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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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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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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Plato|Πλάτων
파일:external/textologia.net/plato-1.jpg
출생 기원전 428(또는 427)년 또는 424(또는 423)년 5월 7일 추정[1]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망 기원전 348(또는 347)년 (향년 75~81세)
고대 그리스 아테네
직업 철학자
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2.2. 방랑 생활과 시칠리아 섬2.3. 아카데미아학파 설립과 말년
3. 사상
3.1. 이데아3.2. 정치철학
3.2.1. 배경3.2.2. 사상
3.2.2.1. 이상국가의 모습3.2.2.2. 철인 정치
3.2.3. 기타
4. 대화편5. 어록6. 평가7. 기타8.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고대 그리스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카데메이아의 창설자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고전기 헬라스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플라톤의 연구 분야는 형이상학, 정치학, 윤리학, 인식론 등 서양 철학의 온갖 영역에 걸쳐있으며, 실상 플라톤 이후의 유럽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들"(화이트헤드)라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학자이다.[2] 또한 플라톤이 주장하고 직접 솔선수범한 금욕적이고 경건한 관상(觀想, θεωρία[3])적 삶의 태도는 그리스도교와 함께 이후 유럽인들의 인생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는 수많은 《대화편》(라틴어로 dialoghi[4])들과 약간의 편지들이 남아있다. 중고등학생 교육과정에서는 이데아론, 철인정치 등 몇몇 키워드를 통해 잠깐 소개되어 그의 위상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대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어느 학문의 입문 과정에서든 비조 격으로 거론되곤 하며, 그의 형이상학[5], 정치철학[6], 미학[7] 등과 그 영향력에 대해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깊게 배울 수 있게 된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플라톤의 원래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Ἀριστοκλῆς[8][A]이며 아테네 출신이다.[10] 어머니의 가계에 그 유명한 솔론이 있다. 플라톤은 외가로 해서 솔론의 6대손이 된다. 한편 솔론의 가계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플라톤은 종종 '포세이돈의 후손'이라 불렸다. 또한 당시 아테네의 소문에 따르면, 플라톤의 어머니는 아폴론에게서 잉태하여 플라톤을 낳았다고 한다.

아리스토클레스는 디오니시오스에서 글을 배웠고, 아르고스 출신 레슬링 선수 아리스톤에게 체육 교육을 받았다. 아리스토클레스는 체격이 좋은 탓에 아리스톤에게서 '넓다'는 의미를 지닌 "플라톤"이라는 이름도 새로 얻었다.[11][A] 그는 레슬링 경기에 참여하기도 했고,[13] 그림에 관심을 두기도 했으며, 서정시와 비극시를 썼다.

20세 때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 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비극 작품을 갖고 경연에 나서려던 차에 디오니소스 극장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을 듣고는 써 두었던 시를 불태워 버리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들어갔다. 소크라테스도 전날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그는 백조 새끼를 무릎 위에 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백조 새끼에게 갑자기 날개깃털이 돋더니 기쁜 듯 고운 소리를 높이 울고 나서 날아가 버리더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 날 플라톤을 소개받자, 그는 '이 친구가 바로 그 백조로군'하고 말했다고 한다.

플라톤도 젊은 시절에는 정치에 뛰어들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친척들 덕분에 정치권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게 되며,[14] 정권 싸움 과정에 자신의 외가 친척인 카르미데스와 크리티아스가 살해당하자 이런 생각은 굳어진다.[15] 아테네에 민주정이 들어서자 다시 한 번 정치에 욕심을 내지만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어이없는 이유로 고발당했고,[16] 재판에서 배심원들 투표에 의해 사형당하자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17]

2.2. 방랑 생활과 시칠리아 섬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후, 플라톤은 크라튈로스[18]와 헤르모게네스[19]의 철학에 전념했다. 그는 28세가 되자 다른 소크라테스 학파 사람들과 함께 메가라에 있는 에우클레이데스[20]에게 가서 은거했다. 그 다음에 그는 퀴레네에 있는 수학자 테오도로스에게 가기도 했고, 다시 이탈리아에 있는 피타고라스학파 사람인 필롤라오스에게 가기도 했다. 또 그곳을 떠나 이집트 사제들에게 갔다. 그리고 페르시아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들을 만나 보기로 결정했으나 그곳에 전쟁이 나는 바람에 포기하고 아테네로 돌아와 아카데메이아[21]에서 지내면서 철학 공부에 열중했다.

한편 플라톤은 시칠리아 섬을 뱃길로 세 차례 방문했다. 처음엔 그 섬과 에트나 화산의 분화구를 구경하기 위해 갔는데, 당시 그곳의 참주였던 대 디오니시오스를 만났고 그는 자신과 친교를 맺자고 플라톤에게 강요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참주제에 대하여 말하면서 "더 강한 자가 덕에 있어서도 뛰어나지 않는 한, 더 강한 자의 이익이 그 자체로 이익이기만 하지는 않다"고 주장하여 그 참주를 화나게 했다. 참주 대 디오니시오스는 화가 나서 "당신은 노망난 이야기를 하고 있소"라고 말했고, 이에 플라톤은 "당신은 참주 같은 이야기를 하시는군요"라고 말했다. 이에 격분한 참주는 플라톤을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그의 처남 디온의 만류로 그렇게 하지 못했고, 대 디오니시오스는 자신의 분을 풀기 위해, 플라톤을 스파르타의 노예상에게 노예로 팔아버렸다.

노예상은 플라톤을 아이기나 섬에 팔았고 그곳은 그 섬에 상륙한 모든 아테네 사람들을 재판없이 사형에 처했기 때문에, 플라톤도 사형의 위기에 처해졌다. 그런데 누군가 플라톤을 보고 철학자라고 말하자, 철학자를 죽이면 신령한 존재가 노하기 때문에 그들은 표결을 통해 플라톤을 사형시키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를 다시 팔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안니케리스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 20므나의 몸값을 주고 그를 아테네에 있는 동료들에게 돌려보냈다. 플라톤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대 디오니시오스는 플라톤에게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하지 말라고 편지로 협박했고, 이에 플라톤은 "나는 디오니시오스를 기억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고 답장을 보냈다.

두 번째로 시칠리아 섬을 방문한 것은 소 디오니시오스에게 자신의 철인정치에 따라 살 사람과 땅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 디오니시오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았다. 철인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명목상이고 사실 플라톤은 그 섬을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려고 디온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플라톤은 위기에 처해있었고 이때 친구 아르퀴타스[22]가 디오니시오스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양해를 구하고 플라톤을 아테네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세 번째로 방문한 것은 디온과 디오니시오스를 화해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디온은 그 섬에서 추방당했고, 이후 디온은 반란군을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소 디오니시오스를 축출하였으나 부하 장수의 배반으로 암살당한다.

2.3. 아카데미아학파 설립과 말년

플라톤은 자신이 머물던 아카데메이아에 학당 '아카데미아'를 세우고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아카데미아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서기 529년에 폐쇄될 때까지 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 아카데미아는 오늘날의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교와 비슷하다. 아카데미아의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 쓰여 있었다고 한다.[23] 플라톤은 여러 제자를 두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제자는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세운 학당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했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아카데미아의 정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이 죽고 나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자신의 학당, '리케이온'을 세운다.[24]

플라톤은 결혼식 피로연 중에 81세로 생을 마쳤고,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철학을 했던 아카데미아에 묻혔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기록한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그의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졌다고 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기록 ㅡ 펼치기 · 접기 ]
"〔43〕(전략) 한편 그의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졌다. 우선,

사멸하는 자들 중 절제와 정의로운 품성에서 뛰어난 자,
바로 여기에 신적인 아리스토클레스[25]가 눕다.
누군가가 모든 이로부터 지혜에 대한 위대한 명성을 얻는다면,
이 사람이 가장 많은 것을 얻을 것이고 질투는 뒤따르지 않을 것이다.

〔44〕또 다른 것으로는

가이아가 플라톤의 이 육신을 가슴에 숨기고,
불멸하는 혼은 지복한 자들 사이에서 위치를 정한다.
아리스톤의 아들, 아무리 멀리 살지라도 훌륭한 사람이라면>그를 누구나 존경한다. 그가 신적인 삶을 보았으니.

그리고 더 최근의 것으로는

A: 독수리여, 너는 왜 무덤 위에 올라 있는가? 말하라! 진정
너는 신들 중 누구의 반짝이는 거처를 멀찍이 보고 있는가?
B: 나는 올륌포스로 날아가 버린 플라톤 혼의
닮은꼴이라오. 흙으로 된 육신은 아티카의 땅이 지녔지만.

〔45〕그리고 가 쓴 것은 이렇다.

그리고 어떻게, 만약 포이보스[26]가 플라톤을 그리스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더라면,
인간들의 혼을 글로써 고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아스클레피오스[27]가 이 육신의
의사이듯이, 플라톤은 혼의 의사로다.

그리고 다른 것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것이니.

포이보스는 사멸하는 자들 사이에 아스클레피오스와 플라톤이 태어나게 했으니,
한 사람은 혼을, 다른 사람은 육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결혼 잔치를 치르고 그는 언젠가 자신을 위해 세웠던 나라.
제우스의 평원에 건립한 나라로 갔다.

이것들이 그의 비문시들이다."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지음, 김주일, 김인곤, 김재홍, 이정호 옮김,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 서울, 나남출판, 2021, p.286-288.

3. 사상


이 단락을 읽기 전에 우선, 플라톤의 사상은 복잡하고 거의 모든 저작이 대화편 형식이라 해석 또한 이견이 갈리기도 한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즉 이 글에서 제시하는 해석을 순전히 믿으면 안된다. 나무위키는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처럼 학술적 공신력이 존재하는 사이트가 아니다.

플라톤의 사상은 흔히 파르메니데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를 이어받았다고 평가받는다.

소크라테스로부터는 윤리적 가치의 정의(definition)을 찾고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진리에 도달하려는 대화법을, 파르메니데스로부터는 불변하는 참된 존재에 대한 존재론을, 피타고라스학파로부터는 만물의 근원인 수의 존재론과 수학적 진리의 확실성, 그리고 피타고라스학파가 신봉하던 오르페우스교의 영혼불멸과 윤회론 등을 받아들여, 이것들이 플라톤의 사상을 이루는 당대 주요한 사상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정리해보면 플라톤의 사상은 크게 존재론으로서는 중기 대화편 중에는 <파이돈>과 <국가>, <파르메니데스>, <소피스테스>, <정치가>의 형상 이론, 인식론으로서는 <메논>과 <파이드로스>의 상기론 내지 <테아이테토스>의 지식론, 윤리학/정치사상으로서는 <국가>의 영혼삼분설, <파이돈>과 <국가>의 영혼불멸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플라톤이 쓴 저서의 대부분은 주로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과 주고받는 대화 형식의 문집이었다. 당대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기반으로 한 문학 장르가 소크라테스의 후예들(안티스테네스, 파이돈, 에우클레이데스, 아리스티포스, 아이스키네스)에 의해 많이 쓰였지만,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일화에 대해서 알려진 것들 중 현존하고 그리고 다수인 이 플라톤의 저작으로 알려졌기에, 플라톤의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실제 소크라테스의 행적에 가까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28]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인 크세노폰이나 그의 사상에 비판적이었던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그린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묘사되어있는 이상적이고 비극적인 소크라테스와는 매우 다르다. 플라톤의 후기 저작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 등이 플라톤에 의해서 왜곡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 반면[29] 플라톤의 대화편 전체가 그 자신의 철학적 체계에 따른 문학적 설정이라는 설도 해석학적 관점으로서 유력하다.

3.1. 이데아

이데아론은 플라톤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데아는 한국어로는 흔히 형상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이는 소크라테스파르메니데스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소피스트들 중 다수가 논쟁에서 일관성 없이 입장을 바꾸며 순간적인 승리에 집중하는 태도를 문제 삼았다. 소피스트들의 이러한 수사적 접근 방식은 법적 논의에서 일관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으며, 소크라테스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런 개념정의를 좀 더 고급화하고 체계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주로 건드리고 싶었던 개념 정의는 용기나 절제, 정의와 같은 것들이며 이런 것들을 위해 구두를 만드는 사람, 의자를 만드는 사람 등의 기술에 대한 비유를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플라톤이 본격적으로 철학의 길로 뛰어들어서 이런 개념들을 논의하려고 하고, 똑똑한 애들 모아서 가르치고 토론하려고 하니 막상 어려움도 많고 말이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그의 이데아론은 이런 부분을 다듬은 것으로, 개념에 대한 개념정리라고 대강 생각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와 관련된 부분에서 얘기하자면, 의견, 감각, 언어 등과 관련해서 얘기해 볼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being[30]은 오직 하나뿐이며, 유일한 진리이고 불변하고 운동하지 않는다. 이런 being은 머리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 감각적인 것이 아니다. 감각은 항상 우리를 속인다. 소피스트들도 이 교설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였다. 소피스트들은 이런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대해서, 아예 감각은 그냥 그 사람 개개인의 고유한 것이므로 사람이 느끼는, 생각하는 모든 것이 참에 속하며, 거짓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플라톤은, 감각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형상이란 것을 도입했다.

플라톤이 그의 대화편에서 예시로 드는 것 중에 하나는 크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다. 크다는 형용사를 명사로 바꿔서 큼이라고 하고, 순수한 큼 그 자체라는 개념이 있다고 해 보자. 이 순수한 큼 그 자체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이다. 플라톤은 대화편에서 이 순수한 큼 그 자체는 정확히 어떤 것인가 등등, 이 순수한 무언가 그 자체가 세상에 있다고 하면 생기는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자기 나름대로 풀어낸다.

이 형상에 대해 플라톤이 새로이 지적하는 것, 플라톤을 서구 철학의 거인으로 만들어준 바로 그것은 우리 인간의 인식 혹은 앎과 개념의 근저를 이루는 그 무엇이다. 바로 위에는 큼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데아를 예시로 들었는데 이데아에 대한 다른 측면을 조망하기에는 약간 적합하지 않아서 새로운 예시가 필요하다. 플라톤뿐만 아니라 하이데거 같은 현대철학자마저도 이데아에 대해 흔히 예시로 드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나무이다. 우리 인간은 나무를 보면 나무라고 인식한다.[31] 그게 소나무이건 전나무이건 참나무이건, 소나무나 전나무나 참나무의 개체가 멋있게 자랐있던, 병이 들어 시들었건, 죽어서 썩어 있는 상태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 여러 나무들을 나무로 만들어 주고, 우리가 그것으로 나무라고 인식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무의 이데아인 것이다. 2010년대 중반 기준으로 인간이 기계어를 통해서 만든 간단한 논리는 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워 하지만[32] 인간은 이와 같은 종류의 개념을 손쉽게 인식하는데, 이것이 형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데아와 같은 것이 있어서 진실된 앎을 가리키고 있으면 소피스트들이 이랬다 저랬다 하기가 어려워지니 말이다.

이런 형상의 체득에 관해 플라톤은 일종의 생득적인 개념을 제시한다. 말이 생득적이지, 혼(魂)득적이라고 나무위키에서 대강 불러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나무라던가 바위라던가 하는 이런 수많은 이데아는 우리 인간들이 이미 혼의 수준에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혼의 개념은 윤회설과 이어진다. 우리 인간의 혼은 불멸하며 육체와 육체를 떠도는데 새로운 육체에 깃들 때 기억을 잃게 된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우리는 형상과 마주할 경우, 혹은 형상과 마주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미 알고 있던 형상을 상기해서 알게 된다. 마치 우리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상기할 때 관련된 것과 마주했을 때 쉽게 상기하게 되는 것처럼 또 때때로는 전혀 상관없는 대목에서 상관없는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한국어로 흔히 상기설이라 부른다.

