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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국왕 아슈르바니팔 𒀭𒊹𒆕𒀀 | |
<colbgcolor=#8B0000><colcolor=#fff,#fff> 칭호 | 아시리아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세계 네 귀퉁이의 왕 세상의 왕 |
출생 | 기원전 685년 |
사망 | 기원전 631년 (향년 54세) |
재위 기간 | 아시리아 국왕 |
기원전 669년 ~ 기원전 631년 (38년) | |
전임자 | 에사르하돈 |
후임자 | 아슈르에틸일라니 신샤르이슈쿤 |
부모 | 아버지 : 에사르하돈 어머니 : 에스하라 하마트 |
왕조 | 사르곤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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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청 건물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 1988년에 제작된 아슈르바니팔 청동상 |
아카드어 | 𒀭𒊹𒆕𒀀 (Aššur-bāni-apli) |
아람어 | ܐܫܘܪܒܢܝܦܠ |
고대 히브리어 | אָסְנַפַּר ('Āsenapar) |
유다, 이스라엘, 이집트, 소아시아, 키프로스 등 오리엔트 지역을 평정한 신아시리아 제국 사르곤 왕조의 제4대 왕이자 아시리아 전성기의 마지막 명군이다. 아시리아의 사실상 제대로 된 마지막 왕이기도 하다.[1]
그리스 기록에 등장하는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인 사르다나팔로스(Σαρδανάπαλος)가 이 인물로 추정되기도 하며,《성경》에서는 오스납발(Osnappar)로 나온다.
2. 생애
기원전 669년 부왕 에사르하돈이 제3차 이집트 원정 도중에 갑작스럽게 병사하자 할머니의 도움으로 왕실과 신하들의 충성 맹세를 받고 왕위에 올랐으며, 아시리아가 점령한 일부 이집트 영토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기원전 667년 쿠시 왕국의 왕이자 이집트 제25왕조의 파라오인 타하르카를 멤피스에서 진압했다.기원전 664년 이집트를 총공격해 제25왕조를 멸망시켜 아버지의 숙원이었던 이집트 정복을 달성했다. 다만 이집트를 직할령으로 통치하는 것보다는 조공을 제공하는 봉신국으로 두기를 원하여 네코 1세를 파라오로 즉위시켰다. 이 왕조를 이집트 제26왕조라 한다. 그러나 이집트 귀족들 일부는 이집트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정복자인 아시리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누비아로 쫓겨났지만 아직 살아있었던 파라오 타하르카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있었기에 아시리아에 대한 반란을 기획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아슈르바니팔은 바로 반란을 잔혹하게 토벌했다.
한편, 누비아에서는 제3대 파라오였던 샤바카의 아들인 타누타멘이 타하르카의 뒤를 이어 제2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즉위했다. 그는 선대 파라오인 타하르카 치세때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빼앗긴 이집트를 탈환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이집트를 공격해 멤피스, 테베 등을 점령하여 이집트의 상당 부분을 회복했고, 네코 1세를 전사시키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집트에서 일어난 소식을 들은 아슈르바니팔은 바로 이집트로 돌아와 네코 1세의 후계자였던 프삼티크 1세와 함께 연합군을 꾸려 타누타멘의 군대를 공격했다. 결국 타누타멘의 군대가 패배하면서 이집트는 아시리아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했다. 타누타멘은 남쪽으로 도망쳐 테베를 거쳐 결국 쿠시 지방까지 후퇴했다. 타누타멘의 뒤를 쫓은 아시리아 군대는 40여 일 만에 대도시 테베에 당도했다.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이집트 일대를 제대로 징벌해야겠다 싶었던 아슈르바니팔은 협박 겸 보복으로 테베에서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집트 측에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아시리아 측에 테베의 대약탈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성경에까지 기록되어 전해진 대약탈로 인해 이집트의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유출되었고, 수많은 이집트인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결국 테베의 대약탈로 인해 쿠시 왕국이 최종적으로 이집트에서 쫓겨내려가면서 누비아 제25왕조의 시대는 완전히 종결되었고,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세력은 완전히 끝장났다. 이후 아시리아와 관계가 있었던 프삼티크 1세[2]를 이집트 제26왕조의 파라오로 즉위시켰고, 이로써 사실상 아시리아의 속국이자 신하나 다름없는 이집트 제26왕조가 아시리아 대신 전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외세의 간섭기이자 고대 이집트 최후의 시대인 이집트 말기 왕조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651년 이복형인 샤마쉬슈무킨이 바빌론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2년이 넘는 포위전 끝에 바빌론을 함락시키고 이를 진압했다. 이때 바빌론을 지원한 엘람과는 10년간 전쟁을 벌여 기원전 639년에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아슈르바니팔은 엘람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저항의 여지도 없애기 위해 엘람의 왕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나무 위에다가 걸어놓았으며, 그 앞에서 만찬을 즐겼다.
이렇게 아슈르바니팔은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어 아시리아를 군사강국 겸 중동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 만들었지만 세력을 넓힐수록 더 많은 세력과 대치해야 하고, 특유의 가혹한 통치 방식[3] 때문에 적대 세력이 너무 많아져 안정적이지 못한 정세였다. 결국에는 아슈르바니팔이 죽자마자 아시리아는 공세종말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유언이 유명한데,
“짐은 신과 인간을, 죽은 자와 산 자를 잘 대접했으나 질병과 고통 그리고 불행이 짐에게 닥친 이유는 무엇인가? 짐의 나라의 분란과 짐의 가족의 불화를 참을 수 없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창피한 사건들 때문에 늘 괴롭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이 짐을 짓누르노라, 짐은 고뇌에 울부짖으며 삶을 마감하노라, 죽음이 짐을 덮쳐 쓰러뜨리노라, 짐은 비탄과 한탄에 젖어 밤낮으로 울부짖노라. 신이시여, 언제까지 저를 이렇게 다루시겠습니까? 부디 저를 구원해 주소서.”
