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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테아 아람어: Nabāṭū아랍어: ٱلْأَنْبَاط
고대 그리스어: Ναβαταῖος
영어: Nabataeans
요르단 일대에 존재했던 아랍인의 일파이며 요르단인들의 직계 조상이다. '나바테아'는 아카드의 기록에 등장하는 나바투(Nabatu)에서 파생된 용어로, '밝게 빛나는 자들'을 뜻한다.
2. 역사
2.1. 기원
농업 혁명이 일어난 이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초승달 지대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군 정착민들과 아라비아 사막을 배회하며 목초지와 수원을 찾아 가축들을 이끄는 유목민 간의 분쟁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유목민들은 수원이 메말라서 살기 곤란해지는 건기 때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정착민들을 습격해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는 식으로 생존을 꾀했다.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문명을 세운 수메르인들을 통합한 아카드 제국은 이 유목민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로 언급되는 이들이 바로 나바투(Nabatu)다. 현대 학계는 나바투가 나바테아인의 전신일 것이라고 추정한다.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나바테아인은 이스마엘의 장남 느바욧의 후예라고 한다. 그는 나바테아인들이 유프라테스 강에서 홍해에 이르는 광대한 사막 지대에 흩어져 살았다고 기술하면서 이 지역을 '나바테리아'라고 명명했고 나바테아인들이 아라비아 국가들에 이름을 부여했다고 설명했다. 데이비드 그라프는 저서 《로마와 아라비아 국경: 나바테아인에서 사라센인까지》에서 나바테아인은 본래 메소포타미아 출신이라고 주장했는데 기원전 703년 갈대아인과 이웃 부족들이 아시리아의 통치자인 센나케립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시리아군에게 강경 진압당했을 때 사막으로 도망친 부족 중 하나로 언급된 '나바투족'이 이들의 선조라는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는 나바테아인들은 기원전 686년부터 기원전 631년 또는 기원전 627년까지 재위한 아시리아 군주 아슈르바니팔 치세에 아시리아 측 비문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등장한다. 아슈르바니팔은 생전에 수많은 정복 전쟁을 단행했는데 그 중 아라비아의 나바테아인을 정벌하여 그들을 복속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원전 652년 이복 형제이자 바빌로니아 왕인 샤마시 삼슈 슈무 우킨이 아슈르바니팔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케다르인들이 샤마시와 손을 잡고 서부 아시리아를 침공했으나 아슈르바니팔에게 격퇴된 뒤 나바테아인의 지도자 나트누에게 도피했다. 이후 카다르인과 나바테아인은 아시리아의 서쪽 국경을 번번이 공격했으나 모조리 격퇴되었다.
기원전 259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논 파피루스는 나바테아인들이 게헤란과 미네아 유향을 사들여서 가자와 시리아로 운반했다고 밝혔다. 그들은 북아라비아, 자우프, 타이마의 퀘다리트 중심지를 통해 상품을 운송했다. 한편 아라비아반도의 서쪽 끝과 시나이 반도에 살아가던 나바테아인에 대한 고대 언급도 있다. 이들은 홍해를 항해하면서 무역선들을 약탈한 해적들이었다. 이후 그들은 항구도시 아일라(오늘날 아카바)를 포함한 몇몇 항구에 기지를 설립했다. 이슬람 시대의 아랍 문헌들은 이라크에 거주하는 나바테아인과 다마스쿠스에 거주하는 나바테아인이 별도로 존재했다고 설명한다.
이렇듯 홍해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의 드넓은 사막지대에 흩어져 살아가던 그들은 유대인들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바빌론으로 끌려간 틈을 타 에돔인들이 유대 지방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공백이 생긴 옛 에돔의 땅으로 이주했다. 초기에는 주요 도시에서 인접한 산악지대에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거주지는 에돔의 수도 부셰이라에서 12km 떨어진 살레였다. 그들은 산 정상에 천막을 치고 여자와 아이들을 그곳에 있게 한 뒤 도시로 내려와서 상업 거래를 수행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에돔인들을 완전히 대체해 그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그들은 지중해 동부 해안과 아라비아 최남단 사이의 육로 무역을 중개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었고 이를 토대로 독자적인 문명을 이룩하고 여러 도시를 건설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도시를 레켐 또는 레크무라고 불렀다.