플라톤이 솥뚜껑을 보고 자라를 떠올렸다고 해 보자. 그러면 플라톤은 솥뚜껑과 자라를 순간적으로 감각을 통해 이모저모 비교하게 된다. 솥뚜껑과 자라는 뭔가가 조금 닮았을 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둘이 같지 않음을 안다. 즉, 솥뚜껑을 보고, 자라를 상기하며, 둘 사이를 비교하며 둘이 같은지 그냥 좀 닮았는지를 판별하게 된다. 그러면 같음이나 닮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빵을 만져보고 그게 떡이 아니라 빵이란 걸 알았다면 해당 촉감 경험이 자기가 알고 있는 빵에 대한 지식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기타 소리를 듣고 그게 드럼 소리가 아니라 기타 소리란 걸 알았으면 마찬가지로 해당 청각 경험이 자기가 알고 있는 기타 소리에 대한 지식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감각 경험을 통해서, 감각으로 무언가를 경험하자마자 우리는 감각 경험과 우리 안의 개념을 비교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감각 경험이 있고, 우리 안의 개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 사이에 놓인 같음이란 개념은 무엇일까?[33]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가정을 하나 해보자. 우리가 빵의 촉감에 대한 지식이나 기타 소리에 대한 지식이나 솥뚜껑 모양에 대한 지식을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알았다고 하는 가정이다. 딱 봐도 알 수 있듯이 설득력이 높지 않다. 그런 지식들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적으로 축적되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같음이란 개념은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일까, 아니면 경험 이전에 알게 된 것일까? 아무래도 경험 이전에 알게 된 것 같다.[34] 우리는 감각 경험을 태어나자마자 시작하지 않은가? 같음이란 개념은 아무래도 감각경험을 하기 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으니까 영혼의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윤회를 반복하는[35] 우리의 영혼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36][37]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니까 같음이란 개념, 말하자면 같음 그 자체를 우리가 아는 것 같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레벨에서부터 알고 있는 것도 맞는 것 같다. 그런 식으로 풀어나가면서 우리는 ~임 그 자체를 안다고 할 수 있다. 나무에 대한 예시가 위에 써져 있는데, 말하자면 우리는 여러 가지 개별 나무들을 보고 아 그게 나무라는 개념과 같네요, 나무라는 개념에 속하는 개별적인 물체네요 이런 것을 안다. 어떻게 개별 나무를 보고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나무 그 자체를 아는 것이다. 재언하는 바지만 요것이 나무의 이데아, 나무임 그 자체 뭐 그런 것이다.[38]

플라톤은 이 상기설을 바탕으로 착한 이성과 철학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냐면 못된 욕심과 감정과 욕구의 삶을 살게 된다면 죽어서 사람이 되기 힘들고 동물이나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혼이 새 육체로 들어갈 때 깨끗한 이성과 철학의 삶이 아니라 찌들은 삶을 살면 혼이 오염되어 버리는데,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감정과 욕구에 휘둘리는 동물의 육체에 들어가기 적합하게 되어 버린 바람에 동물에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철학을 하지 않지만 절제하는 삶을 살 경우는, 꿀벌과 개미나 인간에 들어가기 쉬운 상태가 된다. 이성과 철학 없는 절제는 곧 무절제한 감정과 욕구가 초래할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욕구에 치우친 삶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설명이다. 반면 이성과 철학으로서 절제를 하더라도 선선하고 즐거운 삶을 살며 영혼을 정화한 사람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신이 사는 세계에 신은 아니지만 합류하게 된다.[39]

이데아는 하나의 개념이 될 수도 있고 대상의 본질, 인간의 인식 구조를 이루는 원자적 요소가 될 수도 있다.[40] 해석에 따라 물자체, 실용적 정의 등으로 계승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윤리학에선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좀 고급화해서 정의의 이데아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달리 질문해봐도 그럴 듯하다.[41]

플라톤은 이런 개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데아에 대한 정의로부터 선의 이데아 등등이 나오고 세상을 만드는 데미우르고스 등이 나오고 우주나 세계 같은 이야기도 나온다.[42]

읽다 보면 그런가 보다 싶은 수준으로 읽을 만하게 서술이 되어 있는데 이 형상이론이야말로 서구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주제이며, 영미철학이건 대륙철학이건 간에 오늘날까지 지겹게 물고 늘어지는 중후한 테마라고 할 수 있다. 형상이론에 대해 신선하고 끗발 날리는 논문을 하나라도 써낼 수 있다면 당신은 당당히 철학과 교수로 취임할 수 있다.

이데아 문서도 참조.

3.2. 정치철학

3.2.1. 배경

플라톤의 대화편들 가운데 정치철학이 주요 테마인 대화편은 국가, 정치가, 법률 셋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티마이오스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또한 서한들에서도 어느 정도 정치철학적 이슈가 언급되곤 한다. 개중에서 국가가 가장 유명하다.[43] 플라톤의 대표작이기도 하고, 정치철학뿐만이 아니라 예술비평, 영혼론 등 수많은 테마가 얽힌 방대한 저작이다. 또한 시기적으로는 국가, 정치가, 법률 가운데 국가가 가장 먼저 쓰여졌으며 대화편들 가운데에서 분량이 두 번째로 많은 대화편인데,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젊은 시기에 썼다고 할 수 있다.

비단 국가뿐만이 아니라,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그가 놓여 있는 시대상황과 동시에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인터넷에 나도는 플라톤의 정치철학이란 대개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저열한 자들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플라톤의 경구와 더불어, '근데 이 사람 민주주의자 아니었음 ㅋ' 따위의 발언이 부록처럼 붙어나오기 일쑤다. 즉 플라톤으로 하여금 국가를 쓰게 만든 당시 아테네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하며 단순히 위대한 철학자였지만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식이다.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혐오하게 된 것은, 아마도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더불어 소크라테스의 사형선고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들 생각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의 아테네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페르시아를 무찔렀을 뿐 아니라, 영걸 페리클레스의 통솔하에 아테네는 일개 도시국가가 아니라 거의 제국을 방불케 하는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아테네 주변의 영토들을 작게나마 계속 흡수하고 있었으며, 해운국가답게 바다를 장악해 무역에서 위세를 떨치며 수많은 도시국가들을 아테네 산하에 편입시키며 세금을 받아먹었고, 각 도시국가들 사이의 견제로 인해 쉽게 축조하는 것이 불가능한 긴 성벽도 기습적으로 축조해 수비적으로 엄청난 우세를 차지하게 되어 위세가 등등해졌다.[44]

아테네는 패권국가를 꿈꿨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고 싶은 욕망, 더불어 현재의 위치를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합쳐지면서 인해 패악질이 심해졌다. 스파르타와 테베 등의 강한 도시국가는 이를 좌시하다간 아테네가 장래에 정말로 제국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전쟁이 벌어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페리클레스의 전몰자 추도연설은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다. 페리클레스는 이 연설에서 아테네인들의 용기와 자율성, 임기응변과 자발적인 애국심과 협동심을 찬양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가 병사하고 난 이후 아테네는 더 많이 뜯어내려다 좋은 협상시기를 놓치거나, 반대파를 누르려고 선동하던 사람들이 제 논리에 제가 빠져서 불리한 원정을 강요받거나,[45] 어쨌든 인물은 인물인 알키비아데스도 정치 싸움으로 그 능력을 소진시키고 적국에 좋은 일만 시키는 등 썩 좋은 모습은 못됐다. 거기에 멜로스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인의 패권주의와 야욕은 결론적으로 멜로스 인들의 경고처럼 반 그리스 세력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거니와 플라톤 입장에서 볼 때 올바르지 못한 데다가 경멸스럽기까지 할 내용이었다.

아테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의 민주정 폴리스들은 많은 수가 엉망이었다. 아테네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중우정치, 선동, 야합, 분열과 반목으로 인해 정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외세 결탁, 전쟁 사주, 이적 행위, 부정부패, 쓴소리 하는 엘리트가 미워서 잘난 체한다고 도편추방하기, 누명 씌우면서 공격하기, 그러다가 망하면 책임전가, 능력이 아니라 연설과 선동으로 표를 얻어내서 요직 차지하기 등의 일이 폴리스들에게 일어났다.

이와 같은 민주정치의 혼란은 소피스트들의 정치철학에서 그 원인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멜로스의 대화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피시스와 노모스의 대립관계를 둘러싼 설전이다.[46] 공격을 당하는 약소국 멜로스인들은 퓌시스, 신이 만든 불변의 정의 및 약자를 함부로 괴롭히면 받게될 응보나 재액 등등을 언급했다. 그러나 아테네인들의 경우는 노모스, 그러니까 '흥 신이 만든, 불변하고 만인에게 공유되는 정의라니 웃기고 있네. 온세상 풍속이나 법률이 다 천차만별인 거 보면 모르냐? 그런 건 다 약한 놈들이 무서워서 만든 헛소리고 어차피 세상 일은 힘의 논리에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어 정의가 어쩌고 착한 거 어쩌고 하려다가 먹을 거 못 먹으면 못 먹은 놈 손해지 지금 우리가 세니까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라는 식의 얘기를 했다.[47] 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전부터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진 소피스트들의 유명한 논쟁이다. 이를 통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퓌시스를 공격하고 노모스를 숭앙하는 풍조 및 무리들이 아테네 민주정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음을, 소피스트들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결국 아테네의 폭망으로 끝나자, 아테네인들은 지독한 멘붕에 빠졌다. 많은 아테네인들이 이 당시,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그냥 빛 좋은 개살구고 사실 스파르타 식의 엄격한 규율과 훈련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역시 킹왕짱인 거 아니냐?' 하는 식의 생각에 깊이 경도되거나 영향을 받았고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이런 배경 아래 플라톤은 소피스트들과 당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민주정 폴리스들을 비판하려는 목적 또한 품고 있었다.[48]

3.2.2. 사상

유의사항: 플라톤의 정치사상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크게 두 가지의 탐구법이 이용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고수되었던 당시의 아테네 또는 그리스의 시대상을 파악한 뒤 플라톤의 생각 변화를 기점으로-즉 역사주의적으로 탐구하는 방법이 첫째요, 레오 스트라우스를 비롯한 사상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텍스트 그 자체를 통한 비역사주의적 탐구 방법이 둘째다. 이는 현재의 학자들도 논쟁이 있는 부분으로, 한쪽으로 경도되지 않는 중도를 택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국가는 주제 면에서 대단히 복잡한 면을 가지고 있으며, 플라톤의 모든 대화편이 그렇지만 대화편 형식인 까닭에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이 어디까지나 플라톤의 본심인지 아니면 역설이나 풍자를 담고 있는 문학적 형식인지도 불분명한, 후세인들이 풀이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을 가지고 있다. 사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정치체제를 몇 개로 나누고 다시 그 정치체제들의 등급을 나누고 하는 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차라리 그건 현실정치에 더 초점을 맞춘 훗날의 대화편인 법률이나 정치가에서 더 중요하게 논의되는 바다. 국가가 이렇게 당대 인간생활의 수많은 부분을 다루고 있지만, 어쨌든 국가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정의(justice)라고 할 수 있다. 대화편 국가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노신사 케팔로스와 대화를 하는 와중에 이야기의 소재가 정의로 튄 것으로 불이 붙는다. 케팔로스가 종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뜨고 난 이후, 불붙은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를 통해 더욱 격화된다.

케팔로스와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는 비교적 소박한 정의관, 정직하고 공평하고 잘 대해주는 것이 바로 정의라는 주장을 펼친다. 허나 소크라테스는 자주 그러하듯이 잘 알고 나서 행하는 게 아니면 정직하고 공평하게 행한다고 해도 불의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반박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생각을 가다듬고는 정의는 친구에게는 유익함을 가져다 주고 적에게는 불리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주장을 바꿨다. 왜냐면 소크라테스의 지적을 받고 나서 보니 정직함, 공평함과 잘 대해주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인물들이 비교적 온건하게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트라시마코스개소리 집어치우라며 토론에 난입한다. 이유가 어찌 됐든 남한테 해를 끼치는 건 정의가 아닙니다하는 견해와 더불어 자기가 먼저 말하면서 주장을 만들기보다 남이 말한 것을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태도에 화가 났던 것 같다.[49] 트라시마코스는 벌컥 화를 내고 기세를 돋우면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왜냐면 보통 법률이나 규칙에 복종하는 것을 정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도시국가의 법률을 살펴보면 그 기원은 어떤 신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법률을 만드는 사람(입법자)에게서 비롯된다. 그런데 그 법률을 만드는 사람이란 힘이 있는 강한 사람들이며, 그 강한 사람들이 법률을 만들 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정의로움이란 개념은 허위이며, 정의의 실체는 법률에 복종하는 것인데 법률의 실체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을 편다.[50] 도시국가는 나쁜 일을 한 사람들이 생겨나면 그들이 나쁜 일을 했다고 처벌하지만 실은 강자의 이익을 위해 만든 법률을 어겼을 뿐이라는 것이다.[51]

소크라테스는 이를 반박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법률을 따르는데 그게 지배자의 이익이 아니고 시민의 이익이 되는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지배자가 실수하는 바람에 그런 경우가 생긴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정의가 항상 강자의 이익인가?' 하면서 묻자 트라시마코스는 '견습공은 실수를 하지만 장인은 실수하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진정한 지배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실수하는 지배자는 미숙한 놈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논의는 소크라테스가 '그럼 진정한 지배자는 지배의 기술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인데, 다른 모든 기술들이 그렇듯이 기술이란 것은 의술(醫術)처럼 타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강자만의 이익이란 것은 말이 이상하지 않냐' 하고 논의를 펼치자 트라시마코스가 '양과 양치기와 주인을 생각해 봐라. 양치기가 아무리 양을 잘 돌봐줘도 결국 주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냐'하고 받아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어느 정도 기가 죽은 데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양치기의 비유 역시 오류가 많아서[52] 트라시마코스는 물러나게 된다.[53]

트라시마코스 이후의 논의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를 비롯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폴레마르코스, 소크라테스에 의해 진행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주제가 너무나도 흥미로웠던 나머지 그 주제에서 끝장을 보길 원하며, 자신들이 소크라테스에 반론하거나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답습하는 것이 본의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반박의 논리를 펼침으로 인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더욱 분명해지길 원하고, 더욱 선명해진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통해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극중에서 트라시마코스가 소크라테스를 상대하기 버거워해 퇴장하긴 했지만 그의 주장은 결코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았으며, 당시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져 많은 의문과 토론을 불러일으킨 논설이었다.

소크라테스 제자들이 제기한 의문들은 대강 이렇다.

올바르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왜 정의는 어렵고 불의는 쉬운가? 왜 정의를 행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불의를 행한 사람이 이득을 보는가? 트라시마코스의 이야기처럼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는 것은 그것이 좋고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힘을 가진 사람이 소위 정의라는 것을 행하도록 강제하고, 어기면 처벌 등의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억지로 따르는 것인가?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제약이 없고 자유롭게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게 한다면 이 세상에 불의가 판칠 것인가? 본심이 아니라 억지로 정의를 따르는 것은 좋은가 나쁜가? 사람들은 그저 수치스러운 평판을 피하기 위해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정의로운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가? 선생님, 부디 저희에게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정의란 것은 단지 그것이 정의란 이유만으로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이와 같은 질문을 함께 토의하기 위해, 그 어려운 문제들을 보다 더 쉽게 살펴보기 위해 개인이 아니라 사회나 공동체라는 큰 그림에서 정의가 어떤 것일지 알아보자고 제안한다. 올바른 행동과 법률의 연관성을 밝히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논의는 개인 차원의 정의, 법률, 이익, 욕망 등이 얽힌 문제에서 국가, 사회구조와 같은 차원으로 확대된다.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쟁은 1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총 10권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케팔로스의 아들이 정의에 대해 가르침을 구하는 장면은 2권에 속한다. 이 나머지 9권의 분량 동안 정의를 탐구하는 소크라테스는 교육, 사회, 국가, 예술, 정치, 영혼, 윤리 등 많은 분야를 건드리게 된다. 국가는 그 과정에서 3가지의 주요한 입장을 등장시키는데, 첫째 입장은 노신사 케팔로스가 제시하는 헬라스 세계 종래의 소박한 도덕관이다. 그리고 피시스와 노모스를 구분하는 소피스트를 대표하여 트라시마코스가 있고, 마지막으로 플라톤 본인의 주장을 대변하는 소크라테스가 있다. 플라톤은 앞선 두 주장을 반박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개인의 행복과 정의는 도시의 행복과 정의와 큰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왜냐면 법과 정의, 행복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법이 정의롭지 못할 경우 개인은 법을 지켜도 정의롭지 않고, 그렇다고 법을 어기면 불이익을 받아 행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도시의 법이 정의로워야만 도시에 속한 개인 역시 정의로운 법을 문제 없이 준수하면서 괜찮은 생활을 꾸릴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인해 정의롭고 행복한 도시가 건설되어야 한다.

