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8-10-19 23:21:48

소크라테스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명이인 축구 선수 소크라테스에 대한 내용은 소크라치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서양 철학사 -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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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소크라테스 (Socrates, Σωκράτης[1])
출생기원전 469년 / 470년 경,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망기원전 39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
직업철학자

1. 개요2. 개인적인 삶3. 삶과 철학4. 죽음5. 평가6. 제자들

1. 개요

γνῶθι σεαυτόν
너 자신을 알라. [2]
ὁ δὲ ἀνεξέταστος βίος οὐ βιωτὸς ἀνθρώπῳ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서양철학의 아버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3]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어떠한 저술이나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제자 혹은 지인들, 대표적으로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소크라테스에게 비판적인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남긴 저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그의 삶과 사상을 알 수 있다.[4]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크라테스의 일화나 행적은 대부분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근거한 것이다.

2. 개인적인 삶

외모는 못생겼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외모지상주의 풍조가 있던 당시 아테네에서 꽤 고생을 했다고 한다.[5][6]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알려진 것도, 그의 미남 제자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면서부터였다 하니, 아테네의 외모지상주의나 소크라테스의 추모(醜貌)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대략 짐작해 볼 만하다.[7]

그의 아내였던 크산티페는 못생긴 악처(惡妻)였다고 전해지는데,[8] 사실 앞뒤 정황을 따져보면,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오히려 현처(賢妻)였을 가능성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사실 아내 입장에서 소크라테스는 돈도 없는 주제에 맨날 돈 많은 사람(대표적으로 플라톤)과 사색한답시고 수다나 떨러 다니는 남편으로, 집안 살림은 크산티페가 다 책임졌다. 소크라테스가 물려받았으나 운영 등에 무관심하여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석공소도 크산티페가 직접 운영했다.

그러나 이런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를 내쳤다는 기록은 없으며, 외려 소크라테스가 독배(毒杯)를 마시고 자결할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다혈질기가 있어서 홧김에 소크라테스에게 물을 뿌리고 구박도 자주 했지만… 아내의 잔소리에, 소크라테스는 이런 부인이 참을성을 길러준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하여튼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크산티페가 악처라고 전해지는 것은 다툼이 많은 친구를 악우라고 하는 것처럼,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보이며, '효자보다 악처가 낫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소크라테스가 했다고도 전해지는, "젊은이여, 결혼하라. 좋은 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라는 농담도 그 행간(行間)을 읽을 필요가 있다.[9]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결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의 나이에 중보병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당대 아테네 시민은 신체 및 정신에 장애가 있거나 만 50세를 넘지 않았다면 군복무 의무가 있었으므로, 소크라테스도 군인으로 참여한 것. 대표적인 참전 전투로는 델리온 전투가 있는데, 이때 아테네군이 패배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소속된 부대도 소크라테스의 침착한 대처 덕분에 무질서하게 패주하지 않고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10][11] 무려 세 번이나 참전했다고.

《아테네의 변명》과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삶과 당시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위에 서술된 것처럼 세 번 참전했던 것과, 딱 한 번 이스트모스에서 포세이돈을 위해 열리는 대축제였던 이스트미아 제전을 구경하러 간 것을 합쳐, 단 네 번밖에 아테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아테네의 법이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형식으로 자문자답한 《소크라테스의 독백》에 의하면, '우리(아테네의 법)와 우리의 도시(아테네)만으로도' 소크라테스에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3. 삶과 철학

우선 소크라테스의 삶은 가난했다.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철학자의 삶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벌어오라는 아내의 구박을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상술했듯 티격태격 싸우는 게 일상다반사가 된 것.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하루는 제자들 중 한 명이 "스승님, 결혼은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 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이렇게 가난했던 소크라테스가 일개 수병도 아니고 최소 중산층 이상은 돼야 군장(軍裝)을 마련할 수 있었던 중장보병으로 어떻게 참전할 수 있었느냐다.[12][13] 이에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석공소 주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아버지가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재개발 사업으로 단단히 한몫 잡았을 거라는 설, 소크라테스 대신 석공소를 운영했던 크산티페가 의외로 수완이 탁월한 경영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설, 알키비아데스 같은 부유한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 대신 군장을 마련해 드렸을 것이라는 설 등. 아니면 그냥 대대로 군장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를 지극히 사랑했던 철학자로서,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아테네가 놀아나고 상대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이에 반발하여 보편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지극히 기이한 인물로, 하는 일도 없이 시장이나 광장을 돌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묘한 철학적 질문을 해댄 것으로 유명하다.[14]

