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1 18:34:43

악의 문제

Problem of evil
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한 것이 아니다.
악을 없앨 능력은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악을 없앨 능력도 있고 없애려 하기도 하는가? 그렇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악을 없앨 능력도 없고 없애려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왜 그를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에피쿠로스
"...나는 더 이상 종교적인 주장들과 삶의 현실들을 조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세계의 상황을 볼 때 선하고 전능한 신이 존재하는지, 그 분이 이런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는지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는 선하고 친절하게 행동하기 원하는 통치자가 있고, 그가 이 세상을 책임진다는 사실을 순순히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신은 신이 사랑과 능력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머니를 위해 꽃 몇 송이를 손에 들고 집으로 걸어가던 어린 소녀가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즉사했고 신이 그것을 가로막지 않은 것에 대해 당신은 설명해야 한다..."
바트 어만(Bart D. Ehrman)[1]

1. 개요2. 무신론적 해결책3. 지금까지 제시된 해결책과 그 반박들
3.1. 그나마 여기가 가장 좋은 세상이다.3.2. 자유의지 때문이다.
3.2.1. 자유의지의 존재유무3.2.2. 기회의 문제3.2.3. 자유의지는 정말 악의 근원인가?3.2.4. 자유의지가 있든 말든 악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예 주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3.2.5. 전지전능한 신과의 모순3.2.6.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답이 되지 않는다.
3.3. 신은 현세에 개입하지 않는다3.4. 신 또한 악의 코드를 가지고 있으나, 악을 행하지 않는다.3.5. 악은 경고이다.3.6. 신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3.7. 악은 선의 결여이며,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3.8. 악이란 건 인간의 관점이고 신의 관점에서는 선이다.3.9. 기타
4. 결론5. 관련 문서

1. 개요

절대선인 신과 악이 공존하는 것에 대한 모순을 다룬 종교 철학, 신학 상의 문제.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선한 이 있는데 왜 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에 대한 일반론과는 다른 일종의 고유명사화가 되었다. 한편 신학에서는 이 주제를 다루는 분야를 신정론(theodicy)이라고 한다.

데이비드 흄이 정리했다고 알려진 요약은 다음과 같다.
  1. 신은 전지하다.[2]
  2. 신은 지선하다.[3]
  3. 신은 전능하다.[4]
  4. 하지만 악은 존재한다.[5]
  5. 1, 2, 3, 4가 모두 성립할 수는 없기에 따라서 여기에는 모순이 발생하며, 이 중에 한 가지는 틀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1. 신이 전지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의지와 능력이 있지만 신이 악이 있는 걸 몰라서 악이 생겼으며 신이 이를 알기만 하면 없애버릴 것이라는 것.
    2. 신이 지선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능력이 있지만 신이 선하지 않거나 사악해서 악한 일이 발생해도 관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
    3. 신이 전능하지 않을 경우: 신은 악을 없앨 의지도 있고 악의 존재도 알고 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관여하지 못한다는 것.
    4. 악이라는 게 사실 존재하지 않을 경우: 이런 논의가 있는 건 맞지만 인기 있는 설명은 아니다. 대부분의 크리스트교에서는 악의 존재를 인정하며, 장 칼뱅을 비롯하여 일반적인 정의는 "신에 대한 불복종 내지는 거부, 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정도로 내려지는 상태이다.

논의의 방향에 따라 표현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특성상 신이 2명 이상인 다신교의 경우 사악한 일을 악신의 탓으로 돌리면 되기 때문에(?) 악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6] 악의 문제란 일반적으로 인격신을 믿는 일신교(一神敎/Monotheism)적인 종교에 해당하는 문제다. 따라서 유일신교인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에서도 난제 중 하나로 꼽는데[7], 종교의 특성 상 교리내에서는 '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은 당연히 피하고 있다. 반대로 유일신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악의 문제를 들어 전능하고 선한 유일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쩌면 세상에 악한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억지로 표현을 만들자면) "악신론"(dystheism/misotheism)이라고도 불리곤 한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럴 경우에는 존재하는 유일한 신이 악한 존재' 라고 말한다면 이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라리는 이어서 그런 대담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종교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8] 우리가 그런 종교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럼 이 세상에 왜 선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물론 악신이 심심해서 선을 만들고 선과 악의 대결을 보는 재미에 산다고 말할 수도 있다.[9]

2. 무신론적 해결책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을 내놓는다면, 위 문단에서 나온 1, 2, 3의 논의가 모두 무의미해지므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실제로 이 악의 문제에 대해 '무신론의 암초(the rock of atheism)'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위에 제시된 악의 문제가 그저 일신교에서 주장하는 신의 속성이 현실 속에서 모순된다 주장하는 것일 뿐이고, 신적 존재의 부재를 증명했다고 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이 악의 문제는, 정확히 말하자면 신의 존재 부정이 아니라 기독교나 이슬람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받드는 신이나 그와 비슷한 존재의 속성을 부정할 때에만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모순점들은, 적어도 악의 문제가 적용되는 신[10](혹은 '당신들만의 신')을 믿고 받드는 일을 부정하기엔 충분히 강력하다. 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종교 측의 주장 외에는 확인되지 않았고, 체계(주장)의 설득력은 모순에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다신교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는 논리이기도 하다. 특히 세상을 선의 질서가 정립되는 과정으로 보는 종교에서 무신론적 해결법은 의미가 거의 없다. 이런 종교들은 절대 선을 추구하는 신이 존재하지만 그와 같은 위계, 힘을 가진 악의 존재나 파멸의 존재도 있고, 그 결과 절대 선이 전지전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단적인 예로 힌두교의 시바가 있는데, 시바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선한 신에 가깝지만, 시바는 파멸을 통해 창조하는 신이라 권능의 발현 과정에서 파괴와 파멸, 혼돈과 같은 악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11]

일부의 무신론자들은 악의 문제를 히브리 민족의 신화가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설정오류로 본다. 세상이 시궁창이라 도덕과 율법이 필요했고, 율법에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선한 절대자를 설정했는데, 선한 절대자가 만든 세상이 시궁창이라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12]

3. 지금까지 제시된 해결책과 그 반박들

이에 대해 고대로부터 여러가지 답안들이 제시되어 왔으나 아직도 기존의 종교 교리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근래에 기독교계 내부에서는 대체로 자유의지 때문이라는 답변이 가장 보편적이지만 여전히 헛점이 많은 상황. 사실 세부적으로 본다면 이거 말고도 굉장히 많다. 한사람 한사람 이 악의 문제를 설명하는 논리는 조금씩 다르다. 그렇기에 여기는 포괄적이며 대표적인 것 몇개만 서술한 것이다.

3.1. 그나마 여기가 가장 좋은 세상이다.

신의론(神義論)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theos(神)와 dike(義)이며 ‘신의 의로움’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악으로 인해 생겨나는 신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려는 주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변신론에서 연구의 주요한 촛점은 “우주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악의 실재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善)과 섭리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악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숙고해 왔다.

페르시아 종교와 같은 이원론에서는 세계란 선과 악이 서로 투쟁하는 전쟁터이고, 결국에는 선이 승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신교의 경우에는 신의 전능과 사랑이 현세의 악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오리게네스는 악의 존재를 피조물이 자유를 남용한 죄의 결과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계몽주의시대의 회의주의자 베일(P. Bayle, 1647-1706)은 매력적인 변증법을 사용하여 악이 실재한다는 사실과 신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니츠(C.W. Leibniz)는 그의 저서 ≪변신론≫(Essais de Theodicee, 1710)에서 이에 답하여 현실의 세계는 가능한 한 최고선의 세계이고, 회화(繪畵)에서 그림자가 전체의 미와 조화를 산뜻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가시적인 악은 보다 높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정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 그의 극단적인 낙관론을 피력하였다. 이렇게 변신론이란 단어는 라이프니츠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근대에 들어오자 자연적인 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악이 크게 부각되면서 변신론은 신학적인 중심논제의 위치에서 밀려났다. 즉 사회악이 신의 사랑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근대신학은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신의 사랑과 섭리가 관철될 수 있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히 1, 2차 세계대전은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뿌리째 뽑아 버렸기 때문에 인간생활에 존재하는 악의 실재와 신의 사랑에 대한 문제가 논쟁의 촛점이 되었다. 이제 변신론은 이 문제의 중대성에 밀려 더 이상 논급되지 않는다. 다만 신에 대한 형이상학의 한 부분적 학문인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속에서 언급될 뿐이다.
가톨릭 대사전, <변신론> 항목 中

'변신론' 혹은 '신의론'이라고 번역되는 주장이다.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는, 여기가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세상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현대신학에선 거의 폐기된 주장이다.
  • 볼테르는 자신의 풍자소설 《캉디드(Candide)》에서 라이프니츠의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없음을 보였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온갖 불행을 겪지만 자신이 그래도 가장 행복하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애초에 신에 비하면 지성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인간조차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신이라는 존재가 그런 세계를 상정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현실에선 한낱 인간들조차 을 만들고 치안을 확립하며, 도덕윤리를 교육하여 사회를 발전시키고 있다. 인간도 할 수 있는 일을 전지전능한 신이 못한다는 것인가? 인간 사회의 변화는 지금 이 세상이 완성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 주장은 그 자체로 신의 전지전능함에 한계를 인정하고 있는 셈.
  • 당시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에게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이 가장 크게 반박받은 것은 이미 1755년 포르투갈 대지진이라는 반례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해당 항목 참고. 아닌게 아니라 이 사건 이후로 유럽인들은 세계관이 완전히 뒤흔들려서 "섭리하는 선한 신" 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엉망진창이 되었고 계몽주의가 큰 호응을 얻었다.