정의롭고 행복한 도시를 그리기 위해 플라톤의 상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얘기를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본래 인간은 혼자서 살기는 어렵고 사회에 의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여러 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54] 또, 인간은 각기 타고난 적성이나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이 재능이나 적성에 따라 직업이 알맞게 분배되어야 한다. 이런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좋은 기술을 바탕으로 많은 재화를 창조해내서, 여러 가지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특성을 충족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가 다른 사람들의 수요를 채워준다.[55] 즉 인간이 공동으로 모여사는 이유는 인간이 서로에게 부족하지만 필요한 부분을 협력해서 채워줘야 하기 때문이며, 인간에게 각자 타고난 재능이 있으며 그 재능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정의로운 도시를 만들기 위한 단계로 1단계로 건강한 도시, 즉, 말하자면 돼지들의 도시, 2단계로 정화된 도시 즉 말하자면 군인들의 도시, 마지막 3단계로 아름다운 도시 즉 말하자면 철학자가 통치하는 도시의 3단계가 제시된다. 건강한 도시는 각자가 각자에게 필요한 적성에 맞춰 생활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알맞은 인원이 알맞게 모여서 알맞은 일을 하며 정부가 없이도 잘 돌아간다.[56] 그러나 이 도시는 말이 되지 않는데,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순진무구하게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덕(ἀρετή), 즉 스스로를 단련하고 자제해서 얻는 기술적 능력이 필요하다.

아무튼 이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도시는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하고, 돈과 부를 추구하며, 그렇기에 자신의 재능과 상관없이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을 몇 개씩이나 겸직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이런 이유로 빈부격차가 나타나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자연히 정부의 필요성이 나타나며, 영토확장의 욕구 또한 나타나게 된다. 영토확장의 욕구와 함께 전투의 기술에만 집중하는 전사계급이 나타난다. 돈 버는 기술이 최고인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렇게 전투의 기술 아래 귀속되는 것처럼, 전투의 기술도 최상위의 기술 아래 포섭되게 되는데 바로 철학이다. 어쨌거나 전사가 아무리 용맹스럽게 잘 싸운다 해도 올바른 적을 상대로 올바른 타이밍에 용맹하게 싸우는 게 중요하지, 잘못된 적을 상대로 쓰면 소용이 없으니까.

이런 전투의 기술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능력을 적절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군인들의 강한 성정을 부드럽게 만들고 절제하게 만들 수 있도록 음악과 시의 교육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 때 제공되는 예술은 적절한 것만이 필요할 뿐, 도시가 추구하는 정의에 걸맞지 않고 사람들의 심성을 어지럽히는 나쁜 시와 음악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서 호메로스 등과 같은 시인들은 그들이 묘사하는 신들이 전혀 정의롭지 않고 이상한 놈팽이들로 묘사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제거되어야 한다. 도시는 건전한 시와 음악만을 필요로 한다.[57][58]

체육과 음악 교육을 받은 군인 계급만으로는 이상적인 도시에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더 우월한 지도자들을 위해서는 철학 교육까지 제공되어야 한다. 그 결과 도시는 절제[59]의 미덕을 갖춘 도시가 될 수 있다. 트라시마코스와 같은 부류가 주장하는 바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는 무력과 욕망을 갖추고 있으며, 도시국가의 이익을 위해 무력과 욕망을 함부로 남용하는 행위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으며, 어쩌면 현실정치에서는 그처럼 이익을 위해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결코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아테네인들이 멜로스를 멋대로 침공했던 것처럼. 강한 힘을 가진 도시는 무력을 남용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마음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부정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은 폭력 위에 우리의 현실이 기반해 있으며 우리가 그런 사실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와는 상관없이 이득에 눈이 멀은 도시가 폭력을 남용하는 것은 불의한 일이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현실적 사항을 도외시하고 오직 이상과 정의만을 생각해 볼 때 폭력의 남용은 정의가 아님이 자명하다. 이상적으로 생각해 볼 때, 만약 도시 전체가 절제의 미덕 아래 자신이 타고난 재능에만 집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정의로운 개인과 정의로운 도시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사유재산과 가족제도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게 플라톤의 주장이다. 물론 말도 안 되게 비현실적인 주장이지만,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절대적인 공유제야말로 정의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절제로 가득찬 도시, 사유재산의 폐지와 절대적인 공유제를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철학자뿐이다. 전사계급에게 시행되는 통제된 예술교육만으로는 사적인 욕망을 억누르고 절대적인 공유제를 실현하기는 역부족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흐름 아래에서, 도시의 세 계급이 서로 다른 일을 해도 정의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균형이 잘 맞는,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절제라는 기치 아래에서 잘 짜여진 공동체 도시에서는 세 계급이 각자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이제까지 도시와 개인을 쭉 유비관계로 다뤄 왔는데, 그에 따라서 도시가 세 가지 계급이 있는 것처럼 유비관계를 통해 개인의 영혼에도 세 가지 부분이 있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욕망, 혈기, 이성이 그것이다. 가장 뛰어난 이성에 의해 개인의 영혼이 금전욕에 빠지지도 않고 무절제한 분노에 빠지지도 않는다면, 그는 정의로울 것이다.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또 플라톤이 다른 대화편에서도 종종 주장하는 것처럼, 어떤 개인이 정의로워 보이는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이성을 통해 통제된 상태가 아니라면 완전히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왜냐면 그는 정말로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우연적 요소에 의해 행하는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60]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기원전 5~600년경에 이미 가족제도의 폐지까지[61][62] 주장하는 극렬 공산주의 색채[63][64]를 띠고 있지만, 5권에서는 현대 시점에서 플라톤의 평가를 한층 더 격상시키고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구절이 등장하게 된다. 플라톤은 가족제도를 부숴버린 다음, 그러면 아기와 여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질문에 대해 남녀 평등을 주장한다. 도시의 절반을 차지하는 사람들을 놀릴 이유가 전혀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품고 있는 재능이나 소질은 퓌시스적으로 볼 때 차이가 없다.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남자와 여자는 차이가 없으며, 남자와 여자에 구분이나 재능에 차등을 두는 것은 노모스, 인습적인 것이며 자연 즉 퓌시스에 반하는 것으로, 이상국가에서 그러한 노모스는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65]

이와 같은 가상실험에 파묻히던 소크라테스 일행은, 그건 그런 거 같은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정의입니까?하는 글라우콘의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것이 지긋지긋한 이데아론이다. 정치철학 바로 위의 항목이 이데아론이긴 한데 여기서 연결되는 내용은 쓰여져 있지 않은데 이 문서에서 대강 개념에 대한 개념정리라고 설명하기도 했고, 참나무건 전나무건 소나무건 죽은 나무건 병 걸린 나무건 딱 보면 나무를 나무라고 알 수 있게 하는 나무다운 그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플라톤은 이 애매한 개념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이데아는 수학으로 표현가기가 대단히 편리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완벽한 원이나 삼각형은 없지만 우리는 삼각형이나 원의 정의를 알 수가 있고 그를 통해 삼각형이나 원의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다. 직각사각형의 정의 = 이데아라고 친다면 사각형 중에서 직각사각형의 이데아, 즉 정의(定義)에 들어맞는 건 직각사각형일 터이다.

국가에서 나온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데아를 이렇게 대충 설명했다고 치자. 그런데 이 이데아의 문제가 뭐냐면 이데아의 이데아이다. 약간 국가를 벗어나서 생각해 볼 때 소크라테스는 시장바닥 돌아다니면서 썰을 풀 때 개념정의에 대해 얘기만 해도 충분할 정도로 얘기했던 모양이지만, 플라톤의 경우는 본인이 생각을 깊게 하다 보니 아님 학교를 차리고 강의를 하다 보니 애들이 곤란한 질문을 한 모양이다. 어쨌든 이데아가 있다고 한다면, 큰 문제가 생겨버리는데 이데아의 이데아가 생겨버린다는 것이다. 귀납적 방법을 즐겨 사용했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이, 용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많은 사례들을 모아서 필요하고 충분한 요소들만 쏙쏙 모아 버리면 그것이 진정한 용기, 용기의 이데아인 것이다! 이데아야말로 진짜다! 다른 것들은 다 허깨비, 가상, 2차적인 찌끄레기이고 오직 이데아만이 진정한 참이자 세상의 진리이자 불변하는 실체인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고 할 때,

아니 플라톤 선생님, 그럼 이데아라는 애매한 개념을 우리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데아들의 이데아라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이데아들의 이데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또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라는 것이 필요할 거고요, 또 그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데아들의 이데아들의 이데아, 즉 무한퇴행이라 불리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또, 그렇다면 그 이데아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인식할 수 있습니까? 이데아와 우리 마음이나 지성 이런 것과의 관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죠? 하는 아주 골아픈 형이상학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66]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위의 이데아론 항목에서도 얘기했듯이 현대까지도 해결이 된 건지 안 된 건지 전문 철학자들, 철학 역사에 남았으며 현대에도 천재로 이름 높은 난다긴다 하는 영미, 대륙의 철학자들끼리도 절찬리에 치고박고 있는 노답문제라 꺼무위키는 꺼무위키다운 주제를 파악하고 대강 넘어가 버리고 국가를 얘기하고 있는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플라톤은 결국 정의를 얘기함에 있어서 정의의 이데아라는 소재를 들고 나왔다. 앞서서 나온 퓌시스와 노모스 문제, 결국 정의롭게 잘 살기 위해서 개인과 사회와 국가와 법의 관계에 대한 통찰,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와 법 속에서 개인이 살아갈 수 있도록 철학자가 다스리는 국가 및 철학에 준거된 국가의 이상적 형태 및 나라에서 꾸준히 나라를 다스릴 철학자를 양성할 수 있는 형태 등등을 만드는 것에는 정의(正義, justice)의 이데아와 그것을 알고 있는 철학자가 필요하다. 또, 이 정의의 이데아는 궁극적으로 좋음(the good)의 이데아와 연결되어 있다, 는 것이 플라톤의 결론이다.

모든 이데아는 이 좋음의 이데아에서 비롯된다. 이를 통해 플라톤은 이데아 무한퇴행의 문제에 결론을 낸다. 이데아 무한퇴행을 막는 이 이데아가 왜 좋음이냐면, 플라톤은 그에 대해 아름다움이나 호의와 같은 얘기를 한다. 약간 종교적이 되기도 하는데, 뭐 예를 들어서 말해 보자면 이 세상을 이루는 수학적 원리나 그에 따라 운행되는 천체들, 음악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을 볼 때 이 세상은 수학적이고 아름다운 원리 아래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바로 절대자의 선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서 고대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거의 신적인 조화에 가까운 세상의 여러 초월적인 현상이나 신비를 볼 때 신적인 존재나 힘을 부정하기는 어렵고, 그런 존재가 있다면 왜 호의가 아니라 악의를 내뿜겠으며, 수학이나 그에 기준을 두는 음악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그 증거가 된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이데아 무한퇴행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초의, 근원적인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이다. 왜 이성 좋은 거잖아 좋은 거.

뭐 글라우콘 패거리들은 소크라테스의 이런 설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소크라테스 밑에서 수련이나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논의를 하는 모양새를 볼 때 머리가 좋은 패거리들에 속하니 이런 이데아론을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67] 이들이 이렇게 이데아에 의한 정의의 설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현상 세계를 초월해 있는 그 어딘가에 실존해 있는 이데아만이 정의이므로 실재 세계에서 완전히 정의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 더불어 사회, 체제, 국가 등과 정의의 결합은 철학에 더욱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데아를 아는 자는 철학자일 수밖에 없으니까.[68] 플라톤은 철학이 정치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일반 시민들을[69] 설득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트라시마코스와 같은 소피스트들의 수사학 기술이 필요하다. 철학은 옳기 때문에 수사학을 동원하면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크세노폰과는 달라서 초지일관 철학이 제일 행복한 것이기 때문에 그걸 아는 철학자는 오직 철학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그 입장을 따를 때 철학자들은 어느 정도 공동체를 위해서 강제 동원되어야 한다. 철학자들은 도시를 위해 그런 귀찮은 짓을 하기 싫어할 텐데, 보통 도시민들은 마치 동굴에 갇힌 원시인 패거리들이 불빛에 비친 그림자들이나 보고 우끼우끼 우끼끼하면서 그것만이 진실이자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진짜 사물을 알고 있는 철학자들을 자신들의 안온함을 깨려고 헛소리하는 불한당 같은 패거리라고 여기는 까닭에 철학자들이 그들을 설득하려 들면 들수록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이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가족제도를 깨부숴서 멍청하고 되먹잖은 부모라는 인간들에게 아이들의 교육을 맡기지 말고 10살 정도 되면 무조건 국가에서 길러서 올바른 시민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70]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제시한 정의에 관한 어려운 물음들은 여전히 대단히 애매한 상태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이나마 명확해진 상태이긴 하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억지로, 혹은 자연스럽게 정의로운 것을 따라야 하는가에 관해서 알아보려면 불의에 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치체제를 5개로 구분하면서 하나씩 알아보게 된다. 좋은 순서순으로, 최선자정체(aristokratia),[71] 명예지상정체(timokratia),[72] 과두정체(ὀλιγαρχία), 민주정체(δημοκρατία), 참주정체(τύραννος)로 구분된다.[73] 최선자정체는 지성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명예지상정체는 명예, 과두정체는 돈, 민주정체는 모든 충동, 그리고 마지막 참주정체는 사악한 탐욕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처럼 플라톤은 국가에서 국가(정체)와 시민과 정의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정치철학적으로 타당한 얘기인지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가 훗날 군주론에서 제시한 것처럼 군주의 도덕성과 정치환경은 사실상 분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 당시에는 학문도 그렇고 인간들의 생활상 자체가 공동생활과 분리되기 어려웠다.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선택되었던 예술, 종교, 정치 모두 도시국가의 시민적인 공동생활 속에 한 부분으로 존재했던 것이며, 현대처럼 개인의 예술이나 종교 등의 개념은 상정하기 어려웠다. 이와 더불어 소크라테스가 추구했으며 플라톤이 그 유산을 이어받은, 시민의 도덕성 함양이라는 테마 역시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며 사실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국가의 정치적 올바름이야말로 곧 한 국가의 도덕적 올바름이면서 동시에 한 개인의 정치적 올바름이자 도덕적 올바름이 될 수 있었다.[74]
μανθάνω, ἔφη· ἐν ᾗ νῦν διήλθομεν οἰκίζοντες πόλει λέγεις, τῇ ἐν λόγοις κειμένῃ, ἐπεὶ γῆς γε οὐδαμοῦ οἶμαι αὐτὴν εἶναι.
ἀλλʼ, ἦν δʼ ἐγώ, ἐν οὐρανῷ ἴσως παράδειγμα ἀνάκειται τῷ βουλομένῳ ὁρᾶν καὶ ὁρῶντι ἑαυτὸν κατοικίζειν. διαφέρει δὲ οὐδὲν εἴτε που ἔστιν εἴτε ἔσται· τὰ γὰρ ταύτης μόνης ἂν πράξειεν, ἄλλης δὲ οὐδεμιᾶς.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제껏 우리가 수립하면서 언급해 온 나라, 즉 이론상으로나 성립하는 나라에서 그러려 할 것이란 말씀이군요. 그 나라는 지상의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니까요." 그가 말했네.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걸 보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보고서 자신을 거기에 정착시키고 싶어하는 자를 위해서 하늘에 본으로서 바쳐져 있다네. 그러나 그게 어디에 있건 또는 어디에 있게 되건 다를 게 아무것도 없으이. 그는 이 나라만의 정치를 하지, 다른 어떤 나라의 정치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네."
― 『국가』 9권, 592b

플라톤 자신도 국가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제시한 다음, 위와 같이 말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하나의 본으로써 이를 제시한 것이다. 타락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마음속에 이성 속에 이런 본을 지니고 정치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75] 대화편 국가에서 논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상사회이며, 대화편 법률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이하게도 법률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주역이 아니다.

