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0:24:55

피로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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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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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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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스 1세
Πύρρος Α΄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yrrhus.jpg
생몰년도 기원전 319년 ~ 기원전 272년
출생지 그리스 에페이로스
사망지 그리스 아르고스
지위 에페이로스
국가 에페이로스 왕국
가족 알케타스 1세(증조부)
아리바스(조부)
네오프톨레모스 1세(종조)
아이아키데스(아버지)
알렉산드로스 1세 에페이로스(삼촌)
올림피아스(당고모)
네오프톨레모스 2세(사촌)
알렉산드로스 3세(재종형제)
필리포스(안티고네의 장인)
안티고네(1번째 배우자)
올림피아스 2세(장녀)
프톨레마이오스(장남)
아가토클레스(라나사의 장인)
라나사(2번째 배우자)
알렉산드로스 2세(차남)
바르딜리스 2세(비르케나의 장인)
비르케나(3번째 배우자)
헬레누스(삼남)
참전 피로스 전쟁
에페이로스의 왕
재위 기원전 307년 ~ 기원전 302년
전임 알케타스 2세
후임 네오프톨레모스 2세
에페이로스의 왕
재위 기원전 297년 ~ 기원전 272년
전임 네오프톨레모스 2세
후임 알렉산드로스 2세
마케도니아의 왕
재위 기원전 274년 ~ 기원전 272년
전임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후임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시라쿠사의 참주
재위 기원전 278년 ~ 기원전 276년
전임 티니온
소시트라토스
후임 히에로 2세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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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아키다이(Aeacidae) 왕조에 속하며, 발칸반도 서쪽 에페이로스 왕국의 11대, 13대 왕이자 시라쿠사 제15대 참주이며 피로스의 승리라는 용어로도 유명한 인물.

아이아키데스의 아들[1][2]마케도니아 왕국으로부터 에페이로스 왕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진력했으며, 마케도니아 왕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전쟁을 벌여 마케도니아와 북부 테살리아를 빼앗았으나 리시마코스에게 격퇴당했고 이후 벌어지는 피로스 전쟁에서 여러 차례 로마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전력의 한계로 이탈리아에서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채 퇴각했고, 아르고스 내전에 개입하다가 전사하였다.

2. 생애

에페이로스 왕국 제7, 9대 군주 아이아키데스와 테살리아 장군 메논[3]의 딸 프티아 사이에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데이다미아와 트로이아스가 있었다. 기원전 317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카산드로스올림피아스를 돕던 아이아키데스를 몰아낸 뒤, 이이아키데스의 추종자들은 유아였던 그를 데리고 에페이로스를 탈출한 뒤 일리리아의 왕 글라우키아스에게 보호를 간청했다. 글라우키아스는 처음에는 카산드로스와 갈등이 생길 것을 우려해 주저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자신의 자녀와 함께 양육하기로 했다. 나중에 카산드로스가 피로스를 내주면 거액의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글라우키아스는 거절했다.

11살 또는 12살 때, 글라우키아스의 후원에 힘입어 에페이로스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17살 때 일리리아에서 사귀었던 소꿉친구 한 명이 초대한 결혼식에 참석하러 갔다가, 일리리아인들에게 의존하는 왕에게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사촌 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왕위에 앉히는 바람에 권력과 재산을 모두 잃고 당시 중동 최강의 권력자 안티고노스 1세와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4] 진영으로 망명했다. 기원전 301년 안티고노스 부자와 셀레우코스 1세리시마코스 연합군이 맞붙은 입소스 전투에 참여해 탁월한 용맹을 선보였으나 패배를 막지 못했고, 데메트리오스와 함께 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이후 데메트리오스가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동맹을 맺을 때, 인질로서 이집트에 보내졌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를 인질이 아니라 일국의 왕자로서 정중히 대해줬고, 그 역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총애를 받고자 노력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가 아내 베레니케 1세에게 약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 걸 보고 그녀의 호의와 지지를 얻으려 애썼다. 그 결과 기원전 299년 두 사람의 딸 안티고네와 결혼할 수 있었고, 안티고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름을 프톨레마이오스라고 지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로부터 막대한 자금과 병력을 지원받고 기원전 296년 에페이로스로 향하여 네오프톨레모스 2세와 대립했으나 네오프톨레모스 2세의 지지자들이 상당히 강력했기 때문에 쉽사리 굴복시키지 못하다가 두 왕이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로 합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사로나에서 연례 행사가 개최되었다. 왕과 신하들이 행사에 참여하여 선물을 교환할 때, 네오프톨레모스 2세의 지지자인 겔론이 피로스에게 쟁기질하는 소 한쌍을 선물로 줬다. 피로스의 종 미르틸로스가 피로스에게 이 소들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겔론은 이 기회를 틈타 미르틸로스에게 피로스를 암살하는 계획에 가담하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미르틸로스는 이 모든 계획을 피로스에게 보고했다. 피로스는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신뢰하는 부하 알렉시크라테스도 음모에 가담하는 척하게 했다. 한편, 네오프톨레모스 2세는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여동생 카드메이아의 집에서 동지들과 공공연히 음모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하녀 파이나레티가 벽에 등을 기대고 자는 척하면서 모든 것을 주의깊게 들었다. 다음날, 그녀는 비밀리에 피로스의 아내 안티고네를 찾아가 모든 걸 밝혔다. 안티고네는 희생제가 치러지는 날 네오프톨레모스 2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 뒤 극비리에 숨겨둔 암살자들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했다. 이후 알렉시크라테스가 피로스에게 보고한 명단에 적힌 가담자 전원이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피로스는 에페이로스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되었다.

