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5:45:37

전차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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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작 영화 벤허의 전차경주씬.

1. 개요2. 역사3. 규칙4. 인기5. 현대6. 픽션의 전차경주

1. 개요

Chariot Racing

고대 시대에 있었던 경주 대회의 일종으로, 사실상 현대 모터스포츠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스포츠 레이스 종목이다.

사실 현대에도 마차를 끄는 경주는 존재한다. 다만 기원이 달라 경마의 일부로 들어간다.

2. 역사

원래 전차는 고대에는 승마용구가 없고, 품종 자체가 약해서 타기 쉽지 않았던 관계로, 대신 말을 이용해 끌고다니면서 기동성을 살려서 싸우는 병기의 일종이었다. 초기의 전차경주는 이러한 전차의 기동성(속도)에 주목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흔히 전차경주라고 하면 고대 로마 제국을 떠올리기가 쉽지만, 의외로 전차경주의 시초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가 먼저였다. 서양의 가장 오래된 기록서사시 일리아스에서도 파트로클로스의 추모 경기에서 그리스 영웅들의 전차경주가 나온다.

고대 올림픽 경기의 일종이었으며, 이후 그리스 문화를 흡수한 로마에 의해 신을 경배하는 축제의 클라이막스 행사로 발전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스포츠 레이스로 발전하게 됐다. 또한 의외로 중국에서도 전차 경주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전국시대의 군사 손빈이 슬개골이 파여서 앉은뱅이가 된 후 극적으로 탈출하여 제나라 유력자의 식객으로 있을 때, 이 경주에서 돈을 따게 해주면서 실력을 인정받은 삼사법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로마에서 가장 큰 전차경주 서킷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여러 차례의 확장 공사를 통해 길이 621m, 너비 118m에 달하는 규모로 커졌으며 최대 25만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것은 콜로세움 수용 인원의 3배나 된다. 오늘날의 올림픽 주경기장들(대개 4만~10만명)보다도 큰 규모이며 당시 로마 인구가 3백만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규모인 셈이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경기장은 유지되었으며 549년에 열린 최후의 전차경주를 끝으로 경기장은 서서히 황폐화되어 농장으로 쓰였는데, 현재는 농장을 허물고 경기장 터를 공원처럼 남겨놨는데 지금도 가끔 행사장으로 쓰이기도 한다. (예: 제네시스(밴드)가 2007년에 로마에서 공연한 무대가 이곳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ircus_max_1978.jpg
고대 로마의 전차경주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의 모습 (1978). 오른쪽의 유적은 로마 황궁이 있던 팔라티누스 언덕이다.

파일:external/www.crystalinks.com/CircusMaximus2.jpg
트라야누스 황제 재위 시절의 로마를 복원한 모형에 보이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보다시피 콜로세움보다도 훨씬 크다.

이외에도 지금의 바티칸 시국 위치에 키르쿠스 바티카누스라는 좀 더 작은 전차경주장도 있었다. 물론 여기도 기독교 공인 이후 용도변경되어 흔적은 별로 안 남아있다. 로마시 외에는 프랑스아를 등에 전차경주장 유적이 남아있다.

3. 규칙

룰은 현대의 레이싱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길이와 구간을 가진 서킷 내를 전차로 달리고, 가장 먼저 들어오는 전차가 승리한다. 하얀 천을 던져 출발 신호를 보내면 출발대에서 출발해서 시계반대방향으로 도는 것이 룰의 전부. 말 두 마리가 끄는 전차는 비가, 네마리가 끄는 전차는 콰드리가라고 불렸으며 경주마로 훈련받는 말은 특별한 마구간에서 길렀다. 총 4개 팀이 참전하며, 팀은 각각 색(빨간색, 녹색, 파란색, 흰색)으로 구분된다. 레이서들은 자기 팀의 색을 한 셔츠와 헬멧을 써서 팀을 구분했고, 이 4개 팀은 각기 다른 스폰서들이 맡았다고 한다.