3.2. 자유의지 때문이다.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사용했기에 악이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기독교 내에서는 악에 대한 해명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으나, 여전히 허점이 많아 악의 문제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이 되기엔 부족한 상황이다.

3.2.1. 자유의지의 존재유무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부터 확실치 않다. 애초에 자유의지의 정의는 천차만별이고 결정론 계통에서는 근본적인 입장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하기도 한다. [13]

이 문제에 대해 한 신학자는 '신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너는 신이 아니라 정답을 모르고 선택의 순간에 네 의지대로 행하였으니 전지전능함과 자유의지는 충돌하지 않는다.'라는 답을 한 적이 있으나, 이런 식의 답변은 결국 ‘선택의 결과가 정해져있는데 과연 그게 진짜 자유의지인가’하는 제일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는 바로 아래의 문제로 이어진다.

3.2.2. 기회의 문제

높은 자리에 있으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러나 나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높은 사람에게는 천부의 저주다. 왜냐하면 나쁜 일이라면, 제일 좋은 조건이 그러한 마음을 먹지 않는 것이요, 그 다음이 그럴 수 있는 여건에 놓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 수필집(김길중 역, 문예출판사)" 중 '높은 지위'

어째서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하사 그들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길 바라는 전지전능한 신은 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는가? 본래 야훼를 비롯한 아브라함 계열 종교의 입장으로는 창조주는 인간을 만들 때 자신을 닮도록 했고, 인간을 자신의 아들 딸이라고부른다. 현 세태를 생각하자면 옆집에 도박장이 있는 집에 이사간 거나 다름없다.
다른 관점에서는, 많은 현명한 부모들이 자기 자식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며 자기 자식의 꿈이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인정 해주는 것처럼 신 또한 피조물들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구약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집트 인들이 유태인을 어떻게 억압했건 간에 그건 이집트 인들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신이 직접 나서서 이집트인들을 학살하면서까지 유대인들을 가나안으로 이끌면 안 되는 것이다. 신이 유태민족을 이끌면 유태인들과 이집트인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된다. [14] 하나의 예로 기독교에서 천국은 창조주와 함께 하는 자리고 지옥은 창조주의 결여를 말하는데, 교리에 따르면 사후 그 자가 어떤 삶을 (그것이 악하든, 선하든) 살아왔든 간에 그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기에 이대로 자신과 함께하길 원하지만 함께하길 원치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를 존중한다. 신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자가 당도하게 되는 자리가 바로 지옥, 즉 신이 결여된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구약과는 달리 신약 이후의 기독교에 가장 중요한 방향성이라면 이와 같이 무조건적인 자비와 선이고, 이는 종파에 따라 다르지 않다. 한 때 동성혼에 대해서 찬반논란이 과열되고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동성애자들은 천벌 받을 죄인이라고 매도할 때 당대 교황이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록 동성애자가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내 앞에서 진실로 하느님을 구한다면 내 어찌 이들을 품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한 것이 이와 일맥상통한다. 예수가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임당한 이래,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은 현 기독교의 핵심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다만, 이는 교리가 그렇다는 것이며 여전히 믿음의 문제일 뿐,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바라는 합리적인(논리적인) 답변은 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자기 자식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는 것도 좋은 부모의 충분 조건이지만,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좋고 나쁜것을 넘어 자식에게, 그리고 사회에 대하여 마땅히 이행해야 할 부모로서의 필요 조건이자 부모로서의 도덕적 의무이다.

3.2.3. 자유의지는 정말 악의 근원인가?

모든 악이 자유의지로 인해서 나타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이코패스만 보더라도 순수하게 자유의지 때문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런 답은 악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 국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만하다. 어떤 이들은 선천적인 결함을 지닌 존재가 모두 악인이 된다는 것은 아니며, 장애가 있거나 뇌해부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순수한 자유의지가 없냐고 주장한다. 단적으로 말해 왜 사이코패스와 장애인들의 자유의지가 우리와 같은 순수한 자유의지가 아니라고 멋대로 단정 짓는 것인가? 이다. 그러나 이것은 얕은 생각인데, 사이코패스는 의학적 정의상 공감 능력 자체가 없는 이들이다. 이들도 자유의지는 있다. 오히려 자유의지가 있는데 공감능력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자유에 따를 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겉으로 선량하게 행동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들 역시 악에 대한 처벌을 분명히 인지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천성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공감능력의 부재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지에 따라 그들이 선택한 특성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자유는 있지만 그 자유로 택하게 되는 것은 자유롭게 택할 수 없고, 그것의 궁극적 원인이 신이라면 책임을 물 수도 있는 것이다.
여차 저차 하지만 무신론자들과 기독교인과의 기본적인 의식의 차이는 현실에서의 죽음과 고통이 '악'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갈리게 된다. 무신론자들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사후의 보상으로 현실에서의 고통이나 죽음을 상쇄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 현재 이런 고통을 치르는 이유에 의문을 던지며, 기독교인들은 사후의 영생과 구원을 믿고 현세의 고통이나 죽음을 신의 의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면, 현세에서의 가치판단 기준이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도 신의 의지로 받아들이면 끝이니 문제해결에 적극적일 수가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감히 신의 의지에 대항해?.또한,이 부분에 대해 어폐라는 주장도 있다. 정말 오래 살았거나 미치지 않은 이상 고통과 죽음이 왔을 때 신을 원망하지 않는 자는 없다는 말인데,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원망할 대상이 필요한 것이 일반적인 사람으로서 당연하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운명이나 남을 원망하는등 신자들이라면 그 대상이 신이 되기가 쉽다. 게다가 애초에 이 이야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관점에서 무신론자보다는 덜 하다는 것이지 기독교인도 신을 원망하게 된다고 해서 어말이 되지 않는다.사후세계를 믿는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는 사람보다는 죽음에 대해 덜 나쁘게 받아들일 확률이 높다.하지만 무신론자 관점에서는 심판을 기다리는 죽은자보다 오히려 덜 걱정을 한다고 본다.또한 심판을 기다릴 필요 없이 진정한 '끝'으로 받아들이므로 실질적으로는 무신론자가 편안히 죽는다고 볼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과 악에 대한 판단기준이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 것 때문에 개인의 자유의지와는 무관하게 악이 일어날 수 있다. 이 경우엔 선악에 과연 절대적 기준이 있는가 하는 점이 먼저 문제가 된다. 종교인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악의 판단기준이 아니라 신의 뜻을 선의 기준으로 삼는다고는 하는데, 문제는 신의 뜻이랍시고 나오는 종교 교리조차도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배경에 따라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일부 기독교인들은 신의 뜻이 변하면 안 된다는 것 또한 무신론자들이 만들어낸 편견일 뿐이라고 하는데, 사실 논점이 매우 어긋난 반박이다.또한 근본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유일한 근거인 성경은 100%사실이 무너진다.여기서 말하는 변하는 교리란 것은 무슨 구원이나 심판에 대한 교리 같은걸 말하는게 아니다. 그런 건 어차피 종교인들에게만 중요한 내용이니 비종교인들이 그런 부분까지 문제삼는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말하는 교리는 선악에 대한 부분, 윤리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는 현대인의 눈으로 볼 때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많이 나오는데, 야훼가 그 당시에는 그런 행위들을 방조하거나 조장한 뒤에 이제 와서 변하는게 당연하다고 말한다면, 과연 그런 신이 선악을 논하는 것에 어떤 위엄이나 권위가 있겠는가 말이다. 다른 부족을 공격해서 갓난아기까지 몰살시키는 행위에 대한 선악 판단이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그 판단 주체가 인간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신은?
이것 역시 기독교에서는 야훼가 당시 사람들의 문화와 윤리 수준을 맞춰준다고 한다. 당장 적은 삼대를 멸하고 여자는 끌고 가서 종으로 부리는게 아주 합당한 시절에서 불살주의를 주장하며 신약의 예수마냥 다 용서해라.라고 한다면 어느 인간이 미쳤다고 신을 따르겠는가? 당시 유대 민족으로부터 자신의 거룩함과 영광을 알려 만민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가진 야훼로써는 추후 자신의 계획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는게 답이기는 하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격. 심지어 당시만 해도 유대인들은 야훼가 주는 이익을 믿고 야훼를 따랐지 야훼가 신이라 따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가나안 입성 전부터 삐긋거리더니 입성 후에는 뒤통수만 수십번...
물론 이것도 같은 수준에서 반박이 가능하다. 애초에 신이 당시 사람들의 문화와 윤리 수준에 맞춰준다고 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된다.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들을 일깨워주고 계몽하기는 커녕 비위를 맞춘다는 이야기 뜻 아닌가? 누구보다 앞장서서 잘못된 윤리기준을 바로잡아야 할 신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의 윤리,도덕적 기준이 아닌 인간들의 윤리기준에 맞춰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 무슨 현대의 정치가에 비견될 만한 처세술인가? 무엇보다도 어느 인간이 감히 대홍수를 일으키고 도시를 통째로 불태우는 신이 말하는 것을 자신들의 문화에 어긋난다고 안따르겠는가? 신으로서의 위엄 한번 선보이면 자신들의 문화고 뭐고 당장 따르지 않았을까? 심지어 아브라함은 신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고 하자 실제로 바치려 들었을 정도다. 이게 어딜봐서 이익을 믿고 따른 자의 행동인가? 거의 신성모독급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3.2.4. 자유의지가 있든 말든 악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예 주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상제가 아당(亞黨)을 만들어서 인류의 조상으로 삼았다면 그 신성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상제가 마귀의 거짓말을 곧이 듣고 마귀를 시켜서 아당의 마음의 진솔성 여부를 시험하였겠는가. 설사 아당이 참람되고 망령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상제로서는 의당 다시 주의를 주고 권면하여 고치게 하기를 훌륭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듯이, 좋은 스승이 제자에게 하듯이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상제로서 이런 일을 하였겠는가.
안정복, "천학문답"

