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그들은 낄낄대며 악을 뿌리고 거만하게 을러메며 억누릅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은, "하느님이 어떻게 알랴, 가장 높은 분이라고 세상 일을 다 아느냐?" 그런데 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악인이어도, 몸은 항상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갑니다. 나는 과연 무엇하러 마음을 맑게 가졌으며 깨끗한 손으로 살았사옵니까? 나도 그들처럼 말하며 살고 싶었지만 그것은 당신 백성을 배신하는 일이겠기에 혼자 생각하며 깨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이 아프도록 고생스러웠습니다.
《시편》 73:8, 11~13, 15~16 (공동번역 성서)
《시편》 73:8, 11~13, 15~16 (공동번역 성서)
"하늘의 도는 공평 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고 한다.[1] 하지만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인가. 그들은 이와 같이 인과 덕을 쌓고 청렴하고 고결하게 살다가 이렇게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의 뛰어난 일흔 제자 가운데 중니(仲尼)는 오직 안연(顔淵)만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표창했다. 그러나 회(回)는 가끔 쌀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셈인가? 도척(盜跖)[2]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 고기로 회를 쳐서 먹으며, 포악한 짓을 멋대로 저지르고 수천 명의 패거리를 모아 천하를 마구 휘젓고 다녔지만 결과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이것은 무슨 덕을 따랐단 말인가? 이런 것들은 크게 드러난 예들이다. 근세에 이르러서도 평소의 행실이 도를 벗어나 오로지 악행만을 저지르고도 일생을 마치도록 편안히 놀기만 하여, 부귀가 자손 대대로 끊이지 않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정당한 땅을 골라서 딛고 정당한 발언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항상 큰 길을 걸으며 공명 정대한 이유가 없으면 성내지 않고, 시종 근면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면서도 오히려 화를 입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의심스럽다. 이른바 하늘의 도라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여심혹언 당소위천도 시야비야)
《사기 - 백이열전》
악의 문제(Problem of evil)는 '절대선인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모순을 다룬 종교철학 및 신학 문제이다.《사기 - 백이열전》
2. 양태
신이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를 신으로 불러야 하는가?[3]
에피쿠로스의 역설[4]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를 신으로 불러야 하는가?[3]
에피쿠로스의 역설[4]
데이비드 흄은 위 역설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신은 전지하다.
- 신은 지선하다.
- 신은 전능하다.[5]
- 하지만 악은 존재한다.[6]
- 1, 2, 3, 4가 일반적으로는 동시에 성립되는 건 불가능하며 그로 인해 모순이 발생한다. 즉 이 중에 최소 한 가지는 틀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 신이 전지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의지와 능력이 있으나 악의 존재를 모른다.
- 신이 지선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능력이 있지만 신이 선하지 않거나 사악하여 악을 인지하고도 없애는 데 소극적이거나 일부러 악을 방치, 혹은 조장한다.
- 신이 전능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의지도 있고 악의 존재도 알고 있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없애지 못한다.
- 악이 사실 존재하지 않을 경우: 일단 1~4번 중 각자 하나씩 존재하지 않는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이라 '악은 없다.'라는 수 자체가 고려되긴 하지만, 종교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윤리적으로든 고대부터 '악'의 존재는 확실히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없는 취급된다.[7]
'악의 문제'는 '악함이 가지는 문제'가 아니라 '악의 존재가 야기하는 문제'를 의미한다. 속격조사 '-의'는 기본적으로 소유를 의미하는데 이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는 과거에 일본어로 번역된 영어 문헌을 중역하는 과정에서 of를 번역한 の를 -의로 번역하던 관행이 그대로 굳어졌기 때문일 수 있다. 따라서 '악 문제'가 더 적절한 번역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현재는 '악의 문제'라는 이름 자체가 사실상 고유 명사로 굳어졌다.
