던 어느 날, 피사로나에서 연례 행사가 개최되었다. 왕과 신하들이 행사에 참여하여 선물을 교환할 때, 네오프톨레모스 2세의 지지자인 겔론이 피로스에게 쟁기질하는 소 한쌍을 선물로 줬다. 피로스의 종 미르틸로스가 피로스에게 이 소들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겔론은 이 기회를 틈타 미르틸로스에게 피로스를 암살하는 계획에 가담하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미르틸로스는 이 모든 계획을 피로스에게 보고했다. 피로스는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신뢰하는 부하 알렉시크라테스도 음모에 가담하는 척하게 했다.

한편, 네오프톨레모스 2세는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여동생 카드메이아의 집에서 동지들과 공공연히 음모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하녀 파이나레티가 벽에 등을 기대고 자는 척하면서 모든 것을 주의깊게 들었다. 다음날, 그녀는 비밀리에 피로스의 아내 안티고네를 찾아가 모든 걸 밝혔다. 안티고네는 희생제가 치러지는 날 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뒤 극비리에 숨겨둔 암살자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했다. 이후 알렉시크라테스가 피로스에게 보고한 명단에 적힌 가담자 전원이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피로스는 에페이로스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되었다.

2.4. 피로스 1세

2.4.1. 디아도코이 전쟁

피로스 1세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물리치고 에페이로스 왕국의 단독 군주로 군림할 무렵, 마케도니아 왕국은 카산드로스 사후 두 아들 알렉산드로스 5세안티파트로스 1세가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알렉산드로스 5세는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아테네,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라서 당장 개입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알렉산드로스 5세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 대신, 마케도니아의 팀파이아와 파라아이아 일대와 마케도니아의 속국인 암브라키아, 아카니아, 암필로키아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알렉산드로스 5세가 승낙하자, 그는 즉시 군대를 보내 해당 지역을 병합하고 방비를 굳건히 하게 했으며, 왕국의 수도 파사로나를 암브라키아로 옮겼다. 이후 안티파트로스 1세를 공격하여 그가 소유하고 있던 나머지 땅을 빼앗아 알렉산드로스 5세에게 넘겼다.

그러나 트라키아의 통치자 리시마코스가 개입했다. 그는 피로스를 후원하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막대한 자금을 보내며 피로스의 원정을 중단하도록 권고하라고 부탁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에 동의하여 피로스에게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권고했다. 자신을 후원해주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마케도니아에서 병력을 철수시켰다. 뒤이어 아테네,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마케도니아에 진입한 데메트리오스 1세는 안티파트로스 1세를 완전히 몰아내고 마케도니아를 장악했다. 이후 자신을 내쫓을 궁리를 하던 알렉산드로스 5세를 연회에 초청한 뒤 암살하고 마케도니아의 군주로 등극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피로스의 누이 데이다미아와 결혼했지만, 이 무렵엔 그녀가 죽었기에 피로스와의 관계는 끊어졌다. 게다가 피로스가 가져간 마케도니아 영역을 되찾고 싶어했기 때문에, 양자는 곧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데메트리오스가 에페이로스로 진군하자, 그 역시 마케도니아로 진격했다. 그런데 길이 엇갈리는 바람에 서로 마주치지 못한 채 상대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데메트리오스가 에페이로스를 약탈하는 사이, 피로스는 마케도니아에서 데메트리오스의 부관 판다이코스와 맞붙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판다이코스가 결투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에 응했고, 격투 끝에 판다이코스를 거의 압도했지만 판다이코스의 부하들이 지휘관을 구조해 후방으로 이송시키는 바람에 죽이지는 못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에페이로스군은 마케도니아군 5,000명을 생포하고 다수를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장병들은 그에게 "독수리"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지어주며 경의를 표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판다이코스의 패전 소식을 듣고 급히 마케도니아로 철수했고, 피로스 역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데메트리오스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피로스는 마케도니아를 침공해 각지를 약탈하다가 에데사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인들이 거센 저항을 하는 바람에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철수했다. 한편, 그는 첫번째 아내 안티고네가 사망하자 시라쿠사의 참주 아가토클레스의 딸 라나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라나사는 야만인 소굴로 여긴 일리리아와 트라키아에서 온 다른 아내들이 왕의 총애를 받고 자신은 그러지 못한다는 것에 반감을 품고, 에페이로스를 떠나 아버지가 피로스에게 지참금으로 제공했던 코르기라(코르푸)로 이동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 1세와 결혼하고 섬을 그에게 넘겼다. 피로스에게는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기원전 288년,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 안티고노스 1세가 한때 통치했던 아시아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500척에 달하는 거대한 함대를 건설하고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규합했다. 셀레우코스 1세, 프톨레마이오스 1세, 리시마코스가 이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아시아로 떠나는 사이에 피로스가 자기 땅을 공격할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피로스에게 사절을 보내 자기 편을 들던가 최소한 중립을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리사코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은 에페이로스에 사절을 잇따라 보내 피로스를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는 장고 끝에 데메트리오스를 공격하여 마케도니아로 진출하고 아내와 코르기라를 잃은 수치를 갚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왕들은 데메트리오스가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공세를 개시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대규모 함대를 파견해 그리스 해역으로 항해하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선동했고,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에 전진 기지를 세우고 북마케도니아를 침공했다. 피로스는 데메트리오스가 리시마코스를 상대하기 위해 북상한 틈을 타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많은 영토를 자신의 영토에 합병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노련한 장군인 리시마코스보다는 피로스를 상대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군대가 에페이로스군 진영 근처에 이르렀을 때, 병사 대부분이 피로스에게 귀순해버렸다. 결국 데메트리오스는 변장한 채 테살리아 남부로 도주했다.

