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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an kann auch unser Leben auffassen als eine unnützerweise störende Episode in der seeligen Ruhe des Nichts.[1]
You may look upon life as an unprofitable episode, disturbing the blessed calm of non-existence.[2]
삶은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방해하는,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3][이역]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반출생주의(反出生主義[5], anti-natalism)는 인간[6]의 출산(procreation)을 비윤리적 행위로 간주하는 윤리학적 관점이다.#[7]You may look upon life as an unprofitable episode, disturbing the blessed calm of non-existence.[2]
삶은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방해하는,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3][이역]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2. 배경
사료(史料)와 부족(部族)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인류는 과거부터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을 강박에 가깝게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성욕과 번식 욕구 충족 같은 본능적인 면, 노동력 확보와 노후 부양 같은 타산적인 면이 공존한다.대개 지배층은 인구 증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데, 심한 경우 독신세와 무자녀세까지 걷었다.[8] 이러한 친출생 편향은 현대의 교육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9]
인구가 곧 국력이었던 전근대 농업 국가들은 출산을 장려했다. 조선의 경우 고을 수령의 임무(수령 7사) 중 하나가 인구를 늘리는 것(戶口增)이었다. 관할지의 인구는 왕이 수령의 위민(爲民)을 가늠하는 지표이기도 했기 때문에, 수령은 혼인하지 못한 노총각이나 노처녀가 있으면 그 부모를 질책했고, 그래도 해결 안 되면 처벌하기도 했으며 다른 마을에 수소문 해서라도 어떻게든 혼인을 주선했다.
그런데 인권 개념이 대두하면서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10]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고 그러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는 것은 악습이라는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독신과 무자녀 부부에 대한 부당한 편견도 완화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여성권리·아동청소년권리·동물권리·생명권리 개념의 정립 역시 반출생주의가 구체화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11]
염세주의(pessimism)·염인주의(misanthropy)[12] 사상은 반출생주의와 통하는 면이 있다.[13] 현대의 양극화와 상대적 박탈감 문제, 인간의 수명이 증가하며 발생한 고령화와 세대 갈등의 심화 문제, 환경 오염과 지구 온난화 문제도 낙관적인 미래 전망을 약화시킨다.
19세기부터는 콘돔이 발명되는 등 여러 신뢰성 있는 피임 수단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인공임신중절 기술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개인이 번식을 피하면서 성욕을 충족하는 일도 수월해지게 되었다.[14]
20세기 후반, 학계에서 응용윤리학(실용윤리학, 실천윤리학)이 부상하기 시작한 것도 반출생주의가 학문적으로 성립하는 배경이 되었다. 반출생주의는 비동일성 문제[15][16]의 해결책 중 하나로 제시된다.#@
2.1. 문헌
하늘 아래서 억울한 일 당하는 사람들을 다시 살펴보았더니, 그 억울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데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더구나. 억압하는 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는데 감싸주는 사람도 없더구나.
그래서 나는 아직 목숨이 붙어 살아 있는 사람보다 숨이 넘어가 이미 죽은 사람들이 복되다고 하고 싶어졌다.
그보다도 아예 나지 않아서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되었다.
전도서 4:1-3[17], 공동번역성서
그래서 나는 아직 목숨이 붙어 살아 있는 사람보다 숨이 넘어가 이미 죽은 사람들이 복되다고 하고 싶어졌다.
그보다도 아예 나지 않아서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되었다.
전도서 4:1-3[17], 공동번역성서
다음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실레노스의 지혜(the wisdom of Silenus)'로 소개하는 그리스 신화 이야기다.[18][19]
미다스의 왕이 오랫동안 숲 속에서 디오니소스의 시종인 현자 실레노스를 추적했으나 그를 잡지 못했다는 오랜 전설이 있다. 그가 마침내 왕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왕은 그에게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훌륭한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마신은 미동조차 없이 부동의 상태로 침묵했다. 그러다가 왕이 강요하자 마침내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가련한 하루살이여, 우연의 자식이여, 고통의 자식이여, 왜 하필이면 듣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 가장 복될 일을 나에게 말하라고 강요하는가? 최상의 것은 그대가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것이네. 태어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무(無)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은 ㅡ 바로 죽는 것이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인 소포클레스의 희곡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일단 태어났으면 빨리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게 차선이라네. 청춘의 경박한 어리석음이 지나간들 어느 누가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질투, 당쟁, 불화, 그리고 전쟁... 그 어느 누가 전쟁의 유혈과 전쟁의 비통함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이가 싫어하는 노령이 찾아온다네. 힘도 없고 친구도 없는 노령이... 황혼에 의지할 곳도 없이 온갖 쓰라린 일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노령이.[후략]
그 외에도 여러 문학 작품에서 반출생주의를 내포하는 듯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
태어난 생물에게 생일은 한탄해야 하는 날이다.
모든 것은 죄악이다. 내 말은 모든 것이 그러하며 사악하다는 뜻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죄악이다. 모든 것은 사악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존재는 사악함이며 사악함을 위한 사제로 임명되었다. 죄악은 그 목적이며 마지막 목적이며 우주다. 유일하게 좋은 것은 비존재뿐이다.
자코모 레오파르디, 《아시아에서 방황하는 목동의 야상곡》, 《지발도네》
모든 것은 죄악이다. 내 말은 모든 것이 그러하며 사악하다는 뜻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죄악이다. 모든 것은 사악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존재는 사악함이며 사악함을 위한 사제로 임명되었다. 죄악은 그 목적이며 마지막 목적이며 우주다. 유일하게 좋은 것은 비존재뿐이다.
