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14:46:44

디온(시라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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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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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bfff><colcolor=black> 디온
Δίων
파일:디온1.jpg
생몰년도 기원전 408년 ~ 기원전 354년
출생지 시칠리아 시라쿠사
사망지 시칠리아 시라쿠사
지위 시라쿠사 참주
국가 시라쿠사
가족 히파리노스(아버지)
메가클레스(형제)
아리스토마체(누이)
아레테(아내)
시라쿠사의 참주
재위 기원전 357년 ~ 기원전 354년
전임 소 디오니시오스
후임 칼리포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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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쿠사 6대 참주.

2. 생애

기원전 408년 시라쿠사의 저명한 귀족이자 대 디오니시오스의 동지인 히파리노스의 아들이다. 형제로 메가클레스, 누이로 아리스토마체가 있었다. 히파리노스는 디온이 어렸을 때 사망했고, 대 디오니시오스가 그와 메가클레스, 아리스토마체를 양육했다. 이중 아리스토마체는 대 디오니시오스와 결혼하여 히파리노스, 니사이오스, 아레테를 낳았다. 그는 기원전 375년경 아레테와 결혼했다. 따라서 그는 대 디오니시오스와 이중으로 혈연 관계가 있었다. 대 디오니시오스는 그를 상당히 총애해 시라쿠사 재무부에게 디온이 원하는 금액을 언제든지 지불하라고 지시했다. 이 때문에 막대한 부를 거머쥘 수 있었고, 나중에 개인 수단으로 용병을 모집할 발판이 되었다.

대 디오니시오스는 당시 그리스인들에게는 보기드문 중혼을 했다. 그는 아리스토마체와의 혼인 관계 외에도 로크리 출신의 귀족 가문 출신인 도리스와 결혼하여 소 디오니시오스를 낳았다. 소 디오니시오스가 맏이였기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참주가 될 예정이었지만, 디온은 조카 히파리노스 또는 니사이오스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두 사람에게 상당한 지원을 했다. 한편, 그는 플라톤의 철학에 깊은 감명을 갖고 그와 친분을 맺었다.

기원전 367년 대 디오니시오스가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소 디오니시오스가 정무 경험이 없어서 통치를 맡길 수 없으니 히파리노스와 니사이오스를 참주로 지명하라고 설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마 후 대 디오니시오스가 사망하고 소 디오니시오스가 집권했지만, 정무 경험이 없기에 그에게 실권이 주어졌다. 그는 소 디오니시오스에게 플라톤을 고문으로 초빙하도록 설득해 승인을 받아냈고, 플라톤은 이 기회에 시라쿠사에서 자신의 국가 철학을 실현시키기로 마음먹고 기원전 366년 시라쿠사에 찾아왔다. 그러나 소 디오니시오스는 디온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걸 경계해 디온의 정적인 필라스토스를 궁정 관리로 발탁하여 디온을 견제하게 했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처음엔 플라톤의 언변에 감화되어 그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필라스토스가 플라톤이 디온과 손을 잡고 정변을 꾀한다고 주장하자, 소 디오니시오스는 차츰 디온과 플라톤을 의심했다. 이 당시,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전쟁 중이었다. 디온은 카르타고에 서신을 보내 평화 협상을 중재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편지는 도중에 디온의 반대 세력에게 발각되어 소 디오니시오스에게 넘겨겼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필리스토스의 조언에 따라 디온을 반역죄로 고발하고 시라쿠사에서 추방되어 그리스로 망명했다. 플라톤은 이후에도 훌륭한 철학자로서 시라쿠사에서 존중받았지만, 자신의 계획을 실현할 가능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기원전 365년 시라쿠사를 떠났다.

디온은 비록 추방당하긴 했지만 재산이 압류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스파르타에서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며, 아테네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들어갔다. 기원전 361년, 소 디오니시오스는 플라톤을 다시 초빙했다. 플라톤은 친구 디온이 용서받는 것을 돕고 싶었던 반면, 그는 플라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하고 싶어했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플라톤의 설득을 받아들여 디온을 시라쿠사로 복귀시켰지만, 디온이 플라톤의 제자들과 긴밀한 교류를 가지자 자신을 실각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해 디온의 소유물을 몰수했다. 플라톤은 기원전 360년경 궁정의 의심을 사자 시라쿠사를 떠났다. 또한 소 디오니시오스는 시라쿠사에 남아있던 디온의 아내이자 이복 누이인 아레테에게 디온과 이혼하고 부하인 티모크라테스와 결혼하도록 명령했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디온은 정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용병을 고용하고 아카데미아에서 자신의 계획을 지지하는 이들을 모집했다. 플라톤은 소 디오니시오스의 환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를 직접적으로 돕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디온의 계획에 참여하는 걸 용인했다. 당시 시라쿠사는 서부 지중해 세계에서 제일가는 군사 강국이었지만, 시라쿠사인들은 소 디오니시오스의 무능한 통치에 질려 있었다. 그는 이 점을 감안해 적은 병력으로도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정변을 성사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가 모집한 용병대 대부분은 펠로폰네소스인이었는데, 다수는 코린트인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357년, 디온은 자킨토스 섬에서 5척의 배에 약 800명의 병사를 싣고 출진했다. 소 함대는 12일 만에 시칠리아의 남동쪽 끝에 있는 파키노스에 도착했고, 다시 시칠리아 남서 해안의 카르타고가 통제하는 도시인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당도했다.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는 오랜 세월 적대 관계로 일관했지만, 카르타고인들은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카르타고 사령관 시날로스로부터 병참 지원을 제공받은 그는 시라쿠사로 향했다. 한편, 소 디오니시오스는 디온이 시라쿠사로 향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가 이탈리아 남부 해안을 따라 이동할 거라 예상하고 친히 함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로 향했다. 그래서 시라쿠사는 비어 있었고, 그는 이 틈에 시라쿠사로 진군해 주민들의 호응을 받아 무혈 입성했다. 다만 참주의 직속 용병들이 오르티가 섬에 위치한 요새에서 농성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소 디오니시오스는 오르티가로 이동했다. 양측은 평화 협상을 벌였으나 서로의 입장차가 너무 커서 합의에 실패했다. 이후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이 벌어진 끝에, 헤라클레이데스가 지휘하는 시라쿠사 해군이 필라스토스가 지휘하는 소 디오니소스 휘하 함대를 격파하고 필라스토스를 전사시키면서 전세가 디온 쪽으로 기울었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자신이 신변을 보장해준다면 시라쿠사를 떠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재산과 권력 기반 중 일부를 지키려는 그의 의도를 시라쿠사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었다. 소 디오니시오스는 보물을 실은 몇 척의 배를 타고 야음을 틈타 오르티가에서 탈출했고, 아들 아폴로크라테스가 지휘하는 일부 용병은 오르티가에 머물렀다.