데메트리오스를 쫓아낸 뒤, 리시마코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절반씩 가지고 공동 왕이 되기로 했다. 피로스는 아테네로 가서 아크로폴리스에서 제물을 바쳤고, 테살리아에서 데메트리오스의 지배를 받던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했다. 그러던 기원전 285년 데메트리오스가 아시아에서 셀레우코스 1세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리시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전역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피로스를 물리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처음에 피로스군 보급로를 차단하여 그들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 이후 피로스를 따르는 마케도니아인들에게 피로스는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마케도니아에 순종하며 살던 국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기 편을 들라고 유혹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민심이 급격히 리시마코스 쪽으로 쏠리자, 피로스는 어쩔 수 없이 에페이로스로 철군했고 리시마코스가 마케도니아 전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284년, 리시마코스는 에페이로스를 침략해 각지를 약탈하고 왕릉까지 파괴했다. 적의 군세가 워낙 강력했기에, 그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수도를 지키기만 했다. 이후 왕국을 재건하는 데 전념하던 그는 기원전 281년 리시마코스가 코루페디움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1세에게 패배하여 목숨을 잃고 셀레우코스 1세 역시 트라키아에 진출했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하면서 마케도니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타라스(오늘날 타란토)가 파견한 해군의 지원에 힘입어 코르기라 섬을 탈환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마케도니아 왕위를 차지하자,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막대한 후원을 받아왔기 때문에 마케도니아를 차마 공격하지 못했다.

2.4.2. 피로스 전쟁

피로스 1세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왕국을 차마 치지 못하고 공략 방향을 고민하고 있던 기원전 280년, 타라스가 로마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피로스는 일전에 코르기라 섬을 공략할 때 타라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이 기회에 남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자신이 확보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보태기로 마음먹고, 테살리아 출신의 웅변가이자 유능한 지휘관인 키네아스에게 3,000 병력을 맡겨 타라스로 보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왕과 군사 동맹을 맺고 5,000 보병과 4,000 기병, 코끼리 50마리를 지원받기로 했으며, 장남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에페이로스 통치를 맡겼다.

이후 보병 20,000명, 기병 3,000명, 궁수 2,000명, 투석병 500명, 코끼리 20마리, 수백 척의 함대를 타고 타라스로 떠났다. 이오니아 해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러운 악천후로 인해 흩어진 함대를 수습하느라 수일을 허비한 끝에, 그의 군대는 타라스에 집결했다. 그런데 타라스 시민들은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피로스는 행사, 대중목욕탕 사용 및 모든 여가 활동을 일절 금지하고 장정들을 징집해 강제 훈련시켰다. 타라스 시민들은 구원하러 왔다면서 점령군 행세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많은 이가 도시를 떠났다.