자코모 레오파르디, 《아시아에서 방황하는 목동의 야상곡》, 《지발도네》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못내 억울하고, 게다가 적반하장 격으로 세상에 내보내준 은혜를 고마와하라고 들입다 강조해대는 효 사상이 얄밉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식에게 효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자식은 그저 '애완용'으로 길러야 한다.
마광수[23], 《마광수의 뇌구조》
마광수[23], 《마광수의 뇌구조》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무슨 뜻이냐 하면 생명을 만들어내는 일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어떤지, 그걸 잘 모르겠다는 거야. 아이들이 성장하고, 세대가 교체되고,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지? 산을 더 허물어서 바다를 메우고, 더 빨리 달리는 차가 발명되고 더 많은 고양이가 치여 죽어. 그뿐 아니겠어?
무라카미 하루키, 《양을 쫓는 모험》
무라카미 하루키, 《양을 쫓는 모험》
2.2. 금욕주의
인도 금욕주의[24]·그리스 금욕주의[25] 등 대부분의 금욕주의 사상이 성욕 억제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반출생주의와 통하는 면이 있다.반출생주의는 유정적(有情的, sentient)[26] 존재에게 되도록 고통과 죽음을 강제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채식주의와 접점이 있다. 베나타를 포함한 반출생주의 사상가 중 상당수는 채식주의자, 동물보호 운동가, 환경주의자, 생태주의자이기도 하다.
2.2.1. 불교 입장
불교 전체를 봤을 때, 출산에 대한 공인된 가치판단은 없다. 불교는 무아 사상을 골자로 하여 집착의 소멸로써 고통의 윤회를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아이를 낳아야 한다거나 낳지 말아야 한다고 정하는 일에 집착하지는 않는다.[27]다만, 원시 불교(초기 불교, 근본 불교)의 세계관을 수용한다면, 아이를 낳는 것보다는 낳지 않는 쪽을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여지는 충분하다. 불교는 현재 시공간에서 유정적 존재가 절멸하더라도 결국 다른 시공간에서 유정적 존재가 태어난다고 보는데, 어딘가에서 태어나는 것이 이미 카르마로 정해진 운명이라 한들 윤회로 고통받을 중생을 일부러 낳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28]
석가모니는 "인생은 고해(苦海)다."라고 말했으며, 왕자로서의 의무 때문에 원치 않게 자식을 만들었고, 아들이 태어나자 '속박(굴레)'이 생겼다고 말한 후 출가했다고 전해진다.[29] 석가모니는 자신이 속한 승가(僧迦) 집단의 일원이라면 성관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30][31] 다음은 《Garbhāvakrāntisūtra(The Sūtra on Entry into the Womb)》#[32] 중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난다, 나는 새로운 존재의 생산을 아주 조금도, 그리고 단 한 순간도 예찬하지 않는다. 왜? 새로운 존재의 생산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주 조금만 토해도 악취를 느끼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난다, 새로운 존재의 생산은 아주 조금이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고통이다. 그러므로 난다, 출생을 이루는 그 무엇이든, 즉 물질의 발생, 존속, 성장, 출현, 감정의 발생, 존속, 성장, 출현, 개념화, 영향력, 그리고 의식, 이 모든 것은 고통이다. 삶은 질병이다. 성장은 노화와 죽음이다. 그러므로 난다, 어미의 자궁 안에서 존재를 바라는 자가 흡족해할 게 무엇인가?[33]
한편, 동아시아 대승불교(북방불교)에서는 출생주의 성향이 발견되기도 한다. 북방불교는 역사적으로 세속 정치에 관여하거나, 승병이 발달하는 등 호국불교(민족주의) 성향이 강했고, 평신도가 아들 점지를 바라며 불공을 드리는 경우도 흔했다.
한국 불교[34]는 아이를 만든 파계승 원효를 중요 인물로 내세운다. 한국의 불교 지식인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 교수는 저출산 관련 포럼에서 출산율을 높임으로써 인간도에서 인간을 더 많이 낳아 부처가 될 기회를 최대한 많이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5]
2.3. 영지주의
영지주의의 형성에는 헬레니즘[36]·동방 종교·에세네파[37][38] 등 여러 유래설이 있다. 영지주의는 활동 당시 그리스도교에 의해 이단의 대명사로 쓰였으나, 온갖 상이한 교리가 혼재하고 자잘한 분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주의로 분류되는 다수 교파에서 그리스 금욕주의 등을 계승해 성욕과 육식 욕구를 죄악시하고, 결혼과 성관계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발견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대개 영지주의는 악의 문제(problem of evil)를 지적하며 이원론적 형태를 띠는데,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을 다른 존재로 보았고, 전자를 잔혹한 악신·무능한 선신·사탄과 같은 악마 등으로 취급하며 숭배를 거부했다. 이들은 신성한 요소(divine element) 또는 영혼이 추악한 물질인 육체에 갇혀 고통받는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그러한 존재를 만들어내는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다음은 영지주의 계파나 영지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교파 중 반출생주의 성향이 의심되는 사례들이다. 이들은 당대 지배층과 주류 종교에 의해 학살당하는 등 강하게 박해받으며 멸절되었거나, 반출생주의적 교리로 인해 자연도태되었다.[39]
- 엔크라테이아파(Encratites)[40]는 결혼, 성생활, 육식, 음주, 등을 악마를 돕는 일로 여겨 금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탄생이 죽음으로 이어지므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생식을 멈춰야 한다고 보았다.