이 내용을 유추해보면 아슈르바니팔은 만년에 정신적, 육체적 고생을 하며 괴롭게 생을 마감한 듯하다.하지만 잔혹한 정복정책과 피지배민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아시리아의 국가 정책 행보를 보면 적이 안 늘어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니 본인의 자업자득에 가깝다.
죽기 전에 아들 아슈르 에텔 일라니와 신 샤르 이슈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고 공동 통치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사르곤 왕조 신아시리아 제국은 왕위 계승을 놓고, 내전을 벌이다가 국력이 쇠락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탄 신바빌로니아, 메디아, 스키타이, 킴메르 등 주변 세력의 연합 공격을 받아 마침내 멸망했다.[4]
3. 평가
아시리아의 영토를 크게 넓혀 국력 강화에 힘썼던 위대한 정복군주였을 뿐 아니라 학문, 미술 등의 문화 영역에서도 많은 유산을 남겼던 명군이었다.[5]당시 왕들이 대부분 자신의 이름조차 적지 못할 문맹이었을 때 자신의 언어였던 아카드어는 물론 중동과 소아시아에 알려진 주류 언어를 해독할 줄 알았으며 문학 작품을 집필할 줄 알았고, 자신이 겪은 역사적 사건들을 들고 있는 점토판에 기록했으며 당대 알려진 대부분의 식물학, 화학, 천문학, 수학을 할 줄 알았고 궁술과 군사 부문에 능통한 명군이었으며 이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4. 문화 유산
특이할 만한 사항으로 아슈르바니팔은 지식욕이 매우 왕성한 사람이었는데, 수도 니네베에 도서관을 직접 세워 그동안 수집한 여러 점토판 문서들을 보관한 도서수집광이었다. 이 도서관을 오늘날에는 세계 최초의 도서관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유명한 《길가메시 서사시》와 바빌로니아 창세 신화인《에누마 엘리시》도 이 니네베 도서관[6]에서 출토되었는데, 여기서 나온 자료들이 아시리아, 더 나아가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전체에 대한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었다.아시리아 시대 조각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부조 아슈르바니팔의 사자 사냥[7]을 제작했는데, 사자 사냥을 통해 원초적 힘을 과시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왕실에서는 영토 내에서 잡아온 아시아사자[8]들을 풀어두고 전차와 냉병기를 이용해 죽이는 블러드 스포츠가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5. 기타
고등학교 세계사 과정에서도 짤막하게 짚고 넘어가는데 하필 본인이 수사의 지구라트를 부수고, 엘람의 사원을 약탈한 것을 새겨넣은 점토판 내용만을 소개하고 있어서 모진 정복군주로만 아는 사람이 많다.6.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 《문명 5의 아시리아》의 군주로 등장하며 도서관에 책을 넣으면 유닛에게 경험치를 주는 고유건물에 도시정복시 기술을 주는 특성과 엄청난 성능의 공성탑을 가지고 있어 그 누구보다 빠르게 도시들을 지워버릴 수 있다.
- 《문명 6》시나리오인 <나일 강의 선물>에서 아시리아의 군주로 등장하지만 아쉽게도 플레이어블 세력이 아니다.
- 나카지마 아츠시의 단편 《문자화(文字禍)》에서 등장한다. 왕의 스승이기도 한 나부-아헤-에리바 박사에게 도서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원인을 조사하라고 명령하는데, 박사는 그 원인을 '문자의 영'의 저주라고 결론짓고 '문자를 멀리하자'고 간언한다.[9] 문화군주였던 아슈르바니팔은 이런 2천 년은 앞선 탈구조주의적 개소리를 듣고 격노하였지만, 박사가 왕사였음을 참작하여 사형 대신 근신처분을 내린다.
- 판타지 소설《오버로드》에서 주인공의 본거지인 나자릭 지하대분묘 10층에 아슈르바니팔의 이름을 그대로 딴 거대한 도서관이 등장한다.
[1] 그의 치세 때 아시리아가 멸망한 건 아니지만 그가 죽자마자 후계자 분쟁으로 나라가 약화된 틈을 탄 주변 세력에 의해 멸망했다.[2] 에사르하돈 왕 시절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에서 교육을 받은 친(親) 아시리아파 인물이었다.[3] 각지의 포로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끔살시켜 죽였다.[4] 참고로 이 세력들은 서로 앙숙으로 유명한데 이들이 연합해서 공격했을 정도면 아시리아가 주변 세력들에게 얼마나 미움을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5] 그의 유산은 니네베를 발굴한 영국의 고고학자 오스틴 레이어드에 의해 대부분 대영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6]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7] 창을 맞고 쓰러진 숫사자, 도망가는 숫사자, 눈에 창을 맞은 숫사자,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사자, 하반신을 관통당한 암사자의 모습과, 전차의 뒤에서 달려드는 사자를 창으로 제압하고 맨손으로 사자의 목을 조르고 달려드는 사자의 입에 창을 쑤셔넣는 아슈르바니팔의 모습, 죽은 사자를 나르는 하인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8] 현재 아시아사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절멸했고, 인도에만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인도 외에 서아시아, 남유럽 지역에도 서식했다.[9] 그렇게 결론지은 과정도 희한한데, 문자의 성질을 관조하던 중 해체주의적 시각을 각성해 버리는 바람에(...) 단순히 선의 조합에 불과한 문자에 실제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문자의 정령의 존재를 믿게 되었고, 이런 문자의 정령으로 인해 인간의 주관과 인식은 실재로부터 더욱 멀어진다고 보아 경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