대화편 정치가는 테아이테토스 - 소피스트 - 정치가 순으로 지어진 저작이다.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수학자가 나오고, 소피스트에서는 당연히 소피스트가 나오고, 정치가에서는 당연하겠지만 정치가가 주요 주제이다. 또한 작중 내용도 등장인물이나 시기가 이어지기도 하는 등 어느 정도 연관을 갖고 있다. 즉 플라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앎에 관련된 것을 논의해보고 정치와 다시 한 번 연결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국가에서 철인왕은 여러 가지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일단 철학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철학 즉 진리를 모르고 그저 동굴 속에서 짐승처럼 날뛰며 울부짓는 무리들을 위해 '이 바보들아! 저건 그림자잖아! 저건 버드나무의 잔가지가 바람에 일렁거리는 그림자고, 저건 여우가 도약하는 그림자 아냐!'하고 분별해서 가르칠 수 있는 그림자에 관한 지식, 즉 현실 정치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국가에서는 이상국가를 그리는 일에 집중했기 때문에 실제 현실 정치적 능력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응 그건 철학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하면서 넘어간 바 있다.

대화편 정치가에서 엘레아 사람은 그럼 과연 실제 정치가가 무엇인지에 관해 주장을 펼친다. 아마 당연히 엘레아 학파일 이 엘레아 사람은, 여러 가지 근본 원리나 기술로부터 정치의 기술까지 천천히 논의를 옮긴다. 그 결과 무릇 정치가니 왕이니 하는 것의 본질은 기술이나 앎으로서,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이 어떠한 지위이건 간에 상관없다. 왜냐면 그것은 그냥 기술이니까. 또한, 도시와 가정에는 차이가 없으며 정치가와 가장 사이에도 차이는 없다.

이와 같은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정치의 기술은, 실제 정치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힘, 무력 등과는 무관계하다. 힘이나 무력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정치를 하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일지는 몰라도 실제 정치의 기술과는 무관계하다. 정치는 기술이되, 일종의 지식이나 앎에 속하는 기술로서, 그런 종류에 속하는 기술이 그러하듯이 명령을 내리는 기술이다. 다른 모든 명령을 내리는 기술처럼 정치 역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인데, 정치란 곧 인간을 출생시키고, 양육하도록 만드는 기술이다.[76] 그런데 의술이나 성생활에 관련된 기술도 인간을 보살피는 기술이다. 정치술이 이들 기술과 차별화되는 점은, 인간과 동물의 특별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은 여기서 또 시시껄렁하게 보이는 신화를 끌어들인다. 옛날에는 크로노스 시대였는데, 그때는 신들이 각기 동물들을 이끌고 이래라 저래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제우스 시대는 신이 그냥 인간들을 포함한 동물더러 알아서 하라고 놔둔 시대라는 것이다. 옛날 크로노스 시대는 절대적인 공유제가 시행되던 시대였으나[77] 현재 제우스 시대는 절대적인 공유제도 불가능하고 불의와 무질서가 판치는 시대이므로 인간들끼리 알아서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즉, 국가에서 얘기했던 거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절대적 공유제 그런 거 신이나 할 수 있는 거야 알아들었냐. 이렇게 선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정치는 이렇게 정치가나 왕이 신일 경우와 신이 아닐 경우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 정치가나 왕의 지배가 합법적인가, 올바른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기준은 과연 피지배자들이 동의했는가, 동의하지 않았는가로 구본된다. 엘레아인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정치가의 기술에 대해서 검토한다. 그 결과 현실에서 진정한 정치가들의 기술과 자웅을 겨루고 있는 기술은 바로 소피스트 모리배들의 기술로 과거에도 현재에도 절찬 활용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지배는 세 가지고 나뉘는데 일인지배, 소수지배, 다수지배로 나뉜다. 이 세 가지 지배는 앞서 얘기했듯 피지배자들의 동의했는가, 아닌가 두 가지로 인해 6가지로 나뉘어진다. 즉 왕정과 참주정, 귀족정과 금권정, 민주정으로 나뉜다. 그러나 플라톤 사상하의 민주정에서 자유와 법의 구분에 있어서 주요 쟁점은 소수의 유산계층이 다수의 빈민계급에 의한 지배에 대해 동의하느냐 마느냐인데, 플라톤은 유산계층이 동의하나 마나 별 차이 없다고 여긴다. 따라서 플라톤의 정체는 1) 왕정 2) 참주정 3) 귀족정 4) 과두정 5) (강압하는) 민주정 6) (동의하는) 민주정 이렇게 6가지의 정치이다.

이 6가지 정체는 올바른 통치의 기술인 철학과 무관계하다. 그리고 피지배자들의 동의 여부에 대해서도 큰 신빙성이나 공증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큰둥하다. 플라톤은 이를 자신이 주구장창 사용하는 의술의 예시를 들면서 정당화한다. 의사가 진정한 의술의 기술을 활용하는 한 환자가 동의하건 말건 환자의 신체를 지지고 볶건 간에 의사는 옳은 일을 하게 되어 있다.[78] 마찬가지로 지배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는 어쨌건 공동체에 최선의 선택을 통해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므로 피지배자들이 동의를 해주건 말건, 불법을 자행하건 말건, 사람들을 조지건 말건 외국인을 어떻게 쓰건 상관이 없다.

소크라테스의 키보드 워리어 영혼은 법 없는 지배를 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엘레아인의 주장에 불타오른다. 그러나 엘레아인은 침착하게 소크라테스를 상대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현대 한국에서 그런 것처럼 현대사회에서조차 법 조항의 미비로 인해 뻔히 보이는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거나 불의에 속 끓는 일이 제법 많다. 그런데 이런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돌때기에 글자 좀 새겨넣고 '에헴! 이것이야말로 우리 도시국가가 앞으로 준수해야 할 신성한 법률이라니까!'하고 뻐기는 것이 과연 이치에 닿는 일일까? 각 사건이나 상황은 항상 건 바이 건이 될 수밖에 없으며 시대와 상황은 항상 변화하는데 돌에 법률을 새겨놓고 뻐기는 일이란 과연? 현행 법률들이 사회나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성문이건 불문이건 간에 현행 법률이란 물건들을 살펴 보면 모두가 다 조잡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신성을 지닌 사람을 마치 짐승 무데기인 것마냥 취급한다.

이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이유이고, 법이란 것은 진정한 정치의 기술을 가진 자마저 제약하기 때문에 나쁘다. 실제로 진정한 정치의 기술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는 항상 유연하고 정확하게 각 상황과 사건에 맞춰 일을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법률이 있다면, 동굴 속에서 우끼끼끽~ 우끼이후~ 하는 무리들이 법률에 비춰 진정한 지배에 계속 토를 달면서 방해할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동굴 속의 무지한 무리들은 눈깔이 없기에 현자를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고, 고맙게도 현자가 그들을 다스려준다 할지라도 무언가를 계속 의심할 것이다.

국가에서도 얘기되는 바지만 무지몽매한 무리들은 현행법을 떠받들면서 현자에게도 현행법의 절대성을 인정하길 바라고, 현자가 그를 무시하면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재판정에 보내서 요단강 저 너머로 현자를 보내버릴 것이다. 현행법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백치 아다다들은 어떤 변화나 개정, 토론을 원하지 않으므로, 현자는 스스로 잘 살기를 바라지 굳이 대가리 터진 원숭이들을 다스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실적으로 법의 지배는 인정되어야 하는데 왜냐면 법도 현자도 지배하지 않을 경우 욕심 많고 사악한 야심가가 국가를 다스리며 민중들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도 현행법이 아무리 병신 같을지라도 존경을 표해야 한다. 아니면 모가지가 뽑힐 테니까.[79] 법의 지배는 아무리 쓰레기 같은 법이라도 일단은 이성적 고찰이 조금이나마 섞여 있을 것이기에 무법천지보다는 낫다. 또한 실제로 법이 있다 하더라도, 참주 같은 놈들이 그 법을 지 맘대로 바꾸면 그것은 법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근거해서 각 정체들의 순위가 매겨진다. 당연히 법이 없는 정부보다 법을 따르는 정부가 나으며, 개중에서도 법을 따르는 민주정이 짱이다. 물론 제대로 된 통치의 기술을 가진 정치가나 왕은 법을 맘대로 바꿔도 상관없지만. 엘레아인은 현실적으로 자기자신은 현자가 만든 법이 존재한다면 똥멍청이들이 나라를 지배해도 참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엘레아인은 통치의 특별한 기술을 하나 더 소개한다. 작중에 뜨개질 기술을 예시로 들기도 했고, 인간을 출생시키고 보육시키는 기능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다. 통치자는 균형 잡힌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각 집안과 집안을 이어줘야 한다. 어떤 한 기운이 지나친 집은 반대편 기운이 지나친 집과 맺어줘서 도시 전체의 균형을 잡고 각 시민 개인의 기질을 균형잡히게 만들어줘야 한다. 이와 같은 마담뚜의 기술이 바로 왕의 특성이다. 즉 왕은 인간 무리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물론 철학자는 이런 똥대가리 대중들과는 상관 없고.
3.2.2.1. 이상국가의 모습
플라톤이 생각하던 이상국가는 기본적으로 세가지 계급으로 구성된다.
  • 통치자: '수호자 중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국가의 '왕'에 대응되는 존재이지만 1명은 아니다.[80] 구체적으로 몇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국가에서 가장 극소수를 차지하는 계층이다. 또한 철학자이다.
  • 수호자: 일반적인 국가의 귀족, 혹은 전사 계급에 해당한다. 당시 폴리스들의 가장 일반적인 군대 모습은 '시민군'이었는데, 플라톤은 소수의 전문적인 군인들이 군대를 구성해야 한다고 봤다.
  • 생산자: 일반적인 국가의 평민 계급[81]에 해당한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인구가 너무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도록 성생활이 통제되는데, 제비뽑기를 통하여 누가 누구와 성교를 할지 결정된다. 다만 제비뽑기는 통치자가 교묘하게 조작하여, 실제로는 (아마 플라톤의 사상에서 가장 비판 받는 부분이겠지만) 우수한 남성과 우수한 여성이, 열등한 남성과 열등한 여성이 성교하도록 유도된다. 그리고 성교의 횟수 역시도 '우수집단'이 되도록 많이, '열등집단'이 되도록 적게 하도록 유도되며, 열등집단의 아이나 장애아는 유기되어서 죽도록 방치된다. 한편 모친에게는 '정상적으로' 탁아소에 맡겨진 것이라고 속인다. 플라톤은 이러한 우생학적 개량으로 국가를 더 좋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82]

한편 살아남은 아이들은 탁아소에서 공동으로 양육되며, 기본적으로 '수호자 양성'을 전제로 한 교육을 받는다. 이들의 영혼은 시가(詩歌)로 단련되고 육체는 체육으로 단련되는데, 혹시나 타락하지 않도록 시가는 엄선한다(나쁘게 말하자면 검열한다). 그리고 양성의 마지막 과정에서는 일부러 쾌락에 노출시키는 시험을 치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적성이 맞지 않는자는 떨어져나가고, 다시 말해 생산자 계급이 되고 마침내 엄선된 수호자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물론 양성된 자들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은 통치자가 된다.

플라톤의 이러한 이상국가는 철저한 능력제 사회로, 구조상 누가 누구의 아들, 딸인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83] 혈통적인 신분세습은 불가능해진다. 또한 수호자, 통치자는 사유재산이 없는 등 철저하게 사욕을 배제시켜야 하는 '국가의 봉사자'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현대인의 기준에서 보자면 굉장히 금욕적이고 재미없는 삶일 것이다. 다만 플라톤은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국가의 중대사를 맡길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84]

또한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여성 역시도 남성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여성을 집안에 묵혀두는 건 인력낭비라고 봤는데,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수컷 경비견이든 암컷 경비견이든 일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비유한다.

결국 위에서도 강조했지만, 플라톤이 보는 이상국가란 "가장 적합한 사람이 그 일을 한다"라고 요약될 수 있다. 즉 농사를 잘 짓는 사람이 농사를 짓고, 군대에 적합한 사람이 군인이 되며, 정치에 적합한 사람이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85] 이는 당시 폴리스들의 인간관과는 반대인데, 특히 아테네인들은 모든 인간이 각각 비슷한 재능을 신들로부터 받았다고 봤다. 때문에 아테네에서 정치라는건 '전문적' 프로 정치인이 아니라 '전인적'인 아마추어[86] 정치인들이 했던 것이며, 능력의 차이가 부정되므로 '추첨을 통해' 국가 중대사를 맡긴 것이며, 조국을 지키는 것은 전문적 직업군인들이 아니라 전인적 시민군들이 수행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이란 순수한 인간들이 아니라 반신(半神)들이라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생산자는 절제의 미덕을 지녀야 하는데, 열등한 그들에게 가장 적은 몫이 돌아가게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수호자가 절제의 미덕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같은 방식으로 플라톤 본인을 포함하는 통치자 계급도 용기의 미덕까지 지니고 있다. 즉, 절제 -> 용기 -> 지혜 순으로 갖기 어렵고 고차원적인 미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우월감에 심취했던 플라톤이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을 때 자신을 가장 위에, 나머지 흔한 사람 중 그나마 용기라도 있는 사람을 그 밑에 둔 것에서 출발했다고 해석된다.
3.2.2.2. 철인 정치
철학자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또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
― 『국가』 5권, 473c-d

플라톤은 '철인(哲人) 정치'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데, '국가론'에서 자세하게 설명된다. 이 '철인'이란 단순히 '지혜로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초월하는 이데아를 인지할 수 있는 자'를 뜻한다. '이데아'를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은 해당 영역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느냐의 문제로 이어진다. 물론 '지식의 소유'에 대한 개념도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와 상이한 지점들이 많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와 법률 등 다수의 저작에서 '의사와 환자의 비유'를 종종 사용하는데, 이러한 비유를 통해 플라톤은 병에 걸려 있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병과 치료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 역시 '정치'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똑똑한 사람이 지배해야 된다는 것이 철인 정치가 아니다.

다만 플라톤의 '철인왕'은 이미 플라톤 생전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인왕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방해가 되기까지 한다'[87]고 깠으며, 3세기의 테미스티오스도 '아무리 위대한 플라톤이어도 이건 좀....'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플라톤의 '철학자왕'에 대한 생각은 플라톤의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조금 달라지긴 한다. '국가(혹은 정체)'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중기 사상에서는 철인왕에 의한 일방향적인 통치 외의 다른 방식은 거의 비중이 없지만, 후기 대화편인 "정치가"에서 "법률"로 넘어가면 피통치자에 대한 설득과 소통이나 법률 등을 제법 고찰을 하는 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사실 일관적으로 "철학자왕(즉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영혼이 조화된 상태의 사람)"에 의한 통치를 기본바탕으로 깔고 있다. 다만 플라톤의 비유를 그대로 따르자면 환자를 치료하는데 환자의 설득은 본래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설득의 과정이 없었다간 의사가 맞아 죽거나 환자가 찾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는 정도가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가 주장한 철인 정치를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면모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철인 지배자는 신분이나 성별, 인맥, 지연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들은 다음의 절차에 따라서 선발된다.
  1. 모든 사람은 평등한 교육의 권리를 가진다.
  2. 공정한 시험으로 뛰어난 인재를 선발한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도태시킨다. 이때가 20세 무렵이다.
  3. 그 뛰어난 인재는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거친다.
  4. 수학, 과학, 음악 등의 집중교육을 받는다. 다시금 10년간 교육을 받는다. 이 교육이 끝날 무렵이 30세.
  5. 다시 공정한 방법으로 인재를 거른다.
  6. 5년간 철학 교육을 받는다.
  7. 5년간의 교육이 마무리 된 후 15년 동안 현실세상에서 실무적인 경험을 쌓는다.
  8. 그중 살아남고[88]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에게 국가의 중대사를 맡긴다.(이때가 대략 50세 즈음) 이때는 따로 시험이 필요가 없는데 15년의 실무경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주변 동료들과 대중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평가를 받아 자신의 우수성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자 왕(Philosopher king)의 개념은 동아시아에서는 공자유교 사상에서 성인 지배자(Sage Emperor / ruler of Saint)라는 개념과 흔히 유사성이 지적받는다. 유럽 문명이 중국 문명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시작했을 때, 유럽의 사상가들은 중국의 통치 체계에서 이러한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호메이니가 플라톤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즉, 이란 이슬람 공화국아야톨라라는 직책이 이러한 '철학자 왕'에 해당한다는 것이다.기사 그 외에도 중국식 집단지도체제 역시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국가론과 유사하다.