- 보고밀파[41]와 카타리파[42]는 공의(公義)롭고 인자한 신이 이렇게 불합리한 세상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고 보았고, 악마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출산은 악마를 기쁘게 하는, 육체의 노예를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성교를 경원시했다. 이들은 성욕 충족을 위한 대안으로 항문성교를 제시했다.
- 그리스도교에 최초로 정경(正經) 개념을 도입한 인물로 알려진 마르키온과 그를 따르는 마르키온파는,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을 철저히 구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구약에서 묘사된 유대교의 신이 얼마나 모순적이며 악의적인지 신랄하게 비판하며, 사랑의 신인 예수의 신이 불행과 악이 만연한, 불완전한 세상을 창조할 리 없다고 믿었다. 또한 성교의 난잡함과 임신 및 출산의 고통을 납득하지 못했으며, 결혼을 유대교의 신을 돕는 일로 간주하고 배격했다.
- 유대교·그리스도교·영지주의·조로아스터교·불교·자이나교 등 온갖 종교의 교리를 융합시켜 마니교를 창시한 마니는 간음·생식·육식 등 육체적인 것을 고집하면 환생의 고통을 겪는다고 설파했다.
- 18세기 미국에 등장했던 개신교 분파 셰이커는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재산을 공유하고, 결혼을 경원시하였으며, 순결을 미덕으로 여겼다. 이들은 고아나 노숙자를 입양하였으며, 그들이 21세가 되면 공동체에 머물거나 떠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었다.
악의 문제와 그 하위 문제인 지옥의 문제(problem of hell)[43]는 악과 지옥을 방치하는 신에 대한 비판에만 한정되지 않고, 그런 신과 지옥의 존재를 믿는 교인, 특히 부모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부모의 선택으로 인해 태어난 자녀가 세상에 존재하는 악·고통·죽음에 강제로 노출되는 것도 모자라 자칫하면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옥이라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리스크를 자녀에게 꼭 지워야만 하는 이유 같은 것은 없다. 2022년 기준 세계 인구는 80억을 넘긴 실정이고, 그만큼 세상에는 고아도 무수히 많다. 이렇듯 이미 낳음당해 방치된 아이들을 돌보고 한 명이라도 더 천국 가게 돕기도 벅찬 상황에, 굳이 아이를 낳아 한 명이라도 더 지옥에 보낼 가능성을 높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무종교인 부모도 지옥이라는 최악의 리스크만 덜어냈을 뿐 자녀를 악·고통·죽음에 강제로 노출시키는 것은 동일하다. 따라서 반출생주의 레딧(링크) 등 반출생주의 커뮤니티에서는 모든 출산을 무책임한 도박 내지 물귀신 작전과 비슷한 것으로 취급한다.
2.3.1. 그리스도교 입장
이 문단에서는 영지주의적 반출생주의에 대한 주류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서술한다.전도서 4:1-3과 6:1-6 등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등 반출생주의 관련 서적·논문에서 다른 반출생주의적인 격언·속담과 함께 인용되는 성경 구절들이다. 그 외에도 예레미야 20:14-18, 욥기 3:1-20, 마태오의 복음서 26:24 등 개인의 태어남을 저주하거나[44],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다.[45]
그러나 위 성경 구절들은 문맥을 고려했을 때 일부 개인의 단발성 신세 한탄이거나, 이스카리옷 유다 같은 특정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내용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반출생주의를 지지하는 내용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46]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출생주의 종교다.[47] 창세기 1:28에 있는, 그 유명한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구절을 포함해 여러 구절에서 출산은 신이 준 축복이라고 언급하고 있다.[48] 그 때문에 가톨릭은 출산 및 성생활에 대해서 강경한 출생주의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낙태와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반대하고, 심지어 자위행위도 대죄로 여기며 생리 주기를 이용하는 피임법만 인정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출산 목적이 아닌 성관계는 죄다."라고 규정했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종교개혁자인 장 칼뱅·마르틴 루터도 "섹스는 단지 자손을 얻는 목적 외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49] 따라서 반출생주의 성향의 초기 그리스도교 분파들은 이단으로 분류되는 분파들이고 주류의 입장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칙적으로 개인이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은 순전히 본인의 선택이며 본인만의 책임이고, 낳은 부모의 책임은 없는 것으로 본다. 또한 생명은 순전히 신이 주는 것으로 보기에 아이가 지옥에 갈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신이 주는 생명, 즉 출산을 거부하려 하는 것은 신을 거부하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이는 대죄에 해당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단, 그렇다고 그리스도교 내에서 출산 없는 독신과 입양 자체가 금기시되지는 않는다. 예수는 이혼은 엄금했으나 독신으로 살았으며, 천국을 위해 독신을 택하는 것을 긍정했다.[50]# 당연히 사도 바울로도 비슷한 입장이였으며,[51][52] 선지자 예레미야[53][54]·세례자 요한·사도 요한 등도 독신이었다. 이에 따라 가톨릭의 수도자와 성직자는 독신이 의무이며, 여기에는 독신이 아닌 경우 세습과 친인척 비리가 발생하기 쉽다는 세속적 고려도 포함된다.# # 입양 역시 성경에서도 일관되게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55] 그리고 모세·에스더·예수는 양자였다. 따라서 신을 거역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신앙 생활을 공고히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출산 없는 독신과 입양은 허용되며, 상황에 따라 일부 개인에게 권장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논리
반출생주의 사상가는 의무론적(deontological) 윤리관을 따르거나 참고하는 경우가 많다.[56] 또한 동의(consent) 문제[57][58]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쇼나 시프린·제럴드 해리슨·줄리아 태너·아쉴 싱 등은 출산이 그로 인해 태어날 당사자의 동의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태어날 당사자의 동의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각한[59] 피해 위험을 원천적으로 예방하는 것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는 대신 심각한 피해 위험을 강요하는 것은 중대한 도덕적 의무 위반이며 우리에게는 그럴 도덕적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60][61]데이비드 베나타는 각기 다른 사상가의 단편적인 주장에 가까웠던 반출생주의 통찰을 체계적인 논증으로 이끈 최초의 철학자다. 그는 그의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서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asymmetry between pain and pleasure)과 삶의 질(quality of life) 논증을 반출생주의의 핵심 논거로 제시한다.#[62]
베나타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제시한다.