또한 아테네에서는 공적인 자리에서 정치적인 의사를 피력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공적인 모임에도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에서는, 그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다이몬이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15]

좀 더 와 닿게 설명하자면, 돈도 안 벌어오면서 딱히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다 얘기를 나누다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가 비록 공적인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도,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이 현대인들보다 대단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개중에서도 아테네와 같이 가장 번성하고 개방적인 도시국가는, 외국인이나 시민권을 얻지 못한 채 오래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시민권자들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민권자들이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국가정책이나 도덕에 대해 토의를 하는 것은 현대보다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저술보다는 대화를 통해 철학활동을 하였고, 특히 상대방에게 계속 질문을 해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을 썼다. 이런 질문을 중심으로 하는 교수법을 소크라테스식 문답법, 혹은 산파법(산파술)[16]이라고 부른다. 확고한 주장을 가지고 있던 피질문자가, 질문자의 문답법에 의하여 결국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유도심문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논쟁의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자세는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거나 혹은 심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상대보다 더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기본적인 것부터 검토해 나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형사가 사용하는 유도심문과 같은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쨌든 이렇게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은 이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개념이 사실은 오류가 있는 개념임을 깨닫게 되고, 당황하거나 화내거나 부끄러워하게 된다. 이를 아포리아(Aporia, ἀπορία)라고 한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는' 단점을 지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17] 소크라테스는 산파술을 통해 어떤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도덕 철학을 위해 기존에 있는 개념(가령 '경건함', '선함', '좋음' 등)을 명료하게 만드는 것에 주목했으므로, 이러한 지적은 핵심을 완전히 잘못 짚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계속 산파술을 시전하고 다닌 끝에, 결국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말을 남겼다.[18]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델포이 신전에 어떤 사람[19]이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습니까?' 라고 묻자, 무녀는 평소에 늘 쓰던 은유나 수사들을 생략[20]하고 단 한 마디로 '아니'[21] 라는 신탁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여, 똑똑해 보이는 사람(정치인, 작가, 장인 등)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고 다니며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봤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똑똑해 보였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혹은 편견)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공자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 라는 말을 남겼던 것과 비교해본다면 흥미로운 대목(그러나 공자도 모르는 것을 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계의 의미에서 저 발언을 했기에, 의미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통한다고 볼 수도 있다.). 참고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델포이의 아테나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살아생전 중요하게 여긴 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22] 청년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가 이 말을 인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속 편한 알키비아데스, 부디 나의 말과 델피에 있는 글귀를 받아들여 자네 자신을 알도록 하게. 적수는 이들이지 자네가 생각하는 자(아테네 정치가)들이 아니니 말일세. 돌봄과 기술(앎)이 아니라면, 다른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능가할 수 없을 걸세. 이것들을 결여한다면,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서든 이방인들 사이에서든 자네가 명성을 얻는 일 역시 결여하게 될 걸세. 내가 보기에 어느 누가 그 무엇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네가 더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 명예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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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일, 정준영 역, 《알키비아데스Ⅰ, Ⅱ》 이제이북스(2007).}}}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은 그리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또 감명 깊게 받은 제자들 중 한 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고대 그리스 역사의 위인인 알렉산드로스 3세이니, 따지고 보면 알렉산드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증손제자에 해당된다. 인류 역사상 손꼽힐만한 스승-제자 라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플라톤 말고도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 몇 차례 언급된 크세노폰 역시 그러하며,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가 그러하다. 또한 키레네 학파를 창시하게 되는 아리스티포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키니코스 학파의 창시자이자 유명한 디오게네스의 스승인 안티스테네스도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 메가라 학파의 창시자인 에우클레이데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다.[23]

4.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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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의 1787년 작품인 《소크라테스의 죽음》