플라톤의 철인통치를 이념적으로 계승하여 구체화한 것이 레닌의 전위정당론이다. 이때의 전위조직은 민중의 대리자가 아닌 체제의 수호자적 기구를 말한다. 엥겔스에 따르면 이 전위만이 대중의 불가피한 소부르주아지적 동요에 대해,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불가피한 노동조합 활동가적인 편협성이나 편견, 전이나 문제의 되풀이 논쟁에 대하여 대항할 수 있고,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된 활동전체를 지도할 수 있다고 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 근로대중 전체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89]

3.2.3. 기타

2010년대에 들어 많이 쓰이는 인용구로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 1권 347c에서, 소크라테스는 "돈이나 명예는 훌륭한 사람들이 지배자가 되기를 승낙하지 않게 할 것일세. ... 따라서 그들이 지배하길 승낙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처벌이라는 것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안되네—이것이 아마 강제당함이 없이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게 된 까닭인 듯하네—그러나 가장 큰 벌은, 만약 자기 자신을 지배할 생각이 없다면, 자기만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일세."라고 한다. 이 문장은 민주국가에서 투표 독려의 격언으로 쓰인다. 물론 분명히 하자면 플라톤은 민주정을 싫어했다.[90] 앞의 발언은 일반적인 대중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철학자(즉 통치자)에게 하는 말이다. 즉 철학자가 정치를 외면한다면 가장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앞의 발언은 민주주의와는 오히려 정반대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는 철저히 검증된 소수의 엘리트들, 곧 '수호자(guardian)'를 상정하고 이들만이 정치 권력을 잡아 다른 모든 (열등한) 이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즉 민주정이라기보다는 철저한 능력제에 가깝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발언이 현대 민주국가에서 쓰일 수 있는 것은, 아테네 민주정과 현대 민주정이 지닌 차이점 때문이다. 아테네 민주정은 모든 사람[91]이 통치에 적합한 능력을 완전히 똑같이 가지고 태어났다는 대전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능력의 차이라는 개념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추첨 민주정 체제있다. 즉 정치에 특화된 전문적인 프로 정치인이 아닌, 여러 분야에 두루두루 걸쳐있는 전인적인 아마추어[92] 시민들이 이끌어야 한다는게 아테네 민주정의 대전제였다. 이는 현대 민주정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당장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통치에 특화된 전문적 '프로 정치인'을 가려내기 위해 선거를 치른다. 이는 아테네와 분명히 다른 상황이다.[93] 무엇보다도 계몽주의의 대두 이후로 국가는 국민들에게 의무교육을 제공하며 국민은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확보한 채로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이것이 매우 큰 차이점인데, 과거엔 의무 교육이란 것 자체가 없었으며 당연히 기본 지식조차 없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우리나라 교육과정만 봐도 국어를 통해 자국어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수학을 통해 탐구와 활용, 응용력을 만들게 하며 영어를 통해 다른 나라의 언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역사를 통해 과거의 과오, 선행 등을 두루 살펴보면서 미래로 나아갈 사고력과 탐구력을 제공한다. 그외 많은 탐구 과목들을 통해 교육한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기본적인 지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유하는 자세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므로 과거의 시민과 작금의 시민은 차이가 많다. 무엇보다 일부 계몽주의자들이 왕권신수설과 같은 전제군주체제를 옹호했음에도 결국 권력의 분산화가 일어난 것은 절대적 1인이 유능하느냐 무능하느냐 50:50에 기대는 것보다 시민을 교육시켜 합리적 인간을 많이 만들면 최소한 51:49 정도는 합리적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법 개념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법이 국가의 모든 종류의 정치권력보다 상위에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체계화되어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은 《법률》 편에서이다. 《법률》 편에 개진된 생각의 정도와 범위가 오늘날 우리의 시각에서는 미약한 것일지라도, 이런 생각은 비교적 독립된 사법권과 이에 보편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 제도화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행정관의 신뢰성과 그들에 대한 통제는 아테네에서 이미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플라톤의 제안은 행정관들의 모든 조치와 영역에 이런 통제를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알려진 바대로 플라톤은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반대했던 아테네의 민주주의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것이었으며,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테네 민주주의 못지 않게 《법률》 편이 제시하는 법의 지배와 혼합정체론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법률》(김남두, 강철웅, 김인곤, 김주일, 이기백, 이창우 옮김) 옮김이 해제

플라톤 철학에서 언급되는 민주정체는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아테네의 직접민주정체이다. 상술된 바 있지만 플라톤의 전성기 시절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겪은 고통, 그리고 패배가 끼친 후유증 등으로 인해 개판이었다. 이 와중에 소크라테스도 시민의 투표로 죽는 등, 플라톤 입장에서 민주정은 지배자들(참정권을 지닌 시민)의 이해관계만을 따지는 주제에 중우정치로 흘러가는 정치 체제였다.[94]

민주주의와 귀족정을 구분짓는 것은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는가 아니면 일반대중에게 있는가하는 차이이다. 민주주의자란 대중이 어리석고 비열하며 천박하다 할지라도 권력을 나누어 주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현대의 '민주주의' 개념과 고대 플라톤의 직접 민주정체와 과두, 참주정체는 의미가 다르다. 플라톤은 '능력검증 없이 명문귀족 혈통이란 이유만으로 통치자격을 부여하는 형태의 귀족정'은 부정했으며, 모든 시민[95]이 평등하게 교육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플라톤 이론에서의 '철인'은 능력에 의해서 그 자리를 쟁취한 인간에 가깝다. 플라톤의 주장은 "통치에 적합한 소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능력주의(meritocracy)적이고 수호자주의(guardianship)적이다. 여기에 혼합정치를, 곧 현대적으로 말해서 권력분립을 결합한 것이 플라톤의 폴리테이아(政體) 이론이다.[96]

그러나 플라톤이 전체주의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의견은 있다. 칼 포퍼(『열린 사회와 그 적들』)나 로버트 달(『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등의 관점에 따르면, 플라톤은 열린 사회의 적, 수호자주의자이다.[97]

로버트 달에 따르면,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 전제는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통치하는 능력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며,[98] 여기에서 "모든 이들이 스스로에 대한 통치에 있어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뻗어나온다. 로버트 달은 현대 민주주의가 전문가의 필요성 등에서 능력제적 요소를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전문가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 가운데 하나인 "최종적 주권자인 평등한 시민들이 중요한 사안에 관해 적절한 정보를 제공받는 것"을 돕는 데 한정되며, 최종적 결정권은 평등한 시민들이 갖는 것이라고 논한다. 즉, 대의제와 선거를 플라톤적 개량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어렵다. 현대 민주주의가 대리인 선출이라는 대의제적 요소를 갖게 된 것은 근대국가의 큰 규모를 아테네식의 직접민주주의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모든 시민들이 단 30초만 직접 발언한다고 해도 1억 5천만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시공간적인 제약을 결코 극복할 수가 없으므로 분업의 차원에서 유일한 대안인 대의제가 등장한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플라톤적인 "통치에 적합한 소수"를 결코 상정하지 않는다. (정신질환이나 연령에 따른 선거권 및 피선거권 제한을 예외로 하면) 누구도 평등한 성인 시민 가운데 일부는 통치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하지 않는다는 점만 보아도 그러하다. 이는 의원내각제-비례대표제 민주주의 국가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사람들은 특정 인물이 "통치에 적합한 소수"라고 믿기 때문에 표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당의 정책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다만 고전적 민주정이 현대의 민주정으로 발전한 것이 플라톤적 개량의 의도인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현대 민주정에서도 플라톤적 호소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여지는 분명히 있다. 위에서 인용하듯, 로버트 달 역시도 현대 민주정이 능력제적 요소를 어느정도는 받아들였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 민주정은 '자기통치능력'이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지언정, '통치능력'에서의 차이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통치능력'의 차이를 부정한다면, 대의민주정의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제비뽑기를 통한 대표 선출이다. 인구수의 문제로 순수한 직접민주주의가 힘들었던건 아테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똑같으며, 그렇기에 아테네는 '제비뽑기'라는 방법으로 관료를 선발했다. 왜냐하면 통치능력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테네의 방법을 21세기 민주국가들이 과연 따라하고 있을까? 아니다. 비록 대의민주정이 직접민주정의 현실적 한계(시간, 비용 등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해진 것일지언정, 선거라는 제도는 명백히 '더 알맞은' 사람을 가려내는 제도이다. 심지어 총선에서의 비례대표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비례대표제 항목에서 보듯이, 부적합 인물의 출마 가능성이 있는 것 자체는 비례대표제가 가진 문제점으로 여전히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사람들은 비례대표에서조차 적합한 인물이 좋은 순번을 받았는지, 혹시나 부적합한 인물이 비례대표로 당선되지를 않았는지를 '너무나 당연하게' 검토한다. 이는 '통치에 적합한 누군가'라는 관념이 민주사회에서도 호소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현대 민주정이든 아테네 민주정이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자"라는 것에는 동의를 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는 플라톤의 비판이 현대 민주정도 공격하는 것이기는 하다. 평범한 사람의 목소리를 막으려 한 플라톤의 생각은 21세기 관점으로도 가혹하다. 그러나 21세기의 평범한 사람들은 비록 목소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다시 말해서 선거가 참정권의 유일한 발현은 절대로 아닐지언정, '적합한' 대표를 선별해야 할 상황은 인생에서 끊임없이 닥쳐온다. 바로 그 상황에서,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라는 플라톤적 호소는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99] 플라톤의 이런 철학을 엘리트주의로 말하며 소수의 엘리트가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은데, 현대 민주주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국민들을 엘리트로 만들고자 교육에 힘쓰는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대해 고대에서부터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동시대에 이미 플라톤은 내 사상을 표절했다던가, 혹은 내가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사상을 표절했다던가 하는 얘기도 많았으며, 아리스토파네스나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등에서도 어느 정도 플라톤 사상의 혁신적인 부분과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4. 대화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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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록

ὦ φίλε Πάν τε καὶ ἄλλοι ὅσοι τῇδε θεοί, δοίητέ μοι καλῷ γενέσθαι τἄνδοθεν· ἔξωθεν δὲ ὅσα ἔχω, τοῖς ἐντὸς εἶναί μοι φίλια. πλούσιον δὲ νομίζοιμι τὸν σοφόν· τὸ δὲ χρυσοῦ πλῆθος εἴη μοι ὅσον μήτε φέρειν μήτε ἄγειν δύναιτο ἄλλος ἢ ὁ σώφρων.
친애하는 판과 이곳의 다른 모든 신들이시여, 저의 내면이 아름다워지도록 허락하소서. 제가 밖으로 가진 모든 것이 제안에 있는 것과 우애 있도록 허락하소서. 제가 지혜로운 자를 부유한 자로 여기게 하소서. 절제 있는 자 말고는 다른 누구도 나를 수도 끌고 갈 수도 없는 만큼의 그득한 황금이 제게 있게 하소서.
― 『파이드로스』 279c

ἀλλʼ οὔτʼ ἀπολέσθαι τὰ κακὰ δυνατόν, — ὑπεναντίον γάρ τι τῷ ἀγαθῷ ἀεὶ εἶναι ἀνάγκη— οὔτʼ ἐν θεοῖς αὐτὰ ἱδρῦσθαι, τὴν δὲ θνητὴν φύσιν καὶ τόνδε τὸν τόπον περιπολεῖ ἐξ ἀνάγκης. διὸ καὶ πειρᾶσθαι χρὴ ἐνθένδε ἐκεῖσε φεύγειν ὅτι τάχιστα. φυγὴ δὲ ὁμοίωσις θεῷ κατὰ τὸ δυνατόν· ὁμοίωσις δὲ δίκαιον καὶ ὅσιον μετὰ φρονήσεως γενέσθαι.
나쁜 것들을 없애버리는 것도 불가능하고(좋은 것에 상반되는 어떤 것이 항상 있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나쁜 것들이 신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 것도 불가능하니, 그것들은 사멸하는 존재와 이 세상을 떠돌아다닐 게 필연적입니다. 그런 까닭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곳에서 저곳으로 달아나려 시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달아남이란 가능한 한 신에 동화됨이며, 신에 동화됨이란 슬기를 갖추고 정의롭게 경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 『테아이테토스』 176a-b

τὸ νικᾶν αὐτὸν αὑτὸν πασῶν νικῶν πρώτη τε καὶ ἀρίστη.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 모든 승리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며 최선의 것이다.
― 『법률』 1권, 626e

6. 평가

사악한 사람은 찬양할 자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으로, 죽어야만 하는 인간들 중에서 누구도 능가할 수 없던 플라톤만이 그 자신의 삶과 자신의 저술 탐구를 통해 인간이 동시에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줬다.
아리스토텔레스[100]
χρυσοῦν.
황금.
에피쿠로스, 단편 238[101]
divinus, sapientissimus, sanctissimus, Homerus philosophorum.
신적이며, 누구보다 현명하며, 누구보다 경건한 철학자들의 호메로스.
―파나이티오스, 단편 83
vir doctissimus atque Plato idem gravissimus philosophorum omnium,
모든 철학자들 중 가장 박식하고 권위 있는 플라톤.
키케로, 『법률론De Legibus』 2. 14
철학자들의 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 2.12.32 #
οὕτως καὶ τῆς φιλοσοφίας ὁ λόγος πρότερον μὲν ἦν μονοειδὴς ὡς ὁ φυσικός, δεύτερον δὲ Σωκράτης προσέθηκε τὸν ἠθικόν, τρίτον δὲ Πλάτων τὸν διαλεκτικὸν καὶ ἐτελεσιούργησε τὴν φιλοσοφίαν.
철학의 논의는 먼저 자연에 관한 것이 유일한 형태였고, 두 번째 것으로 소크라테스가 윤리에 관한 것을 덧보탰고, 세 번째로는 플라톤이 변증술에 관한 것을 덧보태서 철학을 완성에 이르게 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Βίοι καὶ γνῶμαι τῶν ἐν φιλοσοφίᾳ εὐδοκιμησάντων』 3.56
qui solus omnium sic philosophatus est, ut ad veritatem propius accederet.
모든 사람 중에서 진리에 더욱 가깝게 접근하고자 철학에 몰두한 유일한 사람.
락탄티우스, 『신적 교양 강요Epitome Divinarum institutionum』 38.1
Plato Aegyptum et Architam Tarentinum, eamque oram Italiae, quae quondam magna Graecia dicebatur, laboriosissime peragravit; ut qui Athenis magister erat et potens, cuiusque doctrinam Academiae gymnasia personabant, fieret peregrinus atque discipulus, MALENS ALIENA verecunde discere, quam sua impudenter ingerere. Denique cum litteras quasi toto fugientes orbe persequitur, captus a piratis et venundatus, etiam tyranno crudelissimo (Dionysio Siciliae) paruit, captivus, vinctus, et servus; tamen quia Philosophus, maior emente se fuit.
그리하여 플라톤은 이집트와 타렌툼의 아르키타스를, 그리고 한때 대희랍이라고 불렸던 이탈리아 해안을 엄청난 수고를 들여 편력했습니다. 그래서 아카데미아의 학교에 큰 반향을 일으킨 아테네의 스승이자 권력자였던 사람은 순례자이자 학생이 되어서 뻔뻔하게 나서기보다 조심스럽게 배우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달아나는 모든 별들을 쫓듯이 학문을 뒤쫓다가 해적들에게 붙잡혀 팔려갔고, 가장 잔인한 폭군 앞에 잡히고, 묶이고, 노예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였기에, 그를 사들인 자보다 더 위대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편지 53 파울리누스에게epist. LIII: ad Paulinus』 1
Plato, uir sapientissimus et eruditissimus temporum suorum, qui et ita locutus est, ut quaecumque diceret magna fierent, et ea locutus est, ut quomodocumque diceret, parua non fierent, [...]Igitur Plato adiciens lepori subtililitatique Socraticae, quam in moralibus habuit naturalium diuinarumque rerum peritiam, quam ab eis quos memoraui diligenter acceperat, subiungensque quasi formatricem illarum partium iudicemque dialecticam, quae aut ipsa esset aut sine qua omnino sapientia esse non posset, perfectam dicitur composuisse philosophiae disciplinam, de qua nunc disserere temporis non est.
플라톤은 당대의 가장 지혜롭고 가장 박식한 인물이었다. 그가 발언하는 방식에 의하면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대단한 것이 되었고 그가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사소한 얘기가 되지 않았다. [...] 그러니까 플라톤은 윤리 도덕에 관해서 품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정교함이라는 세련미에 자연 사물과 신적 사물에 관한 전문 지식을 첨가하였으며, 이 지식은 내가 방금 열거한 인물들에게서 부지런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거기다 철학의 여러 분야들의 훈련 내지 조정의 역할을 하는 변증론辨證論을 덧붙였으니 변증론으로 말하자면 그 자체가 지혜이거나 그것 없이는 지혜가 전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철학을 완전한 학문으로 집대성하였다는데 지금은 그것을 토론할 시간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아카데미아학파 반박Contra Academicos』 3. 17. 37. 성염 번역.
플라톤은 벗이요, 진리는 더한 벗이라.
Amicus Plato, sed magis amica veritas.
라틴어 격언[102]
경쾌한 비둘기는 공중에서 자유롭게 공기를 헤치고 날면서 공기의 저항을 느낄 때, 공기가 없는 공간에서는 훨씬 더 잘 날 줄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감성세계가 지성에게 그렇게 좁은 경계를 쳐놓는다는 이유로 감성세계를 떠나, 관념의 날개에 의탁해서 피안의 세계로, 곧 순수 지성의 허공으로 감히 날아들어 갔다. 이 때 그는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는, 그가 말하자면 거기에 의지해서 그 지점에서 지성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그의 힘을 쓸 수 있는 토대인 버팀목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길도 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사변 속에서 인간의 이성이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의 건축물을 완성해 놓고는 그 후에 가서야 비로소 그 기초가 잘 놓였는지 어떤지를 조사하는 것은 인간 이성의 흔한 운명이다.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B8 이하[103][104]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
여지껏 사상가들에 의해 쓰이고 논의되는 모든 것들이 플라톤에게서 나왔다.[105]
랠프 월도 에머슨
나의 철학은 전도된 플라톤주의이다.
프리드리히 니체[106], <<비극의 탄생>> Ⅲ 3:207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가장 확실하고 일반적으로 특징짓는다면, 그것은 그 전통이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학자들이 그의 글에서 의심스럽게 추출한 체계적인 사고방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플라톤의 글에 흩어져 있는 일반적인 개념들이 얼마나 풍부하게 해석되는지 암시하고자 이를 언급한 것이다.
The safest general characterization of the European philosophical tradi-tion is that is consists of 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 I do not mean the systematic scheme of thought which scholars have doubtfully extracted from his writings. I allude to the wealth of general ideas scattered through them.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저,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 : AN ESSAY IN COSMOLOGY』, 2nd, New York, The Free Press, 1979, p.39.
어쩌면 '철학'은 플라톤의 방법으로 추구하는 탐구 활동의 총합으로 정의될지도 모른다.
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사」[107]
플라톤주의를 모르는 사람은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법이다.
알렉상드르 코제브, 『개념, 시간, 그리고 담론』[108]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보다 피타고라스파르메니데스에게서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109] 변화하는 것은 가짜고, 불변하는 초월적 존재만이 진짜 존재(실재)하는 것이라는 존재론을 플라톤이 계승했고, 이것이 향후 서양철학과 중세신학의 기본 틀이 되었다. 중세 초기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의 철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더 정확히는 기독교가 서양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적극 수용한 것. 그러나 플라톤의 사상과 기독교의 사상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고[110], 이는 후에 그노시아 등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일반적 입장과 대립되는 이단의 출현을 야기했다.[111]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지난 2000년 동안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

