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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도
파일:현재 키르쿠스 막시무스 공터.jpg
현재 모습.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글 |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 |
영어 | [1] | ||
프랑스어 | [2] | ||
국가·위치 |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시국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0년 | ||
등재기준 | (i)[3], (ii)[4], (iii)[5], (iv)[6], (vi)[7] | ||
지정번호 | 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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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ircus Maximus. 고대 로마의 수도 로마에 존재했던 12개 경기장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경기장. 고대 로마에서 가장 큰 공공 건물로 주로 전차경주에 사용되었지만, 다른 유형의 경기나 개선식에도 이용되었다. 현재는 공터만 남아있다.2. 규모
키르쿠스 막시무스 부지는 팔라티노 언덕과 아벤티노 언덕 사이에 있는 무르키아 계곡의 거의 전체 공간을 자치했다. 북서쪽으로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오래된 장소인 포로 보아리오에 이르고, 남동쪽으로 세르비우스 성벽의 성문 중 하나인 카페네 문에 이르렀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부지의 길이는 650m 또는 621m에 이르렀고, 폭은 125m 또는 118m에 달했다고 한다. 대 플리니우스는 길이가 콜로세움 3개이고, 폭은 콜로세움 한 개 정도였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길이는 555m이고 폭은 185m였을 것이다. 현대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총길이는 600m이고, 폭은 최대로 잡았을 때 200m였다고 한다. 따라서 키르쿠스 막시무스 부지의 최대 면적은 12만 제곱미터로, 현대 축구장 16개를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이렇듯 규모가 거대했으니 수용 인원도 엄청났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최대 15만 명이 입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대 플리니우스는 26만 명이 들어갔을 있었다고 밝혔다. 4세기에 익명의 학자가 작성한 <로마 시의 궁금증과 정보(Curiosum et Notitia Urbis Romae)>에 따르면 385,000피트에 달하는 좌석이 경기장에 마련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최대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 통치하의 로마 시 주민이 최대 100만 명이었으니, 전체 인구의 1/5에서 1/4 사이가 경기장에 동시에 앉을 수 있었던 셈이다. 다만 이 기록들은 고대 학자들의 전형적인 '부풀리기'로 추정된다. 2000년대에 보르도 대학에서 실시한 3D 모델링 결과에 따르면, 약 95,000 ~ 10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3. 내부 건축물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 자체의 길이는 최대 568m였으며, 너비는 말과 전차들의 출발용 간이 건물인 카르케레스(carceres)의 75m에서 경주 시작 부분의 84m, 동쪽 끝의 87m에 이르렀다. 경기장 트랙 주위에는 너비 3m, 깊이 3m의 수로가 카르케레스가 있는 서쪽 끝을 제외하고 설치되었는데, 이는 동물을 관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기장 입구 양쪽에 12개의 카르케레스가 배치되었으며, 경기장 주변에는 큰 업적을 세운 선수들의 동상이 세워졌고, 집정관, 법무관 등 고위 행정관들이 머무는 특별 좌석도 별도로 설치되었다.경기장 한 가운데에는 스피나(Spina)라는 이름의 도랑이 자리잡았다. 스피나는 본래 무르시아 계곡을 따라 흐르는 하천을 포착하고 고인 물을 배수하는 역할을 하는 운하였다.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건설되면서 매몰되었다가, 로마 공화국 말기에 경기장 한복판에 재개발되었다. 높이는 1m, 폭은 12m였으며, 길이는 345m였으며, 도랑 위에 다양한 장식 기념물이 서 있는 인공 섬이 있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교차하는 다리들이 섬들 주위에 설치되었다. 섬 위에 설치된 건물은 오벨리스크, 에디쿨레(Édicule, 건축물의 벽면에 입체적으로 조형된 제단 모양의 건축물), 파빌리온(Pavilion) 및 동상들이 있었다.[8]
플라미니오 오벨리스크.
라테라노 오벨리스크.