그는 죽으면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가 1930년대에 출판한 그의 책, 《법철학》에서 실정법주의(實定法主義)를 주장하며 쓴 글이다. 일제시대에 오다카 도모오가 이런 해석을 한 이유는, 일본의 잔혹한 식민통치를 합리화 하기 위해서였다. 소크라테스는 직접적으로 위와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없다.' 다만 폴리스의 결정을 내가 억울하다 해서 위배하여 이러한 일들이 반복된다면 폴리스가 유지되겠는가? 이러한 행동은 옳은가? 와 같은 뉘앙스의 말은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단답적으로 해석하는것은 무지한 해석이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천박한 해석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후술된 내용 참조.[24][25]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당대 아테네 상류층에게 신들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현혹하여 아테네의 전통을 해친다고 여겨졌고, 이로 인해 소크라테스는 위험 인물로 찍히게 된다. 실제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위험인물들이 꽤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스파르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양쪽을 모두 몇 차례씩 배신한 배신자 알키비아데스와, 전쟁에서 이긴 스파르타의 힘을 업고 권력을 잡아 반대파는 (민주파 외 온건 과두파들까지) 죄다 죽여 버리고, 시민의 수는 3,000명으로 고정시키고선 나머지 인원들은 언제든지 즉결처분시키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한 폭군 크리티아스[26]가 있다. 결국 참다못한 아테네인들은 8개월 만에 크리티아스를 축출했고, 그로부터 4년 후, 이러한 사태의 시발점으로 거론된 소크라테스는 고발당하고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해진다. 그의 제자였던 플라톤이, 직접민주제가 타락하면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될 수 있다며 부정적으로 보게 된 이유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27]

하지만 정작 소크라테스 본인은 자신을 따라다녔던 청년들의 과두정치(寡頭政治) 체제를 몹시 부정적으로 평가했을 뿐 아니라 과두정에서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자 그냥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등 반대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과두정이 조금만 오래 유지되었더라도, 그 일로 인해 소크라테스 본인이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또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플라톤의 사상이라는 중론이 있지만) 과두정치 체제를 상당히 하등하고 부정적인 체제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과두정치의 시발점이라는 혐의는 부당한 면이 적잖이 있다.

어쨌든 표면상으로 소크라테스의 기소 혐의는 아테네가 믿는 신을 우습게보고, 새로운 우상을 섬기면서 젊은이를 타락시킨 죄였다.[28] 황당해 보이지만, 크리티아스를 처단하고 내전의 장기화를 우려한 아테네에선 민주정을 회복하는 대신, 그동안 상대방에게 했던 잘잘못은 따지지 않기로 하는 대대적인 사면령이 내려진다. 당연히 여기엔 아테네 시민인 소크라테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배신자 알키비아데스와 폭군 크리티아스라는 위험인물을 키웠다는 혐의를 적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 그래서 진짜 목적은 알카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정신적 스승을 처벌하려던 보복성 고발이었지만, 겉으로는 엉뚱한 걸 만들어 제시한 것이다.

사형 판결을 받은 재판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황당한 점이 많다. 참고로 소크라테스가 고소되었을 때의 죄목들은,
1. 소크라테스는 국가 공직의 추첨제를 비판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국가제도를 경시하게 했다.
2. 병에 걸리거나 소송을 당할 때 아버지나 친척은 도움이 안 되며, 의사나 법에 밝은 자가 보다 유용하다고 하여 부모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게 했다.
3. 호메로스의 시구를 악용하여 젊은이를 오도(誤導)하게 했다.[29]

이 재판은 우선 투표(배심제)로 유죄/무죄를 가린 후, 유죄로 결정되면 다시 고발자가 제안하는 처벌과 피고 본인이 제안하는 처벌 중에서 투표를 하여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특정 당파에 소속되지 않았다고 변론하며, 최종적으로 281:220, 61표차로 유죄가 결정됐다. 표차가 생각보다 안 났다는 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먹혔다는 걸 의미했기에, 이때까지는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고무된 소크라테스가 다시 특유의 어그로를 시전하며 자신은 무죄라며 사형은커녕 오히려 국가유공자급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장황하게 말한 후, 마지막에 "하지만 다른 사람이 벌금형을 제안하라고 권했으니 그렇게 하겠다" 라고 배심원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악수(惡手)를 두고 만다.[30] 쉽게 말하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피 본 사람들이, 그래도 소크라테스까지 죄를 묻는 건 옳지 않은 거 아닌가, 라며 편을 들어주고 있는데, 그렇게 쉴드 쳐주는 사람들 심기까지 건드리는 ‘나의 위대함을 알라’ 식으로 발언한 것.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자기변호 이후 361:14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 판결을 받고 만다. 말하자면 무죄 쪽에 표를 던졌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자기변호를 들은 후에는 사형 쪽에 표를 던지게 된 것.[31]