신이 인간을 사랑하고 전지전능하다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안배하는 것이 옳다. 식량이 부족해서 싸우지 않도록 모든 이들에게 만나를 베풀고 땅이 부족하지 않게 아름다운 목초지를 약속해야 한다. 그러나 재화는 늘 부족하고 불공평하게 분배되며 이로 인하여 싸움과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요약하자면 자유의지는 허락하되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방도를 전지하다면 알아야 하고, 전능하다면 가능해야 하고, 절대선이라면 이를 이행해야 한다.

창세기에서만해도 사시사철 푸르른 목초지에 과실이 무한히 열리며 댓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는 나무 등이 있었다고 하나, 인간의 범죄 이후로 지구 전체가 야훼에게 저주를 받아 무한한 생명력을 잃었다고한다.
비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천하의 개억지지만, 신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들이 죄 지어서 저주 받아놓고 왜 신은 우리에게 무한한 자원을 베풀지 않냐며 원망하는 꼴이다. 물론 전지전능하며 선한 존재가 태초부터 존재했고 세상을 만들었다면 모든 책임을 돌려버릴 수 있으므로 이야기가 안 된다. 애초에 호기심과 욕심을 가지고 태어나 이렇게 될 거라 미리 알고 있으니까. 정말로 전지전능했다면 사랑스러운 "인간"들이 죄를 범하게 나두었을까? 애초에 그런일 가능성 자체를 없앨 수 도 있었다.

바꿔 말해서, 어떤 과학자 A가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간과 같은 외간을 가진 로봇을 만들었다 치자. A는 로봇이 단순한 기계를 넘어서길 원했기에 몇몇 행위를 금지(이를테면 살인)하는 프로그램을 탑재하지 않았다. 위험성을 알고서도. 그런데 이 로봇은 연구실에서 벗어나자마자 어떤 행인을 살해했다. 이 경우, A는 그저 만들었을 뿐 로봇에게 살인을 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신은 이것보다 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 A는 인간이므로 당연히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

사실, 자유의지가 없더라도 상황이 안 좋으면 악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이라면 자유의지를 주는 동시에 상황도 더욱 좋게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앞으로 위험에 처할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막을 힘도 갖추었지만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그런 존재를 선하다고 하기는 문제가 있다.[15]
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자원도 부족하지 않고 풍족한 지구라고 해도 과연 다툼이 없을 것 같은가? 답은 그래도 있을 것이다. 당장 학생들이 밥 한 숟갈 더 먹자고 교실에서 다투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싸움은 기본적인 자원이 부족해 싸우는게 아니라 풍부한 자원의 토대 위에서 싸우는 것이다. 즉 있는 사회라서 싸운다. (애초에 이 또한 무신론자들이 기회의 문제에서 내세운 주장에 따르면 과연 서로 싸우지 않도록 안배하는 자유의지가 진정한 자유의지인지 논해야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싸움과 전쟁이 끝나지 않는 건 인간의 욕심이 만든 그들의 자유의지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더구나 시대가 발전하면서 그 전쟁과 다툼도 점점 잦아들고 있다. 세간에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지만, 인간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총력전을 통한 강대국끼리의 전쟁보다는 평화가 더 최선이고 이롭다는 것을 알았고, 점점 많은 것들이 나아지고 있다. 그리고 애초에 신이 욕심 이라는 개념을 만들지 말았음 모두 해결될 문제다.하지만 신은 그러지 않았지[16] 이건 신이 아닌 인간의 성과고 그 외의 비극적인 건 신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서 생겨난 책임이다? 인간이 서로 싸우는 것이 신의 책임이라면 인간이 21세기에 이르러 점점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 또한 신의 안배가 아니겠는가?' 라는 논조는 문제가 있는 것이 윗 글이 말하는 '평화의 시대'는 상대적인 평화로 애초에 싸우게 됨을 초래한 책임이라는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 발언이다.
그러나 모든 전쟁이 욕심이라는 개인적 동기로 인해 발생하지는 않는다.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에 나오는 구절을 빌리자면, "결핍의 공포가 없음에도 욕심을 부리는 동물은 없다". 학생들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마찰과 자원전쟁을 동급으로 놓는 것은 무리다. 단순히 국가의 창고를 좀 더 채우기를 바라는 욕망에 엄청난 희생을 가져올 수도 있는 전쟁을 일으킬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나 노력에 따라 균일하게 자원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이가 가진 영토나 재산에 눈독 들일 일은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자원은 대개 특정 지점에 편중되어 있다. 국가 간 무역이 진행되면 이러한 차이로 격차가 생길 수 밖에 없고, 이것은 장기적으로 국가 간의 다툼을 불러오게 된다. 역사상의 거의 대부분의 전쟁은 이러한 경제문제 해소나 요충지 확보를 위해서였다. 근대에 제국주의가 등장한 근본적인 원인도 단순히 유럽인들이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다른 지역의 자원이 유럽에는 없고, 이를 각국이 들여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쟁이 발생하기 때문에, 여기서 뒤쳐지는 것을 장기적으로 큰 위협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혹은 지금은 안전해도 언젠가 자원이 부족하리라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국가를 경영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복잡하며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도자들이 탐욕스럽지 않아도 전쟁만이 돌파구인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어떤 독재자나 전제군주가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전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를 돌아볼 때 그런 강력한 체제가 등장한 배경 자체가 거의 분배 문제로 인한 혼란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다고 누구나 똑같이 악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나, 사실 인간 본성에 대해서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결국 누군가가 손에 피를 묻힐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이에 대한 신학적 반론으로 장 칼뱅과 마르틴 루터는 자유의지는 분명 존재하고, 또 인간에게 주어졌으나 인간 본성의 악함(원죄로 인한)으로 인간은 자연히 악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히에로니무스의 은총 교리는 애초에 인간이라는 족속 자체에 신 없이는 구원- 참된 선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보며 인간이 자유의지와 그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논리는 가톨릭, 개신교 구분 없이 이단이다(펠라기우스주의 참조). 물론 이 반론은 애초에 반론이 되지도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요소라는 것이다. 제작자가 나몰라라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만든 당사자가, 자기 말 안들으면 무조건 나쁜 놈이고 지옥간다고 협박하는 꼴이니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종교에서 어떻게 보는지가 대체 무슨 답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보는 것에 어떤 납득할만한 근거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특히 이러한 논리는 도덕, 윤리가 종교에 귀속된 것이 될 수 밖에 없어서, 실제 도덕, 윤리가 종교적 교리로 왜곡될 위험성이 있다. 즉, '신의 뜻 = 진정한 선'이 되기 때문에 현실에 맞지 않는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신의 이름 하에 버젓이 행해지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3.2.5. 전지전능한 신과의 모순

특히 유일신을 기반으로 한 종교에선 신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신이 알아야 한다. 즉 신이 전지전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이 창궐하는' 자유의지를 주었다면 신은 실제로는 전지전능하지 않든지, 아니면 전지전능하지만 해결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든지 한다는 자체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쉽게 예를 들자면, 전지한 신이라면 뱀이 인간을 유혹하여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신은 뱀을 창조했고, 결국 인간에게 벌을 내린다. 즉, 인간이 죄를 짓도록 자신이 설계한 주제에, 정작 인간이 죄를 지으니 그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이 된다.

3.2.6.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답이 되지 않는다.

