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 Triarii |
1. 개요
로마 공화국 시기 로마군에서 3번째 대열을 형성한 중보병 부대를 지칭하는 용어.
2. 상세
트리아리(Triarii)는 '3번째'라는 의미의 라틴어 용어로, 이 부대에 속한 병사 개개인은 트리아리우스(triarius)로 일컬어졌다. 기원전 390년 알리아 전투의 참패와 로마 약탈 사건이 벌어진 후, 로마군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를 중심으로 군제개혁을 단행했다. 이제 로마군에 입대한 장정들은 재산별로 구분되어 각자의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때 가장 부유한 이들이 에퀴테스로서 기병을 맡았고, 두번째로 부유한 이들은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로 편성되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트리아리에는 군대에서 최소 15년을 복무한 고참병들이 배속되었다고 한다.첫번째 대열을 구성한 하스타티와 두번째 대열을 구성한 프린키페스가 약 2.4미터(8피트)의 길이인 하스타로 무장했다가 글라디우스로 변경한 것에 비해, 트리아리는 하스타를 계속 사용했다. 기본 무장 수준은 프린키페스와 비슷했지만, 좀더 화려한 장식의 깃털을 투구 상단에 꽂고 보다 질이 좋은 방패와 갑옷을 착용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들 중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거나 그동안 받은 급료를 잘 쌓아둔 이들은 그리스 호플리테스가 입은 전신 청동 갑옷을 입었고 방패 역시 프린키페스가 스쿠툼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그리스식 둥근 방패인 라운드 실드를 사용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트리아리의 수는 군단당 600명이었으며, 각각 60명으로 이뤄진 10개의 중대로 구성되었다. 제1 대열을 형성한 히스타티와 제2 대열을 형성한 프린키페스가 적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면,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서서 적과 맞붙어서 날이 어두워져서 전투를 더 이상 치를 수 없을 때까지 근접전을 벌였다. 또한 아군이 적에게 압도되어 퇴각해야 할 경우, 최후까지 전장에 남아서 아군이 후퇴를 완료할 때까지 버텼다. 로마인들은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할 때 "rem ad Triarios redisse(트리아리에 이르고 말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트리아리까지 전투가 이어진 적은 드물었고, 때로는 트리아리를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숙영지를 경비하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이러한 전투 순서는 대부분 그대로 이뤄졌지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특별한 전술을 사용했다.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가 적과 전면에서 맞붙고 있을 때, 아군 기병대가 적 보병대의 측면을 공격했으나 격퇴당하자 후방에 있는 트리아리를 적 측면으로 이동시켜 공세를 퍼붓게 했다. 그리고 자마 전투 때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정예 보병대가 중앙을 파고 들어와서 로마 보병대를 포위 섬멸하려 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트리아리와 프린키페스를 중앙에, 하스타티를 측면에 두고 전투 대열을 긴 줄로 형성해 적이 쉽사리 포위하지 못하게 했다. 두 전술 모두 큰 성과를 거두면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을 무너뜨렸다.
통설에 따르면, 기원전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군제개혁을 하면서 하스타티-프린키페스-트리아리로 구성된 마니풀라 시스템을 코호르스(cohors) 시스템으로 개편했고, 그 과정에서 트리아리가 폐지되었다고 한다. 이는 문헌 기록에서 마리우스 이후로 트리아리가 언급되지 않는 것을 감안한 주장이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마리우스가 그런 개혁을 주도했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없다며 지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코호르스는 폴리비오스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룰 때 이미 언급되었으며, 이후 로마가 히스파니아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치른 전쟁에 관한 기록에서 자주 등장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마리우스가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는 시기 이전에 트리아리를 비롯한 마니풀라 시스템이 코흐르스 시스템으로 대체되었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