피로스는 기원전 280년 헤라클레아 전투와 기원전 279년 아스쿨룸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막심한 손실을 입었고, 타라스 등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지원도 시원치 않았다. 피로스는 이러한 현실에 회의감을 느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스쿨룸 전투 후 부하들이 승리를 축하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로마인들을 상대로 한 번 더 이런 식으로 승리하면, 우리는 완전히 패망할 것이다!"

이렇듯 피로스 전쟁에서 별 재미를 못보고 있을 때, 두 소식이 도착했다. 하나는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기원전 279년 켈트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었다. 또 하나는 카르타고군에게 포위된 시라쿠사 참주 티니온소시트라토스의 구원 요청이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와 시칠리아 중 어느 쪽을 택할 지 고심한 끝에, 켈트족의 침략으로 황폐화되고 있는 마케도니아보다는 부유한 시칠리아를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는 편이 더 매력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타란토에 수비대를 남긴 뒤 시칠리아로 떠났다. 이에 타라스 시민들은 로마에 맞서 싸우게 하려고 고용했는데 느닷없이 시칠리아로 떠나버린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

타라스를 떠난 지 열흘 후, 그는 로크리에 도착한 뒤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그곳에 정착시켰다. 이후 현지에서 병력을 추가로 모집한 뒤 카타니아로 항해하여 병사들을 하선시킨 뒤 시라쿠사로 진격했고, 함대는 해안가에서 이들을 따라갔다. 시라쿠사를 한창 포위 공격하고 있던 카르타고군은 에페이로스군이 출현하자 즉시 퇴각했다. 이리하여 시라쿠사에 무혈 입성한 그는 도시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던 티니온과 소시트라토스를 화해시키고 티니온을 영토 방어 감독관, 소시트라토스를 용병대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 후 시라쿠사의 여러 도시에서 사절이 와서 그에게 귀순하며 지원을 약속하자, 그는 이들을 모두 친절하게 맞이하고 시라쿠사 전체를 장악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먼저 카르타고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헤라클레아 시를 공략했다. 뒤이어 카르타고의 영역에 속해 있던 시칠리아 서부로 진격해 여러 도시를 순식간에 확보하고 여세를 몰아 에릭스를 포위했다. 에릭스 시는 난공불락으로 명성이 자자한 도시였지만, 피로스가 보병 30,000명, 기병 2,500명, 전함 200척을 동원해 장기간 포위 공격하고 몸소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전투를 벌이는 등 용맹을 떨친 끝에 함락시켰다.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제물을 바치고 경기를 개최했다. 그는 시칠리아의 현지 부족으로 그리스인들을 상대로 숱한 습격과 약탈을 일삼던 마메르타이인들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는 시칠리아에서의 성공 덕분에 "시칠리아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시라쿠사를 수도로 삼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시칠리아를 관리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평화 협상을 하려 했지만, 이미 시칠리아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던 그는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답했다. 심지어, 그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아프리카 원정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시칠리아의 도시국가들에게 막대한 공물과 병력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이에 시라쿠사 참주 티니온과 소시트라토스가 반발하자, 그는 티니온을 죽이고 소시트라토스를 쫓아냈다. 이에 분노한 시칠리아 도시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카르타고인과 마메르타이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카르타고 함대는 피로스군의 해상보급을 끊어버렸다. 이로 인해 곤경에 처했던 그는 마침 타라스가 로마의 공세로 위험에 빠졌다며 구원요청을 하자 즉시 시칠리아를 떠나 타라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함대가 도중에 습격하여 막대한 타격을 입히는 바람에, 타라스에 도착한 병력은 보병 2만과 기병 3천에 불과했다.