- 고통은 나쁘다.
- 쾌락은 좋다.
- 고통의 부재는 좋다. 설사 그 좋음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향유(享有)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 그 부재가 박탈(deprivation)이 되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를 존재 X가 존재하는 가능세계와 존재 X가 부재하는 가능세계에 대입해 표로 변환하면 다음과 같다.[63]
시나리오 A (X가 존재) | 시나리오 B (X가 비존재)[64] |
①고통의 존재 (나쁨) | ③고통의 부재 (좋음) |
②쾌락의 존재 (좋음) | ④쾌락의 부재 (나쁘지 않음)[65] |
위 표가 옳다면, X에게 나쁠 여지가 없는 시나리오 B를 택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안전한 선택이 된다.
X가 존재하는 경우와 존재한 적이 없는 경우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해보자. X가 존재하는 경우 X의 삶에는 ①고통이 있으며(나쁨), ②쾌락 또한 있다(좋음). 반면 X가 존재한 적이 없는 경우 ③고통은 없으며(좋음), ④쾌락 또한 없다(나쁘지 않음).
두 상황을 비교했을 때, ①고통이 존재하는 상황보다 ③고통이 부재하는 상황은 명백하게 좋다. 반면 ②쾌락이 존재하는 상황보다 ④쾌락이 부재하는 상황은 쾌락이 박탈될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 ④쾌락을 누릴 존재가 없어서 쾌락이 부재하는 상황보다 ②쾌락을 누릴 존재가 있어서 쾌락이 존재하는 상황이 우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X가 존재하는 경우보다 존재한 적이 없는 경우가 언제나 더 낫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베나타는 다음과 같은 유비(類比)를 소개한다. Y와 Z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Y는 ①정기적으로 병에 걸리지만 ②매우 빨리 회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Z라는 사람은 ④빨리 회복하는 능력은 없지만 ③결코 병에 걸리지 않는다. Z가 결코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그에게 좋지만, 빨리 회복하는 능력이 없는 것은 그에게 나쁘지 않다. 그렇기에 Z는 Y보다 항상 더 낫다.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은 대다수가 수용하는 아래의 비대칭성 사례들로 뒷받침된다.[66]
- 재생산 의무의 비대칭성: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을 만들지 않을 도덕적 의무가 있다.[67] 반면 행복한 사람들을 만들 도덕적 의무는 없다. 우리는 고통의 존재가 고통을 경험하는 당사자에게 나쁘고, 고통은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설령 고통의 부재를 기뻐할 당사자가 없더라도 말이다. 반면 우리는 쾌락의 존재가 쾌락을 경험할 당사자에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쾌락의 부재를 경험할 당사자가 없다면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전망적 이익의 비대칭성: 우리가 아이를 만드는 근거로 태어날 아이의 이익을 언급하는 것은 이상하다. 반면 우리가 아이를 만들지 않는 이유로 태어날 아이의 이익을 언급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를 만드는 중요한 도덕적 이유가 되지 않는다. 반면 아이가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를 만들지 않는 중요한 도덕적 이유가 된다. 만일 쾌락의 부재를 경험할 당사자가 없는데도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면, 우리는 극도로 적은 행복이 보장되었더라도 무조건 생명을 만들어야 한다는 중요한 도덕적 의무를 가진다.[68] 그리고 고통의 부재를 경험할 당사자가 없더라도 고통의 부재가 좋은 게 아니라면, 우리는 아이를 만들지 않아야 할 중요한 도덕적 이유를 댈 수 없다.
- 회고적 이익의 비대칭성: 우리는 우리의 결정으로 사람을 존재시킬 경우 그 사람이 처할 상황 때문에 결정을 후회할 수 있다. 우리가 창조한 사람은 불행해질 수 있고, 고통의 존재는 나쁠 것이다. 반면 우리는 우리의 결정으로 사람을 존재시키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이 처할 상황 때문에 후회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 사람은 전혀 존재한 적도 존재할 일도 없기 때문에 행복과 쾌락이 박탈될 일이 없고,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 원거리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부재하는 사람들의 비대칭성: 우리는 어디선가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반면 우리는 어디선가 사람이 없어서 행복을 느낄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에 슬퍼하진 않는다. 우리는 어디선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동정심을 느낀다. 어떤 무인도나 행성에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아서 고통을 겪을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좋다. 왜냐하면 그 좋음을 경험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고통의 부재는 좋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어떤 무인도나 행성에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아서 행복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슬픔을 느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쾌락의 부재는 누군가가 존재해 그 좋음이 박탈될 때에만 나쁘기 때문이다.