이 무렵, 마케도니아 왕국은 카산드로스 사후 두 아들 알렉산드로스 5세안티파트로스 1세가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알렉산드로스 5세는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아테네,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라서 당장 개입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는 알렉산드로스 5세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 대신, 마케도니아의 팀파이아와 파라아이아 일대와 마케도니아의 속국인 암브라키아, 아카니아, 암필로키아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알렉산드로스 5세가 승낙하자, 그는 즉시 군대를 보내 해당 지역을 병합하고 방비를 굳건히 하게 했으며, 왕국의 수도 파사로나를 암브라키아로 옮겼다. 이후 안티파트로스 1세를 공격하여 그가 소유하고 있던 나머지 땅을 빼앗아 알렉산드로스 5세에게 넘겼다.

그러나 트라키아의 통치자 리시마코스가 개입했다. 그는 피로스를 후원하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막대한 자금을 보내며 피로스의 원정을 중단하도록 권고하라고 부탁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에 동의하여 피로스에게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권고했다. 자신을 후원해주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마케도니아에서 병력을 철수시켰다. 뒤이어 아테네,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마무리하고 마케도니아에 진입한 데메트리오스 1세는 안티파트로스 1세를 완전히 몰아내고 마케도니아를 장악했다. 이후 자신을 내쫓을 궁리를 하던 알렉산드로스 5세를 연회에 초청한 뒤 암살하고 마케도니아의 군주로 등극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피로스의 누이 데이다미아와 결혼했지만, 이 무렵엔 그녀가 죽었기에 피로스와의 관계는 끊어졌다. 게다가 피로스가 가져간 마케도니아 영역을 되찾고 싶어했기 때문에, 양자는 곧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데메트리오스가 에페이로스로 진군하자, 그 역시 마케도니아로 진격했다. 그런데 길이 엇갈리는 바람에 서로 마주치지 못한 채 상대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데메트리오스가 에페이로스를 약탈하는 사이, 피로스는 마케도니아에서 데메트리오스의 부관 판다이코스와 맞붙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판다이코스가 결투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에 응했고, 격투 끝에 판다이코스를 거의 압도했지만 판다이코스의 부하들이 지휘관을 구조해 후방으로 이송시키는 바람에 죽이지는 못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에페이로스군은 마케도니아군 5,000명을 생포하고 다수를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장병들은 그에게 "독수리"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지어주며 경의를 표했다. 데메트리오스 1세는 판다이코스의 패전 소식을 듣고 급히 마케도니아로 철수했고, 피로스 역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데메트리오스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피로스는 마케도니아를 침공해 각지를 약탈하다가 에데사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인들이 거센 저항을 하는 바람에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철수했다. 한편, 그는 첫번째 아내 안티고네가 사망하자 시라쿠사의 참주 아가토클레스의 딸 라나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라나사는 야만인 소굴로 여긴 일리리아와 트라키아에서 온 다른 아내들이 왕의 총애를 받고 자신은 그러지 못한다는 것에 반감을 품고, 에페이로스를 떠나 아버지가 피로스에게 지참금으로 제공했던 코르기라(코르푸)로 이동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 1세와 결혼하고 섬을 그에게 넘겼다. 피로스에게는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기원전 288년, 데메트리오스는 아버지 안티고노스 1세가 한때 통치했던 아시아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500척에 달하는 거대한 함대를 건설하고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규합했다. 셀레우코스 1세, 프톨레마이오스 1세, 리시마코스가 이에 맞서 동맹을 맺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아시아로 떠나는 사이에 피로스가 자기 땅을 공격할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피로스에게 사절을 보내 자기 편을 들던가 최소한 중립을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은 에페이로스에 사절을 잇따라 보내 피로스를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는 장고 끝에 데메트리오스를 공격하여 마케도니아로 진출하고 아내와 코르기라를 잃은 수치를 갚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왕들은 데메트리오스가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공세를 개시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대규모 함대를 파견해 그리스 해역으로 항해하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선동했고,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에 전진 기지를 세우고 북마케도니아를 침공했다. 피로스는 데메트리오스가 리시마코스를 상대하기 위해 북상한 틈을 타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 여러 도시를 공략하고 많은 영토를 자신의 영토에 합병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노련한 장군인 리시마코스보다는 피로스를 상대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군대가 에페이로스군 진영 근처에 이르렀을 때, 병사 대부분이 피로스에게 귀순해버렸다. 결국 데메트리오스는 변장한 채 테살리아 남부로 도주했다.

