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09:47

루카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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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경과4. 이후

1. 개요

기원전 56년 4월,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분열 위기에 몰린 제1차 삼두정치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모인 회담.

2. 배경

기원전 59년, 로마 공화국 말기의 정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여 정치적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제1차 삼두정치를 맺었다. 카이사르는 두 거물의 후원에 힘입어 집정관에 선임된 뒤 폼페이우스가 오랫동안 추진했지만 정적들의 방해공작으로 인해 이루지 못했던 퇴역병들에 대한 토지 분배 정책을 달성했으며, 크라수스가 염원하던 징세청부업자의 속주세 예납제 폐지를 이뤄냈다.

그 후 카이사르는 일리리아, 갈리아 키살피나,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한 뒤 갈리아 전쟁을 단행해 승승장구하면서 명성을 드높였다. 그러나 로마에 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갈등을 벌이면서, 삼두정치는 붕괴 위기에 몰렸다. 이 갈등은 카이사르가 자신과 대립하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견제하기 위해 평민의 양자가 되어서 호민관에 선출되려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에게서 비롯되었다.

클로디우스는 초기에는 키케로를 압박해 망명하게 만들고 삼두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는 곧 폼페이우스와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보다 앞서, 폼페이우스는 티그라네스 2세의 아들이었으며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뒤 로마에 귀순한 티그라네스 왕자를 로마로 데려갔다. 클로디우스는 폼페이우스의 반대를 무시하고 왕자를 아르메니아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안티오키아에 상륙했을 때 폼페이우스의 추종자들이 티그라네스 왕자를 이송중이던 자들을 공격해 몇 사람을 살해했지만, 티그라네스 왕자는 결국 아르메니아로 돌아갔다. 이후 양자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기원전 58년 8월 11일에는 한 노예가 체포된 뒤 클로디우스가 자신더러 폼페이우스를 죽이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했지만 유야무야 처리되기도 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클로디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키케로를 복귀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57년 클로디우스의 호민관 임기가 만료된 뒤, 폼페이우스의 의중을 헤아린 원로원 의원들과 새로 선출된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가 키케로의 복귀를 추진했다. 클로디우스는 정치깡패들을 규합해 정치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폼페이우스가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맞서고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가 역시 정치깡패를 동원해 클로디우스에 대항하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키케로가 복귀에 성공하자, 클로디우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악감정을 품고 폼페이우스의 집을 포위하고 돌을 던지거나 연단에 서서 연설하던 폼페이우스를 향해 야유를 퍼붓는 등 온갖 공격을 퍼부었다.

이때 클로디우스 추종자들은 폼페이우스에게 야유를 퍼부으면서 "동방을 맡아야 할 자는 누구인가? 크라수스!"라는 구호를 외쳤다. 폼페이우스는 이 말을 듣고 크라수스가 클로디우스의 배후에 있다고 의심했다. 키케로는 친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보낸 서신에서 폼페이우스가 자신에게 "크라수스가 나를 암살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고 고백했으며, 몇 달간 시골에 내려가서 경호원들의 철통 호위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크라수스로부터 막대한 후원을 받고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 카이사르를 계속 지원할 필요성을 의심했다고 덧붙였다.

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도 로마의 정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카이사르는 이 상황을 내버려뒀다가는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겠다고 염려했다. 그의 염려는 기원전 56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표명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카이사르의 임페리움을 회수하고 집정관 시절에 저지른 불법 행위를 고발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카이사르는 아헤노바르부스의 당선을 저지하고 삼두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회담을 갖기로 했다.

3. 경과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으로서 임페리움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탈리아 본국과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경계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루비콘 강 북쪽의 이탈리아 도시인 루카에서 회담을 갖기로 했다. 기원전 56년 초 겨울 숙영에 들어간 카이사르는 루카로 내려가서 많은 방문객을 맞이했다. 플루타르코스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루카에 방문한 이들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외에도 샤르디니아 총독 아피우스, 히스파니아 총독 네포스를 포함하여 120명의 릭토르와 200명 이상의 원로원 의원이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방문자들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의 요청에 따라 루카에 찾아왔다고 밝혔다.

세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고대 사료에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 수에토니우스는 그들이 루카에서 아래의 합의에 도달했다고 기술했다.
1.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다.
2. 카이사르는 두 사람의 당선을 위해 군인들을 민간인 신분으로서 로마로 보내 투표하도록 한다.
3.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의 임기를 5년 연장한다.
4. 폼페이우스는 임기를 마친 뒤 히스파니아 총독에 선임되고, 크라수스는 시리아 총독을 맡는다.