베나타는 삶의 질에 대한 사람들의 자기 평가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일상적인 심리 현상을 인용한다.
- 낙관주의 편향[69]: 우리는 우리의 과거·현재·미래를 긍정적 관점으로 왜곡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 적응: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악화되면 좋은 삶의 기대치를 그에 맞춰 낮추고 상황이 호전되지 않아도 이내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다.
- 비교: 우리는 자신의 삶을 평가할 때 다른 이들의 삶을 참고해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만약 모두에게 어떤 똑같은 해악이 있다면, 그것을 해악이라고 평가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베나타는 대표적인 삶의 질 평가 이론들, 쾌락주의 이론, 욕구 충족 이론, 객관적 목록 이론 중 어떤 이론을 채용해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항상 심각한 해악임을 주장한다.[70]
- 쾌락주의 이론에 따르면, 개인의 삶의 질은 개인의 쾌락과 고통 체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인간은 앞서 언급한 심리적 이유(낙관주의 편향, 적응, 비교) 때문에 자신의 삶이 얼마나 많은 불쾌함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인간은 반복적으로 먹고 마심으로써 인생 내내 거의 항상 존재하는 허기와 갈증을 잠깐씩만 해소하며, 딱 기분 좋은 온도라고 느끼는 시간에 비해 훨씬 많은 나머지 시간에는 너무 덥거나 너무 춥다고 느낀다.
- 욕구 충족 이론에 따르면, 개인의 삶의 질은 순전히 개인의 욕구 충족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인생은 충족된 욕구보다 불충족된 욕구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모든 욕구는 그 욕구가 충족되어 잠시 만족하는 시간보다 훨씬 오랜 시간 인내해야 하고, 심지어 '역노화'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영생' 같이 충족이 불가능한 욕구도 있다.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충족된 욕구에 쉽게 적응해 만족감을 잃고 다음 욕구 충족을 갈망하게 된다. 욕구계층이론에 따르면 욕구 충족은 일시적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끊임 없는 불만족 상태"라고 말한 바 있다.
- 객관적 목록 이론에 따르면, 개인의 삶의 질은 개인이 객관적 좋음·나쁨에 얼마나 해당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객관적 좋음·나쁨은 개인의 고락이나 선호와는 무관하다. 객관적 좋음을 나열한 객관적 목록에 해당하는 것을 많이 갖춘 삶이 곧 좋은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객관적 목록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객관적 관점에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객관적 목록은 결국 인간의 기대 한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가령 '240세까지 살기'가 객관적 목록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베나타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사람은 존재하게 됨으로써 존재하지 않았다면 입지 않았을 다대한 해를 입는다.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면 좋음이 박탈될 수 없다. 심지어 일말의 좋음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 인해 박탈될 수밖에 없다.[71] 존재하게 되는 것은 순이익 대신 순손해를 낳는다. 따라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항상 심각한 해악이며, 출산은 항상 잘못이다.[72]
물론 낙천주의자들은 삶에서 좋음과 나쁨의 비중을 비교해 좋음이 나쁨을 능가하는 한 존재시킬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반론에 대해 베나타는 삶에서 좋음과 나쁨은 순서, 강도, 길이에 따라 다르기에 저런 식의 단순 계산은 어렵다고 지적한다. 또한 삶에서 나쁨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면 좋음의 양이 얼마가 되든 나쁨을 능가할 수 없으며, 가령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를 가졌더라도 그것이 말기 암이나 고도 전신 화상 같은 것으로 인한 고통을 상쇄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73]
현재도 지구 각지에는 각종 재난과 기근 등으로 고통받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일부 실시간 통계 이 세상은 최고 특권층 부모가 낳은 아이들조차도 각종 치명적인 범죄, 질병, 재난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설령 치명적인 사고를 모두 피하더라도 결국은 늙고 죽는다. 베나타는 출산에 대해 미래의 자손을 겨냥하는, 총알이 가득 찬 총으로 행하는 러시안 룰렛에 빗댄다. 이 때 총알이 일부만 차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즉 고통의 도구적 가치[74]나 삶의 의미[75] 따위에 호소하더라도, 출산이 자녀로 하여금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부모의 일방적 결정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며 여전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
베나타는 말한다.
선한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그렇게나 노력하면서, 아이들의 모든 고통을 예방하는 확실하면서도 유일한 방법이, 그 아이들을 애초에 태어나지 않게끔 하는 것이란 사실까지는 대부분 깨닫지 못한다. 그런 이들이 그토록 적다는 점은 매우 유별난 일이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은 그 아이들의 부모가 될 뻔한 이들의 이익에 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위해서는 최선의 결정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존재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치열한 고통을 경험할 필요도 없이,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영원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은 그 아이들의 부모가 될 뻔한 이들의 이익에 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위해서는 최선의 결정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존재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치열한 고통을 경험할 필요도 없이,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영원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3.1. 동물·환경 문제
데이비드 베나타·건터 블레이봄·제럴드 해리슨·줄리아 태너 등 반출생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에 대해서도 도의적인 관심을 기울이길 촉구한다. 이들은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큼 파괴적이고 해로운 생명체는 없다고 주장한다.매년 인간을 제외한 수십억의 동물 개체는 그저 식도락 같은 인류의 쾌락을 위해 태어나 육식용 식자재로 소비되고 있으며[76], 의약 연구를 위한 각종 동물실험으로 학대당한 후 아무렇게나 폐기되고 있다. 또한 서식지 파괴 등 각종 환경 파괴와 그에 따른 기후 변화로 인해 무수한 종의 생명체가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다.