죽기 직전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서, 당시 아테네에서는 병에 걸렸다 나으면 이 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제물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자신이 독약을 마시고 죽음으로써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니 고맙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화를 상징적으로 해석해서, 삶 자체가 질병이고 죽음은 그 '삶'이라는 병의 치료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평소 언행은 그런 허무주의와 관계가 없었으므로, 진실일 가능성은 낮다. 다른 각도의 해석으로는, 평소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쇠가죽만큼이나 두꺼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가죽'을 가렵게 하는 '등에(쇠파리)'에 빗대었듯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병을, 나 대신 치유해 달라'는, 철학자로서의 임무를 완수해달라는 부탁으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설(異說)들이 있다. 병으로 고생하다 나은 적이 있는데, 감사의 제물을 아직 올리지 않았기에 죽으면서 부탁을 남긴 것일 뿐이라거나, 또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이름의 이웃 사람에게 진짜로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었다거나, 심지어 그냥 농담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대체로 할 말을 직설적으로 했지, 은유적으로 빙빙 돌려가면서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굳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고 의미를 해석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며 직설적인 의미로 해석하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플라톤의 책 《파이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파이돈》이라는 책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라는 사람에게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파이돈》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먹고 누운 상태로 몸이 굳어지다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차분한 죽음의 모습은 플라톤이 포장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플라톤은 이 시기의 소크라테스와 엮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32]에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죽을 시기에는 소크라테스 곁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로, 당시 그리스에서 널리 사용된 독약을 먹으면, 심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면서 전신의 마비와 경련과 함께 사망한다. 플라톤의 묘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먹은 독약은 일명 독당근(국명:나도독미나리)(Poison Hemlock, Conium Maculatum)으로 알려진 것으로, 알칼로이드계 독극물인 Coniine이다. 앞서 말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는 독약은 중추신경계를 공격하는 독미나리이고,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당근은 심장에서 가장 먼 부위부터 말초신경계를 공격해 마비시키는 독약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최후는 오히려 플라톤의 서술과 같은 품위 있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건 어떻게 죽었냐가 아니라, '왜 그가 죽음을 선택했는가?'다.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이때 이미 70세를 넘겼고, 남은 삶은 길어야 몇 년 되지 않을 나이였다. 일단 그는 재판장에서도 자기 신념을 꺾느니 죽겠다고 말한 데다가, 겉으로 공표한 것이야 어쨌든 속의 진짜 죄목은 매국노와 폭군의 정신적 스승으로 많은 아테네 시민들의 증오의 대상이었으니, 재판에서 타협의 여지는 없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이들을 대놓고 돕거나 한 게 아니라, 단지 정신적 스승일 뿐인데 사형은 너무하다는 평가가 아테네 내부에서도 꽤 많았으므로, 형벌을 벌금형 정도로 줄일 수가 있었는데, 스스로 그것을 어그로 끌며 내동댕이쳤다. 또한 감옥에서 탈옥할 수 있었는데도 이를 거부했다. 법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적용받고, 불리할 땐 피한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던 논리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논리를 스스로도 실천한다는 일관성을 위해서 탈옥하지 않았다.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 독배를 든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상술(上述)했듯 소크라테스는 《대화편》에서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 이 말은 고대 로마의 법률 격언 “두라 렉스, 세드 렉스(dura lex, sed lex, 법이 지독해도, 그래도 법이다)”를 번역한 말이다. 로마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역시 자기 책에 저 격언을 인용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죄목인 불경죄를 악법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죽음을 부당한 법이 아니라 부당한 판결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크리톤》에서 친구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법에 의한 판결을 (비록 그 판결이 부당해 보이더라도) 개개인의 판단으로 부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반론을 한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게. 가령 이곳에서 도망할 작정으로 있는 우리한테로, 이 짓을 어떻게든 일컫건 간에, 법률과 시민 공동체가 다가와서는 막아서고서 우리에게 묻는다고 말일세. “소크라테스여, 말해다오. 그대는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나? 그대는 그대가 하려는 이 일로써 우리 법률과 온 나라를, 그대와 관련되는 한, 망쳐놓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나? 혹시 그대가 생각하기엔 이런 나라가, 즉 나라에서 일단 내려진 판결들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개인들에 의해 무효화되고 손상되었는데도, 그런 나라가 전복되지 않고서 여전히 존속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크리톤, 우리는 이 물음들이나 또는 이와 같은 부류의 다른 물음에 대해서 뭐라 대답할 것인가?(50a~b)
이에 대해서, 그가 계약론적 사고를 가졌다는 해석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에게 한 말을 보면, 아테네와 아테네의 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다른 폴리스로 떠날 자유가 있었는데도, 평생 아테네를 떠나지 않고 아테네가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면, 이는 아테네의 법률을 지키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한다면, 그 계약을 어기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외국으로 피하길 원했다면, 애초에 재판정에서 영빈관에서 밥 사라고 어그로 끌지 않고 순순히 추방형을 제안했다면 충분히 받아들여졌을 텐데, 이제 와서 판결에 불복해 해외로 도피하겠다는 건 모순이라는 것도 소크라테스 스스로 지적한다. 이 계약론적 사고에 대해서 부가적인 설명을 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강하게 신봉하는데, 결국 이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압축적으로 보면,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택한 이유는 그 자신의 철학 때문인데, 그는 철학이 유일한 인생의 이유라고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Unexamined life for a man is not worth living.’[33]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이유는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는 신과의 계약이며, 영혼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니,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포기하고 도피를 하면 아테네와의 계약은 지키더라도, 신과의 계약을 어기는 행위가 되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리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 처음부터 국가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켰다는 설명이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및 이후 벌어진 피바람의 원인에 대한 청산 의도를 갖고 추진된 재판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제자들이 저지른 막장행위로 인해 벌어진 아테네의 혼란과 몰락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할 입장으로서 재판에 순응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정황을 통한 추측일 뿐, 소크라테스는 그런 의미를 암시하는 말조차 한 적이 없다.