3. 사상별 입장
자세한 내용은 악의 문제/사상별 입장 문서 참고하십시오.4. 이론
자세한 내용은 악의 문제/이론 문서 참고하십시오.5. 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악의 문제 |
영어 | Problem of evil |
중국어 | 罪恶问题 |
일본어 | [ruby(罪悪,ruby=ざいあく)][ruby(問題,ruby=もんだい)] |
이탈리아어 | Problema del male |
프랑스어 | Problème du mal |
6. 여담
악의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학 외에도 윤리학 및 종교철학, 종교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는 주제이며, 여러 창작자들이 작품을 창작할 때 소재로 삼기도 했고, 심지어 종교에 관심있는 일반인들도 가끔씩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이 주제에 대한 좀 더 심도있는 개관을 원한다면 《신과 인간 그리고 악의 종교철학적 이해》 등의 저서를 추천한다. 개신교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는 《고통과 씨름하다》,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등이 있다. 해당 저서(고통의 문제)에서는 위 항목들에서 서술한 의문들이 대개 제시, 설명되어 있으며,[8] 개중에는 전능과 선함에 대한 정의 또한 포함되어 있다. 대략 이 문제를 개신교적 관점에서 다룬 저술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전도서에서 전도자(가톨릭 전승으로는 솔로몬에 해당된다.)는 악의 문제와 같은 철학/신학적 난제, 곧 선결문제가 존재하며 그 선결문제가 끝 없이 이어지는 부류의 문제에 대한 썰을 간간히 풀어놓는다. 전도자는 지혜를 추구하며 그 누구보다도 큰 지혜를 얻기도 하였고, 이런저런 뛰어나고 공정하고 공평한 치리를 하기도 하였고, 세상의 온갖 악한 것과 미친 것을 연구하여 살피기도 하였으나, 결국 전도자와 같은 지혜자가 이러한 인생의 어리석음에 대하 설파하여봤자 이런 지혜자가 무엇을 이루는 지와 상관없이 인생은 그 교훈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므로, 전에 있던 세대가 그러했고 지금 세대가 그러했듯 후에 올 세대도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니, 이러한 생각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뻘짓이라 말한다. 이 문제의 근본적 실체에 대하여, 전도자는 "인생의 목표는 하느님의 안식에 드는 것임을 명심하고,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한, 전도자가 작성한 잠언의 첫 가르침임을 되새겨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악의 문제는 출산 윤리와도 관련이 있다. 만약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한다면, 1차 창조자인 신만이 아니라 2차 창조자인 부모도 자녀를 낳음으로써 신이 방치하는 악에 자녀를 노출시킨다는 것에 대해 일부 책임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악의 문제를 지적했던 세계 각지의 고대 금욕주의 유파들(영지주의 포함)은 출산과 관련된 성욕을 죄악시했다. 이에 대해서는 반출생주의 참고.
소설가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는 "신은 비대칭의 사디스트야. 성욕은 무한히 주고 해결은 어렵도록 만들었지. 죽음을 주고 그걸 피해갈 방법은 주지 않았지. 왜 태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게 만들었고."라는 대사가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역시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모든 종교적인 답변들은 아무리 정교한 논의라고 할지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따지다보면 결국엔 어느 부분에선가 믿음을 요구하는 시점이 오게 된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호교론에선 어쩔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인 것이다.# 이쪽 계통의 신학서적 등을 파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하나의 예외도 없이 끝에 가서는 이성적인 논리가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는 부분이 반드시 나타난다. 결국 악의 문제에 대한 논쟁은 어떤 형태로 시작했던지 나중에는 이성 vs 믿음의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본래 논쟁이란 이성에 의거해 이치를 따지는 행위이기 때문에, 한쪽이 믿음을 들고 나오면 논쟁의 의미가 없게 된다. 결국 남을 사람은 남고(유신론), 떠날 사람은 떠나는(불가지론, 무신론, 악신론)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6.1. 지옥 문제
problem of hell지옥 문제는 악의 문제에 속하는 문제로, 악의 문제와 관련된 사례 중에서도 최악의 문제에 해당된다.[9] 이 지옥의 문제에서 지옥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사회의 형벌의 3가지 수칙과 어긋난다.
1.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에서 격리의 목적
2. 재사회화의 목적
3. 범죄 예방의 목적(위하력)
"1. 사회 격리의 목적"은 신학적 도덕과 사회적 도덕이 다른 측면도 있어 반박된다. 예를 들어, 평생을 봉사한 불신자도 불신을 이유로 지옥에 가게 된다. 아무리 불신자라지만, 봉사를 하는 것 자체가 사회에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될 리 없으므로 사회 격리의 목적(사회적 이익 목적)과 지옥의 목적은 상충된다. 도덕과 종교의 관계도 참조.
인간의 일생은 길어봐야 자연사하면 100년, 병이나 사고 등으로 요절하면 60대를 못 넘기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기독교 등 아브라함계 종교에서는 이 짧은 일생 동안 저지른 범죄, 불신, 배교 등에게 영원한 고통이라는 형벌을 내린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주류는 한 번 지옥에 떨어지면 절대 돌이킬 수 없이 영원히 고통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이를 부정할 경우 이단시한다. 가톨릭의 연옥이나 고성소 가설 또한 지옥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 시점에서 "2. 재사회화의 목적"이 부정된다. 지옥에서는 아무리 참회하고, 다시 신을 믿는다 한들 천국에는 영원히 들어가지 못한다. 즉, 재사회화고 뭐고 영구적인 벌이 징벌되는 것.
