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페르시아어 خرمدینان [1]아랍어 محمرة
8~9세기 아바스 왕조에 맞서 이란인들이 일으킨 일련의 반란 세력을 통칭하는 말. 755년 아바스 와조의 개국공신인 페르시아인 아부 무슬림이 처형당한 후 사산 제국의 귀족 출신 순파드가 조로아스터교와 시아파를 짬뽕한 교리를 앞세워 봉기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교리상으로 그들은 아부 무슬림의 죽음을 부정했으며, 후에 그가 마흐디 (구세주)로 재림할 것이라 믿었다. 8세기 중반과 830년대의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으며, 둘다 아바스 왕조에 진압되고 잔존 병사들은 동로마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일부 세력은 12세기까지 잔존하였다고 하며 심지어 사파비 제국의 주축인 키질바시가 호람딘의 후예라는 설도 있다.
2. 순파드의 반란
사산 제국의 7대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카린 가문 출신의 순파드는 755년 아부 무슬림의 부고에 봉기하였다. 그는 순식간에 니샤푸르, 쿰, 라이 (테헤란) 등 이란 북부를 석권하며 '피루즈 이스파바드' (승리의 장군)를 칭하였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스스로 사도 혹은 (마흐디가 된) 아부 무슬림의 대리인이라 하였다고 한다. 라이에서는 아부 무슬림의 보물을 취하며 기세를 올린 순파드는 메카의 카바 신전을 파괴하겠다며 서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하지만 하마단으로 향하던 중 아바스 왕조에서 파견한 1만의 군대와 조우하여 싸웠으나 대패하였다. 전장에서 무수히 많은 호람딘이 사망하여 912년까지도 그 뼈무덤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순파드는 타바리스탄 산지로 피신하였으나 그의 지도력에 실망한 다부이 왕조의 한 왕족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로써 이란 북부를 휩쓸었던 순파드의 반란은 70일만에 막을 내렸다.3. 이스학의 반란
767년 페르시아인 이스학[2]은 이란 문화권의 외곽인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봉기하였다. 그는 아부 무슬림이 조로아스터교를 개혁하기 위해 강림한 사도였으며 자신은 알리의 손자 야흐야 이븐 자이드의 자손임을 칭하였다. 그는 주변의 튀르크 인들과 연대하여 알 투르크로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스학은 얼마 가지 못하여 아바스 왕조의 호라산 총독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다만 그의 잔존 세력은 아부 무슬림을 따른다는 의미의 무슬리미야로 불리며 조로아스터교와 시아파를 혼합한 호람딘 사상의 기초를 마련하였다.4. 알 무칸나의 반란
메르브 출신의 페르시아인 알 무칸나의 본명은 하솀 (하심)이다. 본래 화학자였던 그는 어느날 실험 도중 발생한 폭발 사고로 얼굴에 화상을 입게 되었다. 따라서 이후 베일을 쓰고 다녔는데, 따라서 아랍어로 베일을 쓴 자라는 뜻인 알 무칸나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무함마드, 알리, 아부 무슬림에 이은 신의 화신이라 칭하고 화학에 기반한 마술을 행하며 지지자들을 모았다. 알 무칸나의 호람딘은 아바스 조의 흑의에 대응한 백의를 입었으며 호라산 일대의 아랍인 정착촌을 습격하였다. 이에 아바스 당국은 수차례 토벌군을 파견하였으며, 동쪽으로 쫓기던 알 무칸나는 현재 우즈베키스탄인 케쉬 (샤흐리삽즈)의 한 요새에 이르러 포위되었다. 포로로 잡히길 거부한 알 무칸나는 자신이 있는 건물에 불을 질러 자살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이해가 783년으로 약 600년이 흐른 후 알 무칸나가 자결했던 케쉬에선 유라시아를 뒤흔들 티무르가 태어난다.5. 바바크 호람딘의 반란
이란 아제르바이잔주에 위치한 바바크 성채
페르시아어 ابک خرمدین [3]
바바크 (팔라비어로는 파파크)는 아르다빌 출신 페르시아인이었다. 일찍이 부친을 잃고 어려운 유년기를 보내던 그는 한 나그네를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휘하에 들어갔다. 나그네의 정체는 자비단이라는 호람딘의 일원으로, 아바스 조에 대항하는 비밀 결사를 이끌고 있었다. 바바크는 그의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으며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자비단이 자녀 없이 사망하자 그의 부인 바누 호람딘과 결혼한 후 바바크 호람딘이라 개명하였다. 한편 당시 알 마문과 동생 알 아민과의 피트나 (내전)가 끝난 직후라 아바스 왕조가 어수선한 상황이었는데, 바바크는 그 틈을 타 816년 반란을 일으킨다. 이란 각지의 호람딘을 규합한 바바크는 과장을 보태어 20만의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고, 이들은 3차례 (819-821년 야흐야 이븐 무아드, 822년 이사 이븐 무함마드, 824년 아흐마드)에 걸친 아바스 왕조의 토벌군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병법서를 공부한 바바크는 칼리파 군대의 병참선을 교란하고 보급을 맡은 대상 행렬을 습격하는 방식으로 적의 기세를 꺾어 놓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827년 무함마드 이븐 후마이드의 토벌군에 패해 많은 동지들이 포로가 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바바크는 829년 사령관 무함마드를 전사시키며 반격에 성공하였다.
