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고니아 전투 영어: Battle of Pelagonia | ||
시기 | 1259년 9월 | |
장소 | 발칸반도 펠라고니아 평원 | |
원인 | 발칸 반도의 패권을 확립하고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달성하려는 니케아 제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시칠리아 왕국 연합의 대결. | |
교전국 | 니케아 제국 |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시칠리아 왕국 |
지휘관 |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스트라티고폴로스 |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두카스 기욤 2세 드 빌라르두앵 조프루아 드 브리엘 기 1세 드 라 로슈 |
병력 | 약 1만 | 약 2만~4만 5천 |
피해 | 미미함. | 막대한 손실. |
결과 | 니케아 제국의 승리. | |
영향 |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과 동로마 제국의 부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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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59년 9월, 니케아 제국군과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시칠리아 왕국 연합군이 발칸반도의 펠라고니아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 동로마 제국이 부활하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2. 배경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 발칸 반도의 정세는 50여 년간 혼란스러웠다. 라틴 제국, 테살로니카 왕국,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등 라틴계 국가들과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니케아 제국 등 동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국가들[1], 그리고 북방의 불가리아 제2제국은 발칸 반도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그러다 1250년대에 이르러 승부의 향방이 갈렸다.라틴계 국가들 중 가장 강력했던 테살로니카 왕국은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참패한 뒤 쇠약해지다가 이피로스에게 멸망했고, 라틴 제국 역시 세력이 갈수록 약화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만 붙드는 지경에 몰렸다. 한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은 테살로니카 왕국을 멸망시킨 뒤 테살로니카 제국을 자처하며 장차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으나,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불가리아에게 참패한 뒤 불가리아에 복종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가 발칸 반도의 패자로 군림했으나, 1241년 차르 이반 아센 2세가 붕어한 후 1242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고 킵차크 칸국의 봉신으로 전락했다.
이렇듯 경쟁자들이 잇따라 무너지면서, 유일하게 건재한 니케아 제국이 유력 후보로 자리매김했다. 마침, 소아시아 동부 일대에서 그들을 견제하던 룸 술탄국은 일 칸국의 침략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고 쇠락의 길을 걸었기에, 발칸 반도로의 진출을 방해할 요인은 사라졌다. 요안니스 3세는 이러한 이점을 발판삼아 트라키아를 완전히 탈환하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에 적극적인 군사 원정을 감행한 끝에 복속시켰다.
1254년 11월 3일 요안니스 3세가 사망한 뒤 아들 테오도로스 2세가 황위에 올랐다. 이에 불가리아의 차르 미하일 아센 1세가 공세를 감행해 트라키아의 스타니마카, 페루시티사, 크리힘, 체피나 페르페레크 요새를 탈환했다. 테오도로스 2세는 즉시 주력군을 소아시아에서 발칸 반도로 파견하여 불가리아군을 물리치고 로도프 산맥의 요새 대부분을 탈환했다. 1255년 말, 미하일 아센 1세는 헝가리 왕 벨러 4세의 손녀 언너와 헝가리의 봉신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딸인 안나 로스티슬라브나와 결혼하였고, 앞으로는 헝가리의 군대를 지원받기로 하였다.
1256년 봄, 미하일 아센 1세는 헝가리의 지원에 힘입어 니케아 제국을 공격하여 트라키아를 약탈했지만, 곧 테오도로스에게 격파되었다. 군대가 격파되고 발등에 불 떨어진 신세가 된 미하일 아센 1세는 그해 6월 장인 로스티슬라프에게 불가리아와 니케아의 화해를 중재해줄 것을 요청했다. 테오도로스 2세는 미하일이 불가리아가 일전에 잃었던 영토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때에야 평화 협약에 서명하겠다고 하였다. 로스티슬라프는 이에 동의하였고, 양국은 마리차 강의 상류를 국경으로 정했다. 귀족들은 이 결정에 격노하였고, 칼리만 아센 2세는 터르노보 근교에서 사냥하던 미하일 아센 1세를 습격해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그러나 미초 아센과 콘스탄틴 아센 1세가 이에 불복하여 각자의 지배지에서 차르를 칭하면서, 불가리아는 심각한 내란에 휘말렸다.
1256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인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니케아 제국과 맺었던 평화 협약을 파기하고 테살로니카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시칠리아 왕국의 만프레디 왕이 디리키움과 그 주변 지역을 점령했다. 미하일은 만프레디와 합의하여 자신의 딸 엘레니 앙겔리나 두케나를 아내로 삼게 하고, 디라키움 일대와 코르푸 섬을 지참금으로 줬다. 그 후 시칠리아 왕국에 아카이아 공국의 굴리에모 2세를 끌여들어 마케도니아의 니케아 제국 영토를 공략했다.