스피나의 인공 섬 위에 설치된 오벨리스크로 추정되는 것으로는 플라미니오 오벨리스크와 라테라노 오벨리스크가 있다. 플라미니오 오벨리스크는 본래 람세스 2세가 헬리오폴리스의 라 신전 주변에 세웠다가 기원전 10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로마로 이송되어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 한복판에 세워졌다. 그리고 라테라노 오벨리스크는 투트모세 3세가 카르나크 신전에 세워졌다가 357년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로마로 옮겨져서 경기장 내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세웠던 오벨리스크와 나란히 세워졌다. 두 오벨리스크는 모종의 시기에 쓰러진 채 방치되었다가 1587년 교황 식스토 5세의 주도로 다시 세워져서 현재 플라미니오 광장과 라테라노 광장에 각각 설치되었다.
카르케레스에는 12개의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고, 아케이드 정면을 통해 트랙이 내려다보였다. 입구는 밧줄로 고정된 이중 나무 문으로 닫혀 있었는데, 진행 요원들이 문을 열어주는 것과 동시에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 간이 건물은 초기에는 목재로 지어졌고, 다음에는 응회암으로 지어졌다가, 클라우디우스 1세 시대부터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12개의 칸막이는 곡선을 따라 배열되었으며, 각 참가자는 첫번째 라운드의 시작을 표시하는 리네아 알바(linea alba)까지 동일한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경기장은 상점과 작업장이 있는 단층 열주 아케이드로 둘러싸였다. 특정 아치는 스탠드의 아래쪽 줄에 대한 접근을 제공했고, 떠나는 사람들과 교차로에 진입하지 않고 관중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방향이 지정된 위쪽 줄에 접근할 수 있는 계단을 제공했다. 아케이드는 총 3층으로 이뤄졌는데, 이중 1층엔 대리석 석판으로 덮인 외부 기둥들이 대거 설치되어 관중들의 무게를 지탱했고, 나머지 부분은 나머지 부분은 벽돌로 덮인 응회암으로 이뤄졌다.
4. 외부 건축물
키르쿠스 막시무스 주변에는 태양의 신 솔(Sol), 달의 여신 루나(Luna), 대모신 마테르 데움(Mater Deum), 젊음과 활력을 유지하는 여신 유벤타스(Juventas) 여러 신들을 섬기는 사원들이 있었다. 솔 사원은 키르쿠스 막시무스 결승선 맞은 편에 줄지어 있는 스탠드에 위치했으며, 루나 신전은 키르쿠스의 오피둠(oppidum), 즉 아벤티노 언덕 쪽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플로라와 세레스 여신에게 헌정된 2개의 다른 신전도 있었으나 64년 로마 대화재 때 파괴되었다.한편, 키르쿠스의 북서쪽 경계인 포로 보아리오에 농업의 신인 콘수스 에게 바쳐진 로마 제단이 있었으며, 기원전 196년 히스파니아에서 이민족들을 물리치고 귀환한 총독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가 세운 포르닉스 스테르티니(Fornix Stertinii)도 있었다. 포르닉스 스테르티니는 하나 이상의 금박을 입힌 청동 조각품으로 덮인 3개의 아치형 기념비였다. 또한 키르쿠스의 동쪽 끝 맞은 편에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이 자리잡았다.
5. 활용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주로 행해지는 것은 단연 전차경주였다. 전차경주는 카르케레스 위의 관람석에 선 경주 주최자가 흰색 천인 마파(mappa)를 던지면서 시작했다. 선수들은 경기장 트랙을 7바퀴 돌아야 했다. 경기에 동원된 전차는 말 2마리가 이끄는 이륜전차, 4마리가 이끄는 사륜 전차, 최대 10마리가 이끄는 전차 등 여러 종류로 나뉘었으며, 마부는 대개 노예 출신이었다. 대다수 전차 마부들은 경주를 후원하고자 결성된 파벌들 중 하나에 속했다. 이 파벌들은 충성심과 기여에 대한 대가로 회원들을 후원하고 신변을 보장했다. 후원자들은 전차 경주에 관심이 무척 많았고, 전차 마부들에 투자해 이로부터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려 했다. 이들은 서로를 구분짓기 위해 서로 다른 색상을 택했다.테르툴리아누스에 따르면, 본래 겨울과 여름을 상징하는 흰색과 빨간 색의 두 파벌만 있었지만, 나중에는 마르스를 상징하는 빨간색, 제피로스(Zephyrs)를 상징하는 흰색, 봄 또는 대지를 상징하는 녹색, 하늘과 바다 또는 가을을 상징하는 파란색의 4개 파벌로 나뉘었다고 한다.[9] 이들에 속한 마부들은 각각의 색상을 적용한 깃발 및 망토를 착용해, 멀리 있는 관중들이 경주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줬다. 한편, 트랙 코너에 망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 7개의 돌고래 또는 옴팔레(알 모양의 조각품) 모양의 청동 조각상이 있었다. 이 조각상은 전차가 망대가 세워진 곳 주변을 지나갈 때 경기 진행요원이 밧줄을 통해 아래로 잡아당겨져, 관중들에게 해당 선수가 몇 바퀴를 돌았는지를 알려줬다.