데메트리오스를 쫓아낸 뒤, 리시마코스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절반씩 가지고 공동 왕이 되기로 했다. 피로스는 아테네로 가서 아크로폴리스에서 제물을 바쳤고, 테살리아에서 데메트리오스의 지배를 받던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했다. 그러던 기원전 285년 데메트리오스가 아시아에서 셀레우코스 1세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리시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전역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피로스를 물리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처음에 피로스군 보급로를 차단하여 그들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 이후 피로스를 따르는 마케도니아인들에게 피로스는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마케도니아에 순종하며 살던 국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기 편을 들라고 유혹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민심이 급격히 리시마코스 쪽으로 쏠리자, 피로스는 어쩔 수 없이 에페이로스로 철군했고 리시마코스가 마케도니아 전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284년, 리시마코스는 에페이로스를 침략해 각지를 약탈하고 왕릉까지 파괴했다. 적의 군세가 워낙 강력했기에, 그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수도를 지키기만 했다. 이후 왕국을 재건하는 데 전념하던 그는 기원전 281년 리시마코스가 코루페디움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1세에게 패배하여 목숨을 잃고 셀레우코스 1세 역시 트라키아에 진출했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하면서 마케도니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타라스(오늘날 타란토)가 파견한 해군의 지원에 힘입어 코르기라 섬을 탈환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마케도니아 왕위를 차지하자,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막대한 후원을 받아왔기 때문에 마케도니아를 차마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던 기원전 280년, 타라스가 로마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피로스는 일전에 코르기라 섬을 공략할 때 타라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이 기회에 남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자신이 확보하고 군자금을 확보하여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 보태기로 마음먹고, 테살리아 출신의 웅변가이자 유능한 지휘관인 키네아스에게 3,000 병력을 맡겨 타라스로 보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왕과 군사 동맹을 맺고 5,000 보병과 4,000 기병, 코끼리 50마리를 지원받기로 했으며, 장남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에페이로스 통치를 맡겼다.

이후 보병 20,000명, 기병 3,000명, 궁수 2,000명, 투석병 500명, 코끼리 20마리, 수백 척의 함대를 타고 타라스로 떠났다. 이오니아 해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러운 악천후로 인해 흩어진 함대를 수습하느라 수일을 허비한 끝에, 그의 군대는 타라스에 집결했다. 그런데 타라스 시민들은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여흥을 즐기고 있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피로스는 행사, 대중목욕탕 사용 및 모든 여가 활동을 일절 금지하고 장정들을 징집해 강제 훈련시켰다. 타라스 시민들은 구원하러 왔다면서 점령군 행세하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많은 이가 도시를 떠났다.

피로스는 기원전 280년 헤라클레아 전투와 기원전 279년 아스쿨룸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막심한 손실을 입었고, 타라스 등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지원도 시원치 않았다. 피로스는 이러한 현실에 회의감을 느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스쿨룸 전투 후 부하들이 승리를 축하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로마인들을 상대로 한 번 더 이런 식으로 승리하면, 우리는 완전히 패망할 것이다!"

이렇듯 피로스 전쟁에서 별 재미를 못보고 있을 때, 두 소식이 도착했다. 하나는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기원전 279년 켈트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었다. 또 하나는 카르타고군에게 포위된 시라쿠사 참주 티니온소시트라토스의 구원 요청이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와 시칠리아 중 어느 쪽을 택할 지 고심한 끝에, 켈트족의 침략으로 황폐화되고 있는 마케도니아보다는 부유한 시칠리아를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는 편이 더 매력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타라스에 수비대를 남긴 뒤 시칠리아로 떠났다. 이에 타라스 시민들은 로마에 맞서 싸우게 하려고 고용했는데 느닷없이 시칠리아로 떠나버린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