2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항상 첫 손에 꼽히는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다. 플라톤의 이데아[112]론을 통해 서양철학사를 상징하다시피 하는 세부철학인 관념론이 탄생하게 되었고, 이러한 관념론을 신(神)의 입장에서 연구한 것이 중세철학이고, 인간의 입장에서 연구한 것이 근대철학이며, 부정하려 하는 것이 현대철학이다. 때문에 그의 철학적 업적과 영향력은 이뤄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113]

7. 기타

  • 플라톤의 책을 번역한 책들보면 책의 여백에 페이지 번호와 다른 숫자가 매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어 번역 뿐 아니라 영어 등 다른 언어의 플라톤 번역서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번호는 '스테파누스 번호'라고 불리며, 학술적으로 플라톤의 글귀를 인용할 때 표준적으로 사용되는 번호이다. 가령 티마이오스를 인용할 때 'Tim. 29d' 이렇게 인용해도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번호는 Henri Estienne(라틴어로 Henricus Stephanus)라는 사람이 1578년에 제네바에서 3권으로 구성하여 출판한 플라톤 전집에서 유래했다. 이 전집은 한 면에 라틴어 번역, 한 면에 고대 그리스어 원문을 싣고 있어서 당대의 사람들이 유용하게 사용했다. 또한 이 전집은 책의 각 페이지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a에서 e까지의 문자를 해당 구역에 할당했다. 스테파누스 넘버가 영문자로 끝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 "에우튀프론"에서 신화를 비판했는데, 이는 후대의 이신론이나 '신으로 비유되는 세계법칙에 대한 철학'은 아니고 무신론은 더더욱 아니다. 플라톤의 비판은 자극적이고 비윤리적인 이야기를 창작하는 시인들과 제사에 대한 기복신앙적 이해에 관한 것이다. 오히려 대화편 전체에 걸쳐서, 신탁을 내리는 신들과 세상에 개입하는 다이몬(신령)들에 대한 진지한 믿음을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다. 곧, 플라톤은 경건한 고대 아테네인이었다.[114]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 이런 조언을 하면서 돌아다니고 여기저기 참견도 하면서, 공적으로는 여러분의 무리 앞에 올라와 국가를 위해 조언하는 일에 엄두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스러운 일이라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는 까닭은, 내가 여러 번 여러 곳에서 그 말을 하는 걸 여러분이 직접 들은 적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 어떤 신적인 혹은 신령스러운 것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멜레토스가 고발장에 써서 희화화한 것도 바로 이런 것이고요. 내겐 이것이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어요. 어떤 목소리가 생겨나는데, 생길 때마다 늘 내가 하려는 일을 못하게 말리긴 해도 하라고 부추기는 적은 한 번도 없지요. 내가 정치적인 활동들을 하는 것에 반대한 게 바로 이것인데, 내가 보기에 그 반대는 정말 훌륭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테네인 여러분, 이 점을 여러분이 잘 알아 두었으면 하는데, 내가 오래전에 정치적인 활동들을 하려고 시도했더라면 오래 전에 이미 죽었을 것이고, 여러분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아무런 이득울 주지 못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31c-e, 정암학당
  • 말년에는 천체가 바로 신이며 올림포스는 이들과 신을 중개한다고 주장하고 이 모든 것을 데미우르고스가 창조했다고 주장했는데,[115] 이 역시도 고대 헬라스에서 특별히 세속적인 종교관은 아니었다. 많은 고대인들이 그렇듯이, 고전기 헬라스인들도 천체를 신이라고 생각했고,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그 자체로는 '제작자'라는 서술적 표현이지 기존 종교에 대한 부정이 아니었다.[116]
  • 어리석은 사람은 땅과 가까워져서 4발 동물이 되고, 더 심해지면 뱀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ἀρετή라는 그리스어가 흔히 덕으로 번역되는 것도 철학과에서 플라톤 설명에 있어서 시간을 빼먹는 요소 중 하나이다. 한국말로 덕이라 하면 인덕이나 덕이 깊다 등 사람의 뛰어난 성품과 관련된 뉘앙스가 강하다. 그러나 ἀρετή는 덕이라는 요소도 있지만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요소가 강하다.[117][118] 따라서 플라톤 권위자인 박종현 교수는 역서에서 ἀρετή를 단순히 덕이 아닌 훌륭함 내지는 훌륭한 상태로 해석한다. 그런 논리에서 dikaiosyne를 정의(justice)보다는 올바름, 올바른 상태 등으로 해석하는 것을 선호했다.
  • 마지막 저서 《법률》에서, 수학을 공부하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주장했다.
  • 2024년 4월 23일, 피사대학교 라노키아 교수 연구팀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된 두루마리[119]를 AI를 이용하여 해독하는 과정에서 플라톤의 정확한 무덤 위치를 알아내었다고 발표하였다. 헤르쿨라네움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할 당시 폼페이와 함께 소멸한 곳으로, 두루마리가 극심하게 탄화되어 사람 손으로는 계속 연구하기 어려운 상태였는데 AI로 글을 새로 읽어낸 것이다. 플라톤의 무덤은 아카데미아 내 정원의 개인 공간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 필로데무스의 "아카데미아의 역사"는 이외에도 플라톤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전하고 있는데, 플라톤이 죽기 직전에 트라키아 노예 소녀의 연주를 듣고 부족한 걸 지적했다던지, 플라톤이 노예로 팔린 시점이 기존 알려진 시기보다 더 이른 스파으타가 아이기스를 점령했던 때 혹은 소크라테스가 사망한 직후로 보인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아카데미아의 역사가 많이 해독되면 플라톤에 대해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더 드러날 수 있으며 또는 전혀 몰랐던 플라톤의 새로운 저술이 드러날 수도 있어서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어쨌든, 플라톤의 생애에는 어머니나 자매를 제외하고 여성이라곤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에게는 크산티페와 테오도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피튀아스와 헤르퓌리스라는 여성이 이야기되곤 하지만 평생을 독신으로 산 플라톤에게는 그런 사람은 물론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유명인사에게 늘 따라다니는 여성 스캔들 관련 일화조차 없다. 게다가 그는 예상과 달리 동성애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GG. Field(1967) p.28) 아마도 그는 그의 철학이 갖는 엄격함만큼, 마치 수도승처럼 경건하고도 금욕적인 태도로 평생을 살아간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의 《편지들》(강철웅, 김주일, 이정호 옮김) 부록에서 발췌
  • 플라톤의 <향연> 속 알키비아데스 묘사와 당대 그리스의 풍습 때문에 플라톤이 동성애를 좋아한거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운동경기, 전투, 정치, 철학, 수사술과 같은 높은 신분의 활동들은 자유인 신분의 남성들에게 국한되어 있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성인 남성이 18세 이하의 소년을 애인으로 삼는 문화가 자연스러웠다. 당시에는 잘생긴 소년은 강한 성적 매력을 풍기는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아무리 잘생겼더라도 성인 남성은 성적 매력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120] 성인 남성들은 성적 욕망에 이끌려 소년들을 따라다녔다. 성적 욕망의 대상인 소년들은 그 욕망을 공유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에 비해 소년 애인은 성인 남성과의 관계에서 물질적 이득, 사회적 성공, 애호, 존경등의 다양한 연애 동기를 가질 수 있었지만, 성적 욕망이나 쾌락은 앞서 말했듯이 동기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물론 그 중에는 성인 남성이 소년의 성적인 욕망을 자극시킬 가능성도 있다. 통상 능동적인 역할의 성인 남성은ἐραστής(사랑하는 자)로, 수동적인 역할인 소년은 ἐρώμενος(사랑받는 자) 또는 padika(소년 애인)으로 지칭하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라고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소년애 관계는 대등하지 않았다. 참고로 이러한 소년애 관계는 시민권을 따기 전인 소년에 대한 사회적, 교육적인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연애와 교육적인 기능,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동성애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소년애는 그리스 사회에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121][122] 오늘날 육체적 사랑과 대비되는 정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플라토닉 러브'[123]는 플라톤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를 처음 쓴 사람은 이탈리아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르실리오 피치노다. 그는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처음 번역하면서 유럽 전역에 플라톤의 사상을 소개했다.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플라톤의 에로스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단테의 개념 등을 결합하면서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념을 재해석하여 만들어낸다. 그에 따르면 '플라토닉 러브'는 플라톤이 묘사한 사랑이고, 그것은 즉 신의 사랑이었다. '플라토닉 러브'는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편지와 그가 주석을 단 <향연>에서 처음 쓰였다. 피치노의 '플라토닉 러브' 개념은 15,16세기 전반 유럽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문학작품에서 '플라토닉 러브'는 피치노의 철학적인 배경과 분리되고 희석되었다. 또한 플라토닉 러브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시민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던 소년애와 맞물리면서 그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한다. '플라토닉 러브'는 남자 어른과 소년과의 동성애, '에로스'는 이성애로 오해되었다. 영어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이 처음 쓰이게 된 것은 영국의 작가 윌리엄 데버넌트의 책, 희극 <The Platonick Lovers>(1635)이다. 윌리엄은 작품에서 <향연> 내용을 토대로 덕과 진리 사이에 있는 선(善)에 대한 사랑을 플라토닉 러브라고 주장했다. 이후 플라토닉 러브는 영국 왕실과 상류사회의 중요한 패션으로 자리 잡는다. 사랑을 육체적인 대상물로 표현하는 것은 저급한 계층에서나 하는 이야기며, 사랑은 품위가 있어야 하며 고매해야 진정한 사랑이라는 분위기가 퍼진 것이다. 이렇듯 오늘날 육체적 사랑과 대비되어 쓰이는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은 원래의 에로스[124] 어원에서 많이 멀어진 채로 쓰인다고 할 수 있다.

8. 대중매체에서

  • 락 오브 에이지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좀비가 된 채로 르네상스 시대의 트렌토에서 출연한다. 난데없이 무덤에서 되살아나 중세 시대의 인물들을 전부 쫓아낸다.
  •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서는 소년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아리스토클레스가 본명이지만, 본인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미스티오스가 그럼 이름을 바꾸지 그러냐고 말하자, 자신의 동생이 자기 이름을 발음하기 어렵다며 플라톤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자신도 그렇게 부르겠다고 한다.