서커스 게임 역시 이 곳에서 열렸다. 특히 9월 4일부터 9월 19일까지 이어지는 루디 로마니와 11월 4일부터 11월 17일까지 이어지는 루디 플레베이(Ludi Plebeii) 시기에 이곳에서 행사가 자주 열렸다. 서커스 게임은 포로 로마노에서 키르쿠스 막시무스까지 이어지는 행렬로 시작한다. 고위 행정관, 군인, 마부, 무용수, 음악가, 사제 등이 행렬에 참여했다. 사제들은 신들을 위해 마련된 단상인 풀비나르(pulvinar, 쿠션)에 신들의 조각상을 놓았다. 서커스 게임에는 곡예, 전사 춤, 승마 쇼 및 운동 경기(경주, 권투, 레슬링), 검투사 경기, 동물 싸움이 포함되었다. 키르쿠스는 오랜 세월 로마의 유일한 서커스 경기장이었지만, 80년 콜로세움이 건설된 후에는 상당수의 서커스 게임이 그곳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많은 현대 학자들은 콜로세움이 세워진 후에도 키르쿠스에서도 종종 서커스가 제공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한편,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개선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선장군은 전차를 탄 채 로마 시내를 돌다가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에 들어가서 한 바퀴 돈 후 유피테르 신전으로 향했다. 그 후 전차경주를 가능한 한 큰 규모로 거행해 오락에 굶주린 로마 시민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다만 개선장군이 전차를 탄 채 도로와 높이 차이가 있는 이 건물을 어떻게 통과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로마 기술자들이 개선장군을 위해 임시 경사로를 건설해 주고, 개선장군은 이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서 경기장에 들어갔으리라 추정한다.
6. 역사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로마 왕국 제5대 국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라틴 도시인 아피올라에를 정복한 뒤 유피테르를 기리기 위한 전차경주를 벌이고자 무르키아 계곡에 임시 경기장을 처음으로 건설했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로마 인구를 늘리기 위해 사비니 여성 납치를 단행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고 한다. 이후 승마 행사가 이 장소에서 열릴 때마다 임시 건물이 종종 건설되다가 기원전 4세기 말에 전차경주를 위한 목조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당시엔 전차 경주가 곡선이 아니라 직선으로 진행되어서, 전차가 경기장 끝에 도달한 뒤 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경주했다. 또한 스피나는 존재하지 않았고, 카르케레스, 동물을 임시 사육하기 위한 건물 등은 포에니 전쟁 이후에 등장했다.기원전 2세기 후반, 로마의 하수도 시스템이 개발되면서 경기장 아래에 높이 약 4.5m, 폭 2.5m에 달하는 대형 터널이 건설되면서 스피나가 설치될 수 있었다. 또한 기존의 방식으로는 경기장 바닥을 사전에 평평하게 만들어야 하는 노동력과 비용이 많이 들자 트랙을 능선 형태로 개조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186년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열린 경기에서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기둥이 폴렌티아 여신상에 떨어져 박살냈다. 이 사고에 놀란 원로원 의원들은 축제를 하루 연장하고 파괴된 동상을 2개의 새로운 동상으로 대체했으며, 그 중 하나에 금박을 입혔다고 한다.