디온은 이로써 시라쿠사의 통치자가 되었으나, 그가 시민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고 새로운 독재정을 세우려 한다는 의심이 도시 곳곳에 퍼졌다. 그는 오랫동안 디오니시오스 가문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기 때문에, 민주파 인사들은 그를 강하게 의심했다. 디온이 소 디오니시오스의 탈출을 용인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대 디오니시오스의 무덤 파괴를 허용하지 않은 것 역시 의심받았다. 반 디온 세력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디온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함대 사령관 헤라클레이데스를 찾아갔다. 헤라클레이데스는 디온의 지휘하에 있었으나, 이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디온의 정적으로 부상했다.

기원전 356년 여름, 민회는 헤라클레이데스의 당파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토지가 시민들에게 재분배되었고, 디온의 용병들에 대한 급료 지불을 중단하기로 했다. 또한 새로운 지휘관이 선출되었는데, 여기에는 디온이 빠지고 헤라클레이데스가 포함되었다. 이에 디온은 용병들과 함께 시라쿠사 시 영내에 속한 레온티노이로 이동했다. 레온티노이 시민들은 시라쿠사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그들을 후원하여 독립을 이루기로 하고,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얼마 후, 오르티가의 수비대 장군 닙시오스의 기습 공격으로 시라쿠사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헤라클레이데스의 위세가 꺾인 틈을 타, 디온은 대 디오니소스의 관할에 있었던 시칠리아 도시 국가들로부터 후원을 받은 뒤 시라쿠사로 진격했다.

반 디온 세력은 성문을 걸어잠그고 항전했지만 닙시오스가 또다시 습격을 감행해 도시에 불을 지르고 시민들을 살해하하는 걸 막지 못하는 바람에 지지를 잃어버렸다. 시민들은 이제 디온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그는 용병대와 도시에 입성한 뒤 많은 구역을 점령하고 황폐화시킨 닙시오스를 격파하여 오르티가 섬으로 도로 철수하게 했다. 그 후 총사령관으로 선임되었고, 헤라클레이데스는 함대 지휘권을 맡았다. 그러나 디온이 이전 소유자들에게 토지를 도로 되돌려주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한층 더 고조되었다.

기원전 355년, 오르티가 수비대는 디온과 헤라클레이데스의 연이은 공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로크리로 이동해 소 디오니시오스의 휘하에 들어갔고, 오르티가에 억류되어 있던 디온의 가족은 석방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정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먼저 민주파의 보루가 될 위험이 있는 함대를 해산하게 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신데레온(synhédrion)을 소집했다. 신데레온에는 시라쿠사인 외에도 시라쿠사의 모도시인 코린트인도 포함되었다. 당시 코린트는 과두정 체제였으니, 시라쿠사에 참주가 다시 등장하는 걸 용인할 가능성이 높았다.

디온은 반대 세력의 반발을 예상하고 헤라클레이데스를 신데레온에 참여시키려 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데스는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정부를 세웠다. 이리하여 양측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중, 헤라클레이데스가 디온의 추종자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이 사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디온의 지지도는 크게 줄어들었다. 민회에서 디온의 용병대에 급료를 더 이상 지급하지 않기로 결의하자, 그는 정적들로부터 재산을 몰수하고 지지자들에게 재산을 헌납하라고 요구하는 등 강압적인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시민들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한 데다, 그렇게 했는데도 급료 체불이 있었기 때문에 용병들마저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걸 주저했다.

디온은 아테네에 체류하던 시절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칼리포스와 친분을 맺었다. 칼리포스는 디온의 정변에 함께 해 그가 집권자가 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상황이 디온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디온을 제거하고 자기가 시라쿠사의 참주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354년, 칼리포스와 추종자들은 시라쿠사 시의 주요 거점을 점거하고 집에 있던 디온을 습격해 살해했다. 칼리포스는 자신의 행동을 "시라쿠사 시민들의 자유를 위해 독재자를 처단했다"라고 선전하고 시라쿠사의 새 집권자가 되었다. 디온의 누이 아리스토마케와 아내 아레테는 디온이 사망한 후 투옥되었다가 칼리포스가 나중에 처단된 후 석방되어 그리스로 보내졌으나 도중에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