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의 민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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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틴어: comitia populi tributa.영어: Tribal Assembly.
로마 공화국의 4개 민회 중 한 형태. 하급 행정관을 선출하고 집정관 또는 법무관이 제안한 법률에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 상세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은 로마 공화국 시기에 2개의 부족 민회가 있었으며, 고대 자료에서는 두 민회 모두 'comitia tributa'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하나는 호민관이 소집하고 귀족이 제외된 평민회이고, 또다른 민회는 집정관 또는 법무관이 소집하고 귀족과 평민이 모두 모인 민회였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많은 현대 학자들은 로마 국민 전체가 참여하는 부족 민회를 'comitia tributa' 또는 'comitia populi tributa'라는 용어로 지칭하고, 평민회는 'concilium plebis' 또는 'concilium plebis tributum'으로 지칭한다.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 구분법은 현대 역사가들이 임의로 만들어냈을 뿐 실체가 없는 용어이며, 평민들이 투표를 위해 모이고 법안을 제출하는 평민 호민관이 주재하는 모임 외에는 부족을 기반으로 한 의회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고대 문헌에서 집정관이 'comitia tributa'에 법안을 제출했다는 것은 실제로는 켄투리아회에 제출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평민회를 주재하지 않는 집정관이 부족 민회에 법안을 제시하고 하급 행정관 선거를 주재했던 것을 볼 때 별개의 부족회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텍사스 공화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자 로마사 연구자인 게리 포사이드(Gary Forsythe)는 2005년에 발간한 저서 <초기 로마의 중요한 역사>에서 평민만 구성되는 평민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이 제시한 파트리키와 플레브스간의 항쟁 역시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했지만, 학계에 널리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평민회에 참석한 플레브스들은 초창기에는 씨족별로 구성되는 쿠리아별로 조직되었다. 이로 인해 쿠리아의 최상단에 위치한 파트로누스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쳐서 평민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자, 기원전 471년부터 부족별로 조직하기로 해 파트리키로부터의 독립을 꾀했다. 트리부스회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트리부스회가 도입된 이유는 평민회에서 결정된 법안은 오직 평민에게만 적용되었기에 귀족들에게도 적용되는 법률을 제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레브스들의 권력이 갈수록 신장되고 기원전 287년 평민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면 원로원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호르텐시우스 법이 통과되면서, 트리부스회는 법안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권리를 평민회에게 내주었다.
35개의 로마 부족으로 구성된 트리부스회는 재무관, 수석 조영관, 2명의 집정관이 이끄는 4개 군단에 소속된 24명의 트리부누스 밀리툼 등 하급 행정관과 폰티펙스 막시무스, 폰티펙스 등 사제단을 선출했다. 그리고 집정관 또는 법무관이 제안한 법률에 승인 여부를 결정했으며, 벌금형 등 가벼운 형벌에 대한 최종 승인도 맡았다.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고 독재관에 취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민회에서 재판을 다룬 관행을 폐지하고 모든 재판을 상설 법정체제에 위탁하게 했다. 이후 로마 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지중해 세계의 절대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트리부스회에서 선거를 통해 뽑던 하급 행정관을 자기가 임명하는 것으로 변경하면서, 트리부스회는 모든 기능을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