이후 전차경주의 인기가 날로 상승하면서 키르쿠스를 좀더 확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갈수록 거세졌다. 기원전 46년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대중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키르쿠스를 대대적으로 재개발해 길이 600m, 너미 200m에 달하는 규모로 확장했다. 이때 그는 기원전 55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20마리의 코끼리들끼리 싸움을 붙인 서커스 게임을 벌였다가 코끼리들이 경기장과 관중 사이에 설치된 방어벽을 밀쳐버리는 바람에 많은 이들이 압사당한 사고가 벌어진 것을 반면교사 삼아, 좀더 강력한 방어벽을 설치하고 트랙과 관중석 사이에 수로를 파냈다.
그러나 목조 건물인데다 수많은 이들이 왕래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화재 사고가 종종 벌어졌다. 기원전 31년 대형 화재가 발생해 상당 부분이 손상되었고, 서기 36년 화재로 인해 아벤티노 언덕과 가까운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석조 스탠드를 부분적으로 건설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고, 64년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목조 스탠드 대다수가 파괴되었다. 키르쿠스는 빠르게 재건되어 네로가 68년 그리스에서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할 때 사용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관람석과 스탠드는 완전히 돌과 대리석으로 대체되었다.
1세기 말의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도무스 아우구스타나를 건설해 황실 가족이 궁전에서 경주를 관람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키르쿠스의 긴 양쪽이 다시 화재로 손상되었다. 트라야누스는 건물을 재건축하고 좌석을 5,000개 추가하는 등 대폭 확장했으며, 건물의 모든 부위를 석재로 대체해 화재 발생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트라야누스의 치세 때 최대 크기에 도달했다. 그러나 사고는 여전히 종종 발생했다. 고대의 몇몇 기록에 따르면,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와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에 관중석이 붕괴되는 바람에 수많은 희생자가 양산되었다고 한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종교로 자리잡은 후에도 여전히 흥행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낡고 금이 간 경기장을 대대적으로 보수했으며, 그의 후계자들도 대대로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열리는 전차 경주를 후원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의 통치자가 된 테오도리크 대왕도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의 뒤를 이은 동고트 왕국 통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록상으로 전해지는 마지막 전차경주는 549년 토틸라에 의해 열렸다.
그러나 동고트 왕국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으로 인해 멸망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이 이탈리아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로마의 정세가 매우 불안정해진 상황 속에서 전차 경주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고,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오래도록 방치되었다. 특히 중세에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돌과 대리석이 다양한 궁전과 교회 건축에 재사용되었고,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폐허로 전락했다. 여기에 원래 홍수가 나기 쉬운 곳에 자리잡았던 터라 테베레 강이 범람할 때마다 충적토와 축적된 잔해가 계속 쌓였다. 그 결과 원래의 선로는 표면 아래 6m 깊이에 묻혔다.
1852년 영국-이탈리아 가스 협회가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있었던 부지에 가스 공장을 설치해 1910년 로마 외곽으로 옮겨질 때까지 운영되었다. 1930년대에 베니토 무솔리니의 주도하에 유적지 발굴 사업이 개시되면서 세간에 이 곳의 중요성이 알려졌다. 이후 발굴 과정에서 좌석 층의 하단 부분과 외부 현관이 발견되는 등 여러 성과가 있었지만, 침수가 자주 일어나고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추가 탐사는 쉽사리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있었던 공터는 '치르코 마시모 공원'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그 주변은 대중에게 공개되어 콘서트나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 2006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을 우승했을 때, 군중이 치르코 마시모 공원에 몰려들어 축하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1] 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2] Centre historique de Rome, les biens du Saint-Siège situés dans cette ville bénéficiant des droits d'extra-territorialité et Saint-Paul-hors-les-Murs[3]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4]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5]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6]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7]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8] 일설에 따르면,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기원전 33년 조영관에 선임된 뒤 청동으로 조각된 돌고래 분수를 경기장 한복판에 세웠다고 한다.[9]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보라색과 금색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파벌을 만들었다고 전해지지만, 두 조직은 그의 사망 후 기록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