당시 칼리파였던 알 마문은 아제르바이잔에 더이상 개입하지 못한채 833년 사망하였다. 후대 칼리파인 알 무타심은 페르시아계 아프신을 사령관으로 임명해 재차 토벌을 시도하였다. 아프신은 바바크의 전술을 간파하곤 보급을 맡은 대상들에게 군대를 보내 보호하였다. 호람딘 군은 여느 때처럼 보급로 차단에 나섰다가 아프신의 반격에 섬멸되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호람딘 측은 적의 보급로 차단은 커녕 아군의 세력이 감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적의 보급품을 빼앗아 물자를 충당하던 전술이 실패하자 바바크는 타격을 입었고 정면 대결을 포기한 채 본부인 바드 성채로 철수하였다. 이에 알 무타심은 지원군을 파견하였고, 아프신은 바드를 철저히 포위한 채 호람딘의 여력이 바닥나길 기다렸다. 기나긴 공성전 끝에 아프신은 바바크에게 목숨을 보장하며 항복을 종용하였다. 이에 바바크는 40년을 노예로 사느니 통치자로 하루를 살겠다며 거부하였고, 소수의 친위대와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였다. 바바크는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도 유지 이븐 사을에게 피신하였는데, 그는 뇌물을 받고 바바크를 아프신에게 인도하였다. 아프신은 바바크에게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겠다 제안하였고, 바바크는 20년간 수도로 삼았던 바드 성채의 폐허를 둘러보곤 순순히 귀환하였다. 이후 바바크는 사마라로 압송되어 손과 발이 잘린 후 처형되었다. (838년) 비록 실패했지만 페르시아인의 기개를 널리 알린 바바크는 현재 아제르바이잔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6. 나스르의 망명
한편 833년 가을, 이스학 이븐 이브라힘의 토벌군에 패배한 1만 4천의 호람딘 군대는 추격을 피해 장군 나스르의 지휘로 동로마령 아르메니아로 망명하였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전사한 군인들의 과부와 결혼하여 정착하였다. 테오포보스로 개명한 나스르는 페르시아 투르마 (기병대)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1만이 넘는 그 숫자는 전체 동로마 병력의 1/6을 차지하였다. 동로마 황제 테오필로스는 이들을 일종의 페르시아 망명정부 급으로 대우하였고 테오포보스에게 누이를 결혼시켜 인척으로 삼았다. 837년, 테오필로스는 페르시아 군단과 진격해 칼리파 알 무타심의 출생지인 소조페트라를 함락하였다. 그해 9월에는 바바크의 패색이 짙어지며 1만 6천의 호람딘이 추가로 동로마에 망명해 왔다. 838년, 알 무타심이 반격해와 벌어진 안젠 전투에서 동로마 군은 대패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테오포보스는 테오필로스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테오필로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에 시노페에 집결한 페르시아 군단이 테오포보스를 황제로 옹립하는 일이 있었다. 특히 성상파괴파였던 테오필로스에 비해 성상에 호의적이었던 테오포보스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일부 귀족이 그를 지지하기도 하였다.하지만 테오포보스는 황위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테오필로스와 비밀리에 협상하였다. 따라서 839년 후자가 진격해오자 테오포보스는 항복하였고, 3만에 달하는 페르시아 군단은 2천명 단위로 쪼개져 각지의 테마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후 본래의 위치로 복권된 테오포보스는 계속해서 압바스 조와의 국경에서 복무하였다. 그러나 842년, 죽음을 직감한 테오필로스는 후계자 미하일에 대한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자 매부 페트로나스와 환관 출신 장군 테옥티스코스를 시켜 테오포보스를 처형하였다. 테오필로스는 테오포보스의 수급을 확인한 후에야 임종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호람딘 세력은 역사 속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10세기 초엽 조로아스터교를 내걸고 일시적으로 이란을 거머쥐었던 지야르 왕조의 마르다비즈는 호람딘이 아니었다. 다만 이란 역사의 추세를 볼 때에 잔존한 호람딘이 시아파나 조로아스터교 세력과 협력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