이에 테오도로스 2세는 역모죄로 몰려 룸 술칸국에 망명했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다시 불러들여 대 이피로스 전선 사령관으로 보냈지만, 그에게 맡긴 병력은 고작 500여 명뿐이었다. 미하일은 이런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1257년 적군이 테살로니카 인근까지 이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니케아 궁정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던 1258년, 테오도로스 2세가 뇌졸중에 시달리다가 사망하고 8살의 어린 아들 요안니스 4세가 황위에 올랐다. 요르요스 무잘론과 형제들이 섭정을 맡았으나, 9일 뒤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열린 황제의 추모식 때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무잘론과 그의 형제 1명을 주제단에서 살해했다. 귀족들은 뒤이어 테오도로스 2세에게 심한 견제를 받아 감옥에 갇혀 있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석방시킨 뒤 섭정을 대신 맡게 했다. 미하일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국유지를 빈농에게 하사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1259년 1월, 미하일은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어 공동 황제가 되기로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는 요안니스 4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요안니스와 미하일이 상호 서약을 맺어서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관식을 치를 때 요안니스 4세가 먼저 즉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2명의 고위 성직자를 제외한 주교들은 미하일이 먼저 대관식을 치를 권리가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아르세니오스는 미하일과 아내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에게 먼저 왕관을 씌웠고, 뒤이어 요안니스 4세에게 특별한 머리 장식을 씌웠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승복할 수 없었던 그는 파스카시오스 수도원으로 들어간 뒤 총대주교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고, 니키포로스 2세가 그를 대신하여 총대주교를 맡았다.
이렇듯 공동 황제에 올랐지만 여전히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미하일은 탁월한 군공을 세워서 모두의 인정을 받기로 마음먹었다. 1258년 가을, 그는 형제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와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스트라티고폴로스에게 군대를 맡겨 마케도니아로 진군해 현지 군대와 합세한 후 이피로스를 굴복시키게 했다. 그러면서 이피로스와 동맹을 맺은 아카이아 공국과 시칠리아 왕국에 사절을 보내 동맹 파기를 권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59년 봄, 니케아군은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서쪽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당시 카스토리아에 진을 치고 있던 이피로스의 미하일 2세는 적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급히 시칠리아 왕국의 영토인 아블로나 인근으로 철수했다. 그러다 1259년 6월 2일 트라니에서 적에게 따라잡혀 상당한 손실을 입고 패퇴했고, 니케아군은 여세를 이어가 오흐리드와 데아볼리스를 공략했다. 1259년 9월, 시칠리아에서 파견된 분견대와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그리고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두카스가 이피로스군과 합세했다. 이들은 팔레고니아 평원에서 니케아 제국군과 조우했다. 이리하여 발칸 반도의 패권을 둘러싼 양측의 대결이 임박했다.
3. 전개
니케아 총사령관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는 적의 군세가 아군보다 많은 것을 보고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소모전을 전개해 적을 지치게 만들기로 했다. 그는 중무장한 군대를 언덕 위의 강력한 방어 진지로 옮겨서 수비를 굳건히 하게 한 뒤, 쿠만, 튀르크, 그리스 기병대를 적군의 후방으로 파견해 보급로를 끊고 물자를 약탈하되, 적이 막으러 달려오면 후퇴했다가 적이 돌아가면 다시 습격하게 했다. 연합군은 니케아군의 이같은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로인해 전의가 갈수록 떨어졌다.요르요스 아크로폴리티스에 따르면, 이피로스의 데스포티스인 미하일 2세는 이러한 상황에 심한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군대와 함께 프릴레프로 달아났고, 요안니스 두카스는 동맹군을 버리고 니케아군에 넘어갔다고 한다. 반면 니키포로스 그레고라스에 따르면,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가 적진에 보낸 스파이가 "프랑크인들이 니케아 측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고 이피로스를 배신하기로 했다"는 소문을 퍼트렸고, 이를 믿은 미하일 2세가 도주했다고 한다. 요르요스 파키메레스에 따르면, 연합군은 힘을 합치기 전부터 프랑크인들과 그리스인들이 해묵은 원한으로 인해 서로를 믿지 않았기에 불화가 심했다고 한다. 또한 일부 아카이아 기사들이 요안니스 두카스의 아름다운 부인을 추행했을 때, 아카이아 공작 기욤 1세는 부하들을 처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요안니스 두카스가 사생아인 점을 들먹이며 모욕했다. 이로 인해 반감을 품은 요안니스 두카스는 밤중에 군대를 이끌고 진영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렇듯 연합군이 사분오열되자, 니케아군은 즉시 이들을 공격했다. 그레고라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400명의 프랑크인이 항복했다고 한다. 한편 기욤 1세는 카스토리아 인근의 건초 더미 또는 관목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그를 따르던 고위 귀족 30여 명도 포로로 잡혔다. 모레아 연대기에 따르면, 브리엘의 제프리는 니케아군을 상대로 분전해 첫번째로 몰려오는 게르만 용병 기사들을 격퇴했으나 뒤이은 헝가리인과 쿠만인 궁수들이 말을 향해 화살을 퍼붓는 바람에 낙마 후 생포되었다고 한다.