자유의지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악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쉽게 이야기해서 길가던 의사가 뺑소니 사고를 목격했다고 치자. 이 의사가 사고 피해자를 구해주는 것이 뺑소니 운전자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일일까? 전혀 아닐 것이다. 자유의지를 존중해서 뺑소니 운전자가 사고를 치는 것을 방관하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그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겼을 때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음에도 구해주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한낱 인간들조차 무고한 피해자들을 돕고자 하는데, 충분한 능력을 갖춘 신이 방관한다는 것은 변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원죄론은 답이 될 수 없다. 원죄론으로 악의 문제를 답하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애드혹으로서, 너네는 기억도 없겠지만 태어날때부터 죄를 가지고 태어나 고통스러운 것이니 그런거 따지지 말고 열심히 믿기나 해라는 식의 회피에 불과한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악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도 안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니, 사실은 그 이상으로 매우 악질적인 행위다. 상대가 잘못했다고 윽박질러서 주눅들게 하고 스스로가 잘못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노예농장주들이나 인신매매범들, 독재자들이 자주하는 행동이 아닌가 말이다. 또한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언제일지 모를 먼 훗날의 보상이 과연 지금의 고통보다 나은 대가가 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고통이란게 무슨 숫자로 치환되는 대상도 아닐진대, 지금 아프리카 내전에서 산채로 불에 타죽은 어린아이의 고통이 과연 훗날 천국에 드는 것으로 보상이 될까? 제아무리 극상의 기쁨과 즐거움이 주어진다고 해서 산채로 불에 타죽거나 그에 준하는 고통들에 대한 보상이 과연 될런지 생각해보자. 그런 생각을 가진 신이 과연 인간의 관점에서 선한 신이 될 수 있을까?

3.3. 신은 현세에 개입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지금은 구약 시절 때마냥 죄악이 난무한다고 소돔과 고모라에 신이 손수 메테오를 후려치던 시절이 아닌 예수가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악이 모두 면제된 신약 이후의 시대다. 구약과는 달리 인간의 죄로 인해 신과 인간 사이에 단절이 이어진 지금 같은 시대에서 더 이상 신은 구약 시대마냥 직접적으로 함께하지 않는다. 다만 영적으로 함께하며 피조물이 시련이나 위기에 빠졌다면 이를 이겨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올바른 길로 비춰줄 뿐이다. 그것에 응하고 자신의 의지로 걸어갈지는 피조물의 선택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우화로도 제시된다.
지나친 폭우로 인해 홍수로 침수될지 모르는 마을에 한 청년이 있었다. 라디오에서 이를 경고하며 경찰들이 조기에 주민들을 피난시키려 하자 마을사람들이 피난하는데 청년은 피난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네, 도망치지 않고 뭐하는 건가?" 라고 물으니 청년은 기도하면서 "괜찮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지켜주실 거니까요." 라고 말했다. 이윽고 마을이 침수되기 시작하고 구조대의 구조선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도착했으나 다른 주민들과는 달리 여전히 청년은 주님이 지켜주실 거니까 괜찮다며 구조를 거부했다. 조금 있은 후, 이번엔 구조헬기가 아직 구조되지 못한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날아왔지만 마찬가지로 청년은 주님이 지켜주실 거라며 구조를 거부하고 가만히 기도했다. 그리고 결국 마을 전체가 침수되면서 청년은 익사했다. 사후, 청년은 하느님 앞에 서게 되자 굉장히 억울한 얼굴로 따지고 들었다. "주님! 전 주님이 절 지켜주실 거라고 믿고 마지막까지 기도했는데 어찌하여 절 지켜주시지 않으신 겁니까!" 그러자 하느님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내가 너한테 세 번이나 구조대를 보냈잖아!"

허나 이 문제의 논점은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자기의 실수로 악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의 행위 결과를 아무 상관없는 이가 받았다고 할 때 그 책임은 분명 저지른 자에게 있지만 그것의 결과를 '무고한' 이가 당한다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남의 행동에 피해를 입는 일은 일상다반사이고, 이것이 부당함에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신이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떤 신의 뜻이 있다 해도 그것을 모르는 인간이 이에 항의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애초에 악의 문제가 기독교적 배경에서 나타났음을 고려하면 매우 황당한데, 기독교 교리의 기본은 예수가 인류 대신 피흘려 죄를 면제해 주었다고, 즉 사람과 신 사이에는 단절이 없다이다. 그렇다면 신은 최소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실질적으로 개입하여 구원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실제로 성경에서는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준다는 구절도 아주 많이 있다.[17]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내세의 구원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의 구원도 약속한다.

3.4. 신 또한 악의 코드를 가지고 있으나, 악을 행하지 않는다.


신은 선의 코드와 악의 코드를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오직 선만을 행하는" 존재라고 규정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천사와 같은 신의 수족은 "선의 코드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아브라함계 종교의 사탄과 같은 적대자는 "악의 코드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규정된다. 인간은 마치 신과 같이 선과 악의 코드를 모두 가지고 있으나 둘을 같이 행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대표적으로 헤겔은 악도 신 자신에 의해 정립되는 것으로,“세계의 모든 것은 신적 정신 혹은 靈(Geist)으로서의 신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변증법적 운동으로부터 온다.악은 정신의 변증법적 자기활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요소이며 정신에 의하여 부정되고 고양 된다”고 했다.[18]

이것은 굉장히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설명으로, 결국 신은 자신과 같은 존재를 원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계 종교의 야훼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는데, 야훼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므로, 야훼의 창조목적이 자신과 같은 존재를 얻는 것이라면, 인간이 그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야훼처럼 "스스로 존재할 수 있어야한다." 따라서, 악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선택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인 "악이냐 선이냐?"를 구성하기 위하여 악과 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 해석은 신의 창조사유가 인간이 자손을 얻고싶어하는 욕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전제를 요구한다. 따라서 이 전제를 사용하지 않는 종교에서는 이 해석을 사용할 수 없다. 또한 이 해석은 인간이 신에게 악의 방치를 항의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신의 목적이 애초에 스스로 선을 선택하는 존재의 생산에 있기 때문에 신이 악을 제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도 이레나오와 같은 교부들이 이와 비슷한 논지의 말을 남긴 바가 있다. 이레네오의 경우에는 흔히 이단논박으로 알려진 "거짓 지식의 폭로와 반박"에서 세상을 인생이 인간이 스스로 선택을 통해 신적 존재로 훈련받는 곳으로 보았고, 아예 신으로 불리는 존재는 "하느님과 그의 아들, 그리고 '입양된 자' 뿐이다."란 서술을 했다.

성 바오로의 서신중에는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가 언급된다. 또한 욥기에서도 사탄은 정죄의 대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을 악과 선을 둘다 행할 수 있으면서 선만을 골라 행하는 존재로 보는 해석과 상당히 부합하는데, 이 해석 하에서는 사탄이 그저 인간이 선을 행하는 연습을 하기 위한 스파링 상대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낱 스파링 상대에게 졌다고 정색하고 화내면서 처벌한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 주장일까?

하지만 이 접근법도 당연히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일단, 악의 코드가 있으면서 전혀, 절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부터 인생에게 절대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사람에 비유하면 악을 저지르고자 하는 충동이나 본성은 있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인간은 애초에 신처럼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충동이나 본성이 존재하면서 스스로 항상 억누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현실에서는 극한 상황이 얼마든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족과 함께 굶어죽게 된 가장이, 똑같이 굶어죽기 직전인 사람이 가진 약간의 음식을 도둑질하지 말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인간들의 법에서조차 범인의 가족이 범인을 숨겨주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여겨 처벌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만약 위 주장처럼 신이 자신과 같은 존재를 원해서 만든 것이 인간이라면, 얍삽하게 자신의 가장 중요한 능력들은 몽땅 빼고 준다음 자신과 똑같이 행하라고 말하는게 되는 것이다. 맹자의 표현을 빌리면 '항산(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항심(선함)'을 유지하는 선비의 수양을 요구하면서, '죄악에 빠진 다음에 쫓아가 벌을 주는' 것이다. 애초에 부족할 것 하나 없고 모르는 것도 없는 존재가, 자신에 비하면 아는 것도 없고 능력도 부족해서 치열하게 생존해야 하는 존재들을 만들어서 던져놓고, 자신과 똑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벌받게 하는 행위가 정말 올바른 일일까?

혹시 신 역시 이러한 행위는 악으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음식을 빼앗겨 고통스럽게 굶어죽은 사람에게는 정말 황당한 신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가장이 끝까지 음식을 훔치지 않아 일가족이 고통스럽게 굶어죽었다면, 과연 누가 악한 것일까? 구해줄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방관한 신이 가장 악한 존재 아닐까?