나바테아인들의 막대한 부에 눈독을 들였던 안티고노스 1세는 기원전 312년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에게 그들을 기습 공격하게 했지만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데메트리오스 1세는 나바테아인과 화해한 뒤 부친에게 돌아갔다. 이후 그들은 아라비아 최대의 도시인 페트라를 재건하고 중심지로 삼은 뒤 최고 통치자를 선출하기 시작하면서 나바테아 왕국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2.2. 나바테아 왕국
자세한 내용은 나바테아 왕국 문서 참고하십시오.2.3. 로마 제국에 복속된 후
나바테아 왕국은 서기 106년 트라야누스에 의해 로마 제국에 병합되어 아라비아 페트라에아(Arabia Petraea) 속주에 편성되었으며 주도는 페트라에서 보스라로 이전되었다. 나바테아인들은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 제국에 복속된 후에도 번영을 구가했는데 유목민족의 습성을 버리고 상업과 농업 활동에 전적으로 몰두하는 정착민이 되었다. 3세기 무렵에는 그동안 사용하던 아람어를 버리고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이렇듯 그들은 로마에 빠르게 동화되었으며 서기 3세기에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를 배출하기도 했다. 반면 로마에 동화되지 않은 이들은 사막 지대에서 살아갔고 로마가 약화된 후 시리아와 요르단 내륙 지역에 가산 왕국을 건국했다.363년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도시가 무너지면서 쇠락하기 시작했고 551년 또다른 지진이 더 광범위한 파괴를 야기했다. 7세기에 아랍인들이 이 지역을 침공했을 때 도시들은 오래 전부터 버려졌고 현지인들은 농업을 통해 근근히 먹고 살 뿐 예전의 영화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후 나바테아인들은 오랜 세월 잊혀졌지만 19세기에 페트라 등 도시들이 재발견되고 나바테아 문화가 주목받으면서 다시금 각광받고 있다.
3. 문화
스트라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대 플리니우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등 고대 역사가들은 나바테아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여러 기록을 남겼다. 반면 나바테아인들이 남긴 기록은 동로마 제국이 다스리던 시기에 기술된 페트라 두루마리 외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나바테아인을 '아랍인'으로 지칭하면서 그들의 생활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아랍인들의 나라에서는 적군이 물을 얻을 수 있는 강이나 샘이 없다. 그들에게는 곡식을 심지 말고 열매나 채소를 심지 말며,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집을 짓지 말라는 법이 있다. 그들이 이 법을 지키는 이유는 이러한 것들을 소유한 자들은 권력자들에게 명령받은 일을 하도록 쉽게 강요될 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 중 일부는 낙타를 기르고, 다른 일부는 양을 기르며 사막에서 살아간다. (중략) 아라비아 펠릭스라 하는 곳에서 유향과 몰약과 가장 값진 향품을 옮기는 자들에게서 받아 바다로 운송하기를 즐기는 자가 적지 않다. 그들은 명백히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위험이 닥칠 때마다 사막으로 달아나서 그곳을 요새로 삼는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그들이 10,000명의 전사로 구성된 강력한 부족으로 아라비아 유목민들 사이에서 용맹이 탁월했으며 빗물로 채워진 웅덩이를 판 다음 덮고 그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남기는 식으로 살아갔다고 서술했다.