기원전 275년, 피로스는 베네벤툼에서 로마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그는 두 집정관을 상대로 동시에 전투를 치르는 건 승산이 없다고 보고, 베네벤툼에 주둔한 마니우스 쿠리우스의 로마군을 기습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습격대가 야간에 숲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대혼란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소음 때문에 적의 움직임을 눈치챈 로마군의 역습으로 습격대 대부분이 섬멸되고 코끼리 절반을 상실했다. 다음날, 로마군은 피로스군의 본영을 공격했다. 피로스는 이들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남은 코끼리들이 불타는 화살에 겁을 먹고 날뛰는 바람에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지 못하자 전투를 중단하고 철수했다. 이 패배로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그는 보병 8천과 기병 500명 밖에 안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2.4.3. 피로스 1세의 최후

6년간의 전쟁에서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하고 막대한 전력 손실만 입은 피로스 1세는 기원전 274년 용병대의 급료를 지급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를 침공했다. 그는 아우스 강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를 격파했고, 안티고노스는 신분을 감춘 채 가까스로 탈출했다. 피로스는 여세를 몰아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장악하고 왕을 칭했고,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 동부 해안 도시들만 차지하였다. 그러나 피로스는 군자금 마련을 명목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옛 수도 베르기나의 왕실 묘지를 도굴하여 금을 찾으려 드는 바람에 민심을 잃었고, 해안 도시에 내몰린 안티고노스를 왕국을 잃고도 여전히 보라색 망토를 착용하다니 참으로 뻔뻔하다고 비웃으면서도 그대로 내버려뒀다. 그 덕분에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안티고노스는 피로스에게 반감을 품은 마케도니아인들을 끌어모아 군대를 재건했다.

기원전 272년, 스파르타에서 추방당한 클레오니모스 왕이 피로스에게 자신을 복위시켜주면 그의 동맹이 되겠다고 제안했다. 피로스는 이에 혹하여 2만 5천 보병대와 2천 기병대, 그리고 24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건너가 아르카디아메갈로폴리스를 점령하고 스파르타를 위협했다. 메갈로폴리스에서 스파르타 사절단을 만난 그는 자신은 스파르타를 칠 생각이 없으며 그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혼란을 수습하고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싶어한다고 밝혔다. 스파르타인들은 그 말을 믿고 방심했지만, 피로스는 극비리에 스파르타로 쳐들어갔다. 그가 스파르타 시에 당도했을 때, 스파르타 왕 아레오스 1세와 장병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도시를 공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후속 병사들이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느라 시간을 지체한 사이, 시민들은 민병대를 결성하고 깊은 도랑을 파고 방어시설을 세웠다.

해가 떠오를 무렵 전 병력이 집결하자, 피로스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아레오스의 어린 아들인 아크로타토스가 이끄는 분견대가 적 후방에서 출현해 피로스군을 급습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도시로 귀환했다. 다음날, 피로스는 시신을 비롯한 다양한 재료로 도랑을 메우고 도시에 재진입하려 했다. 그러나 수비대의 결사적인 분전으로 도시 진입에 실패했고, 피로스 본인은 말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 바람에 낙마하여 경상을 입었다. 이리하여 도시 공략이 또 실패하자, 그는 평화 협상을 하여 조건부 항복을 받아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스파르타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에 안티고노스가 마케도니아의 일부 영역을 탈환한 뒤,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모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레오스 1세가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크레타 섬에서 귀환하여 도시에 입성하면서, 스파르타를 공략하는 건 더욱 힘들어졌다.

피로스는 스파르타를 향한 세번째 공세를 가해봤지만 역시나 실패하자 라코니아로 철수하여 약탈을 자행하면서 겨울을 그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때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스파르타 다음으로 강력한 도시인 아르고스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아르고스에서는 아리스티포스와 아리스테아스가 도시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는데, 아리스티포스는 안티고노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에 아리스테아스는 피로스와 손잡고 아리스티포스를 몰아내기로 했다. 피로스는 아르고스를 자기 편으로 삼으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패권 확보에 도움이 되리라 확신하고, 전군을 이끌고 아르고스로 향했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 아레오스가 그들의 진군로 주변에 병력을 매복했다가 급습했고, 피로스의 장남 프톨레마이오스가 매복군과 싸우던 중 크레타의 압테라 출신인 오로이소스가 내지른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피로스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장 에우알코스를 처단했다. 전투가 끝난 뒤, 그는 아들을 위한 장례식을 벌인 뒤 아르고스를 향한 행군을 계속했다.