고대 로마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벌어진 경주의 경우, 최대 12대의 전차가 약 8km, 총 7바퀴를 달려서 먼저 들어오면 승리했다고 한다. 문제는 레이서들이 쓰는 헬멧 이외에 전차 자체가 아무 안전장치가 없었고, 당시 레이서들도 현대와 마찬가지로 속력을 높이기 위해 차체를 최대한 가볍게 했기 때문에 내구력이 떨어져서 경주 중에 전차가 인수분해되거나 말고삐를 잘못 잡으면 팔이 꼬여서 전차에서 떨어진 채 질질 끌려다니거나, 그 상태에서 잡고 있던 고삐를 놓쳐서 땅에 널부러진뒤 뒤에서 달려오는 말과 전차에 깔려 목숨을 잃는 사고도 많았다고 한다. 이게 왜 용인되냐 하면 기수가 떨어져도 전차만 결승점에 맨 먼저 도착하면 우승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차를 의도적으로 상대에게 충돌시켜서 코스이탈시키거나 파괴하는 게 반칙이 아닌 레이싱 전술의 일종으로 인정을 받았다. 최고 속도로 4두전차를 몰면서 코너를 도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에 여기서 수많은 기수들이 넘어졌다. 또한 관중들이 격렬한 레이싱일수록 더 환호했기 때문에 레이서들이 짐짓 위험 상황을 만들기도 해서 어느 영화처럼 목숨을 거는 격렬한 레이싱이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그렇잖아도 위험한 경기에 팬보이들이 위험한 물건[1]을 경기장 안에 투척하기까지 하면서 실전과 맞먹을 만큼 위험했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기수들이 경기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또 현대 모터스포츠처럼 치프와 정비사들이 중요하진 않았지만, 지원이 필요했다고 한다. 선수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고속 주행으로 격렬한 마찰이 일어나면서 바퀴나 바퀴축이 불타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원팀이 물병을 들고 트랙 가까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들의 전차가 지나갈 때 물을 끼얹어서 불을 끄거나, 떨어진 기수가 있다면 신속히 달려가서 구조했다고 한다. 어쩐지 포뮬러 1 정비팀의 피트 스탑과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전차가 굉장히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전차의 소유주는 대부분 부자들이었다. 보통은 이 부자들이 팀 하나를 맡아 훈련받은 노예들을 레이서로 출전시켰지만, 평민이면서 전속계약을 맺고 경주를 생업으로 삼는 프로 레이서도 존재했다. 승자에게는 승리자의 야자잎과 황금지갑, 상금이 지급되어 영웅으로 받들어졌으며, 챔피언 말은 경주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종마로 썼다. 노예 레이서의 경우 신분해방의 기회도 부여되었다. 영화 벤허에서도 주인공 유다 벤허는 로마 경주에서 5관왕을 달성하고 노예신분에서 해방된다.

4. 인기

현대에는 수많은 스포츠가 있어 인기가 분산되기도 하고, 스포츠가 아니더라도 다른 오락거리가 많지만, 고대 로마에서 시민들의 정기적인 단체 오락거리라고는 검투사 경기와 전차경주 사실상 둘 뿐이었다. 아예 그런 오락거리에 별 관심이 없는 성격이 아닌 한, 자연히 거의 모든 로마 시민은 전차경주의 팬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대에 로마시의 인구가 백만 명 남짓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차경주 서킷인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25만 석[2] 규모였으니 알 만 하다. 서울의 어느 스포츠 스타디움 규모가 200만 석 규모라고 생각해 보자.

예나 지금이나 특정 스포츠의 인기를 가늠하는 가장 직관적인 척도는 해당 종목 프로 선수들의 수입이며, 이 분야에서 전차경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모든 종목을 통틀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스포츠맨은 전차경주 레이서다. 2세기에 대활약한 스페인 출신의 가이우스 아풀레이우스 디오클레스(Gaius Appuleius Diocles)가 그 주인공으로, 십대에 선수생활을 시작해 중년에 은퇴할 때까지 24년간 35,863,120 세스테르티우스, 순금 아우레우스 기준 약 금 2.6톤을 벌어들였는데, 환산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이는 현대 화폐가치로는 수천 억에서 수 조 원에 달하는[3] 거액이다. 이는 타이거 우즈, 리오넬 메시, 플로이드 메이웨더가 일생동안 상금으로 번 돈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것인데, 하물며 저 셋은 인구 수십억의 전세계인을 상대하는 현대인인 반면 디오클레스는 인구도 적고 경제규모도 작으며 원격매체도 없던 고대의 인물이니 비교를 불허한다. 당시의 경제규모를 감안해 더 와닿게 비교하자면, 디오클레스의 총 수입은 당시 로마 시의 1년치 식량 예산, 혹은 로마 제국군 전체의 3개월치 봉급 지출과 맞먹었다.[4]