타라스를 떠난 지 열흘 후, 그는 로크리에 도착한 뒤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그곳에 정착시켰다. 이후 현지에서 병력을 추가로 모집한 뒤 카타니아로 항해하여 병사들을 하선시킨 뒤 시라쿠사로 진격했고, 함대는 해안가에서 이들을 따라갔다. 시라쿠사를 한창 포위 공격하고 있던 카르타고군은 에페이로스군이 출현하자 즉시 퇴각했다. 이리하여 시라쿠사에 무혈 입성한 그는 도시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던 티니온과 소시트라토스를 화해시키고 티니온을 영토 방어 감독관, 소시트라토스를 용병대 수장으로 임명했다. 그 후 시라쿠사의 여러 도시에서 사절이 와서 그에게 귀순하며 지원을 약속하자, 그는 이들을 모두 친절하게 맞이하고 시칠리아 전체를 장악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먼저 카르타고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헤라클레아 시를 공략했다. 뒤이어 카르타고의 영역에 속해 있던 시칠리아 서부로 진격해 여러 도시를 순식간에 확보하고 여세를 몰아 에릭스를 포위했다. 에릭스 시는 난공불락으로 명성이 자자한 도시였지만, 피로스가 보병 30,000명, 기병 2,500명, 전함 200척을 동원해 장기간 포위 공격하고 몸소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전투를 벌이는 등 용맹을 떨친 끝에 함락시켰다. 그는 승리를 기념하여 제물을 바치고 경기를 개최했다. 그는 시칠리아의 현지 부족으로 그리스인들을 상대로 숱한 습격과 약탈을 일삼던 마메르타이인들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는 시칠리아에서의 성공 덕분에 "시칠리아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시라쿠사를 수도로 삼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시칠리아를 관리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카르타고는 평화 협상을 하려 했지만, 이미 시칠리아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던 그는 시칠리아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답했다. 심지어, 그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아프리카 원정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시칠리아의 도시국가들에게 막대한 공물과 병력을 바치라고 명령했다. 이에 시라쿠사 참주 티니온과 소시트라토스가 반발하자, 그는 티니온을 죽이고 소시트라토스를 쫓아냈다. 이에 분노한 시칠리아 도시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카르타고인과 마메르타이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카르타고 함대는 피로스군의 해상보급을 끊어버렸다. 이로 인해 곤경에 처했던 그는 마침 타라스가 로마의 공세로 위험에 빠졌다며 구원요청을 하자 즉시 시칠리아를 떠나 타라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함대가 도중에 습격하여 막대한 타격을 입히는 바람에, 타라스에 도착한 병력은 보병 2만과 기병 3천에 불과했다.

기원전 275년, 피로스는 베네벤툼에서 로마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그는 두 집정관을 상대로 동시에 전투를 치르는 건 승산이 없다고 보고, 베네벤툼에 주둔한 마니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의 로마군을 기습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습격대가 야간에 숲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대혼란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소음 때문에 적의 움직임을 눈치챈 로마군의 역습으로 습격대 대부분이 섬멸되고 코끼리 절반을 상실했다. 다음날, 로마군은 피로스군의 본영을 공격했다. 피로스는 이들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남은 코끼리들이 불타는 화살에 겁을 먹고 날뛰는 바람에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가지 못하자 전투를 중단하고 철수했다. 이 패배로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그는 보병 8천과 기병 500명 밖에 안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6년간의 전쟁에서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하고 막대한 전력 손실만 입은 그는 기원전 274년 용병대의 급료를 지급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를 침공했다. 그는 아우스 강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를 격파했고, 안티고노스는 신분을 감춘 채 가까스로 탈출했다. 피로스는 여세를 몰아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장악하고 왕을 칭했고,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 동부 해안 도시들만 차지하였다. 그러나 피로스는 군자금 마련을 명목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옛 수도 베르기나의 왕실 묘지를 도굴하여 금을 찾으려 드는 바람에 민심을 잃었고, 해안 도시에 내몰린 안티고노스를 왕국을 잃고도 여전히 보라색 망토를 착용하다니 참으로 뻔뻔하다고 비웃으면서도 그대로 내버려뒀다. 그 덕분에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안티고노스는 피로스에게 반감을 품은 마케도니아인들을 끌어모아 군대를 재건했다.

기원전 272년, 스파르타에서 추방당한 클레오니모스 왕이 피로스에게 자신을 복위시켜주면 그의 동맹이 되겠다고 제안했다. 피로스는 이에 혹하여 2만 5천 보병대와 2천 기병대, 그리고 24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건너가 아르카디아메갈로폴리스를 점령하고 스파르타를 위협했다. 메갈로폴리스에서 스파르타 사절단을 만난 그는 자신은 스파르타를 칠 생각이 없으며 그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혼란을 수습하고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싶어한다고 밝혔다. 스파르타인들은 그 말을 믿고 방심했지만, 피로스는 극비리에 스파르타로 쳐들어갔다. 그가 스파르타 시에 당도했을 때, 스파르타 왕 아레오스 1세와 장병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도시를 공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후속 병사들이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느라 시간을 지체한 사이, 시민들은 민병대를 결성하고 깊은 도랑을 파고 방어시설을 세웠다.