피로스가 아르고스 인근에 이르자, 아르스티포스는 안티고노스 2세에게 구원을 청했고 스파르타 왕 아레오스도 아르고스에 도착했다. 이리하여 양군이 아르고스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아르고스에서는 자신들의 땅이 폐허가 될 것을 우려해 다른 곳에서 전투하라고 요구했고, 안티고노스 2세는 요구에 따라 다른 곳으로 물러났다. 피로스 역시 요구에 응했지만, 어둠을 틈타 장병들을 친히 이끌고 아르고스를 기습했다. 그러나 성문이 작아 코끼리들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고 아르고스인들이 저항하면서 안티고노스 2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안티고노스 2세와 아레오스 1세가 즉시 아르고스로 병력을 보냈고, 에페이로스군은 수적으로 우월한 적의 협공을 받았다. 날이 밝으면서 적의 규모를 눈앞에서 확인한 피로스는 철수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성문이 너무 좁아서 병사들이 탈출하기 힘들 게 자명했다. 이에 후방에 있던 아들 헬레노스에게 전령을 보내 성벽의 일부를 허물어서 퇴로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전령은 명령을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했고, 헬레노스는 아버지가 추가 병력을 보내라는 걸로 오해하고 남아있는 코끼리와 부하들을 이끌고 도시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에페이로스군 절반은 도시를 벗어나려 하고, 나머지 절반은 도시로 진입하려 하면서 대혼란에 휩싸였다. 여기에 코끼리들이 적의 화살 세례에 격분해 미쳐 날뛰면서,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장병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다가 서로 짓밟아 죽거나 아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을 목도한 피로스는 투구에서 휘장을 제거하고 말을 타고 추격하는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다가 한 병사가 그를 향해 창을 던졌는데, 가슴 부위의 갑옷을 꿰뚫었지만 미미한 상처만 입혔다. 그는 자신을 공격한 군인 쪽으로 다가가 단칼에 쳐죽이려 했다.

이때 그 군인의 어머니는 건물 옥상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중 아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기와를 들어 두 손으로 피로스를 향해 집어던졌다. 기와는 피로스의 목을 강타했고, 목 밑의 척추뼈가 부러졌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안티고노스 휘하에 있던 조피로스는 바닥에 쓰러진 자의 정체를 눈치채고, 피로스가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을 때 어느 집으로 끌고 간 뒤 수급을 베었다. 이리하여 시대의 풍운아 피로스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2.5. 왕국의 몰락

피로스 1세가 전사할 무렵,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역시 전사했고 삼남 헬레노스는 마케도니아군의 포로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본국에 남아서 통치를 대행하던 차남 알렉산드로스 2세가 에페이로스 왕국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 재위 초기엔 일리리아 통치자 미틸로스와 전쟁을 벌였다. 한번은 부하들에게 일리리아인의 의복을 입히고 자기 영토를 약탈하게 했다. 일리리아인들은 이들이 자기들과 한 패라고 여기고 방심했다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이후 미틸로스와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기원전 260년 안티고노스 2세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스파르타, 아테네와의 전쟁으로 번주한 사이, 그는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 여러 요새를 공략하고 레프카디아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 2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가 군대를 일으켜 데르데아에서 에페이로스군을 격파했다. 그 후 마케도니아군이 에페이로스로 쳐들어오자, 그는 아르카나니아로 피신했다가 마케도니아군이 돌아간 뒤 에페이로스를 탈환했다. 이후 아이톨리아 동맹과 아르카니아의 일부 영토를 나눠가지는 협정을 맺었다.

기원전 242년, 알렉산드로스 2세가 사망했다. 그에겐 두 아들 피로스 2세, 프톨레마이오스가 있었으나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아내 올림피아스 2세가 섭정 여군(女君)으로서 나라를 통치했다. 기원전 240년, 그동안 마케도니아 왕국의 부추김으로 서로 싸우던 아이톨리아 동맹아카이아 동맹이 평화협약을 맺었다. 두 동맹은 곧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 왕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는 두 동맹과 전면전을 벌이기 앞서 에페이로스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싶었다. 그녀 역시 불안정한 왕권을 다지려면 평화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그녀는 알렉산드로스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프티아를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시집보냈다. 이리하여 마케도니아와 에페이로스 왕국은 그동안의 갈등을 종식하고 결혼 동맹을 맺었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마케도니아와 결혼 동맹을 맺으면서 왕권을 굳건히 한 그녀는 두 아들 피로스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성년이 되었을 때에 통치에서 물러났다.[4]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234년에 사망했고, 피로스 2세 역시 기원전 234년 이전 또는 직후에 사망했다. 그녀는 두 아들의 잇따른 죽음에 슬퍼하다가 사망했고, 왕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 피로스 3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피로스 3세 역시 기원전 234년 암브라키아에서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했다.