비텔리우스의 부친처럼 전차 경주 룰과 승부예측에 능한 이유로 집정관 등 최고위 선출직 지도자들이나 황제에게 총애받은 사람도 있을 정도로 로마 최상층 지배계급들에게도 그 인기가 대단했다. 따라서 평소 짠돌이로 이름난 티베리우스 황제조차, 두 후계자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인기를 드높이고 황실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명성을 위해 전차경기를 열게 하고 발행화폐까지 주조했다. 또 로마 황제들은 룰을 바꾸거나 살짝 손보면서 인기와 트렌드를 이끌기도 했는데, 이쪽에서 대표적인 황제가 바로 칼리굴라다. 칼리굴라 황제는 즉위 직후 룰까지 과격하고 박진감 있게 변경해 전차경주 트렌드 자체를 바꿨다고 한다.

젊은 여성팬들이 많았던 검투사 선수들과 비교해 오늘날의 프로 인기 스포츠 선수 같은 이미지였고, 수입도 많은 탓에 명문가 자제들 중 전차기수로 활동해 명성을 쌓은 이들도 꽤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제5대 황제 네로의 할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인데, 네로의 조부는 젊은 시절 로마 내에서 상당한 실력으로 많은 인기를 누린 뛰어난 전차기수였다.

이런 전차경주의 팬들을 "Dēmos(데모스, 영어로는 deme)"이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위 문단에서 상술한 적색, 녹색, 청색, 백색의 네 전차경주 팀을 각각 응원하는 네 팀이 있었는데 마치 오늘날 프로스포츠에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과 똑같은 유니폼을 맞춰입는 서포터들처럼 이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전차경주 팀의 유니폼과 같은 색의 옷을 입었다.

서로마가 몰락하고 동로마 시대로 바뀌면서 전차 경기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고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의 확장 공사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의 국교가 크리스트교로 공인된 이후부터 검투사 경기가 금지되면서 볼거리가 전차경주만 남았다. 그래도, 전차경주가 워낙에 위험하고 스피디한 볼거리였던지라 동로마인들은 사실상 모두 다 전차경주의 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로마 시대에는 적녹청백의 네 팀들 중 녹, 청만 남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서민계층은 이 팀을 중심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팀끼리는 서로 격렬하게 반목했기 때문에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람들의 정치, 경제 등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심지어 기독교 종파의 노릇까지 하였다. 청색 팀은 백색을 흡수했는데 주로 귀족층의 지지를 얻으며 오늘날 그리스도교 정통으로 여겨지는 그리스도 양성론을 믿었고, 녹색 팀은 적색을 흡수했으며 주로 평민층의 지지를 얻고 단성론을 믿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은 로마의 키르쿠스 막시무스 보다는 작아도 10만 명가량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는데, 이 대경기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은 모두 청색 아니면 녹색 팀에 속해 있는 팬보이들로, 대단히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무리였다. 6세기에는 이들이 전차경주장에 모여 일으킨 니카의 반란으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죽을 뻔한 적도 있다.[5]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 총수가 50만 명이 좀 넘었는데 그중 3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분명 부상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오늘날 축구훌리건 따위는 애들 장난으로 보일 수준이다. 장소도 같고(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 응원하는 사람들이 계층 별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스탄불 더비의 원조라고 봐도 되는 위치였다.

쉽게 말해서 팀은 스포츠 팬덤, 종파 등등의 기능을 모조리 겸비한 일종의 정치 조직 같은 정당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훌리건 세력들이 특정 정당의 당원을 겸했고 교리 및 철학 논쟁을 벌였으며 빡치면 황제 앞에서 폭동도 일으켰다는 것(...)이다. 501년 녹색 팀은 경기장에서 청색 팀을 습격해 3,000명을 학살할 정도로 양측의 경쟁심은 단순한 운동경기 광팬 수준을 초월했다.