해가 떠오를 무렵 전 병력이 집결하자, 피로스는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했고, 아레오스의 어린 아들인 아크로타토스가 이끄는 분견대가 적 후방에서 출현해 피로스군을 급습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히고 도시로 귀환했다. 다음날, 피로스는 시신을 비롯한 다양한 재료로 도랑을 메우고 도시에 재진입하려 했다. 그러나 수비대의 결사적인 분전으로 도시 진입에 실패했고, 피로스 본인은 말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쓰러지는 바람에 낙마하여 경상을 입었다. 이리하여 도시 공략이 또 실패하자, 그는 평화 협상을 하여 조건부 항복을 받아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스파르타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에 안티고노스가 마케도니아의 일부 영역을 탈환한 뒤,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모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레오스 1세가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크레타 섬에서 귀환하여 도시에 입성하면서, 스파르타를 공략하는 건 더욱 힘들어졌다.

피로스는 스파르타를 향한 세번째 공세를 가해봤지만 역시나 실패하자 라코니아로 철수하여 약탈을 자행하면서 겨울을 그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때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스파르타 다음으로 강력한 도시인 아르고스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아르고스에서는 아리스티포스와 아리스테아스가 도시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는데, 아리스티포스는 안티고노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에 아리스테아스는 피로스와 손잡고 아리스티포스를 몰아내기로 했다. 피로스는 아르고스를 자기 편으로 삼으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패권 확보에 도움이 되리라 확신하고, 전군을 이끌고 아르고스로 향했다. 그러나 스파르타 왕 아레오스가 그들의 진군로 주변에 병력을 매복했다가 급습했고, 피로스의 장남 프톨레마이오스가 매복군과 싸우던 중 크레타의 압테라 출신인 오로이소스가 내지른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피로스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장 에우알코스를 처단했다. 전투가 끝난 뒤, 그는 아들을 위한 장례식을 벌인 뒤 아르고스를 향한 행군을 계속했다.

피로스가 아르고스 인근에 이르자, 아르스티포스는 안티고노스 2세에게 구원을 청했고 스파르타 왕 아레오스도 아르고스에 도착했다. 이리하여 양군이 아르고스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아르고스에서는 자신들의 땅이 폐허가 될 것을 우려해 다른 곳에서 전투하라고 요구했고, 안티고노스 2세는 요구에 따라 다른 곳으로 물러났다. 피로스 역시 요구에 응했지만, 어둠을 틈타 장병들을 친히 이끌고 아르고스를 기습했다. 그러나 성문이 작아 코끼리들이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고 아르고스인들이 저항하면서 안티고노스 2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안티고노스 2세와 아레오스 1세가 즉시 아르고스로 병력을 보냈고, 에페이로스군은 수적으로 우월한 적의 협공을 받았다. 날이 밝으면서 적의 규모를 눈앞에서 확인한 피로스는 철수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성문이 너무 좁아서 병사들이 탈출하기 힘들 게 자명했다. 이에 후방에 있던 아들 헬레누스에게 전령을 보내 성벽의 일부를 허물어서 퇴로를 확보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전령은 명령을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했고, 헬레누스는 아버지가 추가 병력을 보내라는 걸로 오해하고 남아있는 코끼리와 부하들을 이끌고 도시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에페이로스군 절반은 도시를 벗어나려 하고, 나머지 절반은 도시로 진입하려 하면서 대혼란에 휩싸였다. 여기에 코끼리들이 적의 화살 세례에 격분해 미쳐 날뛰면서,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장병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다가 서로 짓밟아 죽거나 아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을 목도한 피로스는 투구에서 휘장을 제거하고 말을 타고 추격하는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다가 한 병사가 그를 향해 창을 던졌는데, 가슴 부위의 갑옷을 꿰뚫었지만 미미한 상처만 입혔다. 그는 자신을 공격한 군인 쪽으로 다가가 단칼에 쳐죽이려 했다.

이때 그 군인의 어머니는 건물 옥상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중 아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기와를 들어 두 손으로 피로스를 향해 집어던졌다. 기와는 피로스의 목을 강타했고, 목 밑의 척추뼈가 부러졌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안티고노스 휘하에 있던 조피로스는 바닥에 쓰러진 자의 정체를 눈치채고, 피로스가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을 때 어느 집으로 끌고 간 뒤 수급을 베었다. 조피로스는 안티고노스 2세의 아들 알키오네오스에게 바쳤고, 알키오네오스는 의기양양하게 아버지의 발 앞에 수급을 바쳤다. 그러나 안티고노스 2세는 적이지만 당대의 영웅이었던 피로스를 잔혹하게 대우한 것에 분노하여 "이 무례하고 야만스러운 놈아!"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아들을 지팡이로 구타하고 쫓아냈다. 그 후 할아버지 안티고노스 1세와 아버지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의 불행한 최후를 회고하며 흐느껴 울었다.

안티고노스 2세는 피로스의 유해를 수습한 뒤 화장하라고 명령했다. 알키오네오스는 항복한 장병들을 살펴보던 중 피로스의 아들 헬레누스가 허름한 옷으로 변장한 것을 발견했다. 그는 헬레누스를 친절하게 대접한 후 아버지에게 데려갔다. 안티고노스 2세는 이번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들아, 네가 지금 한 일은 그 전에 한 어떤 것보다 낫구나. 그렇지만 우리가 승리자가 된 지금 우리에게 불명예스러운 이 옷을 입게 놔두는 이유는 무엇이냐?"

