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00201, #a00201 20%, #a00201 80%, #800201)" {{{#!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00201><tablebgcolor=#a00201> | 아우구스투스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생애 · 평가 | ||
가족 관계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clearfix]
1. 개요
기원전 26~24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로마 제국의 이집트 행정정관이었던 가이우스 아일리우스 갈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감행한 아라비아 원정이다.
2. 배경
고대 로마인들은 아라비아 반도를 아라비아 페트라이아(Arabia Petraea), 아라비아 데세르타(Arabia Deserta), 그리고 아라비아 펠릭스(Arabia Felix)의 세 지방으로 구분했다.아라비아 페트라이아는 오늘날의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 일부를 포함하는 아라비아 반도 북부 지역으로, 나바테아인이 세운 왕국이 다스렸다. 그들은 한때 시리아에 진출한 로마 제국의 적수였지만, 나중엔 로마의 속국이 되어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이 이집트로 진출하는 걸 저지하는 완충국 역할을 수행했다.
아라비아 데세르타는 아라비아 반도의 대다수 영역에 해당하는 사막 지역으로, 로마인들은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여겼다. 하지만 실제로는 베두인들이 이 땅에 살았고, 종종 부가 넘치는 아라비아 페트라이아와 아라비아 펠릭스를 침략했으며, 타지의 권력자들로부터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로마의 학자인 대 플리니우스는 저서인 《박물지》에서 베두인족이 "우유와 야수의 고기를 먹고 살며, 야자수에서 포도주를 추출하고, 참깨에서 기름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서술했다.
마지막으로 아라비아 펠릭스는 "부강하고 비옥한 아라비아"라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으로, 오늘날의 예멘과 오만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인도양과 홍해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예로부터 이집트와 인도를 왕래하는 무역선들이 자주 드나들며 향신료 등 온갖 귀금속을 거래했다. 또한 이 지역 자체에서도 유향과 몰약 등 각종 약재가 나왔기에, 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매년 120척의 로마 상선이 고대 이집트의 항구인 바라니스에서 아라비아 펠릭스까지 무역을 위해 항해했다고 한다.
기원전 30년 숙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무너뜨리고 로마 제국의 절대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군사적인 위업을 달성하여 권력을 공고히하려는 야망에 불탔다. 그는 게르마니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등 로마 주변의 여러 지역을 공략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 중에는 아라비아 펠릭스도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 지역이 자기들이 속주로 삼은 동방 영토 못지 않게 부귀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이곳을 차지하여 그 부를 획득하려는 욕망을 품었다. 또한 홍해와 인도양에서 출몰하는 해적들이 종종 로마 상선들을 약탈했기에, 에퀴테스(기사 계급)들은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서라도 로마군이 이 지역을 '보호'해주길 희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여론을 의식하고, 아라비아 펠릭스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을 기획했다.
3. 경과
기원전 26년, 이집트 행정장관 가이우스 아일리우스 갈루스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아라비아 펠릭스로 원정을 가서 그곳의 통치자들을 복속시키고, 저항하는 자들을 무력으로 응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이 명령을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전임 장관이었던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는 이집트를 잘 이끌었으나 기원전 29년 상이집트의 테베에서 일어난 반란을 단숨에 진압한 뒤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필레에 기념비를 세웠다가 경쟁자가 될만한 자들을 배제하던 아우구스투스의 경계를 사 해임된 뒤 자살을 강요당했다. 전임자가 그 꼴이 되었으니, 아일리우스 갈루스로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지시를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또한 이번에 공적을 세운다면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받아 더 높은 출세를 보장받을 수도 있었다.갈루스는 10,000명의 로마 군단병과 이집트 보조병, 500명의 유대인, 1,000명의 나바테아 지원군을 수에즈 만의 클레오파트리스에 집결시켰다. 또한 지중해에 배치되어 있었던 군함 80척과 수송선 130척을 나일 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통해 홍해로 이동시켜 육군을 태우도록 했다. 이때의 원정에는 그의 친구인 스트라본도 동행했는데, 이 아라비아 펠릭스 원정에 관한 현존하는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1년간 군대를 규합한 뒤, 원정대는 기원전 25년 여름 출발했다. 그러나 항해는 순탄하지 않았다. 아카바 만을 지나가던 중 폭풍우로 인해 많은 배가 파괴되었고, 상당수의 함선이 암초에 걸려 좌초했다. 함대는 온갖 고생 끝에 아라비아 반도의 레쿠케 코메 또는 하우라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그곳에서 나쁜 음식과 물을 섭취해 괴혈병에 걸려버렸고, 결국 원정군은 겨울 내내 가만히 있어야 했다.
기원전 24년 봄, 가까스로 군대를 재정비한 아일리우스 갈루스는 물을 머금은 낙타들의 캐러밴 행렬과 함께 사막을 가로질러 진군했다. 이와 동시에, 로마 함대는 아라비아 반도의 해안가를 따라 남하했다. 그들은 로마의 동맹자인 아레타 부족이 지배하는 땅을 30일 동안 행군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막을 50일간 더 행군했다. 그 동안 무수한 장병이 사막에서 탈진해 쓰러지거나 낙오되었지만, 그들은 기어이 오아시스가 있는 네그라나 또는 네즈란 지역에 도착해 몇몇 마을을 정복하고 보급품을 확보했다. 이후 부족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마르시아바 또는 마리브 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보급품은 바닥났고, 병사들은 힘든 행군을 하느라 지칠대로 지쳐서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다.
안내인 역할을 맡은 나바테아 출신의 살라에우스는 2일만 더 가면 바다가 나오며, 부유한 해안 도시들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병사들이 더 이상 행군하기를 기피한 데다가 살라에우스를 믿을 수 없었던 갈루스는 원정을 중단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60일 동안 사막을 또다시 주파하는 고난 끝에 홍해 연안에 도착한 로마군은 함대를 타고 이집트의 미오스 호르모스 또는 아부 사르로 건너갔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로마군은 전투시 7명만 잃었지만 질병, 굶주림, 심한 더위와 강렬한 햇빛으로 인한 탈수증으로 인해 절반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아일리우스 갈루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뒤 원정 실패의 책임을 안내인이었던 실라에우스에게 떠넘겼고, 아우구스투스는 실라에우스를 처형한 후 갈루스를 용서했다. 그 후 로마는 두 번 다시 아라비아 펠릭스를 노리지 않았고, 그 지역의 아랍인들은 로마와 인도 사이의 바닷길을 통제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