5. 평가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책을 쓴 적도 없고, 자신만의 사상을 전개한 적도 없다. 중앙대 심리학과 이장주 교수에 따르면, 그는 책이 기억력과 사고력을 감퇴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책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34] 이런 사고방식은 고대 세계에서는 의외로 그리 드물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는 노장(老莊)사상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참고로, 그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에 의해 날조된 인물로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만으로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뿐만이 아닌, 다른 제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소피스트들의 글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문헌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특히 제자인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플라톤의 것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플라톤의 후기 작품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이름만 소크라테스일 뿐, 플라톤의 고유한 사상을 소크라테스라는 등장인물이 말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철학적 업적 자체는 적다고 생각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이는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귀납적 방법론[35] 통해 비로소 대상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직접적으로 계승되어, 더 나아가서는 2,600년 서양 철학사를 꿰뚫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형상철학으로 이어지기 때문. 때문에 철학적 업적 또한 결코 적지 않다. 당장 플라톤을 비롯해 그의 제자들이 각지에서 아카데미를 연다든가 하면서 각자의 철학 학파를 창설했을 정도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인기는 죽은 이후에 오히려 올라갔으며,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은 상당히 유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비록 플라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철학적 업적과 영향력은 상당한 편. 그리고 더 나아가 인지도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최고[36]를 달린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삶의 모습과 진리를 대하는 참된 자세, 그리고 죽음의 상징성[37]이 매우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묘사되듯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나 친구들은 재산을 가진 이들이 많아서 끊임없이 탈옥을 권한다. 고대는 물론 중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반역죄나 살인죄 같은 엄청나게 사악한 죄상이 아니고서는 죄수를 처박아놔서 콩밥 먹이거나 사형을 시행시켜봤자 딱히 좋거나 얻을 게 없기 때문에, 걍 범죄종자가 꺼져버리고 다신 자기네들 공동체에 얼씬도 않으면 그러려니 했었다. 실제로 진상이 다르게 밝혀지거나 범죄자가 다시 필요해져서 불러들이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고. 《플라톤의 대화》에서 묘사되는 간수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상당히 호의적이고, 그를 사형시키기 싫어하면서 은근히 탈옥에 대해서도 그리 부정적인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평생 내가 아테네의 법률을 따랐고 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혜택을 입었으며, 또 평생 아테네를 위해 옳은 말을 해왔는데, 탈옥한다면 내 가르침들이 빛이 바래고 말 것이니 사형 선고에 묵묵히 복종하고 후회하지 않겠다며 의연하게 독배를 마셔 죽음을 택했다. 아마 이로 인해 아테네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지 않았나 하고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소크라테스의 위상이 그의 사후에 급격하게 올라가면서 특히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모습이 크게 조명되었다. 어느 공동체가 안 그러겠냐만 당시 아테네인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절제 등을 주요한 가치로 여겼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빗대어서 직접 민주주의의 실패 또는 중우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한다.
잘 선동된 군중들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거나 정적을 매도하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된다는 것

고로 철학적 업적에 있어선 플라톤, 칸트 등이 많이 거론되나,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가장 모범이 되는 철학자로는 소크라테스가 많이 꼽히는 편이다.