안티고노스는 곧 귀한 의복을 가져와서 헬레누스에게 갈아입히게 한 뒤, 영예로운 손님으로 대접하고 피로스의 유해와 함께 에페이로스로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에페이로스 왕국 최고의 군주로서 명성을 떨쳤던 왕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사후 에페이로스 왕위는 차남 알렉산드로스 2세가 맡았다.

3. 평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두 번째로 위대한 장군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 바르카: 에페이로스의 피로스요. 그는 진영을 잘 짜는 방법을 처음 생각해냈소. 지형에 따라 군대를 잘 활용하기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소. 그는 사람들의 지원을 잘 얻어냈고 그래서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에도 이탈리아 사람들의 지원을 받았지. 그들이 그 땅에서 잘 살아왔는데도.[5]
"피로스는 주사위를 던질 줄은 알지만 그 주사위를 활용하지는 못하는 것 같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6][7]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로 가장 뛰어난 전술가이자 야전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얻을 만큼 출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 예로 한니발은 그를 역사상 알렉산드로스 대왕 다음으로 뛰어난 명장이라고 평했으며 한니발 본인을 3위로 올렸다. 이 일화가 워낙 유명한지라 디아도코이 전쟁이나 피로스 1세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도 '2위'인 피로스 1세에 대해 알아보게 되기 마련이며, 사실상 한니발의 언급으로 인해 현대인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비해 실제적으로 당대의 판도를 바꿨다거나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아니었으며, 이는 '같은 순위권에 있는' 거물들인 알렉산드로스 대왕한니발 바르카[8]와 분명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과대평가 의혹이 제기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신출귀몰한 전략가의 이미지를 가진 제갈량이 실제로 수차례의 북벌로도 당대의 판도에 거의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 것처럼, 피로스 1세 역시 에페이로스 왕국의 패권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소국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9][10]

물론 피로스의 명성이 후대에 과장되었을뿐 당대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동시기의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가 그랬듯, 그는 당대의 명사였고 위협적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와 마찬가지로, 패배 전적이 상당히 많으며 부산하게 움직인 것에 비해 뭔가 실속이 없다. 리시마코스와 합세하여 마케도니아를 탈취하였으나 리시마코스에 의해 간단히 축출되었고, 스파르타 원정에서는 숫자로 밀어붙였으면서도 패배했고, 최종적으로는 아르고스 내전에 휘말려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명성에 비해 실제가 빈약하다 보니, 일각에서는 "초기 로마를 밀어붙였던 커리어로 인해 명성이 과대포장된 것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작 피로스 전쟁이 대중적으로는 '그 유명하다는 피로스의 패배'로 알려진 것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

이 때문에, 실제로 그의 군사적 성과보다는 그가 남긴 전술법이라든지 병법서로 인해 그가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당대 명사들의 영웅담을 기록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전술의 귀재라고 하며 본인이 저술한 전기나 전술서 등도 당대와 후대 전술가들의 필독서가 되었다고 알려졌지만, 불행히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본인이 적은 전기나 전술서 등이 없다. 즉, 소실된 기록들이 많다.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처럼, 뛰어난 명성에도 불구하고 저서가 거의 남지 않아 그 진상에 대해 자세히 알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11]

다만 상술하였듯이 피로스가 당대 유명한 명장으로 불린 것 자체는 사실이며, 이는 로마와의 전쟁 이전에 디아도코이 전쟁에서의 활약 때문이었다. 애당초 피로스가 타렌툼에 초청된 것도 그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명성높은 장수라는 이유였다. 피로스가 그리스권에서의 실제적인 성과가 엇갈렸음에도 그가 명장으로 널리 인정받았던 것은, 그만큼 그가 보인 단점을 상쇄할 만큼 뛰어난 용맹과 전술을 선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만한 자료가 적고, 그나마 비교적 소상하게 남아있는 건 당시의 '야만인 세력'이었던 로마와의 전쟁 기록뿐이라는 사실은 얄궂은 일이다.

정리하자면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과 같이 역대급 지휘관인지에 대해선 기록의 부족과 실제 성과의 빈약함으로 인해 후대의 과장이라는 의혹을 가진 사람도 있으나, 적어도 그가 당대 손꼽히는 명장이라 불린 것 자체는 사실인 셈이다.

한니발은 그가 최초로 숙영지의 중요성을 자각한 장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적혀 있는 부분들에도 보급 부족 때문에 고생은 했어도 숙영지 자체로 문제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시 말해, 전혀 모르는 타지에 원정을 가도 단 한 번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 알렉산드로스조차 숙영문제와 타지를 원정갔을 때 고생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물론 알렉산드로스가 간 곳은 당시 그리스권 국가들이 거의 생면부지나 다름 없는 곳이니 차이가 있긴 있다.