[1] 아폴로도로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타르겔리온 달(현대의 5월)의 일곱째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2] 물론 플라톤 이전에도 헬라스에는 엄연히 철학자들이 존재했으며, 직계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물론이고 피타고라스 등 여러 위대한 선학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선학들은 저작이 단편으로만 전해질 뿐 온전히 남아있지 않으며, 이미 헬레니즘 시대에도 플라톤은 가장 중요한 헬라스 철학자로 대우 받고 있었다.[3] theōria. 라틴어 contemplatio, 영어 contemplation으로 번역된다.[4] 이탈리아어로도 똑같은데, 이탈리아어 어휘는 라틴어 어휘와 똑같은 경우가 많다.[5] 대화편 <<파이돈>>과 <<국가>>로 대표됨.[6] <<크리톤>>, <<국가>>, <<법률>> 등.[7] <<향연>>, <<파이드로스>> 등.[8]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Διογένης Λαέρτιος,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Βίοι καὶ γνῶμαι τῶν ἐν φιλοσοφίᾳ εὐδοκιμησάντων III,4.[A] 다만 플라톤의 본명이 정말 아리스토클레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플라톤보다 600년 뒤의 인물이기 때문에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플라톤의 이름이 태어났을 때부터 플라톤이었으며 아리스토클레스는 낭설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이 있으니 참고하자. Notopoulos, J. A. (1939). The Name of Plato. Classical Philology, 34(2), 135–145.[10] 플라톤의 부모(아리스톤과 페릭티오네)는 모두 아테네 명문 귀족 집안이다. 그의 외삼촌인 카르미데스와 외가족 5촌 당숙인 크리티아스는 '30인 정권'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가족들은 그의 저서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다. 《국가》에서는 아버지의 가계와 형제 아데이만토스, 글라우콘을 언급한다. 어머니 가계는 《카르미데스》, 어머니가 재혼해서 낳은 안티폰은 《파르메니데스》에 대화의 전달자로 나온다. 그러나 플라톤 자기 자신은 전체 대화편에서 단 세 차례만 언급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두 차례, 《파이돈》에서 한 차례 언급된다. 플라톤의 개인사는 대화편보다는 주로 플라톤의 서한집에서 취한다. 플라톤의 서한집은 위작 논란이 많지만, 플라톤의 개인사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7서한은 거의 진품에 가깝다고 인정된다. 말하자면 아마 플라톤이 직접 쓰지는 않았더라도 최측근이 쓰지 않았겠냐는 정도.[11] 플라톤은 고전 그리스어로 '넓다'라는 뜻인데, 이마 또는 어깨가 넓어서 붙여진 별명 내지는 개명된 새 이름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플라톤의 비문에서도 '플라톤'이란 이름과 '아리스토클레스'란 이름이 병행된다.[A] 다만 플라톤의 본명이 정말 아리스토클레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플라톤보다 600년 뒤의 인물이기 때문에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플라톤의 이름이 태어났을 때부터 플라톤이었으며 아리스토클레스는 낭설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이 있으니 참고하자. Notopoulos, J. A. (1939). The Name of Plato. Classical Philology, 34(2), 135–145.[13] 이스트미아 경기대회에서 두 차례 우승하는 등 실력도 좋았다고 한다.[14] 제7서한에 플라톤은 정치 문제들이 천변만화하는 양상을 보고는 현기증을 느끼게 되었다고 나온다. 그와 더불어 현존하는 대부분의 법률이 폐기물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엄청난 운빨이 아니고서는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고 보아서 그를 제대로 개선할 수 있는 길을 몸소 보여주고자 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15] 역시 제7서한에서 플라톤은 당시 자신이 정치하면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위기도 있었기 때문에 철학자가 되었다고 한다.[16] 표면적인 이유는 국가 제도를 비판하고, 젊은이들을 현혹시켰다는 내용이었지만 진짜 이유는 아테네를 망쳐놓은 폭군 2명(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을 제자로서 배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느 쪽이든 법치주의에서 볼 때 어이없는 내용이기는 마찬가지.[17] 스승이 억울하게 죽어나가는 걸 보고 민주정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에, 플라톤의 민주정 혐오가 스승의 죽음 때문이 아닌가 하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이건 너무나 단순화된 설명이다. 플라톤은 Demokratia(데모스정치)를 싫어했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Demokratia(데모스정치)는 '다수의 다스림' 중에서도 특히 부정적인 형태를 지칭하는 표현일 뿐이다. 즉 플라톤이 반대한 것은 Demokratia(데모스정치)이지 '다수의 다스림'이 아니며, 오히려 다수가 다스리더라도 공공선에 따라 다스리는 형태는 Politeia(시민정치)라 부르며 좋게 평가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이 싫어한 체제는 '다수가 다스린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다수가 _나쁘게_ 다스리는 것'이다. 다수가 __ 다스리면, 그건 Demokratia(데모스정치)가 아니라 Politeia(시민정치)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다.[18] 헤라클레이토스 학파의 일원.[19] 파르메니데스를 연구했던 철학자.[20] 메가라 학파의 창시이자 철학자인 에우클레이데스를 말한다. 동명의 수학자 유클리드(영어식 발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21] 아카데메이아는 장소이름이고, 여기에 지은 학원이 '아카데미아'다.[22] 피타고라스학파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남부 이탈리아 타라스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필롤라오스의 제자다. 단 동문수학 했는지는 알 수 없다.[23] 단,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는 이야기는 10세기 이후의 서적에서야 언급되기 시작한다.[24] 플라톤이 죽을 당시,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를 침공했던 시기여서, 마케도니아 출신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원을 계승하지 못했다. 이후 아카데미아는 조카(보다 구체적으로는 플라톤 누나의 아들) 스페우시포스가 이끌어나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후에 다시 아테네로 와서 정착해 리케이온 학원을 차린 것.[25] 플라톤의 본명.[26] 아폴론의 별칭.[27]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 신의 아들로서 의사였으나 제우스의 벼락을 맞고는 죽어서 신이 되었다.[28] 보통 변론에 나오는 소크라테스가 역사적 소크라테스에 가깝지 않을까 추측하지만 이것마저도 불확실하다.[29] 플라톤의 전기저작등과 소크라테스의 말이나 사상이 너무 차이가 났다.[30] 일반적으로 존재, 실존 등으로 번역된다.[31] 플라톤은 인간의 감각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이 예시에서는 착각의 가능성(예:나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을 제외했다.[32] 이미 인공지능은 캡챠등을 극복하는 알고리즘을 만들었다.[33] 플라톤 대화편에서는 같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전개하니까 여기서도 유사함이나 다름이 아니라 같음이라고 치자.[34] 이 얘기에 대해 아니 같음이란 개념, 즉 같음 자체란 것도 결국 우리의 감각경험이 쌓이면서 생긴 것이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니 뭔 소리하냐? 라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 말대로 우리가 감각경험을 한 후, 우리의 감각경험을 우리 안의 여러 개념들과 비교하고 대조해 보는 매커니즘이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안의 여러 개념들은 감각경험이 쌓여진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은 좀 그렇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념은 결국 감각경험이 쌓이게 해주는 매커니즘 아래에서 축적된 것이니까, 이렇게 잘 생각해 보면 감각경험 이전의 매커니즘이라거나 시스템이라거나 아무튼 감각경험의 토대가 되는 뭔가가 있기는 있는 것 같다. 둘째로, 현실 세계에서는 명확히 똑같은 감각경험을 하는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감각경험이 쌓여도 같음 자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할까? 같은지 아닌지 판별해서 사물의 종류를 분류하는 개념 즉 같음이라는 개념은 매우 어려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감각경험이 충분히 쌓이기 전부터 이미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두 가지 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같음 자체가 감각경험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35] 그리스 신화적, 종교적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물론 플라톤이 제법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 가긴 하지만, 고대인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36]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알고, 하는 데 같음이란 개념 자체가 굳이 필요하냐? 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같다, 다르다, 유사하다와 같은 개념들 없이 우리가 인식하고 생각하고 뭐 이러는 건 어려운 것 같다. 사과 A와 사과 B를 봤을 때 그것은 사과라는 면에서 같다. 그러나 생긴 게 다르니까 다른 사과 A와 B다. 이처럼 우리가 인식하고 생각하는 과정에는 같다, 다르다, 유사하다와 같은 개념들이 필요한 것 같다. 혹은, 나의 시력이 너무나 안 좋은 나머지 사과 A와 B의 차이를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내가 분간할 수 없는 사과 A와 B가 동시에 내 눈앞에 내밀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당연히 다른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분간한다. 이런 걸 봤을 때 우리가 뭘 보고 아는 데 같고 다르고 유사하고 이런 개념은 필요한 것 같다.[37] 이어지는 반박으로, 야 그래 거기까진 인정하겠다. 뭔가 감각경험 이전의 토대나 체계는 있는 것 같다 그건 인정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뭐 우리 혼이 윤회하고 어쩌고를 떠나서, 그리고 뭔가 같음이나 그 자체라는 이데아인가 싶은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우리의 개념이나 앎이 우리의 경험을 떠난 어딘가에 있다던가 그건 아닌 것 같다 하는 반박도 가능하다. 이건 강력한 것 같다.[38] 조약한 축약본이니 더 궁금하면 파이돈을 사서 읽어보라.[39] 상기설과 혼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소피스트들, 특히 고르기아스 저격이 들어가 있다. 고르기아스는 1. 존재란 게(진짜 있다는 게, 있음이, ~이다 혹은 ~임에서 ~에 속하는 부분이) 뭐냐? 2. 그딴 게 있은들 우리 인간이 알 수 있으리? 3. 응 많이 봐줘서 우리 인간이 그딴 걸 알 수 있다고 쳐 줘도 그걸 남한테 전한다는 건 불가능하거든? 하고 주장하는데 이 논리를 저격하는 부분이다. 응 영혼의 수준에서 앎이라는 것이 새겨져 있으니까 인간들끼리 올바른 지식의 인식 및 전달 및 교습이 가능하거든? 하는 플라톤의 주장이다.[40] 인식 구조를 이루는 원자적 요소라는 말은 상기설에서 상술된 바 있는 같음에 대한 얘기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같음 그 자체, 동일함 그 자체란 말은 좀 거칠게 말하면 이데아에 속한다는 말이다.[41] 아래에서도 나오겠지만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는 국가론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42] 이는 나중에 히브리 신앙과 결합하여 기독교 신학의 근간이 된다.[43] '정치체제(polity)'에 가까운 제목이다. 라틴어로 Respublica라 번역되어서 여기에서 영문 번역명 Republic과 국문 번역명 '국가'가 튀어나왔다. 그리스어 원전을 번역한 박종현 역은 이를 반영해 <국가·정체(政體)>로 제목을 붙였다.[44] 좀 더 설명하자면, 도시국가는 규모의 한계상 아테네처럼 쌈빡한 성벽을 두른 국가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인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도시국가들이기 때문에 성인 장정 한 명 한 명은 훌륭한 직업인이자 전투원이자 정치 구성원들이었는데, 문화적인 동질감이나 충성심 등의 이유로 결원을 쉽게 보충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공성전은 공격자에게 엄청난 피해를 강요하게 된다. 따라서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서로서로 성벽 같은 걸 못 세우게 하려고 빡세게 견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가 자신들의 물량과 경제력 + 페르시아를 상대할 필요가 있다는 핑계 + 정치적 술수로 시간벌기 3콤보를 통해 기습적으로 성벽을 완성했다. 이제 다른 도시국가들이 1:1로 아테네를 상대하려고 하면 기습도 거의 안 통하고, 항구도시이자 해운국가인 아테네의 해운력과 경제력, 물량을 제대로 상대해야 된다는 얘기. 오죽하면 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 측이 아테네 측에 승리하면서 내건 휴전조건 중 하나가 아테네의 성벽 완전제거였을 정도였다.[45] 마치 이순신은 겁쟁이라서 못하지만 나는 밀어버릴 수 있다고 프로파간다를 펼치다 정작 부임하고 나서는 비현실적인 규모의 육군 지원이 없으면 못 싸운다고 핑계대다가 곤장 맞고 억지 진군을 하게 된 원균처럼.[46] 소피스트 항목도 조금 참조. 피시스와 노모스 대립에서는 안티폰이 유명하다.[47] 나무위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멜로스 대화와 소피스트들의 주장을 적당히 섞어놨다. 멜로스 대화에서 아테네인들의 주장과 완전히 합치되지는 않고 꽤 다른 부분도 있으나 배경 설명으로서는 상관 없을 것이다.[48] 스파르타는 플라톤 생전에 레욱트라 전투로 몰락한다. 스파르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아테네가 자멸로 쇠락했다면 스파르타는 구조적으로 쇠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49] 왜냐면 현실적으로 아무리 정의로운 도시국가라도 전쟁도 막 일으키고 그러면서 남한테 해를 끼친다. 또, 전설이나 역사 속의 영웅들도 어떻게 보면 남한테 해를 많이 끼치기도 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런 부분에서 트라시마코스가 분노한 것처럼 보이게 대화편을 썼던 것 같다.[50] 법 말고는 뭐 없다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현대의 법실증주의와 닿아있다.[51] 안티폰 항목에서 써 놓은 바 있지만 트라시마코스의 이런 생각은 당대 소피스트들이 실제로 펼쳤던 주장이며 플라톤이 이를 반박하기 위해 작중 등장인물로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52] 결국 양치기와 양의 관계에서도 양 측 모두 이득을 얻는다. 이와 더불어, 1권에서 플라톤은 양치기술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보수 획득술이라는 별개의 기술(techne)이 고유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보아 트라시마코스가 '범주적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물론 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라는 구절은 어느 정도 독자연구지만 희곡 형식인 대화편의 맥락을 볼 때 그렇게 보이는 점이 있다. 또 이런 부분이 플라톤 대화편의 문학적 묘미이기도 하다.[53]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트라시마코스 문서에서 서술하도록 한다.[54] 아마 플라톤은 사람들이 서로 의존적이며 사람 한 명의 힘으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진정한 기술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말하는 것 같다.[55] 1권에서 제화공 같은 사람들이 진정한 기술을 발휘해 좋은 구두를 왕창 만들어서 남을 이롭게 해준다는 얘기를 했다.[56] 현대인인 우리는 사람의 적성이나 하고 싶은 일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관해 자연스러운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그에 관해 옛날 사람들다운 순진한 개념을 통해서, 자연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균형을 맞춰놓는다고 대답한다. 옛날에는 플라톤 말고도 자연이 알아서 균형을 맞춰놓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57] 시와 음악이라니까 소설과 음악 교육으로 느껴지겠지만, 당대 뮤즈의 역할을 고려해 볼 때 역사와 도덕 및 상식 교육까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58] 한편,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나는 사형 판결을 받아도 두렵지 않다,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가면 위대한 인물을 만나볼 텐데 그게 좋으면 좋았지 뭐가 죽음이 무섭다고?" 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혹은 뻔뻔하게 응수하는데, 이 때 '저승 가면 만나볼 위인들' 중에 한 명으로 바로 호메로스가 언급된다. 시인 추방론을 말한 <<국가>> 대화편은 (당연히) 소크라테스의 재판보다 이전 시점이라는 설정인데(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힌 뒤일 리 없으니), 대화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소크라테스는 제자들 앞에서는 호메로스를 까다가, 정작 재판에 가서는 호메로스를 위대한 인물이라고 추켜세운 꼴이 된다(...). <<변론>>이 실제 소크라테스의 재판 기록에 기반해 사료로서 쓰일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인에 대한 견해는 다소 차이가 있었던 듯 의문을 품어 볼 수 있지만 <<국가>> 10권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진리에 앞서 사람이 더 존중되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할말은 해야만 하겠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스승이고 위인이여도 진리에 맞지 않는다면 비판하는 것이다. 그 비판하는 행위는 사랑과 공경을 전제로 놓고 한다.[59] 고대 그리스인들은 절제라는 덕목을 대단히 좋아했다. 기본적으로 이게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살아간 것 같다. 포도주 같은 것을 예시로 들기 좋아했다.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셨는데 너무 타면 맛이 없고, 생으로 포도주를 마시면 야만인들이나 그렇게 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균형, 절제, 중용을 중요시했다. 아니 그건 세상 사람들 다 그런 거 아닌가? 싶다면 싸우고 또 싸우다 뒤지면 예! 천국에서도 싸우고 또 싸우는 발할라가 기다린다네~ 식의 무지막지한 생각을 하던 바이킹이란 족속도 있었다.[60] 다만 유비관계는 도시에서와 달리 인간의 욕망과 혈기가 상하나 우열관계를 갖느냐고 반문했을 경우 뾰족한 대답이 나오기 어렵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이 우열관계가 비교적 확실한 도시를 먼저 예시로 제시한 다음 인간의 영혼으로 넘어가면서 그런가보다 하고 느끼도록 대충 뭉개고 넘어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61] 물론 가족을 폐지해 버리면 2세대의 생산이 멈춰버리기 때문에 이를 대충 뭉개고 넘어가는 플라톤이 희한하긴 하다. 성생활과 출산은 몸의 욕구, 즐거움이 아니라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일 것임은, 이 문서를 잘 읽었다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플라톤은 머리를 굴려서 나오는 결론에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감각적인 쾌락은 쳐주지 않으니까. 어쨌든 플라톤의 이 주장은 그 비현실성뿐만 아니라, 가족의 폐지가 과연 철학자들까지인지, 전사계급까지인지, 아니면 도시 구성원 전체에 이르는지 그것도 명확하지 않고, 전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얘기라면 아기를 도대체 몇 살부터 부모와 분리해야 하는가 등 구멍투성이지만 그러려니 하자.[62] 사실 앞의 주석은 사실 이미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다. 예컨대 사유재산의 폐지나 가족의 폐지는 단순히 플라톤이 공산주의적 사상을 지님이 아니다. 플라톤의 사유재산 철폐와 가족의 해체는 결국 수호자(방위자+통치자)들에게 해당되며, 그 이유는 국가에서 혼의 '이성적 부분'에 해당하는 통치자 계급이 사유재산이나 가족에게 그 기능(ergon)을 쓰게 될 경우 통치자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다하지 못하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플라톤은 통치자들에게 먹고 살 정도의 보수만을 주며 여타 것에 '마음 쓰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플라톤의 가족공유제와 사유재산 철폐는 kalipolis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해결책으로서 플라톤이 제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플라톤을 공부하는 이들 사이에서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종현 교수의 <헬라스 사상의 심층>과 레오 스트라우스의 <서양정치철학사 1>을 참고하면 좋다[63] 물론 그렇다고 플라톤이 공산주의자라고 본다면 이는 플라톤을 모욕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경우, 사유재산 철폐가 그들의 목적이며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해체하고 공산사회라는 이상향을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오히려 국가주의자라고 볼 정도로 국가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처자공유제와 사유재산 철폐는 공산주의와는 다르게 목적이 아닌 올바른 나라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또한 교육철학에서도 플라톤의 교육론을 배울 정도로 플라톤의 교육론은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플라톤에게 교육은 공산주의가 자본가 계급이 더욱 쉽게 착취하기 위해 이용한다는 교육과는 전혀 다르다. 