또한 이 접근은 신의 전지전능에 대한 답을 제안하면서도 문제거리를 여전히 남겨둔다. 이 방식으로 따질때, 신의 전지전능함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논리에 기반한 전지전능함으로 제한된다. 현실의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램에 대해 전지전능하지만, 프로그램에 간섭하려면 그 언어에 맞게 자신의 목적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쉽게 말하면 신의 전지전능함은 인간의 논리로는 알 수 없는 영역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전지전능해 보이지 않을 뿐 사실은 불가해의 영역에서 전지전능하다는 소리다. 즉, 애초에 이치를 따지는 것은 그만두겠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애초에 기독교는 물론이오 유대교 까지 그 근본교리에 이 문제가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고 판단을 인생의, 기초적인 "자신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여 따지는 합리적인 사고능력에 맡기고, "교리의 타당성에 대한 클레임을 따져보아라"는 메세지가 들어있다. 즉, 에초에 이 두 종교의 근본 교리 부터가 "믿거나 말거나"를 먼저 제시한다.

영원하지 못한 허상적 존재인 인생에게 안식, 곧 영원을 약속하며, 그에 대해 인생이 따지기에 가장 "타당한 클레임"을 제시하는 것이 선민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하느님의 구원의 법의 기본이다. 애초에 유대교부터가 야곱이 에서로부터 야바위 장자의 권리를 주장해 빼앗은 것으로 그 계보가 이어진 종교이고, 기독교는 아예 예수 본인 부터가 유대 율법사에게 클레임을 주장해 처형당했다가, 십자가 사건[19][20]이 반전[21]으로 끝나며 선민의 지위를 강탈한 종교이다.

이런 이유로 아예 창세기에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여젔으나, 카인의 제사는 반려된 사건"이 나오며, 구원의 길의 첫 걸음을 맹종으로 말하고 있다. 즉, "전능자이자 인생의 보호하는 창조주 하느님에게 절대적 신뢰를 보내라"는 것으로 구원의 법의 첫 장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이 아벨의 제사법은 성경에 나오는 세 하늘중 첫째로써 모세율법이 나오기 전에 가장 원시적인 법으로써 존재하였음이 암시된다. 이후 예언서에 도달하고 나서는 "너희들이 지금 옳고 바른 길을 간다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내가 하느님의 뜻을 전하니 따져보고 맞는가 판단하라."식으로 선지자가 나와 경고하는 것이 반복되며, 여전히 "클레임 주장"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절정에 이르는 것이 신약의 십자가 사건이다.[22]

즉, 기존의 주장에 비해 이 주장이 더 타당하니 믿어봐라! 란식이고, 자세한 답은 나중에 주겠다 식의 설명이 "신도 악의 코드를 가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 물론 이게 간단한 문제였으면 애초에 종교란게 나올 이유도 없었고, 철학 조차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지만.

이에 대해 기독교 교리로 따진다면 ,성부는 불가지, 불가해한 존재라 논리를 벗어나는 전지전능이며, 성자는 불가지, 불가해한 성부가 타자가 성부를 가지, 가해할 수 있게 내보낸 성부의 얼굴이라고 한다. 즉, 성부 자체는 논리를 벗어난 전지전능이 맞으나, 현실에서는 논리 안에 있는 전지전능일 수밖에 없다는 것. 애초에 십자가 사건 부터가 "반드시 죽으리라"[23]라 창조주가 선언한 것을 뒤엎기 위해 일어난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바오로 서신들에도 나와 "첫 사람은 나중에 오실 이의 그림자이다."란 설명을 한다. 즉, 극단적으로 보면, 창세기 부터 요한 묵시/계시록 까지의 모든 기록이 "하느님의 야바위[24]"라고 볼 수도 있는 종교가 기독교다. (...) 심지어 욥기에도 하느님과 사탄의 야바위가 나온다.

이와 동일한 말로, "하느님이 전지전능하다면,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들어올리지 못하는 것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는 모순이다."는 주장에 대한 답으로 "하느님이 들어올리지 못하는 것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인간'을 들어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성경'이다"란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 있다. 어쨌든 둘다 전능자가 만들었고, '불가능한 것을 만들었고, 또한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만들었으므로' 전지전능하다는 논지.[25]

또한 이 논리로 악의 문제를 설명하는 것이 반드시 문제를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논리에 대한 문제 제기 또한 반드시 문제에 봉착한다는 것이 재미있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애초에 악의 정의가 무엇인가? 악이 존재는 하는가?"란 선결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논리를 적용할 수 있는 기독교 또한 "그래서 결국 악의 문제의 답은 무엇인가?"란 선결문제에 대한 답은 안 알랴쥼으로 일관한다. 단, 진짜로 안 알려주겠다는 것은 아니고, 잠언과 전도서를 보면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알게 될것을 약속하고는 있다.

역시 이것도 의외로 해당 문제를 잘 반영한 예시가 있는대, 키배의 원조(...)인 그리스만 따저봐도, 당장 그리스어에는 "악하다"란 단어 자체가 없다![26] 이에 대한 기독교 교리적 답을 억지로 찾아본다면, 악이란 곧 "인생이 천국에 못가게 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인대, 이에 대한 근거는 레위기가 "화목제의 규례" 곧,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법"을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3.5. 악은 경고이다.

악은 신이 인간이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을 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다.
  • 악은 경고가 아니라 결과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경찰들은 살인범을 찾아 감옥에 집어넣고 피해자의 가족은 세상의 동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피해자의 가족의 슬픔이 사라지지 않으며 죽은 자가 돌아오진 않는다. 신이 경고를 보냈는데 왜 인간이 피해를 받아야 하는가.
  • 경고는 화를 피하기 위함이다.
    경고는 정신을 환기시키는 행동이다. 어린아이가 불타는 집에 들어가려고 하면 아이를 끌어내서 그러지 말라고 교육해야지 몽둥이로 다리를 부러트릴 필요는 없다. 전지전능하며 선한 존재라면 덜 잔혹하고 더 명확한 경고를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 전지전능하고 선하신 신이 악을 보냈다?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악'이 아니던가? 그게 아니면, 신을 안 믿으니 악을 보냈다는 것인가? 결국 신이 악을 조장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신이 있다면 말 그대로 악신일 것이다.

3.6. 신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신은 우리를 훨씬 초월하였고 우리의 판단과 사고를 통해 이해하지 못하며 신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기에 악하다고 주장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카렌 암스트롱이 저서 《신을 위한 변론》에서 주장한 논리다. 이를 통해 신을 악의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카렌은 동시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신이 선하지도 지혜롭지도 않다'고 말하고 있어 악의 문제로 논할만한 주장이 아니다.

어쨌거나 암스트롱의 견해를 채택하는 순간 신은 악의 문제를 피해가는 동시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코스믹 호러가 발생하는 건 마찬가지. 이렇게 되면 우리가 악의 문제를 토론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인 '아니, 그럼 전선 전능 전지하지도 않으며 코즈믹 호러스러운 존재를 대체 왜 우리가 돈과 마음까지 써가며 믿어야 하나?'는 질문은 그냥 집어던지는 격.

외적인 문제로는 캐런 그 자신이 동일한 저서에서 "신은 절대적인 선과 아름다움, 질서, 평화, 진실, 정의"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다는데, 성대한 자폭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
“암스트롱의 책은 상당 부분 회피와 모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증거적 악의 문제 같은 반박이 제기되면, 암스트롱은 자신이 믿는 ‘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라며 망토를 덮어 자신의 주장을 보호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편리할 때는 살짝 걷어내 세속의 종교인들이 그 안들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그녀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신성한 존재’-절대 선과 아름다움, 질서, 평화, 질서, 정의로서 묘사될 수 있는-의 속성을 슬쩍 내비친다. 이러한 행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의미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 사이를 편의에 따라 시소처럼 왔다 갔다 하는 의미적 시소 전략의 예이기도 하다.
스티븐 로,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 와이즈베리,(2011), P. 192

그리고 일단 이 문제는 '전지전능'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킨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애초에 어떤 이유로든 '의사를 전달할 수 없다' 라는 것 자체부터가 성립될 수가 없다. 차라리 신은 죽어라 말하는데 인간이 듣지 않는다.가 더 합리적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결국은 신이 인간이 듣게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 이 역시도 결국 신은 전지전능하다는 논제에 모순을 일으킨다.

