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5 23:53:19

테살리아 왕국

1. 개요2. 역사
2.1. 요안니스 1세 두카스2.2. 콘스탄티노스 두카스2.3. 요안니스 2세 두카스

1. 개요

13세기 에피로스 친왕국에서 갈라져 나온 테살리아의 왕국. 역대 군주들은 정식 왕 대신 '아우구스투스'의 그리스어 형태인 세바스토크라토르를 칭했는데, 불가리아나 세르비아 왕국 군주들도 종종 쓰던 칭호라 독립 왕국으로 분류하기에 손색이 없다.

1268년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 사후 차남 요안니스 두카스가 자립하며 시작되었다. 그의 손자 요안니스 2세 대에 테살리아 왕국은 아테네 공국의 간섭 하에 약화되었고, 카탈루냐 용병대에게 수도 네아파트로스를 빼앗기는 등 쇠락하다가 1318년에 멸망했다.

2. 역사

창건지 요안니스 1세는 미하일 2세의 서자로, 테살리아 지역 블라크 (왈라키아) 족장 타로나스의 딸 히포모네와 결혼했다. 그는 1259년 에피로스-라틴 연합군과 니케아 제국 간의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부왕을 도와 블라크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는데, 아카이아 공국의 기사들이 아내를 탐내자 분노하여 니케아 측으로 전향해버렸다. 그 결과 전투는 니케아 제국의 대승으로 귀결되었고, 니케아 군대는 도서 지역을 제외한 에피로스 대부분 지역을 정복했다. 요안니스는 니케아 군에 종군했으나 총독 권유도 없이 외면되자 보니차에 웅거하며 이오니아 제도로 피신한 부친 미하일 2세와 연락해 사죄했다. 이후 둘은 세력을 합치고 시칠리아 왕국의 지원과 함께 니케아 군에게서 아르타를 수복한 후 포위되었던 이오안니아도 구원했다. 이로써 에피로스 친왕국은 부활했고, 1260년 봄에는 요안니스의 이복혈 니키포로스가 테살리아 대부분을 되찾았다.[1] 한편 1261년 니케아 제국의 미카일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회복하며 동로마 제국을 복원했다.

2.1. 요안니스 1세 두카스

1268년 미하일 2세가 사망하자 에피로스 본토는 니키포로스, 테살리아는 요안니스에게 분봉되었다. 1272년 미카일 8세는 조카 안나를 니키포로스와, 다른 조카 안드로니코스를 요안니스의 딸과 결혼시켰다. 이때 요안니스는 세바스토크라토르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1273년 안드로니코스가 미카일 8세와의 갈등 후 테살리아로 망명하며 양국 관계는 틀어졌고, 요안니스는 라틴 제국 부활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계획하던 나폴리의 샤를 (카를루) 1세 및 아테네 공국과 동맹했다. 동시에 테살리아의 비단을 아풀리아로 수출하고 이탈리아 군마를 수입하는 무역 협정도 체결되었다. 이에 미카일 8세는 1274년 리옹 공의회에서 동서 교회 통일을 제안하며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트레비존드 제국과 동로마 황실 및 성직자 다수가 반발했다.

미카일 8세는 요안니스와 샤를 간의 동맹 파기를 위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요안니스를 파문하라 청했지만 거절되었다. 이에 1275년, 미카일 8세는 동생 요안니스 팔라이올로고스 휘하의 군대를 보내 기습적으로 네아파트로스를 포위했다. 이에 요안니스는 잃어버린 말을 찾는 마부로 변장해 빠져나가 아테네 공국에게서 3백의 기병을 지원받았고, 동로마 군을 격퇴했다. 그 대가로 요안니스는 딸을 아테네 공작의 아들 기욤과 결혼시키며 그라비아, 가르디키, 제투니온을 지참금으로 할양했다. 1277년 미카일 8세는 교황 특사와 함께 교회 통일을 선포한 후 요안니스에게 따를 것알 지시했으나 그는 거부했고, 오히려 따로 공의회를 열어 미카일 8세와 교황 및 총대주교를 이단으로 지정했다. 그후로도 양측은 한번씩 더 상호 파문을 날렸고, 요안니스는 반대 의사를 보인 네아파트로스와 트리칼라 주교를 처벌했다.