또한, 사상 최강의 토론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사람이기도 하나, 그 기록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저작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포함한 14:1의 토론에서도 무쌍을 펼치나,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정의는 《대화편》이고, 이건 철학과 문학의 중간 형태라고 보면 된다. 초기 《대화편》이 내용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잘 표현해주었을 수도 있으나, 이 안의 묘사는 어느 정도 문학으로 파악해야지 곧이곧대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건 당대 사람들이 읽으라고 쓴 글이며, 토론의 무간지옥인 고대 아테네 전성기에서 아가리 파이터논객(論客)으로 유명했던 소크라테스가 토론에 대단히 뛰어났다는 것 정도는 사실일 것이나, 그의 전적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다 하고 표현하는 것은 과장에 속한다.

그리고 사실 멍청한 척하면서 산파술을 펼치는 모습은 주로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고, 크세노폰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는 평범한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사리 분별이 지극히 뚜렷하고 양식이 있으며 사나이다운 모습이다. 뭐가 진실인가는 요즘도 학자들의 연구주제이긴 하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사람에 따라 태도를 달리 했다고 하니, 아마 그에 기인한 측면도 있지 않나 추측해 본다. 표리부동하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상대방의 성격이나 지적수준 등에 맞춰서 상대방이 쉽게 알아먹고 도움이 되는 식으로 대화를 전개했다고 한다.[38]