전차경주는 7세기에 동로마제국이 이집트와 레반트 일대를 상실하는 과정에서 전차경주를 진행할 경제력이 줄어들어 일시적으로 쇠퇴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제국이 초토화되기 이전가지는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 외에, 이 전차경주는 극장, 검투장과 달리 남녀가 합석해서 관람이 가능했다. 시인 오비디우스는 그래서 전차경주장이 남녀가 만나기 좋은 장소라고 썼다고 한다. 오비디우스가 전차 경주장에서 연인과 함께 경주를 관람하며 남긴 글이 있는데, '저 기수에게 쏟는 관심만큼 나에게도 관심을 줬으면 좋겠다' 같은 가벼운 푸념부터 '코너에서 따돌려져서 뒤로 밀려나다니 뭐하는 놈이냐' 같은 레이서에 대한 비난도 있다.

5. 현대

1925년에 개봉한 라몬 노바로 주연의 벤허가 인기를 끌면서 1920~1930년대에 전차 경주가 다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 경기가 특별했던 것은 원래처럼 말이 끄는 것이 아니라 오토바이가 끄는 전차 경주였다.

파일:오토바이벤허2.jpg
초기에는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조작하고 뒤에 기수가 타는 형식이었다.
파일:오토바이벤허.jpg
나중에는 오토바이의 조향장치를 끈으로 연결하여 기수가 오토바이를 직접 조작 했다. 이쪽도 원본에 못지 않을 만큼 위험천만한 경기였을 것이다. 이것은 1930년대에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1940년대에 사라졌지만 최근 호주 시드니에서 실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6. 픽션의 전차경주

  • 벤허: 전차경주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절대로 빼먹을 수 없는 작품으로, 원작 소설에서도 전차경주 파트는 박진감이 넘치는 하이라이트다. 특히 1959년 영화판의 전차경주 씬은 개봉 60년이 넘은 현재에도 레전드급 명작으로 회자되는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보러가기


[1] 돌이나 막대기, 못을 박은 점토판 따위.[2] 물론 이게 늘 만석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킷이라는 특성상 길어질 수밖에 없으니 자연히 규모도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3] 이처럼 갭이 큰 이유는 당시와 현재의 물가가 정확히 대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곡물을 기준으로 하느냐, 귀금속을 기준으로 하느냐, 평균적인 농부의 소득이나 군인의 봉급 등을 기준으로 하느냐 등에 따라 같은 액수나 금속 양이라도 그 실제 가치와 동원 가능한 구매력은 수십 배 이상의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나마 물가가 본격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제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기에 총 수입의 가치 환산이 용이한 편이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고전학 교수인 피터 스트럭은 디오클레스의 총수입을 로마군의 봉급으로 환산한 후 이를 현대 미군 사병의 급여로 치환하여 최대 150억 달러(약 15조 원) 규모의 구매력이었다고 추산하기도 했다. (출처) 근현대를 기준으로 해도 순은 40톤은 청나라가 매년 무역으로 벌던 은화 가치의 절반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며, 순금 2.6톤은 웬만한 소규모 국가의 금 보유고와 맞먹는 양이다.[4] 디오클레스의 통산 전적은 4257전 1462승 승률 34%로, 4명이 경주하는 걸 감안하면 물론 높은 승률이지만 의외로 무적은 아니었다. 그의 막대한 수입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나머지 경기의 대부분을 2등에서 끝마칠 정도로 의도적으로 아슬아슬한 레이스를 만드는 뛰어난 쇼맨십,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오래 살아서 활약한 덕분이다. 그의 어마어마한 수입 못지않게 대단한 업적은 이 위험천만한 스포츠에서 활약하면서 24년 동안 이틀에 한번 꼴로 경기를 하는 가혹한 스케쥴을 소화하면서도 죽거나 불구가 되지 않고 무사히 은퇴한 것이다. 실제로는 많은 기수들이 20대도 넘기지 못하고 죽거나, 살아남더라도 부상으로 더 이상 전차경주를 할 수 없는 지체장애인이 되어 강제은퇴하는 게 보통이었다.[5] 단 니카의 반란은 두 팀이 서로 싸운 것보다는 두 팀이 모두 황제에게 반발한 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