반면, 디오 카시우스는 루카 회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공동 집정관이 된 것은 카이사르의 명성이 갈수록 높아진 것에 위협을 느낀 폼페이우스가 크라수스를 끌어들여서 카이사르에 대항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카이사르의 지지자들의 반발에 부딪치자 카이사르의 임페리움을 3년 연장하는 것으로 달랬다고 한다. 라젠비(J. F. Lazenby)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디오의 이같은 기록과 당대의 저명한 정치인 키케로의 서신에 루카 회담에 대한 직접적 또는 간접적 언급이 전혀 없었다며 루카 회담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콤 뤼베드(Colm Luibheid)를 비롯한 다른 학자들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모순이 있다고 지적한다. 기원전 56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에게 "세간에 당신들이 카이사르와 짜고 집정관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 정말로 집정관이 되고 싶은가?"라고 묻자, 폼페이우스는 옵티마테스 때문이 아니라 선동을 일삼는 자들 때문에 로마의 정세가 불안하니 집정관을 맡아야 한다면 맡겠다고 답했다. 반면에 크라수스는 자신은 카이사르와 짜고 집정관으로 지명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후 두 사람이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자, 원로원 내부의 많은 이들이 두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며 격분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카이사르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 집정관이 되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카이사르와 짜고 집정관을 맡았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원로원 의원들이 두 사람을 적대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뤼베드는 키케로가 루카 회담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은 이 회담이 공개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사적인 모임을 가장한 비밀 회의였음을 반증한다고 주장했다. 키케로는 루카 회담 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 선거에 뒤늦게 출마할 때까지 기간 동안 진상을 알아채지 못한 수많은 로마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뤼베드는 키케로의 서신에서도 그가 삼두에게 강한 압박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고 본다. 키케로는 기원전 56년 5월 15일에 캄파니아에서 카이사르의 농지법에 따른 토지 분할을 지속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이에 불만을 제기하자, 폼페이우스는 키케로를 불러서 농지법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키케로는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강화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에 굴복해 5월 15일 원로원 회의에 출석하지 않았고, 동생 퀸투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만약 내가 내 입장을 다소 바꿔서 내가 가장 깊이 감사하고 있는 매우 가치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면, 일관성이 없다는 비난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이후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면서 거센 반발이 일어날 때 이에 대해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집정관을 맡는 동안 그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이로 보건대, 루카에서 사적인 모임을 가장한 비밀 회담이 열렸고 키케로가 의견을 철회하고 로마에서 소문이 돌 정도로 사람들이 이 모임에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정확한 내용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사실에 근접할 것으로 추정된다.

4. 이후

루카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몇 달 동안 회담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세간에서 두 사람이 루카에서 카이사르와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떠돌고 현직 집정관 마르켈리누스가 대놓고 집정관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도, 두 사람은 대답을 얼버부릴 뿐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56년 가을에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비로소 속내를 드러냈다. 마르켈리누스는 이에 격분해 두 사람의 출마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두 사람은 호민관 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1]를 회유하여 선거를 마르켈리누스가 퇴임한 후인 기원전 55년 1월로 미루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했다. 마르켈리누스는 "이것은 공화정의 정신에 위배되는 행위다!"라며 공개적으로 항의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당대 최강의 거물인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출마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잇따라 사퇴했지만, 아헤노바르부스는 소 카토 등의 격려에 힘입어 선거 유세를 이어가기로 했다. 많은 로마인들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밀실에서 집정관 자리를 거래했다고 분개하며 아헤노바르부스를 지지했다. 이윽고 투표일에 카이사르가 보낸 병사들이 로마에 대거 밀려들어왔다. 아헤노바르부스 및 옵티마테스 파벌 추종자들은 이에 맞서 무리를 결성했다. 곧 두 무리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더니 투표장이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아헤노바르부스를 칼로 내리쳤고, 사람들은 이에 기겁하여 도주했다. 아헤노바르부스는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갔고, 다른 이들은 폼페이우스의 피묻은 옷을 집으로 가져왔다. 당시 임신 중이던 폼페이우스의 아내이자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는 이 옷을 보고 폼페이우스가 죽은 줄 알고 놀라 유산했다.

이후 기원전 56년 2월로 미뤄진 투표 결과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두 사람은 루카 회담에서 정한 대로 정책을 단행했고, 원로원 의원들은 굴욕감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며 이를 허용했다. 그리하여 붕괴될 위기에 몰렸던 제1차 삼두정치는 굳건해졌지만, 집정관 임기를 수행한 후 시리아 총독에 부임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무리하게 단행하다가 패사하고 율리아가 아기를 낳다가 사망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간의 결혼 동맹이 끊기면서 깨졌다. 그 후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로마는 내전으로 치달았다.
[1] 소 카토의 먼 친척으로, 소 카토와는 달리 삼두정치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