6. 제자들


[1] Sōkrátēs, 현대식으론 Sokrátis[2] 사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맨 처음 한 말이 아니다.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안의 기둥에 새겨져 있는 글귀이다.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안광복 저)에서 확인 가능. 하지만 생전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말이며, 본인도 이 말을 몇 번 인용한 적이 있으므로 그의 어록에 들어갈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3] 국내 한정 4대 성인들 중 한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만, 애초에 4대 성인(聖人)이란 말 자체가 공신력이 없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4] 이로 인해 발생한 게 바로 '소크라테스 문제'. 누가 남긴 어떤 기록을 얼마나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소크라테스를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몇 명을 거쳐서 들은 정도인 아주 약간의 이야기들도 남아 있긴 하다.[5] 실제로 고발되어 잡혀온 창녀가 예쁘다는 이유로 무죄방면 되기도 했고,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는 질 게 뻔한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회의에서 퇴각해야 하는 이유를 조리 있게 설명했지만, 못생겼다는 이유로 그의 주장이 묵살당한 병사의 이야기도 나온다. 고대부터 이어져온 외모지상주의[6] 당시 아테네는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문화관을 갖고 있었고, 그들이 추구하는 제1의 미는 '인간의 아름다움'이었다. 오직 인간만이 지성을 갖고 철학적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이 스스로에게 도취된 결과이다.[7] 하지만 크세노폰의 기록에 따르면, '용맹하고 남자의 풍모가 넘치는 미남'이라고 한다. 다만 크세노폰은 뼛속까지 소크라테스 빠돌이였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라는 점을 참고하자.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서는 둘 모두를 고증하여 얼굴은 반반하지만 아테네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파오후로 등장한다.[8] 플라톤은 사모(師母)라고 할 수 있는 크산티페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거의 없었다. 부정적인 묘사가 없다기보다도 철학적인 면을 조명한 바가 크기 때문에, 크산티페가 등장하는 대목이 얼마 없다. 개중에 부정적인 묘사라고 하면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크산티페가 울부짖었다는 정도다. 크산티페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대개가 다 크세노폰으로부터 비롯한다. 남편 제자들한테 차별대우를 했었나[9] 어쨌든 행복하거나 똑똑해진다는 얘기니 결혼이 나쁘단 얘기는 안 했다.[10] 아테네군의 운 좋은 일부 패잔병들끼리 뭉쳐, 소규모 집단이나마 전열을 다시 갖췄다. 추격하던 기병들은, 소규모이지만 저항할 태세를 갖춘 중보병 무리들을 괜히 상대하다 다칠까봐 회피하고, 지천에 널린 손쉬운 먹잇감인 비무장 도망병들에게로 말머리를 돌렸다.[11] 실제로 전투에서는 패닉 상태에 빠져서 무질서하게 패주하면, 궤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패배하더라도 침착하게 전열을 어느 정도 갖춘 상태에서 후퇴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특히 그리스식 보병 방진은 전열이 무너지거나 흐트러지면 답이 없지만, 뭉쳐있으면 상당히 강력해서, 퇴각 상황에서도 전열을 유지하고 있으면 추격하는 기병이라도 함부로 덤비기가 상당히 부담스럽다.[12] 고대와 중세에서, 고급 무장(武裝), 즉 전투 장비는 병사나 기사 개인이 장만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재력이 충분한 주군에게 고용된 기사라면 예외가 될 수도 있겠지만, 중장보병의 군장(軍裝)은, 오늘날의 물가로 계산해서 어지간한 고급 중형차 한 대 값이라고 보면 되고, 기병(騎兵)용 말과 고급 장비는,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웬만한 집 한 채 값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아테네도 처음엔 민주정이 귀족과 자산가들 위주로 이루어졌다. 아테네에서 빈민층은 값 비싼 장비가 필요 없는 해군 노잡이로 참전했는데, 아테네가 성장하고 세력이 확장되면서 해군의 규모와 중요성이 높아져서, 이 노잡이들도 국방에 기여한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참정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13] 무지막지한 인력 동원을 자랑했던 로마는, 순수히 자비로 장비를 마련하던 시절에는 그 많은 인력 동원을 위해 흉부를 대충 보호하는 금속판만 줄에 묶어 장비한 무장을 썼었다. 마니퓰라 제도 하에서 최전선을 담당한 비숙련병인 하스타티가 대표적인 예시.[14] 광장에 소크라테스가 뜨면 다들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 했다고 전해진다.[15] …내가 바삐 돌아다니면서 사사로이 그렇게 충고를 하면서 부질없는 참견을 하지만, 공적인 모임에 나타나서 나라에 대해서는 충고를 하지 않는 것을 아마 이상하게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이미 여러분이 여러 번 여기저기서 내가 말하는 것을 자주 들은 적이 있는 바로 그것, 즉 나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종의 신의 알림이라든가, 신령스런 것인데…(중략)… 바로 그것이 내가 정치에 관여하기를 반대하고 있거니와, 그 반대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왜나 하면 아테나이의 여러분, 내가 일찍이 어지러운 정치에 관여하려고 했더라면 틀림없이 벌써 몸을 망치고, 여러분이나 나 자신에게나 아무 이로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올재 번역본 중[16] '조산사'라는 뜻의 산파(産婆)와 같다(!). 어머니가 산파였기 때문에 진리의 분만(?)을 도와준다고 산파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는 석공인데, 이것도 진리를 점차 찾아간다는 것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도. 그런데 이 방법을 개발한 사람이 대표적인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스 철학자 전기작가였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Διογένης Λαέρτιος, 생몰년일은 불명. 그러나 남긴 저작을 분석으로 3세기 사람으로 추측)가 그런 기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설령 소피스트가 이런 방법을 개발했다고 해도,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활용한 방향은, 인습과 개념의 구분을 하지 않던 소피스트들과는 정반대로, 인습에서 벗어난 개념을 정립하기 위함이므로, 소크라테스의 위상에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17] 트리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두고 "누가 질문을 하면 대답은 하지 않고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무식한 척을 할 뿐이다." 라고 비난하기도 했다.[18]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말이다. 