피로스 2세의 딸 데이다미아는 군대를 일으켜 피로스 3세가 사망한 암브라키아를 맹렬히 공격했다. 주민들이 평화를 간청하자, 그녀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걸 인정하면 평화를 맺겠다고 밝혔다. 거래는 성립되었지만, 에페이로스인들은 이에 반감을 품었다. 기원전 233년, 음모가들은 그녀의 친척이자 경비병이던 네스토르에게 뇌물을 줘서 그녀를 죽이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목숨을 건졌고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도망쳤다. 신전에서 사람을 해치는 건 중대한 범죄였기에 다들 그녀를 해치길 꺼렸다. 그러나 음모가들은 이미 모친을 살해한 죄로 중벌이 예고되었던 밀로를 보내 그녀를 해치게 했다. 이리하여 에페이로스 왕국은 멸망했다.

2.6. 후일담: 에페이로스 연맹

기원전 231년, 에페이로스 일대의 여러 부족들은 서로 동등한 관계를 맺고 각 부족의 자치권을 일절 간섭하지 않지만, 신드리온(Synedrion)을 설립하고 대표들을 그곳에 배치하여 국방, 외교, 통화 관리 등을 감독하고, 유사시 하나로 뭉쳐서 대응하는 '에페이로스 연맹'을 조직했다. 연맹의 행정 구역은 에페이로스 일대에서 가장 명망높은 신탁소가 있던 도도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에페이로스는 강력한 외세의 위협에 직면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이 남쪽에 군림했고, 북쪽에서는 일리리아인들이 공략할 기회를 노렸으며, 동쪽에서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세력 확장을 꾀했다. 여기에 더해, 서쪽에서는 로마 공화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확장되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톨리아 동맹과 연합을 맺고 마케도니아 왕국을 견제하고, 일리리아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기원전 229년 일리리아의 테우타가 대규모 침략을 자행하여 에페이로스 일대를 황폐화시키는 바람에 일리리아에 공물을 바치고 봉신이 되었다.

이후 테우타의 해적 행위에 분노한 로마 공화국이 일리리아로 쳐들어가면서, 일리리아 세력은 위축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 역시 아이톨리아 동맹, 셀레우코스 제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트라키아 등과 세력 경쟁을 벌이느라 에페이로스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했기에, 에페이로스 연맹은 수십년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과 마케도니아 왕국 간의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초기에는 로마를 지원하는 듯했다가 나중에 마케도니아 편을 들어서 로마 공화국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결국 기원전 168년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피드나 전투에서 꺾어버린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장군이 기원전 167년 에페이로스로 쳐들어와 70개의 도시를 파괴하고 15만 명에 달하는 에페이로스 인들을 로마와 남부 이탈리아에 노예로 끌고 갔다. 이리하여 에페이로스 연맹은 멸망했고 에페이로스 지방은 로마 공화국의 속주가 되었다.

3.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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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메토스 타르히파스 알케타스 1세 네오프톨레모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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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바스 알렉산드로스 1세 아이아키데스 네오프톨레모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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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아키데스 알케타스 2세 피로스 1세 네오프톨레모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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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스 1세 알렉산드로스 2세 올림피아스 2세 피로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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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피로스 3세 데이다미아 - }}}}}}}}}

4. 관련 매체




[1] 그래서인지 역대 국왕들 이름을 보면 아킬레우스와 관련된 이름이 많다. 아이아키데스('아이아코스의 자손', 아이아코스는 아킬레우스의 조부) 네오프톨레모스(아킬레우스의 아들의 이름), 피로스(네오프톨레모스의 다른 이름), 데이다미아(네오프톨레모스의 생모의 이름)[2] 에페이로스에 위치한 판도시아는 아케론 강 북쪽에 위치해 있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처음 도도나의 신탁을 받았을 때, 신탁이 가리키는 강이 그곳이라고 여겼다.[3] 피로스의 누이 데이다미아와 결혼했다.[4] 기록이 미비해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