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 Hastati |
1. 개요
로마 공화국 시기 로마군의 최선두 중보병 부대를 지칭하는 용어.
2. 상세
하스타티(Hastati)는 라틴어로 창을 의미하는 하스타(hasta)에서 유래한 용어로, "창병"을 의미한다. 이 부대에 속한 병사 개개인은 하스티이(hastae)로 일컬어졌다. 기원전 390년 알리아 전투의 참패와 로마 약탈 사건이 벌어진 후, 로마군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를 중심으로 군제개혁을 단행했다. 이제 로마군에 입대한 장정들은 재산별로 구분되어 각자의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때 경무장 보병인 벨리테스보다 부유하지만 프린키페스보다 가난한 이들은 하스타티에 소속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엄격한 재산별 분리는 사라졌고, 중보병 중 가장 어린 신병이 하스타티가 되었다.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약 2.4미터(8피트)의 길이인 하스타로 무장했지만, 신속한 이동과 작전 수행이 강조되면서 주무기를 글라디우스로 변경했다. 이들은 한 손에 길이 1~1.2m, 폭 60~80cm의 큰 사각형 방패인 스쿠툼을 한 손에 붙잡고 다른 손으로 글라디우스를 잡고 적군에 맞서 근접전을 벌였다. 또한 2~3개의 필룸을 별도로 챙겼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반구형 모양의 몬테포르티노(Montefortino) 또는 둥근 형태의 카시스(Cassis) 투구를 착용했다. 간혹 공적을 세우거나 높은 직위를 갖춘 이들은 투구 상단에 여러 개의 깃털을 꽂음으로써 부대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들은 가벼운 갑옷을 착용했는데,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심장 보호대"로 일컬어지는 사각형 모양의 작은 흉갑이었다.
하스타티는 초기에는 900명으로 구성되었다가 포에니 전쟁 시기에 1,200명으로 늘어났으며, 각각 120명으로 이뤄진 10개의 중대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중보병들 중 최선두에 섰고, 벨리테스가 적을 향해 필룸을 다 날리고 물러난 후 적을 향해 천천히 진군하다가 적군이 충분히 접근한 순간 필룸을 한꺼번에 날린 뒤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돌격하여 근접전을 치렀다. 이들이 적의 대열을 돌파하는 데 실패한다면 프린키페스와 교대하여 후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프린키페스 역시 돌파에 실패한다면, 마지막으로 최후미에 있던 트리아리가 투입되어 마지막 교전을 치렀다.
이러한 전투 순서는 대부분 그대로 이뤄졌지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특별한 전술을 사용했다.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가 적과 전면에서 맞붙고 있을 때, 아군 기병대가 적 보병대의 측면을 공격했으나 격퇴당하자 후방에 있는 트리아리를 적 측면으로 이동시켜 공세를 퍼붓게 했다. 그리고 자마 전투 때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정예 보병대가 중앙을 파고 들어와서 로마 보병대를 포위 섬멸하려 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트리아리와 프린키페스를 중앙에, 하스타티를 측면에 두고 전투 대열을 긴 줄로 형성해 적이 쉽사리 포위하지 못하게 했다. 두 전술 모두 큰 성과를 거두면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을 무너뜨렸다.
통설에 따르면, 기원전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군제개혁을 하면서 하스타티-프린키페스-트리아리로 구성된 마니풀라 시스템을 코호르스(cohors) 시스템으로 개편했고, 그 과정에서 하스타티가 폐지되었다고 한다. 이는 문헌 기록에서 마리우스 이후로 하스타티가 언급되지 않는 것을 감안한 주장이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마리우스가 그런 개혁을 주도했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없다며 지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코호르스는 폴리비오스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룰 때 이미 언급되었으며, 이후 로마가 히스파니아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치른 전쟁에 관한 기록에서 자주 등장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마리우스가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는 시기 이전에 히스타티를 비롯한 마니풀라 시스템이 코흐르스 시스템으로 대체되었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