그 어떤 포악하고 무자비한 인간 말종이라 할 지라도, 그가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완벽하게 정당한 심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수백만, 수억 년도 아니고 영원이다. 즉, 죄의 경중에 따른 형량의 조절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 하물며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도 과하다고 생각되는 이 지옥이 그렇게까지 악해보이지는 않는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인간 기준에서 지나칠 정도로 비상식적이고 가혹하다. 이렇게 신의 행동이 비상식적이기에 여러 변신론이 등장한 것이지만, 신이 강제로 주입시킨 자유의지 등을 핑계로 영원한 고통의 장소에 내버려둔다는 것 역시 비상식적이긴 매한가지다. 이런 신의 비상식적인 면모는 신에게 자비를 구걸하며 신의 언약을 믿는 게 과연 '상식대로' 의미가 있을지 회의하게 만든다. 또한 벌의 양이 무한이라는 비상식적 기간을 거치기 때문에 "3. 위하력"을 약화시킨다. 유태인 학살을 저지른 히틀러와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친 잡범이 지옥에서는 똑같이 무한한 기간을 벌을 받는다. 벌을 받는 기간은 똑같이 무한인데 이미 범죄를 저질렀으니 차라리 더 큰 범죄를 저지를까?라는 생각을 품게 할 수도 있다.
철이 들기 전에 죽은 아동의 사례도 있다. 일부 교파를 제외하면, 신이 이 아동을 지옥에 보낼 리 없다는 것이 정론이다. 이슬람교의 경우도 15세까지는 죽으면 심판 없이 즉시 낙원에 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선량하지만 무신론자라 결과적으로 아이를 지옥에 떨어지게 유도한 부모보다, 아이를 죽여 천국 가게 확정시켜 준 아동 살해범이 아이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푼 셈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철도 안 든 아동이 죽으면 지옥 간다는 비상식적인 결론을 피하려고 하니, 지옥에 갈 가능성이 생기는 청소년기 이전에 몰살시키거나, 출산 직후의 자유의지가 없는 영아를 살해하거나, 임신하자마자 낙태시키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의 지옥행을 원천봉쇄하고 천국 보내는 선행이라는 더 비상식적인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근세 스페인 선교사 중 일부는 위와 유사한 논리로 원주민 영아가 미개한 원주민 사회에서 자라 다른 원주민들처럼 지옥에 떨어질 것을 염려해 세례 후 살해한 바 있다.
물론 아브라함계 종교의 주류 입장은 신이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해도 믿고 순명해야 한다는 것이므로(아브라함은 신의 명령대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 창세기 말씀(생육하고 번성하라)을 지켜 아이를 낳고 금살 계명을 지킨 결과 자식이 지옥에 가도 온전히 자식 책임으로 돌린다.
지옥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여러 이단 교파를 발생시켰다. 그 중 유명한 것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있는데, 이들은 영원한 고초를 겪는 불타는 지옥의 존재가 전선한 하느님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그러한 지옥의 존재를 부정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지옥이 존재한다면 마지막 심판의 날이며, 죄인이 고통 속에서 영생하는 대신 응분의 벌을 받은 후 소멸하는 것으로 본다.
7. 관련 문서
[1] 노자 79장에 나오는 구절이다.[2]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도적이다.[3] 단, 신의 개념은 종교마다 신화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악신'이라는 개념도 존재한다.[4] 콘스탄티누스 1세 치하 신학자 락탄티우스에 의해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내용으로 전해진다. 다만 에피쿠로스의 저술이 대부분 소실되어(상당수 초기 기독교도들이 없앴다고 한다.) 그가 실제로 한 말인지는 교차검증이 불가능하다.[5] 제일 기본적으로는 단어의 뜻 그대로 모든 걸 알며(전지) 모든 게 가능하고(전능) 모든 악한 행동을 허락하지 않는 것(지선)을 칭하지만, 기준에 따라 전지/전능/지선에 대해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6] 이 또한 위의 각주와 동일하게 기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무고한 즉 억울한 고통을 만드는 행위와 그 행위의 실천자 또는 신을 섬기기는 커녕 신에게 반발하고 멀어지는 것과 그런 행동을 하는 인간은 악으로 본다.[7] 실제로 일신교든 다신교든 종교적으로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는 종교를 믿는 것이 기본적인 '선행'이라 할때 그 선행을 실천하지 않는 것(무신론)이나 더 나아가 그 선행을 방해하는 것이 악행으로 간주되지 않으면 신자들의 믿음과 결속을 다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만 해도 통일 이스라엘, 북이스라엘, 남유다 국왕들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기준이 야훼에 대한 믿음이다.[8] 당연하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정도로 확실하게 수긍할만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C.S. 루이스 자신이 전문적인 신학자나 철학자는 아니라는 점은 감안하자.[9] 다만 일반적인 악의 문제가 유일신교라면 그 구조상 무조건 마주해야만 하는 문제인 것과 달리, 지옥 문제는 유일신교 중에서도 유달리 가혹한 지옥을 설정해놓은 기독교만이 겪고 있는 문제에 가깝다.[10] 악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계기를 제공한 대재앙.[11] 선과 악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욥과 그의 친구들이 갑론을박하다,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진다. 결국 하느님이 직접 나타나 "욥은 선한 사람이다."라고 책의 초반에서 정의 내린 것이 옳다고 선언함으로써 지리멸렬한 논쟁이 끝나게 된다. 재미있게도 악의 문제를 논하는 경우 어떤 식으로든 저 상태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