미카일 8세는 마누엘 라울에게 2차 테살리아 원정을 맡기려 했으나, 그가 교회 통합을 반대하자 감금하고 미카일 카발라리오스를 임명했다. 하지만 미카일 카발라리오스는 파르살로스에서 요안니스의 매복에 당해 패했고, 부상이 악화되어 곧 죽었다. 1282년 미카일 8세는 재차 테살리아 원정을 준비하다 죽었고, 그를 계승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시칠리아의 만종으로 샤를의 침공 위협이 사라지자 불만이 많던 교회 통일을 중단해 정교회를 재통합했다. 요안니스는 형 니키포로스가 동로마로 기울자 이오안니아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이에 니키포로스의 부인 안나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해 사촌 안드로니코스 2세와 음모를 꾸몄다. 1284년 니키포로스는 자신의 딸과 요안니스의 아들 미카일을 결혼시키겠다며 후자를 에피로스로 초대한 후 사로잡아 콘스탄티노폴리스러 압송했고, 미카일은 결국 옥사했다. 그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테살리아를 침공했으나 말라리아로 많은 병사들을 잃고 철수했다. 1285년 요안니스은 에피로스를 침공, 아르타 근교를 약탈하여 보복했고 그후 양측은 휴전을 맺었다.

2.2.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1289년 요안니스는 사망하여 자신이 세운 포르타 파나기아 수도원에 묻혔고, 두 어린 아들 콘스탄티노스와 테오도로스가 계승했다. 섭정을 맡은 모후는 안드로니코스 2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동로마 제국에 복속했으나, 명목상에 그쳤다. 1295년 친정에 나선 콘스탄티노스는 에피로스와의 전재을 이어가 같은해 아이톨리아 지방을 공격, 니키포로스가 샤를과 사돈을 맺으며 지참금으로 할양한 영토를 점령했다. 이에 이듬해 나폴리 왕국군이 반격했고, 1301년까지 테살리아 군을 몰아냈다. 한편 콘스탄티노스는 1299년 동생 테오도로스의 사후 단독 군주가 되었으나, 얼마 못가 1303년에 사망했다. 사후 아들 요안니스 2세가 계승했다.

2.3. 요안니스 2세 두카스

즉위 당시 요안니스는 어린 나이였기에 귀족들은 5촌 당숙인 아테네 공작 기 2세[2]를 섭정으로 옹립했고, 후자는 앙투안 르 플라멩을 대리인 (바일리)로 임명해 테살리아 통치를 맡겼다. 마침 테살리아를 침공했던 에피로스의 섭정 안나 팔라이올로고스는 아테네 공국군을 보자 철수했다. 하지만 1306년 카탈루냐 용병대가 테살리아를 유린하기 시작했고, 아테네 공국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1308년 요안니스는 성년이 되어 친정에 나섰는데, 같은해 기 2세가 사망한 후 브리엔 가문 출신의 고종사촌 고티에 5세가 아테네 공으로 즉위했다. 고티에 5세는 테살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고, 요안니스가 반발하자 카탈루냐 용병대를 고용해 네아파트라스 등 30여 성들을 점령했다. 결국 요안니스는 굴복하여 고티에 5세에게 종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카탈루나 용병대의 철수를 요구해 수용되었다.

이때 고티에 5세가 4개월치 급여를 기병 2백 및 보병 3백명에게만 주고 나머지를 그냥 쫓아내려 하자, 카탈루냐 용병대는 정복지에 봉신으로써 정착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고티에 5세가 항명한다면 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그들은 반란을 일으켜 역으로 1310년에 아테네 공국을 침공했다. 1311년의 할미로스 전투에서 고티에 5세는 패하며 전사했고, 카탈루냐 용병대는 아테네 공국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틈에 요안니스는 테살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으나, 요아니스 1세 사후 약한 중앙 집권에 익숙해져 있던 현지 호족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요안니스는 1315년 안드로니코스 2세의 서녀 이리니와 결혼, 동로마 제국의 힘을 빌려 권력을 강화하고 카탈루냐 용병단에 맞서려 했으나 1318년에 후손 없이 사망했다. 그 무렵 테살리아 서부는 강력한 영주 스테파노스 가브리엘로폴로스가 지배하다가 동로마 제국에 귀순했고, 네아파트로스 등 남부는 카탈루냐 용병대의 수중에 있다가 네아파트라 공국이 되었다. 1332년 스테파노스의 사후 테살리아는 에피로스 친왕국 군주이자 니키포로스의 외손자인 조반니 2세 오르시니와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가 대립하다가 전자의 사후 후자가 전부 정복한다.


[1] 다만 데메트리아스, 벨레스티노, 할미로스, 파르살로스는 한동안 동로마 령으로 남았다[2] 콘스탄티노스의 누이 헬레나와 기욤 1세와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