일단 자신이 모르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남에게 배워서 아는 것이든 스스로 숙고해서 깨닫는 것이든, 진정한 앎이 시작되기 때문이다.[19] 소크라테스의 친구였던 카에레폰(Chaerephon)이 질문했다는 설이 있다.[20] 대표적으로 크로이소스의 신탁이 있다. 리디아의 왕이었던 크로이소스가 무녀에게, "우리가 전쟁을 벌이면 승리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무녀 曰, "크로이소스가 전쟁을 한다면, 그는 대제국을 멸망시키리라" 라는 답변이 돌아와서, 이를 믿고 키루스의 페르시아와 전쟁했더니 되레 패배해 리디아가 멸망했다. 신탁에서 말한 멸망한다는 대제국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리디아였던 것.[21] 다른 설도 있는데, 당시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의 신탁은 두 가지 방법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하나는 많은 돈을 받고 정식으로 써주는 신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적은 돈을 받고 예/아니오만 알려주는 약식 신탁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요청한 소크라테스의 친구는 이 약식 신탁을 받아서 이렇게 딱 떨어지는 답을 받았다고도 한다.[22] 《The Philosophy Book》 by Dorling Kindersley(2010)[23] 한국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시하여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철학적으로도 타당하다. 하지만 철학에 대한 기반이 탄탄한 서구의 기준으로 봤을 때, 헬레니즘 철학이나 중세 철학에 있어 이러한 중요한 철학자들의 누락은 아쉬운 바가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유학을 가야 한다.[24] 이는 서기 2세기 로마의 법률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가 책에 로마 법률 격언을 인용하여 저술한 책에 나온 말로 전해지며,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 법과 교수 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가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소개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군부독재시절에도 국민들에게 재갈을 물리기 위한 명언(?)으로 요긴하게 써먹었다고. 이 때문에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한다며 나선 자들 사이에선 소크라테스가 인기가 없었다는 우스갯소리도.(…) 헌법재판소는 이미 2005년 11월에, '악법도 법이다'를 소크라테스의 어록으로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부적격하다는 의견을 냈다.[25] 상술했듯 '너 자신을 알라' 라고 많이 알려진 말도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26] 이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친척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대화형식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크리티아스》라는 저술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전설 속 대륙 아틀란티스도 바로 이 《크리티아스》에 등장한다.[27] 플라톤은 신들에게 항상 감사를 드리던 네 가지 중 하나로, 소크라테스 시대에 태어난 것을 꼽을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참고로 나머지 셋은 동물이 아닌 사람, 여자가 아닌 남자, 그리고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그리고 그의 수제자이자 반박론자이기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인이라,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원장 자리를 승계하지 못하고, 아테네를 떠나 고국인 마케도니아로 돌아간다.[28]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이라는 신령이 자신에게 어떤 일들을 금지시킨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29] 물론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아테네인들도 알고 있었으므로, 본질은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아테네를 파멸로 몰아넣은 죄였고, 소크라테스 자신도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사형을 받아들인 것이다.[30]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대해 아테네 사람들이 숙고하도록 만드는 철학적 행위야말로 어떤 행위보다도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고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가르친 공로가 있는 자신은 국가에 엄청난 봉사를 한 것이므로, '영빈관에서 나한테 밥이라도 한 끼 사야 되는 거 아니냐' 라는 식으로 어그로를 끌었던 것. 참고로 아테네 시민이 영빈관에서 대접받으려면, 개선장군이나 올림픽 경기 우승자급 위업을 이룩해야 했다.[31] 이런 시각도 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법정에서도, (듣는 내가) 기분 나쁘다, 좋다에 따라 판단했다는 것.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이 자신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게 만듦으로써, 그들이 알고 있고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 정의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자신의 죽음으로써 증명한 셈이라는 것이다. 물론 배심원들을 저주했다는 말도 있다.(…)[32] 플라톤 본인은 당시 몸이 아팠다고 말한다. 다만 당시에도 그 이야기를 믿어준 사람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33] ‘Unexamined life’가 핵심인데, ‘(옳고 그름이) 검증되지 않은 삶’, ‘(옳으냐 그르냐를) 고찰 or 반성하지 않는 삶’ 등등 다 의미가 통하며 다 함축돼 있다.[34] 비슷한 일례로는 《인간의 조건》 시즌1의 휴대폰이 없다면 에피소드에서 개그맨 김준현한 말인,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즉, 기록에 의존해서 기억력과 사고력이 감퇴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35] 아리스토텔레스가 좀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귀납의 창시자를 소크라테스에게도 돌린 적이 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귀납과 산파술을 통해 보편적 개념을 만들려고 했던 것은 어느 정도 인정되는 바이다.[36] 당장 한국만 해도, 플라톤을 모르는 이는 널리고 널렸지만, 소크라테스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37] 자신이 믿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비견될 만큼 상당히 충격적이다.[38] 아마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앞에서는 산파술을 많이 펼쳐 보였고, 크세노폰 앞에서는 양식 있고 남자다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교사가 제자들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대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