이렇듯 인류 문명이 만들어 낸 부조리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그렇기에 반출생주의자들은 그저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 다른 종에 해를 끼치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동물보호 운동가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동물권리와 환경 보존을 위한 가장 확실한 해결책으로 인구 억제가 거론되는데[77], 이는 반출생주의와 어느 정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새롭게 태어나는 인간이 더 적어지거나 완전히 없어질 수 있다면 인간에 의한 다른 종의 피해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아이를 한 명 덜 낳는 것은 환경을 고려하는 다른 활동보다 20배 가량의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있다.연구 자료 관련 기사
반출생주의자들은 동물 또한 원칙적으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본다.# 다만, 수술 전후의 고통이 없는 중성화수술[78]이 아직까지는 불가능하므로, 일단은 동물 복지를 추구하는 선에서 인간에게 의존하는 가축·반려동물 등의 번식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79] 같은 맥락에서 반출생주의자들은 유기동물을 입양하되 일부러 번식시키지는 않는다.
3.2. 오해와 해명
반출생주의자에게 삶이 고통이면 왜 당장 자살하지 않느냐고 묻거나, 반출생주의는 학살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80] 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은 반출생주의를 극단적인 소극적 공리주의(negative utilitarianism)[81]나 친죽음주의(pro-mortalism)[82]로 오해하는 것에서 비롯된다.소극적 공리주의자가 반출생주의를 효용적으로 긍정할 수는 있다.[83] 그러나 소극적 공리주의자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출산을 옹호할 수도 있다.[84] 반출생주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의무론적 입장에서 학살에 반대하고, 자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거나 중립적이거나 조건부적으로만 옹호한다. 반출생주의자로서의 이상적인 행동은 자살이나 학살이 아니라, 당장 더 분명하게 선행으로 여겨지는 반출생주의 관련 계몽과 후원이다.
베나타는 그나마라도 부여할 수 있는 삶의 소소한 개인적 의미마저 박탈하는 죽음 역시 해악이며,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인 것과 별개로 이미 시작된 삶을 지속하는 것보다 당장 중단하는 게 항상 더 나은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친죽음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반출생주의와 별개로 더 강력한 논증이 추가로 요구된다.[85]
이미 시작된 인생을 중단하는 것과 인생을 시작하지 않게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많은 경우 삶에서 최악인 부분은 처음에 있지 않으며[86], 아직 삶에서 그보다 더 나은 부분이 남아 있는 이들은 자살을 유예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설사 삶의 어떤 단계가 매우 나쁘다고 생각하더라도, 죽음을 더 선호할 정도로 충분히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죽음 자체가 심각한 해악으로 여겨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보다 삶이 훨씬 나쁘게 되어야 죽음을 더 선호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극장에 들어가 상영이 시작된 후에야 지루한 영화인 걸 알고 후회하지만 나가지는 않는 것,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이 끔찍한 식단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먹는 것과 같다. 과거에 대부분의 노예가 자살하지 않았고 노예제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해서 노예제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개인에게 죽음이 생존보다 더 나은 경우도 있지만, 죽음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해악이다.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에 따르면, 어떤 유정적 존재를 그의 동의 없이 죽이는 게 그에게 좋다는 판단이 틀린 경우 그에게 심각한 해악을 가하게 될 위험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설령 당사자가 일절 고통과 공포를 느낄 수 없게끔 자는 사이에 몰래 마취를 해서 죽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살해 행위는 정당화가 어렵다.
죽음이 실제가 어떻든[87] 일반적으로 매우 두려운 해악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필멸자를 낳으면 안 될 이유가 된다. 자살은 고도로 진화한 생존 본능 때문에 매우 괴롭고 힘이 드는 일이며, 안락사 역시 제한적이다. 또한 주변인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주기도 한다. 이미 죽어가는 중인 자신도 죽기 싫으면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새로이 죽을 타인을 만드는 것은 부도덕하다. 그리고 심대한 고통이나 자살 충동을 겪는 사람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고통받게 된 개인이 자살하면 그만이니 그럴 위험을 감수하고 낳아도 된다는 것 역시 부도덕하다.[88]
우생학이나 에코 파시즘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반출생주의는 번식해도 되는 우월한 조건을 가진 사람(동물)과 번식하면 안 되는 열등한 조건을 가진 사람을 정해서 차별해야 한다는 사상이 아니며, 공리주의적 희생 강요를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단지 미래 세대의 희생 가능성을 담보로 하는 번식과 이를 당연시하는 행태에 대해, 세대 이기주의(집단 이기주의)에 기반한 도덕적 잘못이라고 비판할 뿐이다.
개인의 비출산에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그 이유에 반출생주의가 포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때 비출산 이유로 개인이 임의로 설정한 부모 자격 요건 불충족을 제시할 경우, 해당 자격 요건 충족 시 출산 가능하다는 의미를 내포하므로 반출생주의보다는 모종의 차별주의적 사고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3.2.1. 유비추론적 설명
다음은 반출생주의가 곧 자살주의는 아니라는 것에 대한 유비적 설명이다.3.2.1.1. 원치 않는 가석방
1. 스무 살에 무고하게 무기징역형으로 감옥에 갇혔던 로버트라는 사람이 있었다.