그러나 정치적 안목이나 전략적 식견은 좀 모자라서 적수[12]를 너무 많이 만들었고,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원정에서는 그나마 있던 동맹들도 배반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3] 결국 여러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목표였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지배는 이루지 못하였으며, 에페이로스 왕국의 중흥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나마 이런 애매한 전과 덕분(?)인지, 에페이로스는 훗날 로마의 그리스 정복 때에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온전히 속주로 편입될 수 있었다. 무려 대놓고 로마를 침공해서 큰 피해를 입혔는데도 말이다. 아무리 피로스 전쟁이 오래전 일이라지만 카르타고와 코린트, 마케도니아가 당한 꼴에 비하면 정말 대접이 좋은 편이다. 한니발이 '너무 잘 싸워서' 로마가 카르타고를 아예 멸망시키는 원인을 제공한 걸 본다면 에페이로스 입장에선 나름대로 해피엔딩일지 모른다.

4. 여담

  • 당대에는 흔치 않은 용맹과 과감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실제 그의 행보는 지장보단 몸소 앞에 나가 적의 사기를 꺾는 강력한 무장의 이미지가 강해서, 왕의 신분임에도 적장들과 일기토를 벌여 쓰러뜨렸고 맨 선두에서 돌격을 행하였다. 그가 어떤 면에서 전술적으로 뛰어났는지는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 로마와 전쟁을 할 당시 에피소드로 다음의 내용이 있다. 당시 피로스의 주치의는 불만을 품고 피로스를 배반해서[14], 포로 협상을 위해서 온 집정관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Gaius Fabricius Luscinus)[15]에게 피로스의 독살을 제안하였다. 그러자 가이우스는 피로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피로스는 가이우스를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측근 자리를 주겠다며 자기 편으로 회유하려 하였지만, 가이우스는 그쪽에 가면 당신의 측근들이 당신을 버리고 나를 왕으로 옹립할거요라고 응수하였다(...). 이 대담함과 고결함에 두손 다든 피로스는 로마군 포로 600여 명을 석방해 주었다. 덧붙여 로마는 로마대로 질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똑같이 포로들을 풀어주었다.
  • 이 로마군 포로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위의 독살 기도 사건이 벌어지기 전 피로스와 로마군은 전쟁을 중단하는 협상을 시도했다. 이때 상호 협의에 따라 잠시 로마군 포로를 로마 측에 귀환시켰다. 만약 협상이 결렬될 경우 로마 측에서는 이 포로들을 다시 피로스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 포로들은 로마 진영에 돌아와 가족과 친지들을 만났고, 결국 협상이 결렬[16][17]되자 한 명도 빠짐없이 자발적으로 피로스 진영으로 돌아갔다.[18]
  • 대 플리니우스박물지에 따르면, 피로스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는 신기한 힘이 깃들어 있어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몇가지 예를 들면, 그가 엄지발가락으로 우울증 환자를 쓰다듬으면 즉시 환자가 완쾌했으며(!), 피로스가 죽었을 때, 그 시신을 화장했는데 오른쪽 엄지발가락만은 무슨 수를 써서도 태울 수 없어 작은 함에 담겨 한 신전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 유명한 일화로는 에피이로스 왕국의 키네아스가 로마와 전쟁하러 가는 피로스에게 로마를 정복하면 좋은 것과 정복한 다음 등을 묻고 피로스는 자신의 원대한 원정 계획,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에 비견되는 서방원정 이야기를 했다가 서방과 그리스 권 국가들 다 정복하고 난 다음에 편안히 지낼거라고 하자, 키네아스가 지금 해도 상관없을 거라고 이야기 했다. 피로스도 이 대답에 감탄했지만 그래도 가기로 했다고 한다.[19][20]
    키네아스는 이탈리아 원정 준비로 바쁜 피로스를 찾아왔다.

    "전하, 로마는 대단히 호전적인 나라라고 합니다. 만약 그런 나라를 물리칠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 아닌가. 로마를 정복하게 된다면 그리스인이건, 다른 야만인들이건 우리에게 저항할 수 있는 나라는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탈리아는 우리의 차지가 되는 것이지."

    피로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키네아스는 잠시 후 다시 물었다. "그럼 이탈리아를 정복하신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키네아스가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이탈리아 옆에는 아주 부유한 시칠리아가 있지 않은가? 그곳은 지금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으니 손에 넣기에 수월하지 않겠는가?"

    "그렇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전체를 지배하시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편안히 쉬면서 날마다 즐거운 이야기나 나누지 뭐......"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온 키네아스는 말했다.

    "전하는 지금도 편안히 쉬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습니다. 아무런 노력과 고통 그리고 위험 없이도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하시려고 합니까?"
  • 윗니 전체가 하나의 뼈였고 틈 대신 줄이 그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모양이 사람들을 무섭게 했다고.