이렇듯 초기에는 전형적인 유목민족으로 살아갔지만 지중해 연안 지대와 아라비아 최남단 지역인 '아라비아 펠릭스' 사이의 중개 무역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생활 양식이 바뀌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기 위해 포도를 재배하고 연회에서 사용했지만 로마인처럼 술을 과도하게 마시지는 않고 저녁 시간에 11잔 이하로 제한했다고 기술했다. 그들은 말 대신 낙타를 사용했으며 튜닉 대신 로인클로스(성기와 엉덩이를 가리고 허리띠를 두른 한 장의 옷)를 입었고 그들의 왕은 연회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정도로 민주적이었다고 한다. 대 플리니우스는 저서 《박물지》에서 이들이 판매한 다양한 종류의 유향, 의약품들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한편 그들은 무역 경로를 영업 기밀로 간주하고 외부인에게 절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다마스쿠스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나바테아 왕의 아내는 여사제, 공동 통치자 또는 자치 군주를 맡았으며 여인들은 재산을 상속 및 처분할 수 있었고 자신의 무덤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소송을 독자적으로 제기할 수 있었다. 나바테아에서 발견된 동전에서는 남성 군주와 여성 군주가 동등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 묘사되었다. 말리코스 2세(서기 40년 ~ 70년 재위)의 아내인 샤킬랏 2세는 나바테아 왕국의 마지막 왕이자 아들인 라벨 2세가 어렸을 때 섭정을 맡기도 했다.
스트라본은 나바테아인들에게 노예가 거의 없었다고 기술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로마 제국에서 주인의 심한 핍박을 받았던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이곳에 은신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외국의 몇몇 인사들은 노예 신세가 될 위험에 처했을 때 나바테아로 망명하곤 했다.
4. 탁월한 물 관리 체계
나바테아인들은 물 관리에 있어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는데 수로, 파이프, 지하 수조를 사용하여 빗물을 모으는 방식을 개발했으며 여기에 더해 매우 튼튼하고 방수가 잘 되는 시멘트를 개발했다. 그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은 페트라 도시 중심부에 사이폰[1]을 사용해 정교한 세라믹 파이프 수로와 저수지를 개발했다. 도시 외곽에서는 댐이 우기 동안 물을 받을 수 있도록 와디를 폐쇄했다. 테라스는 토사의 유출을 지연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어 농작물을 키우는 데 쓰일 귀중한 표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들이 세운 저수지는 나바테아 왕국 전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수지 바닥에는 완벽한 정육면체 형태의 석고 타일이 깔려있고 거대한 돌기둥이 그 주변에 정확한 간격으로 세워졌다.고고학자들은 이렇게 체계적인 물 관리 시스템 개발에는 수백 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다만 이들은 초창기에도 물 관리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로도스는 그들의 물 관리 역량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들은 광야로 피신하여 그 곳을 요새로 삼았다. 물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들이 건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투코(stucco, 치장 벽토)로 줄 지어 있는 지하 저수지를 마련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다. ... (중략) ... 그들은 저수지 입구를 아주 작게 만들지만 갈수록 깊게 파면서 끊임없이 너비를 늘려 마침내 각각의 면의 길이가 약 100피트에 이르는 크기로 만들었다. 이들 저수지를 빗물로 채운 뒤 입구를 닫아서 나머지 땅과 고르게 만들고, 자신들은 알아보지만 외부인들은 알아볼 수 없는 표시를 남긴다. 이틀에 한 번씩 양떼에 물을 주어서, 도망치거나 물이 없는 곳을 헤매게 될 때 물을 계속 공급할 필요가 없다.
헤로도토스는 나바테아인들을 '아랍인'으로 지칭하면서 그들이 사막 어디에서나 물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고 밝혔고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 원정을 떠날 때 사막에서 물을 가져오기 위해 아랍인을 이용했다고 기술했다. '아랍인'들은 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하기를 거부하면서도 물을 정기적으로 공급해 군대가 사막을 가로질러 이집트로 갈 수 있게 했다.