1. 로버트는 20년의 형기를 살면서 감옥에서의 생활에 만족했으며 심지어 감옥 밖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사회적 지위와 친구들과의 우정 그리고 안정감을 얻었다.
1. 그런데 갑자기 로버트의 가석방이 결정됐다. 로버트는 이미 바깥 세상보다 감옥 안에서 산 시간이 더 길기도 했고 감옥에서의 생활에 적응했기에 그냥 감옥에서 계속 살기를 원한다고 호소했다.
1. 그런데도 로버트는 강제로 가석방됐다.
1. 바깥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던 로버트는 자살했다.[89]
가석방을 원하지 않는 로버트의 비유에서, 무고하게 투옥된 것은 강요된 출생에 해당된다. 그리고 감옥은 삶, 석방은 죽음에 해당된다.1. 로버트는 20년의 형기를 살면서 감옥에서의 생활에 만족했으며 심지어 감옥 밖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사회적 지위와 친구들과의 우정 그리고 안정감을 얻었다.
1. 그런데 갑자기 로버트의 가석방이 결정됐다. 로버트는 이미 바깥 세상보다 감옥 안에서 산 시간이 더 길기도 했고 감옥에서의 생활에 적응했기에 그냥 감옥에서 계속 살기를 원한다고 호소했다.
1. 그런데도 로버트는 강제로 가석방됐다.
1. 바깥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던 로버트는 자살했다.[89]
즉, 반출생주의자는 "감옥은 안 좋으니까"(염세주의) "거기에 사람 집어넣지 말자"(반출생주의)라고 주장할 뿐, 이러한 주장이 "모두를 감옥에서 해방시켜야 한다"(학살) 혹은 "탈옥해야 한다"(자살)라는 새로운 주장으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출생주의자는 단지 사람을 무고하게 투옥시키는 것(출산)부터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잘못이라고 지적할 뿐이다.
3.2.1.2. 납치 후 고속도로
원문은 로렌스 안톤이 게시한 반출생주의 핸드북의 17번째 변명에서 나온다.밤길을 가는 도중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타나 당신을 납치해서 봉고차 뒷좌석에 태운다.
당신은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는데 고속도로 한복판을 빠르게 달리고 있다.
당신은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고통스럽다고도 호소한다.
납치범들은 '차 문은 안 잠겨 있으니까. 고통스럽고 싫으면 뛰어내려라. 우리가 한 일(납치)이 잘못이라고 생각해도 뛰어내려라'라고 한다.
당신은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는데 고속도로 한복판을 빠르게 달리고 있다.
당신은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고통스럽다고도 호소한다.
납치범들은 '차 문은 안 잠겨 있으니까. 고통스럽고 싫으면 뛰어내려라. 우리가 한 일(납치)이 잘못이라고 생각해도 뛰어내려라'라고 한다.
이 비유에서 납치는 곧 출산을 의미하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은 인생을, 뛰어내리는 것은 자살을 의미한다.
즉, 반출생주의자는 "납치하지 마라"(반출생주의)라고 주장할 뿐, 이러한 주장이 "고통스러우면(염세주의), 뛰어내려라(자살)" 내지는 "납치가 부도덕한 행위라면(반출생주의), 뛰어내려라(자살)" 식의 새로운 주장으로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출생주의자는 단지 사람을 납치하는 것(출산)부터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잘못이라고 지적할 뿐이다.
4. 비판
-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 대한 리뷰와 답변 링크 모음(UCT)
- [요약번역] 데이비드 베너타 "여전히 결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내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 [논문번역][회원기여] "인식할 수 있는 모든 해악: 반출생주의에 대한 추가적 옹호"
정리하자면,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혹은 가치론적 비대칭성)은 1. 재생산 의무의 비대칭성, 2. 전망적 이익의 비대칭성, 3. 회고적 이익의 비대칭성, 4. 원거리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부재하는 사람들의 비대칭성이라는 네 가지 비대칭성 사례들로 뒷받침된다. 이로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항상 해악”이라는 중간 결론이 도출되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베나타는 반출생주의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비대칭성 논증의 틀이다.
많은 비평가들은 베나타의 비대칭성 논증에서 제기되는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일부 비평가들은 네 가지 비대칭성 중 전부 혹은 일부가 가치론적 비대칭성(axiological asymmetry) 이외의 원칙들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Harman 2009, 781; Bayne 2010, 50–52; Metz 2011, 241–243). 또 다른 이들은 재생산 의무와 관련한 비대칭성이 문제적이라고 주장하거나(Bradley 2013), 가치론적 비대칭성에 기반한 비교 평가 자체가 모순적이라고 지적한다(Bradley 2010). 반면 후미타케 요시자와는 설령 베나타의 논증에서 제시되는 모든 명시적 전제를 수용하더라도 반출생주의적 결론이 도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4.1. 엘리자베스 하만의 비판
Harman, E. "Critical Study: David Benatar's 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인생이 그렇게 끔찍하다면 반출생주의자는 왜 자살하지 않고 삶을 살고 있는가? 아마 반출생주의를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가질 의문점일 것이다. 이 문서의 상단에 언급된 쇼펜하우어조차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으나 정작 자신은 18세기에 72세까지 장수했다.