[1] 계보를 올라가면 네오프톨레모스안드로마케의 아들 피엘로스가 조상이라고 한다. 즉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후손인 셈.[2] 참고로 피로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6촌 동생뻘 되는 먼 친척 관계다. 알렉산더 대왕의 어머니 올림피아스가 에페이로스 왕족 출신. 이쪽도 마찬가지로 아킬레우스의 후손임을 주장했다.[3] 라미아 전쟁에서 테살리아 기병대를 이끈 장군이다.그는 레온나토스를 전사시키고 기병에 한해 마케도니아군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으나 폴리페르콘에게 패해 전사한다.[4] 피로스의 누이 데이다미아와 결혼했다.[5] 참고로 첫 번째는 알렉산드로스 3세, 세번째로는 한니발 자신을 골랐으나, 실은 포에니 전쟁을 이겼다면 앞의 둘보다 더 위대할 수 있었던 자신을 꺾은 스키피오야말로 위대한 장수라는 찬사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 시점에는 피로스가 이런 명장들과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의 위상이 있는 명장으로 평가받았었다고 볼 수 있다.[6] 다만, 이런 전략적 근시안을 지적한 것과 별개로 피로스를 동시대의 가장 훌륭한 장군으로 인정하였다. 피로스 자신은 의외로 폴리페르콘을 가장 뛰어난 장군으로 꼽았다.[7] 재밌게도 폴리페르콘은 피로스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파르살루스의 메논을 격파하고 전사시킨 장군이다.[8] 전쟁에서 패배했으나 20여년간 아슬아슬한 교착 상태를 만들며 실제로 로마를 멸망 위기로 빠뜨렸으니, 당대의 주역이라 할 만하다.[9]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대규모 지원을 받고도 로마와의 전쟁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니, 본인의 능력에 비해 세력이 작아 실패했다는 것도 어쩐지 변명스러운 부분이 있다. 다만 본토에서 싸우면서 계속적으로 병력을 충원받은 로마와 달리, 피로스 1세에 대한 지원은 일시적이었고 타렌툼 현지에서의 호응도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참작의 여지는 있다.[10] 그러나 전과로 치면 피로스가 제갈량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로마는 최소한 피로스와의 전투 자체에선 이긴 적이 없으며 피해도 로마가 더 컸다. 단지 동원력이 언제나 더 우세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제갈량의 전과는 미미한 수준이며, 차라리 강유나 제갈각이 교환비 자체는 더욱 압도한다. 물론 실존인물 제갈량은 훌륭한 전략가가 아닌 훌륭한 정치가/행정가였으므로 애초에 적합한 비교가 아니다. 정치/행정 측명에서 촉한을 바닥부터 다져놓은 명재상 제갈량이 소설적 캐릭터로 변하는 과정에서 "신출귀몰한 전략가"로 각색되어서 오인되는 부분.[11] 실제 피로스의 전투 기록은 로마와의 전투 기록 외에는 그 진상이 소상하게 알려진 것이 적다. 그리스권에서의 피로스의 전투 기록은 대개 '승리하였다, 성을 점령하였다'는 식으로 전술의 묘사보다는 승리한 것 자체와, 피로스의 용맹 부분만을 중심으로 적힌 것이 많다. 당장 피로스의 전쟁 중 하나인 시칠리아에서의 전투와 카르타고와의 전쟁조차 두리뭉실하게 적혀있어, 오늘날까지 그의 행적 및 전적을 파악하기 힘들게 하고 있다.[12] 로마, 카르타고,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시칠리아 섬의 도시들 등. 로마의 경우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다른 것들, 특히 시칠리아 섬의 경우는 빼도 박도 못한 피로스의 정치적 실책이 맞다.[13] 이런 면에서는 외교적으로 뛰어났던 안티고노스 고나타스와 대비된다.[14] 기록에 따라서는 피로스가 판 덫이라고도 한다.[15] 애꾸눈 가이우스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뇌물로 점철된 공화국 시절에도 청렴함으로 유명했다.[16] 처음부터 피로스가 제안했던 협상 내용이 로마에게 비교적 가혹한 편이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에 대한 불가침을 준수하고, 그 중간지대에 잇는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을 독립시킬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이는 로마에게 이탈리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뜻이었다.[17] 단,판본에 따라선 협상 내용이 다르다.로마에게 가혹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렇게까지 가혹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존재한다.[18] 돌아가지 않는다면 사형이라고 했다.[19] 이게 우둔한 선택만은 아닌 것이, 이때는 디아도코이 전쟁 시대였다. 편안히 쉬면서 즐거운 이야기나 하고 있다가는 왕국을 빼앗길 위험도 농후했다. 원정을 실패해서 문제지[20] 이와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일화는 피로스 대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현대의 이름없는 하버드 MBA 출신 등을 주인공으로 해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플루타크 영웅전을 통해 널리 알려진 피로스 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