3.7. 악은 선의 결여이며,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중략)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내재하는 ‘악’의 사실을 설명하기 어려웠었다. "왜 신은 만든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과 천사가 그 자유를 악 때문에 남용함을 막지 않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는, 악이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선’한 것으로서 만들어진 의지가 자신의 놓여 있는 질서에 배반할 때에만 악이 존재한다는 것, 이 의지의 반역 즉 ‘죄’를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그 악에 대하여 당연한 벌을 받게 되며, 이리하여 악도 신의 섭리 안에 들어 있음을 밝혔다. 성서 가운데에는 신의 전능과 악의 존재에 관한 논리적인 해석이 제공되어 있지 않으므로, 근대에 와서 여러 각도에서의 신학적인 주장이 펼쳐졌다.
(중략)
여기서 특히 가톨릭에서 해석하고 있는 ‘악’이라는 용어를, evil과 wrong의 경우 두 가지로 나누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evil : 당연히 있어야 할 선, 자연히 본질적으로 속해 있어야 될 선의 결여를 ‘악’(evil)이라 한다. 즉 자연히 갖추어져 있고, 어떤 존재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을 이 경우의 ‘악’으로 본다.
② wrong : 바르지 않은 것, 틀린 것을 이 경우의 ‘악’(wrong)이라고 말한다. 인간행위에 적용하였을 때, 당연히 나아가야 할 길, 인간의 최종목적인 천국에 다다르는 길에서 벗어남을 지칭한다. ①②가 마찬가지로 ‘악’의 의미로 쓰이지만, 엄격히 말해서, ‘wrong’은 ‘진리’에 반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evil’은 ‘선’에 반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가톨릭 대사전, <악> 항목 中
악이 없는 선은 존재하지만, 선이 없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

현재 가톨릭의 주류를 이루는 설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는 신학자들, 대표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주장을 했으며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악은 선의 부재(nicht gut)로 보았다. "선은 옷이고, 악은 옷에 생긴 구멍이다."와 같은 비유를 통해 선과 악의 관계를 설명하려 하는 경우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가톨릭의 자세한 교리를 보고 싶다면, 악의 문제/가톨릭 문서를 참조하자.

악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단지 선이 결핍된 상황을 뜻할 뿐이라는 것. 즉, 악은 선의 결여(privatio boni)라는 주장.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명사를 부여해서 그것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가령 어두운 방에 대해 '어둡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보자. 이 때 어둠은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취급되지만 사실 어둠이란 대강 말해 빛의 유무에 따른 현상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악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악'이라고 호칭하기 때문에 악이 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악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선이 결핍되어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은 어둡다. 이는 '어둠'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빛이 거기에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선과 악의 관계도 이와 같다는 것이 이쪽 계통의 주장이지만, 비유는 근거가 아니다. 선이 없는 상태가 악인 건지, 악이 없는 상태가 선인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악을 빛에 비유해도 반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가톨릭에선 이것이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교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악은 '창조된 것'이 아닌, '선의 결핍', '창조된 것의 결핍',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되기에, 인간이 초월자로부터 나온 '선'을 따라야할 이유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악은 선의 '결핍적 부재'이지 '부정적 부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악이란 '있어 마땅한 것'의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가톨릭에서조차 "있어 마땅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는 그것이 뭔지 모른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으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에 성금을 낸다면 '선'이다. 그렇다면 여기를 지나쳐버리는 사람은 악한 것일까? 이 사람을 악하다고 하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머뭇거릴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이걸 악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지만, 지금 당장 1000원짜리 지폐 한 장 쥐어주지 않으면 하루를 못 버틸 사람을 지나친다면 '있어 마땅한 것'의 결핍이고,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적 관점에선 악이라고 한다. 상기한 사례들에서 한 개인이, 타인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인식하고 완전한 자유의지로 그 기회를 거부했다면 소죄로 취급된다. 애초에 '인식'과 '자유의지'를 둘다 갖추었는데 무관심으로 타인을 죽게 만들었으니 어쨌든 죄라는 것. 게다가 현대사회에선 사회에선 어차피 인터넷 등의 발달로 평범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용돈을 아껴서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단돈 얼마가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소죄를 짓고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교리상 모든 인간은 원죄가 있다는 것과 연결된다.

하지만 이 주장도 당연히 헛점이 많다.안그랬으면 이 문제 자체가 수백년 전에 사라졌겠지
  • 선과 악이 정확한 동량(同量)의 상대성을 가진다는 점을 오인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선하다면, 그 다른 것은 어떤 것보다 악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직관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우리는 어떤 행위는 다른 행위보다 보다 더 선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가령 목숨을 걸고 물에 빠진 아이를 구출하는 것은, 길을 가다가 쓰레기를 줍는 것보다 더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행위임은 일반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쓰레기를 줍는 행위가 아이를 구하는 행위보다 더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할까? 우리는 쓰레기를 줍는 행위가 어떠한 악덕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이 악의 부재라는 명제를 인정한다면, '덜 선하다'는 것은 '더 악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되어야 한다. 선을 열에 비유한 위 글에 비유하자면, A가 B보다 뜨겁다는 것은 B가 A보다 차갑다는 말과 의심의 여지없이 같다. 그러나 A가 B보다 더 선한 행위라는 것이, B가 A보다 더 악한 행위임과 같은 뜻이라고 말하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 이 주장은 결국 '자유의지'와 거의 똑같은 비판을 받게 된다. 즉 신이 인간에게 허락해준 자유의지로, 인간이 '선이 결여된 언행'을 하여서 타락하게 되는데 왜 신이 이것을 바로잡아 주지 않느냐는 점이다. 세부적인 비판은 자유의지와 거의 겹친다.
  • 또한 악을 선의 결여로 표현하면서 사용한 비유들은 그대로 선을 악의 결여로 표현하는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수많은 역사를 통해 선의 기준에 어느 정도 공통된 요소가 존재한다고 반론하는 경우가 있는데, 똑같은 이야기는 악에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간과한 이야기다. 악 역시도 역사를 통해 어느 정도 공통된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선과 악 어느 쪽으로 결정하기 힘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결핍적 부재, 부정적 부재라는 모호한 말로 분리해서 넘어가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악이 명확하게 존재해서가 아니라 선 역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같은 문제를 보자. 결핍적 부재에 해당하는 사례지만, 그렇다고 그게 악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다같이 빠져죽는 것이 '있어 마땅한 것'일까? 이에 대해 가톨릭에선 그것도 악이고 소죄라는 식으로 넘어가지만, 냉정히 보면 악의 문제에 대한 답이 못된다. 그냥 신이 그런 상황에서 구해주거나 애초에 그런 상황이 오지 않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악의 문제에 다시 걸리는 것이다.
  • 세상은 단순히 선VS악이 아니다. 상당수의 사례는 오히려 선VS선인 경우다. 만약 사람이 자신은 100% 선이라고 믿고 그것을 추구했는데 결과가 악하게 나왔다면 어쩔 것인가? 히틀러도 원래의 목적은 그저 1차 세계대전 이후 망해버린 독일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를 이행하기 위해 그 자신은 악이 아니라고 생각한 대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만약 선의가 악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 이 논리대로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전파되기 전에는 세상이 온통 악의 구렁텅이였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하던가?
  • 옷을 제단사에게 맡겼는데, 옷에 구멍을 뚫려 있어서, “왜 구멍이 있습니까?”라고 따졌는데, 제단사가 “구멍은 천의 결여이지, 구멍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고 옷의 결함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악의 문제는 선악의 정의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왜 무고하게 고통받는 경우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인데 악은 선의 결여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현실에 있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왜 그러면 신은 결핍을 채우지 않는가?”라고 질문이 바뀔 뿐이다.

이것저것 길게 늘여 써놨지만, 이 답은 사실 악의 문제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악의 문제 자체를 무효화하려는 논리로서, '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신에게서 멀어지면 그게 악이다'는 지극히 간단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악이 선의 결여'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결여되어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게다가 선이 신으로부터 온다는 부분에 이르면, 신과 관련을 맺지않는 세속윤리(secular ethics)는 불가능한가?라는 의문과 반박에도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

3.8. 악이란 건 인간의 관점이고 신의 관점에서는 선이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마다 모두 악의 기준이 다르며 시대마다 악의 기준이 다르다. 그렇기에 그들이 판단하는 악은 단순히 자신들의 생각과 손익계산을 통해 판단한 악에 불과하고 신의 관점은 완전하기 때문에 그가 보는 것은 전부 선이다. 라는 주장 조금 변형된 주장으로는 인간이 이미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정확한 선의 판단이 불가능 하다라는 주장도 있다.
  • 신이 인간과 세상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신의 분신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전쟁보다 평화를, 다툼보다 공존을, 불행보다 행복을 바란다. 이러한 주장을 듣다 보면 신의 분신인 인간이 선을 추구하고 신은 악을 추구하는 역전된 결과가 나온다. 무엇보다 정식 종교로 선택된 성경에서도 신의 이름을 걸고 서로 죽이고 미워하며 배척하라고 쓰여있지 않다.[27] 거기에다 이는 특히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자기모순인데, 분명 성경에서 인간의 선악 기준은 신이 내리신 거라더니 이제 와서 신의 선악은 인간의 선악과 다르다고?

절대선이라는 단어는 그 어떤 존재가 보기에도 상대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고 절대적으로, 공통적으로 선하다고 평가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상대선을 의미하는 이 주장은 그냥 개소리다.