플라톤의 교육은 결국 좋은 시민을 만들기 위함이고, 그 교육의 끝은 국가의 통치자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플라톤이 공산주의자라는 의견은 플라톤을 오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64] 다만 현대 플라톤주의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 같은 사람들은 플라톤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소수 의견이나마 플라톤을 공산주의를 통해 해석하려는 철학자들은 20세기 초부터 꾸준히 존재해왔다.[65] 그렇다 하더라도 플라톤을 단순히 페미니스트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플라톤은 <국가>편 3권에서 훌륭한 남성들은 여인을 모방하도록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말했었고, 10권에서는 감정을 못 이겨 날뛰는 것은 여자나 그러는 것이라는 논지의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철학자 Juila Annas는 플라톤이 남성 본질주의자이며 공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여성을 수단시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66] 이데아 소리가 나오는 순간부터가 어느 정도 형이상학이긴 하다.[67] 그러나 국가를 1빠따로 착 집어든 독자들은, 아무래도 국가만으로는 이데아에 대한 설명이 극도로 부족하기 때문에 이게 뭔 소리야! 싶은 생각에 빠져들게 되며 납득하기 어렵다.[68]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플라톤의 주장을 무시한다. 철학이 도시의 자연스러운 구성요소가 아니라 강제적인 계도의 법칙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웃기다는 것이다.[69]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민주정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70] 당연한 얘기지만 철학자들이 관우장비로 이뤄진 것도 아니고 판타지다.[71] 말하자면 왕정이다.[72] 명예지상정체는 스파르타적인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상술했듯이 아테네가 패하며 플라톤이 스파르타 체제에 상당히 경도되었음을 뜻하며, 만년에 쓴 법률이나 정치가에서는 스파르타의 병크를 잘 목격했기 때문에 스파르타 욕도 많이 한다.[73] 헤시오도스의 다섯 시대 구분, 즉 금의 시대, 은의 시대, 동의 시대, 영웅시대, 철의 시대에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 왕정(monarchy) 혹은 최선자정(Aristocracy)이었던 국가는 곧 명예지상정(Timocracy)이 되었다가, 과두정(oligarchy)을 거쳐 민주정(democracy)을 겪은 후 참주정(tyranny)에 다다르게 되며, 이후에는 참주정이 무너지고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게 된다고 보았다.[74]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부인하지만.[75] 공자 역시도 그와 비슷한 면이 있다. 흔히 공자는 '주나라'라는 '좋았던 과거'를 단순히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오해되곤 하는데, 사실 공자 사상에서 '주나라'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상의 주나라라기보다는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가공의 사회이지만,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할 이상적인 사회'에 가깝다. 공자 역시도 주나라에 대한 정보는 당대에 이미 상당수 유실되어서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76] 이를 위해서는 동물과 인간을 보살피는 기술이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 그리스인과 야만인들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시다.[77] 그렇다고 크로노스 시대가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데, 왜냐면 절대적 공유제와 신의 인도로는 충분치 않고 철학을 해야 행복하다는 것이다. 진짜 지독한 인간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78]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차이점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사의 비유를 웃기고 있다고 생각한다.[79] 이 부분은 아마 플라톤의 인식이 변화한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틑 철학자가 동굴에서 벗어나 진정한 앎을 인식한 연후 원숭이들이 들끓는 동굴로 다시 돌아가는데 그 이유는 철학자는 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원숭이 무리에게 지배를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가에서는 더럽지만 그냥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참는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80] 플라톤이 고평가한 것으로 여겨지는 스파르타는 왕이 2명이다.[81] 칼 포퍼는 여기에 노예도 포함된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그리스인이 그리스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지만, 결코 노예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82]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필연적으로 유전적 문제로 '우수집단'은 몰락해갈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수와 열등으로 나눌 때 우수의 기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사회의 다수가 되긴 힘들며 그나마 플라톤이 말하는 우수가 '열등만 아니면 괜찮다' 정도라면 유전적 문제로 자멸할 일은 없겠지만 그의 성향으로 보아 그가 말하는 우수는 적어도 평균 이상은 될 것인데 이 정도면 우수란 사회에서 소수집단이며 소수집단 간의 성교로 대를 이어나간다. 그나마 이 소수집단에서 외부 혈통이 꾸준히 유입된다면 이 체제로도 버틸 수 있겠지만 외부 혈통의 개입없이 소수혈통들끼리의 성교로 대를 이어나가면 유전적 병목현상이 발생해 각종 유전병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사실 유전학이 발달하거나 하기 전에는 이런 개념을 몰랐기에 많은 지배층이 근친혼을 하다가 부작용을 면치 못하곤 했다.[83] 다만 부모자식간의 근친상간을 막기 위해, 아이가 잉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성교를 한 남녀들은 모두 그 아이의 부모로 간주된다.[84] 사실 이렇게 보면 디스토피아 세계관인 1984의 오세아니아는 플라톤식 이상국가에 어느정도 부합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오세아니아도 3단계 계급체계 국가인데다 계급체계에 오르는 기준은 철저히 능력이기 때문이다.[85]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사람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 비슷한지 이는 공자의 정명사상, 곧 군군신신부부자자와 비슷하다. 다만 정명사상은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그 지위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사상이기도 하니, 사람이 자신에게 걸맞은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플라톤과는 방향성이 정반대다. 결론은 같지만 과정은 정반대라 할 수 있다.[86] 정치를 하면서 다른 직업도 가진다는 의미지,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 자질이 떨어진다는 비하의 의미가 아니다.[87] 단편 982.[88] 굳이 전쟁 등이 아니더라도 당시엔 50세면 자연사할 수도 있는 나이였기에 이런 조건이 붙은 것[89] 러시아공산당 제10회 대회에 제출된 우리당내의 상디칼리즘적 및 무정부주의적 편향에 대한 결의문 초안, 1921, 레닌전집 제32권, P. 257[90] 플라톤을 민주/반민주주의자로 구별하려는 시도는 현대 학계에서도 섣불리 정의내릴 수 없는 주제이다. 일례로 포퍼는 플라톤을 전체주의자이자 반민주주의자라고 해석하는 반면, 로널드 B. 레빈슨이나 존 와일드 같은 경우는 플라톤을 민주주의자에 가깝다고 해석하는 등 이견이 많다.[91] 현대의 '모든 사람'과는 범위가 다르다. 당시의 모든 사람이란 시대적 한계상 시민 남성만을 의미하고 노예와 여성이 빠졌다는 점을 간과하면 오독이 된다.[92] 위에서와 같은 원리로, 여기서의 '아마추어'는 폄하하는 의미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현대 자본주의적 인간과는 달리 전문적 삶이 아닌 전인적 삶을 살았다.[93]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비판자가 가장 많이 저지르는 오류 중 하나는, 아테네 민주정을 현대 민주정과 비교하면서 폄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옹호자가 가장 많이 저지르는 오류 중 하나는, 아테네 민주정을 현대 민주정과 동일시하면서 무작정 옹호해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둘 다 지양되어야 한다.[94]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사상적 스승인 것에 대한 죄값을 물은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적으로 알키비아데스나 크리티아스를 사주했거나 반아테네적 사상을 주입하지 않은 이상 그걸 이유로 사람에게 사형을 때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항목에서도 서술되어 있듯이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많은 부분 그가 어그로를 끌었던 탓이 있지만, 원래도 밉상인 놈이 어그로까지 끌어서 더 미워져서 사형을 때린 것, 즉 너 미우니까 죽여버린다는 것이 바로 당시 민주정의 실태 중 하나였다.[95] 상술했듯 당연히 이 '모든 시민'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뜻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야한다.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식의 현대적 시각으로 읽어서는 오독이 된다.[96] 가장 널리 알려진 <국가> 집필 시기의 플라톤 정치철학은 '옳고 그름의 전문가'인 철학자가 정치를 담당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귀족적 혈통주의와는 거리가 멀지만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인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스파르타의 몰락과 철인왕 옹립 시도 실패 등을 겪은 말년의 플라톤은 <정치가>, <법률>에서 자신의 사상을 더욱 보완하여 옳고 그름을 잘 모르는 다수 민중도, 참주로 전락할 수 있는 소수 엘리트도 아닌 법과 권력분립, 시스템에 의거한 통치를 주창하였다. 현대 대의민주정은 플라톤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여 사람이 아닌 헌법에 기반한 통치 시스템을 확립하고 정치의 전문가가 존재함을 인정해 민중의 정치 직접 참여가 아닌 더 나은 전문가를 뽑고 견제할 권리를 민중에게 부여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97] 플라톤의 저작이 희곡 형식의 문학 작품이라서 그런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는 해석이 굉장히 다양하다.[98] 플라톤도 정치가에서 철인정치가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로 누구든지 복종할 만한 우위를 가진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얘기했다. 신체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99] 비슷한 예시를 들자면, 키케로는 민중파를 물어뜯었을지언정 독재를 막으려는 민주주의자들에게 즐겨 인용되며, 존 로크가 자유를 "지배의 부재"로 해석한 것은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먼 신로마 공화주의자들에게 즐겨 인용된다.[100] "정치학" 김재홍 번역 해제를 통해 간접 발췌.[101] 라에르티오스의 에피쿠로스 8에서 재인용. 자신을 제외한 철학자들을 멍청이, 장사꾼 등으로 지칭하면서 모조리 까대던 에피쿠로스였지만 의외로 플라톤은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단편적인 말이라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힘들지만 일반적으로 플라톤의 문체를 까는 것이라고 생각된다.[102] 이는 보통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존 저작 가운데 이러한 말이 직접 나타나는 곳은 없다. 다만 비슷한 취지의 말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1096a11–15에 보인다. 아무튼 플라톤에 대한 서양철학계의 경의와 대결 의식, 그리고 철학함의 근본 자세까지 압축적으로 표현한 명언으로 자주 인용된다.[103] 임마누엘 칸트 저, 백종현 역, <<순수이성비판>>(전 2권), 서울: 아카넷, 2006, 220-221쪽.[104]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를 단 한 명만 꼽으라면 높은 확률로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플라톤과 칸트이다. 칸트는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초험적(transzendent: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 전통과 정면 대결하여 그것을 전복시킴으로써 철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고 이로 인해 플라톤급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105] Out of Plato come all things that are still written and debated about among men of thought.[106] 극렬 플라톤까인 동시에 플라톤빠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그의 전집 첫 권의 분량 대부분이 대학 교수 시절 열중했던 플라톤 연구 내용이다.[107]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러셀은 극렬 플라톤까인데도 이런 평을 내렸다.[108] 마크 릴라 저, 서유경 역,『분별 없는 열정』, 서울: 필로소픽, 2018 p.154에서 재인용.[109] 철학의 내용적인 면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또 나무위키 치고는 지나치게 과감한 시도이다. 기본적으로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 플라톤 탐구 방법의 기본을 이루는 만큼 소크라테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뿐만 아니라 아테네 사회에서 문답법을 통해 정확한 덕과 정의를 찾고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려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소크라테스 철학의 동기 면에서는 정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뻑하면 체육선생, 제화공, 의사, 목수 등을 예시로 들면서 일반 기술과 철학 기술을 동치로 놓으려는 시각 역시 소크라테스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것 아닌가 하고 보는 편이기도 하다.[110] 기독교에서 신(야훼)과 일치시킨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세상을 무에서 만든 것이 아닌, 이미 있던 물질들을 설계서에 따라 조합한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완전히 무에서부터 설계, 조합까지 그 스스로가 스스로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에서는 이를 받아들여서는 안되었다.[111] 니체는 그리스도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20세기 성서학에서는 니체 시절보다는, 신약 성서에서 헬라스 철학의 영향을 읽어내는데 회의적인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플라톤주의의 연장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가령 바울로의 경우 헬라스 철학에 대한 교양을 갖추고는 있지만, 논증 방식과 사유 체계는 핼라스 철학자보다는 유다인의 미드라쉬에 가깝다. 헬라스 철학에 대한 교양을 넘어, 본격 헬라스 철학의 길을 걷는 신학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다.[112] 생각, 관념을 지칭하는 idea, 이상을 지칭하는 ideal등의 단어들 모두가 이데아를 어원으로 두고있다.[113] 플라톤의 철학은 절대 관념론이 아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현상의 실재와 이데아의 실재를 모두 인정하는 이원론자이기 때문에 관념론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데아 개념이 관념론과 연결될 수 있다고 해도 이 문단처럼 단순히 도식화해서는 안 된다. 또한 중세, 근대, 현대 철학을 관념론에 대한 입장으로 단순화하는 서술 또한 매우 잘못된 것이다. 당장 근대 초기 경험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인 로크, 버클리, 흄 중 버클리만이 관념론자였다는 점을 생각해보자.[114] 근본적인 오해는 '신화'와 '종교'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둘은 다른 개념이며, 오히려 고전기 헬라스인들에게는 "일리아스에서 어떤 신이 누구랑 싸웠더라" 하는 것보다 신탁과 제사가 훨씬 중요했다. 가령 고전기 아테네는 시인들이 신화에 대해 비판하는 것에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신전 모독만큼은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플라톤 역시 "파이돈"에서 최악의 흉악 범죄의 예로 신전 모독을 언급한다.[115] Francois-bernard huyghe,'갈릴레오 이전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았는가',문신원 역,이끌리오,2000[116] 애당초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은 혐의가 '새로운' 신들을 아테네에 도입했다는 것이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결코 이단자가 아니라고 변호하며 살았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서 기존 종교를 부정했다는 것은, 고전기 아테네의 종교사적 맥락에서든, 대화편 내부 내러티브에서든, 플라톤의 삶이라는 맥락에서든, 텍스트를 오독한 것이다.[117] 예를 들어 페이커는 lol의 ἀρετή가 있고 임요환은 스타크래프트의 ἀρετή가 있다고 고대 그리스 철학책에 써 있다면 한국어로 번역되었을 때 페이커는 lol의 덕이 있고 임요환은 스타크래프트의 덕이 있다는 식으로 번역될 가능성이 높다.[118] 사실 德이라는 단어도 고대 중국에서는 기능적인 요소가 강해서 페이커가 lol의 덕이 있다는 식으로 쓰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119] 해당 두루마리는 헤르쿨라네움에 살았던 철학자이자 시인인 필로데무스가 쓴 ‘아카데미아의 역사’[120] 동성이지만 성적인 욕구가 없기에 이런 점에서 소년애는 동성애와 구분된다.[121] 여성과의 사랑과 성관계는 종족번식의 본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순수하지 못하고, 번식이 불가능한 동성과의 사랑이 본능 따위 포함되지 않은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이라고 했다. 그 시대의 여성은 남성들과 엄격하게 분리된 생활을 했다. 어린 나이에(14세 정도에) 결혼을 했다. 결혼 생활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리는 엄격하게 유지되었고, 활동 공간 역시 나누어져 있었다. 가사를 돌보고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것이 여성들의 일이었고 집 밖으로 나갈 일은 거의 없었다. 스파르타를 제외한다면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은 반쪽짜리 2급 시민이자 아이를 낳는 태반 역할로 취급 당했다.
이런 연유로 낭만적인 사랑은 자유인 남성 정부와 흔하진 않지만, 성인 남성과 소년 애인과의 사이에서만 가능했다. 여성과 결혼하지 않고 평생 지속되는 배타적인 소년애 커플은 흔하지 않다고 한다. <향연>에 나오는 아가톤과 파우사니아스가 그렇다.
[122] 다만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 들어서는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이성애를 중시하는 풍조가 도래하게 되었다. 루키아노스에 따르자면 심지어 이성애vs동성애를 놓고 어느 쪽이 좋은지 철학자 사이에 논쟁이 있었을 정도.[123]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플라토닉 러브를 가장 변태적인 사랑이라고 평한 바가 있다.[124] 플라톤의 저서 〈향연〉은 여러가지 에로스에 대해 쓰였다. 〈향연〉에서 플라톤은 육체적 욕망으로부터 출발해 정신적인 것의 추구, 교류를 통해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로 인해 지식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지식의 아름다움은 다양한 이야기와 사유를 산출하게 된다. 이를 포괄하는 것이 아름다움 자체(= 좋음)이다. 에로스를 추구하는 최종단계에서는 아름다움 자체(= 좋음)를 갑자기 알려지는 것이 가능해진다. 몸에만 해당하는 아름다움이 아닌, 아름다움, 좋음 자체를 연습하는 일이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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