5. 종교
나바테아인들은 여타 고대 아랍인들처럼 아랍 다신교를 믿었다. 나바테아 판테온의 신들은 문, 신전의 구석, 동전, 무덤, 도자기, 부적 등의 형태로 조각되었다. 초창기 나바테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은 알 카움(Al-Qaum: 전쟁의 신, 사람과 영혼의 보호자), 알 쿠트비(Al-Kutby: 지식, 글쓰기, 점술의 신), 그리고 알 우자(Al'Uzza: 신과 지상의 힘과 연관된 최고의 여신)[2]였다.후대의 신들은 마나와트(Manawat: 운명과 다산의 여신), 알라트(Allat: 재생, 봄과 다산의 여신), 두샤라(Dushara: 태양의 신)가 각광받았는데 이 중에서 두샤라가 최고신으로 규정되었다. 나바테아인들은 매년 축제 때마다 나바테아 판테움 옥상에서 두샤라를 숭배하는 의식을 벌였고 집에서 사적인 의식을 통해 자신들만의 신을 섬겼다고 전해지며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개방된 사제 계급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외에 자세한 건 알려지지 않았으며 축제 외에는 공공 예배 제도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희생제는 대부분 동물을 잡아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두맛 알잔달에서는 매년 소년 한 명이 희생되어 제단 아래에 묻힌 사실이 고고학 연구로 확인되었다.
로마 제국에 의해 병합된 뒤에도 두샤라는 나바테아 지역에서 주조된 주화를 대표하는 신으로 남았다.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로마 건국 1,000년을 기념하는 주화를 전국에서 주조했을 때 나바테아 지역에서는 두샤라가 '악티아 두사리아'라는 이름으로서 기념 주화에 새겨졌다. 나바테아인들은 자신들의 신을 특징 없는 기동이나 블록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을 받아 신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기원후 5세기경에는 기독교가 나바테아인의 신앙으로 자리잡았고 7세기 아랍의 정복 후에는 이슬람이 이를 대신했다.
6. 언어
나바테아인들의 언어는 나바테아 지역 전역에서 발견된 수천 개의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기원전 6세기부터 오랫동안 중동에서 널리 사용되던 아람어가 변형된 방언을 사용했다. 기원전 2세기부터 나바테아 일대에 세워진 비문에는 아람어 알파벳에서 파생된 나바테아 문자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일상 생활에서는 아랍어를 흔히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3] 현재 남아있는 나바테아인의 법률 문서에는 아람어로 기술된 법률 아래에 아랍어가 별도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문어로서는 당시 공통어였던 아람어를 흔히 사용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일종의 양층언어 사회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7. 건축
페트라의 알 카즈네
사우디아라비아의 마다인 살레
나바테아인들은 바위 암반을 깎아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는 것에 능했으며 뛰어난 건축가들을 잇따라 배출했다. 특히 2세기의 건축가 다마스쿠스의 아폴로도로스는 돔을 표준으로 삼는 건축 기술을 구사하여 역사에 이름을 뚜렷이 남겼다.
8. 여담
요르단에서는 자국의 영광스러운 역사로 생각하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슬람주의를 희석시키려는 의도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다만 나바테아는 서양의 역사 매체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아랍인이 건국한 왕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다. 그 원인은 유대-기독교 관념으로 이슬람 이전 중동의 고대 역사를 현대 중근동의 역사와 단절된 역사로 여기는 기조가 강했을 뿐더러 20세기 이후 시오니즘의 로비로 유대인만 빠진 역사적 단절성의 기조가 서양에서 대중화되었고 시오니스트들이 타자화 대상으로 삼은 아랍인은 단지 사막으로 떠도는 베두인으로서만 간주되고 주요 서양 역사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4]
[1] 대기의 압력을 이용하여 액체를 하나의 용기에서 다른 용기로 옮기는 데 쓰는 관[2] 아래 문단에 언급된 알라트와 더불어 고대 아랍인들이 널리 숭배하던 여신으로, 무함마드가 속한 쿠라이시 부족의 주신이기도 하였다.[3] 물론 현대 표준 아랍어의 바탕이 되는 쿠란은 훨씬 후대인 7세기경에 쓰여졌고, 당대에 메카 인근에서 사용되던 방언에 기반하므로, 엄밀히 말해서 나바테아인들이 사용했던 아랍어는 표준 아랍어와는 다르고 나바테아 아랍어라는 그보다 더 오래된 형태의 방언을 사용했다.[4] 이 때문에 요르단인들은 시오니스트들을 매우 싫어한다. 아예 이스라엘 국기를 땅 위에 버려 밟는 사례가 있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