이와 관련하여 DC 종교 갤러리올라온 글. 단 이에 대해서도 교리상으로는 "오원춘이나 장자 살해에 대한 선악판단은 인간의 것이지, 신의 판단은 다를 수 있다" 고 반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신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선행을 강요하는가?" 하는 물음이 나올 수도 있다. 덧글 중에서 한 네티즌은 어째서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의 선악잣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었냐는 언급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인간은 결국 초월적인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 또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전지전능한 신 개념과 상충한다는 점이다. 만약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어째서 인간에게 자신과는 다른 관점을 주었단 말인가? 신은 인간 또한 살인과 폭력 같은 행위들을 선으로 여기게끔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신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위의 문항과 유사하게 종교인들 스스로의 행위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종교인들은 그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뜻을 교리 혹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확신하고 연구하며 실천하는 동시에, 그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틀리거나, 진정한 신의 뜻이 전혀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정설을 주장하는데, 어차피 태초부터 인간은 은총으로 택함받아 천국으로 들어갈 무리와 지옥으로 갈 무리로 나뉜다는 것이다. 소위 전도행위란 이미 예정된 사람을 부르는 행위일뿐, 비신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차피 비신자들은 애초에 신이 선택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신의 뜻을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것이 교리이다. 그리고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 밖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변명하고자 만들어낸 궤변에 불과하고, 일종의 Ad Hoc 같은 주장이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신의 뜻 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애초에 악의 문제 자체가 악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 의문에 의하여 제기된 것인데 신이 원래 그렇게 정해놓아 인간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 자체를 막아놓는 것이므로 반박이나 답변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신의 기준으로 볼 때 인간 기준의 악행은 선으로 보인다고 한다면, 그러한 행위를 긍정하는 신을 어째서 믿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믿음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나오게 된다. 소소한 것에서부터 차마 형용하기 힘든 것까지 모든 악행을 선, 하기에 마땅한 행위라고 간주한다는 점에서 이는 그저 강자에 대한 복종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반박이나 악마숭배자의 사상이 혼재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창작물에 따라서는 이 주제에 더더욱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신은 인간에게 있어 지극히 악하고 해로운 존재지만 너무 강해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한다는 시추에이션이 그것이다. 이것은 코즈믹 호러와도 맥을 같이하며, 특히 크툴루 신화로 가면 선악의 개념이 다른 초월적 존재 앞에서 무력한 인간[28]이란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로 가기 일쑤. 더군다나 이 세계관의 중심에는 바로 그 야훼에 대응하는 절대자가 존재하며 이 존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부하격인 초우주의 신들조차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절대자'를 극단적으로 잘 드러낸 사례.

반대로 이를 뒤집어 인간 입장에서 신을 악으로 간주하고 죽여버리는 충격적인 전개와 결말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신 죽이기란 클리셰. 이 문서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YHVH인류의 적으로서 처단당하는 진 여신전생 2/진 여신전생 4 FINAL이 가장 직접적으로 이 문제를 찌르고 있다.

3.9. 기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제시한 답이 애매모호하고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하자, 이를 답답하게 여긴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만든 여러가지 이론들도 있다.

대표적인 기타 이론은 혼돈-질서 대립 이론인데, 신은 창조에는 전지전능하지만 질서와 혼돈의 개입 영역에는 전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이것은 '신이 전지전능하다'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셈이기 때문에 정론으로 굳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혹은 이 모든 게 신의 섭리이고 따지고 보면 선도 악도 다 필요했다고 말도 있다. 이스카리옷 유다가 예수를 팔았기에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결국 인간은 신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재라는 주장. 하지만 이렇게 되면 불쌍한 유다 가롯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신자로 만들어졌고 배신자로써 지옥에 떨어지는 운명이 고정된 것이기에 당연히 명확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29][30] 밀턴의 실낙원 같은 경우, 이런 부류로 야훼를 해석해서 루시퍼의 타락도, 아담의 타락도 알았던 것으로 나오며, 대개 이런 주장의 경우 욥기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 범위를 넓게 잡아놓는 편이다.[31] 대표적으로 c.s. 루이스가 이 부분에 대해 고통의 문제를 서술한 바 있고, 그는 타락한 우주, 부분적으로만 구원받은 우주에 있는 악과 선에 대해 4가지의 분류를 제시했는데, 곧 (1)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선, (2) 반항하는 피조물들이 만들어 내는 순수한 악, (3)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을 위해 그 악을 이용하시는 경우, (4) 그 결과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고난을 받아들이고 죄를 회개함으로써 증진될 수 있는 복합적인 선이다. 다만 하나님이 순수한 악으로부터 복합적인 선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고 해서 순수한 악을 저지른 사람들의 책임이 면제되는-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을 수는 있어도-것은 아니다. 이런 구분은 아주 중요하다.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화가 임한다. 죄는 확실히 은혜를 더하게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계속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전 체계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충돌을 '고려해서' 만들어졌으며, 어떤 행동을 하든 위의 분류에 따라 결국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처럼 섬기느냐 요한처럼 섬기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를 모호하게 만드는 데다가 인간이 마치 도구처럼 쓰이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전지전능이라는 것은 제약의 부재를 의미한다. 손가락을 튕겨서도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데, 그걸 굳이 유다같은 사람이 자살할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하는 방식을 채용하는 존재가 과연 절대선일까?

리스본 대지진은 이 문제에 관해 신학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종교적 축제일에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교회와 성당에 모인 신자들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집창촌은 피해가 적었기 때문.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고.

전도서에서 전도자(코헬렛)은 악의 문제와 같은 철학/신학적 난제, 곧 선결문제가 존재하며 그 선결문제가 끝 없이 이어지는 부류의 문제에 대한 썰(?)을 간간히 풀어놓는대, 이에 대한 전도자의 조언은 다음과 같다.

전도자는 지혜를 추구하며 그 누구보다도 큰 지혜를 얻기도 하였고, 이런저런 뛰어나고 공정하고 공평한 치리를 하기도 하였고, 세상의 온갖 악한 것과 미친 것을 연구하여 살피기도 하였으나, 결국 전도자와 같은 지혜자가 이러한 인생의 어리석음에 대하 설파하여봤자, 이런 지혜자가 무엇을 이루는 지와 상관없이, 인생은 그 교훈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므로, 전에 있던 세대가 그러했고, 지금 세대가 그러했듯, 후에 올 세대도 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니, 지혜자와 우매자의 결국이 일반이다, 즉, 해봐야할 생각이긴 하나, 그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뻘짓(...)이라 말한다. 이 문제의 근본적 실체에 대하여, 전도자는 "인생의 목표는 하느님의 안식에 드는 것임을 명심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한, 전도자가 작성한 잠언의 첫 가르침임을 되세겨라."는 결론을 제시한다.

4. 결론

신이 다중인격이라면? 또는 신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다면?사실상 선악도 정의도 전부 환상이다 카더라
이 문제는 "전지란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인가", "전능이란 무엇인가" 같은 주제들이 먼저 명확히 정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절대적인 선(善)'이 무엇인지 증명되지 않는 한 '신은, 인간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면서 신만이 알고 있는 절대적인 선에 따라 인간이 악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존재하게 했다'고만 해두면 내부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절대선신 = 인간의 관점에선 악신'이라는 결론[32]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절대선신의 존재[33]를 증명하고자 하는 입장에서는 웬만하면 논의를 여기서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온갖 종류의 복잡다단한 설명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

이런 개념과 악의 문제는 그리스도교 신학 외에도 윤리학 및 종교철학, 종교사회학 등의 분야에서 뜨겁게 불타고 있는 주제이며, 여러 창작자들이 작품을 창작할 때 소재로 삼기도 했고, 심지어 종교에 관심있는 일반인들도 가끔씩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이 주제에 대한 좀 더 심도있는 개관을 원한다면 《신과 인간 그리고 악의 종교철학적 이해》 등의 저서를 추천한다. 개신교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룬 책으로는 《고통과 씨름하다》,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등이 있다. 해당 저서(고통의 문제)에서는 위 항목들에서 서술한 의문들이 대개 제시, 설명되어 있으며,[34] 개중에는 전능과 선함에 대한 정의 또한 포함되어 있다. 대략 이 문제를 개신교적 관점에서 다룬 저술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보다 깊이 탐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전문서적을 찾아보도록 하자.

사실 무신론적인 답이 아닌 모든 종교적인 답변들은 아무리 정교한 논의라고 할지라도 계속 따지다보면 결국엔 어느 부분에선가 믿음을 요구하는 시점이 오게 된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호교론에선 어쩔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인 것이다.# 이쪽 계통의 신학서적 등을 파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하나의 예외도 없이 끝에 가서는 이성적인 논리가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는 부분이 반드시 나타난다. 그리고 거기까지 이르면 논쟁이라는, 이치를 따지는 행위는 그 의미를 잃게된다. 쉽게 말해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진행하면 결국 계속해서 따지다 보면 무신론적인 답 이외에는 마땅한 해답이 안나오는 문제[35]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문제에 너무 심각하게 몰입하지는 말자.