4. 이후
펠라고니아 전투 이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은 니케아 제국에 복속되었고 시칠리아 왕국 등 남은 경쟁자들의 세력은 많이 약해졌다. 이제 니케아 제국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전념할 수 있었다. 1260년의 공성은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라틴 제국의 후원자인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막혔다. 하지만 1261년 7월 25일 두번째 공성에서 총사령관 알렉시오스 스트라티고풀로스가 수비군이 떠난 틈을 타서 입성에 성공하였고, 보두앵 2세를 쫓아내고 황도를 수복했다. 미하일 8세는 아르세니오스에게 세계총대주교에 복귀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르세니오스는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고, 1261년 8월 15일 미하일 8세는 환도식을 거행했다. 그 후 그는 장남 안드로니코스 2세와 함께 수복된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그러나 자기 손으로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킨 것에 도취된 탓인지, 미하일은 이 시점에서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1261년 12월 25일, 이제 11살이 된 요안니스 4세를 붙잡아 실명형에 처한 뒤 비티니아의 마르마라 해 디키비제 요새에 감금한 것이다. 황위 경쟁자를 배제하여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굳건히 하려는 의도로 그리 했겠지만, 굳이 극단적인 방식을 동원할 필요는 없었다. 요안니스 4세가 명목상의 황제로나마 남아있게 해놓고, 자식들을 공동 황제로 세워서 황권을 굳히는 게 정석이었다. 로마노스 1세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뒤에도 콘스탄티노스 7세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고 자식들을 뒤따라 황위에 올려서 후계구도를 정해뒀던 전례도 있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여론이 자신을 지지하는 것에 연연한 나머지, 민중의 신망을 받던 라스카리스 왕조를 부정해버리는 조치를 내렸다.
어린 황제를 끝까지 지켜주겠다는 맹세를 어긴 것에 분노한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는 미하일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미하일이 파문을 거두어 달라 청하자, 그는 알렉시오스 1세가 쿠데타로 제위를 차지한 뒤 거친 옷을 입고 맨바닥에서 자며 40일 동안 참회했던 것처럼 하라고 요구했다.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선례를 본다면 일단은 숙이고 추후 힘을 모아 반격하는 것이 정석이었겠으나 미하일은 그가 라스카리스 왕조의 지지자들과 결탁했다는 참언을 믿고 요구를 거부했고, 두 사람은 4년간 대립했다. 미하일은 교황에게 항소를 하겠다고 위협하며 파문을 철회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자, 1265년 5월 공의회를 소집한 뒤 아르세니오스를 폐위하고 프로코네소스 섬으로 유배했다. 이에 니케아 제국을 이끌었던 라스카리스 왕조를 지지했던 소아시아 신민들이 대거 반발하면서, 아르세니오스 분열이 발생해 제국의 단합력을 심각하게 떨어뜨렸다.
미하일은 잃어버린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발칸 반도 영토의 수복에 나섰으나 라틴 제국을 후원했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공세에 맞서야 했으며, 다시 반기를 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도 전쟁을 치러야 했다. 여기에 아카이아 공국과 아테네 공국의 반격도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불가리아 제2제국과 세르비아 왕국 역시 동로마 제국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제국 동쪽 소아시아에서는 일 칸국에 의해 무력화된 룸 술탄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튀르크인들이 서쪽으로 이주해 로마의 영토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사방의 적과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동로마 제국은 쇠락의 길을 걸어갔다. 물론 미하일도 이에 맞서 시칠리아의 만종을 뒤에서 지원해 서유럽 세력들이 발칸에서 손을 떼게 만들었고 말년에 아나톨리아도 뒤늦게나마 신경쓰는 등 노력을 안한 건 아니었지만 쇠락을 막을 순 없었고 결국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