5. 관련 문서


[1] 『성경 왜곡의 역사』라는 저서로 유명한 성서학자. 실제로 그는 개신교 근본주의 풍토에서 수학했으나 이후 악의 문제로 인하여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막상 그가 연구한 성경의 오류나 변개 등은 신앙에 별 영향을 안 줬다고 한다.) 신앙을 버린 이후에도 그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는데, 쉽게 말하면 "신이시여, 만일 당신이 계시다면 지상의 이 모든 비참한 사태에 대해 어디 변명이라도 좀 해 보십시오!"라는 계기로 무신론에 기울어졌다는 것인데, 사실 오늘날의 신무신론자들 중에도 한때 기독교인이었다가 무신론자가 된 사람들 중에는 이런 것에 영향받은 경우가 굉장히 많다.[2] "신이 전지하다" 는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일단 신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안다고 치면 된다.[3] 이 역시 논란이 많다. 여기에서는 신은 모든 악한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 성향을 지닌다는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4] 이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여기에서는 가능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5] 악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일단 "무고(無故)한 고통" 정도를 의미한다고 하고 넘어가자.[6] 이 경우 선신이 악신을 없애지 못하므로 선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있다. 다만 이런 종교의 대부분은 악신이 선신과 대립할 수 있을 정도만큼은 강하고, 보통 선신이 신승한다. 보통 악신을 이겨낸 선신이 주신의 위계를 가지게 되는데, 주신이 딱히 전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7] 이 떡밥은 대부분의 유일신교들이 해당하는 문제이지만, 이 문서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기독교를 위주로 작성되었다.[8] 당연하지만 존재하는 유일한 신이 악신이라면 그 신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없고 이러면 종교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다. 대다수의 종교는 신을 믿는 것이 전제되니까[9] 단, 이 경우 발생하는 문제는 분명 이 세상에 선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악과 대결시키는 이 신을 과연 ‘악신’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개미를 지켜보며 개미의 행동에 흥미를 느껴 어떨 때는 사탕을 떨어뜨려주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물을 부어서 홍수를 일으키는 경우, 우리의 행동에는 어떤 악의나 선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재미(위에서 언급한 종류의 재미의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를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는 어떤 ‘악인’이 아닌 그저 ‘중립적인 존재’ 정도가 된다. 즉, 만약 ‘신’이라는 존재가 악과 선을 창조하고 동시에 ‘전지전능하다면, 해당 존재는 ‘악신’이 아닌 ‘중립신’으로 불려야 한다. 왜냐하면 해당 존재가 ‘악신’일 경우 언제나 절대적으로 악이 유리하고 악만이 판치는 세상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신이라면 선신이 재미로 악을 만들고 그 결과를 지켜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애당초 선과 악을 대립시키는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은 선신이든 악신이든 믿을 이유가 없다.[10] 신이 전능하고 선하며 세상에 개입해 악을 없애려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의 신들[11] 힌두교도들이 악의 문제를 다루는 논리가 재미있다. 비슈누, 브라흐마, 시바가 삼주신이고 셋 다 창조의 권능이 있는 것으로 본다. 비슈누, 브리흐마교도야 다 때려부수는 시바 탓이고, 시바교도는 우리 시바님은 짱이라 시바님이 창조하셨으면 세상이 천의무봉인데, 비슈누, 브리흐마같은 모지리들이 창조한다며 먼저 깝쳐서 세상이 이 모양이라는 식이다.[12] 종교적 율법과 도덕이라는 것들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도덕적이라고 하지 못할 조항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13] 예를 들어 내가 식당에 들어가 다양한 음식 중 순두부찌개를 골라 점심식사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순두부찌개를 선택한 것은 개인의 자유의지의 결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 유아기부터 길들여진 식습관과 식사를 할 때의 날씨, 건강상태, 기타 다양한 환경의 결과로 순두부찌개가 선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다못해 며칠 전 본 순두부찌개집 광고가 머릿속에 남아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순두부찌개가 먹고 싶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자기는 그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내 의지로 선택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에 불과하고, 사실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모여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고, 나의 생각은 정해진 결과를 그저 따라가고 있는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자유의지와 전지전능한 타자는 양립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자유롭지 않은 것이고, 인간이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은 것이다.[14] 이 때는 구약으로 예수의 죽음이 일어나기 전이었기에 인간과 신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기 때문이다.[15] 실제로 창세기에는 이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나와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아무런 조건 없이 무한히 소산을 내놓던 땅은 이제 인류가 스스로 경작해야 했으며 경작을 방해하는 잡초나 엉겅퀴들이 생겨났다. 즉 성경에 따르자면 원래 이 세상은 100% 완전하게 창조되었으나 죄가 들어오면서 야훼의 저주를 받아 이 꼴이 되었단 얘기다. 그러나 또 반복되듯이. 전지전능한 신이 실재한다면 그러한 저주도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데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선이 아니라는 의미다.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어야하며 야훼는 행동을 번복할 수 없다. 때문에 에덴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최후의 날에 현 우주를 멸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고한다. 즉, 언제인지도 모르는 최후에는 가능하지만 당장은 안된다는 것인데, 전지전능한 존재치고는 많이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16] https://www.youtube.com/watch?v=NbuUW9i-mHs[17] 마태복음 7;7-11, 21;22[18]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제 1권 (서울:연세대학교출판부,1991),371[19] 예수의 처형 = 신성 모독으로 천벌을 받음 = 곧 예수의 주장은 하느님의 가르침이 아닌 사람의 뇌피셜 생각이었을 뿐이다.[20] 십계명에서 말하듯 인생의 목적은 하느님의 안식, 곧 영원한 천국의 삶을 얻는 것인대, 이를 위해 일해야할 인생이 누군가의 허위 주장에 넘어가 헛되게 피를 흘리다 영적 사망을 맞이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나았을, 이보다 허무할 것이 없는 처참한 비극이기에 성경에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를 받은 것이란 말이 있다.[21]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어찌보면 결정적으로(...) 기독교의 발흥과 로마의 개종.[22] 심지어 이런 "반전"은 후에도 계속 있었음을 사도행전이 기록중인, 정황을 잘 따저보면 뭔가 이상한 것이 한둘이 아닌 여러 "사태"들로 짐작할 수 있다. 애초에 사도행전 첫장 부터가 천사가 와서 "이스라엘 회복이 뭐가 중요하냐. 니들 구원이 중요한건데?" 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예수께서는 다시 오실것이다."란 떡밥을 뿌리는 등 심히 골때리는 장면으로 구성되어있다. 성경 전체가 이런식으로 낚시를 시전하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알 수 없는 미래의 일, 네 구원과 관계 1도 없는 일을 알려고 뻘짓하지마라"고 해놓고 그 미래의 일을 이야기해주는 건 참...[23] = 죄의 삯은 사망이다.[24] 그래서 기독교에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나태내기 위한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냄으로써, 자연스럽게, 허상적 존재인 인생이 실존적, 곧 하느님 처럼 영원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변호하는 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애초에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라는 것을 성경은 기록한다.[25] 단, 이것은 논리적으로 완전히 잘못된 논지이다. 전지전능이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이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모든 것’을 알고 ‘모든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인간이 만들어지고, 이에 전능한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라는 명제가 발생하는 순간 이미 전지전능은 파괴된 것이다. 간단한 예로 설명하자면, “A라는 열쇠장인이 X라는 자물쇠를 만들었다. 이 자물쇠는 A가 가진 힘으로 열 수는 없지만, A는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 Y라는 열쇠를 만들어 해당 자물쇠를 열 수 있게 했다”라고 가정했을 때, 열쇠장인인 A가 열쇠인 Y를 ‘통해서’ X를 열 수는 있어도, 여전히 A는 Y없이는 X를 열지 못한다. 그러나 해당 논지에서는 A가 Y를 만들었기에 Y가 없어도 X를 여는 게 가능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26] 좋다, 나쁘다로 실질적으로 선하다/악하다란 말을 한다.[27] 인간의 손을 들어 불가능한 기적을 행하사 다른 인간과 민족을 죽이거나 배척하는 경우가 있긴하지만...[28] 크툴루 신화에는 인간에게 관심 자체가 없는 건 그나마 다행이고, 아예 선악이고 뭐고 없이 전 인류를 취미로 가지고 노는 극악무도한 케이스도 존재한다. 이 악의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의외로 야훼가 이런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29] 유다에게 거부할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결국 본인이 거부하지 않았다는것. 게다가 베드로의 경우 3번 부인하고 회개했지만 유다는 그냥 자살해버렸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유다도 회개했더라면 예수가 용서해줬을것은 뻔하기 때문이다.[30] 이 경우에는 신은 전지전능할지는 모르나 절대선은 아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유다를 희생시킨 것이기에[31] 어째서 넓게 잡는다는 부분이 서술되었느냐 하면, 결국 욥기에서도 명확한 해답은 내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32] 당연히 이 경우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무신론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33] 아무리 절대선신이라도 인간의 관점에서 악하다면 있어서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의 다른 모든 생물들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멸종시키는 신을 생각해보자. 아무리 숭고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그런 신의 존재를 반길 수 있겠는가.[34] 당연하지만, 딱히 비기독교인도 수긍할만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C.S. 루이스 자신이 전문적인 신학자나 철학자는 아니라는 점은 감안하자.[35] 종교적 문제로 중요해진거라 그냥 신은 없음 하면 땡이기 때문에[36] 악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계기를 제공한 대재앙. 자세한 내용은 문서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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