데이비드 베나타는 반출생주의자가 자살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저서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였고, 나무위키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유튜버들이 비유를 들어가며 자신들의 선택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하만이 보기에 이같은 설명은 부족하다. 반출생주의의 논리가 옳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자살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반출생주의의 핵심 논거는 1.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과 2. 삶의 질 논증이다. 첫번째 논거가 자살의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그의 말은 우리가 출산을 할 때, 그 사람이 겪게 될 좋은 경험들(good experiences)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좋은 경험들이 발생하지 않는 것에 나쁜 점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출산에 관한 관점은 자살을 할지 말지 고민할 때 앞으로 누릴 좋은 경험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베나타는 자신의 두번째 논거에서도 우리가 자살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어떤 삶은 시작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나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삶이 계속 유지할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존재하는 사람은 계속 존재하고자 하는 이익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베나타의 두 번째 논거가 성공적이라면, 그 결론은 우리가 자살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는 우리의 삶이 단지 시작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나쁘지만 그렇다고 계속할 가치가 없을 정도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삶이 끔찍하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의 삶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고려했을 때 전체적으로 매우 나쁘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우리 각자는 자살을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처럼 보인다. 베나타가 제시하는 유형의 논증들은, 대부분 우리에게 있어 미래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똑같이 유효하게 작동할 것 같다. 그가 주장하는 바 중에, 삶의 좋은 부분이 대체로 나중에 오고 나쁜 부분이 먼저 온다는 내용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더 나은 부분을 놓치는 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아마도 우리는 타인을 향한 의무 때문에 자살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고려할 때, 만약 베나타의 두 번째 견해에 대한 논증이 성공한다면, 우리에게는 자살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된다.
4.2. 후미타케 요시자와의 비판
후미타케 요시자와. (2021). 베나타의 비대칭성 논증이 내포하는 딜레마. Ethical Theory and Moral Practice, volume 24, 529-544요시자와에 따르면, 베나타의 비대칭성 논증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간극(gap)이 존재한다. 네 가지 비대칭성은 삶 전체의 평가와 관련된 것인데, 가치론적 비대칭성은 고통과 쾌락 같은 삶의 일부 부분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베나타는 삶의 부분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삶 전체의 평가와 관련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하지만, 모두 (반출생주의를 옹호하기엔) 적절하지 않아 딜레마가 발생한다.
첫 번째 선택지는 베나타가 하는 것처럼 삶의 부분에 가치론적 비대칭성을 적용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반출생주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가치론적 비대칭성이 이 방식으로 적용될 경우, 삶 전체에 관련된 널리 받아들여진 네 가지 비대칭성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다른 선택지는 가치론적 비대칭성을 삶 전체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 비대칭성은 설명력을 갖추어 정당화될 수 있지만, 반출생주의 결론으로는 이어지지 않게 된다.
요시자와는 베나타의 비대칭성 논증에 존재하는 심각한 간극을 자세히 밝힌 다음, 그 논증이 앞서 말한 딜레마로 이어진다는 점을 보인다. 결국 베나타의 기본 전제들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베나타의 비대칭성 논증에 동의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없음을 주장한다.
4.2.1. 간극
(i) 재생산 의무의 비대칭성: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을 만들지 않을 도덕적 의무가 있다.반면 행복한 사람들을 만들 도덕적 의무는 없다. 우리는 고통의 존재가 (고통을 경험하는 당사자에게) 나쁘고, 고통은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설령 고통의 부재를 기뻐할 당사자가 없더라도 말이다). 반면 우리는 쾌락의 존재가 (쾌락을 경험할 당사자에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쾌락의 부재를 경험할 당사자가 없다면)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인용문에서 강조된 두 쌍의 표현에 주목하자. 하나는 “고통은 나쁜 것”과 “쾌락은 좋은 것”이라는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 받는 사람을 존재하게 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와 “행복한 사람을 존재하게 할 의무가 없음”이라는 표현이다. 전자는 삶의 일부 요소에 대한 가치론적(존재론적) 평가인 반면, 후자는 삶 전체에 대한 도덕적 의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고통과 쾌락이라는 삶의 부분적 평가가 어떻게 삶 전체의 평가와 관련되는지는 여기에서 명시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고통 받는 사람과 행복한 사람의 삶이 모두 고통과 쾌락이라는 요소를 포함할 수 있음에도 이 점은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다른 세 가지 비대칭성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이들 모두 삶 전체에 관한 것이지만, 이들을 설명한다고 주장되는 가치론적 비대칭성(axiological asymmetry)은 고통이나 쾌락 같은 삶의 부분적 요소들에 적용된다. (ii) “그 아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것이다”와 “그 아이는 고통 받을 것이다”, (iii) “고통 받는 아이”와 “행복한 아이”, 그리고 (iv) “고통 받는 먼 곳의 사람들”과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세 쌍의 표현을 상기해보자. 요점은 베나타가 네 가지 비대칭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가치론적 비대칭성은 삶의 부분들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지침은 제시하지만, 삶 전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시자와가 베나타의 논증에서 발견한 간극이다.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삶의 부분들에 대한 평가로부터 삶 전체에 대한 평가를 도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체로서의 삶” 평가(as-a-whole evaluation)를 얻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가치론적 비대칭성에 근거하여 삶의 부분들을 비교 평가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삶 전체를 평가하는 방법이다. 베나타는 원래 이러한 방식으로 “해로운 탄생(harmful birth)” 결론을 이끌어낸다. 둘째, 먼저 비교가 아닌 방식으로 삶 전체를 평가한 뒤(비교 없이 삶 전체의 가치를 판단), 그 다음에 가치론적 비대칭성에 따라 시나리오들을 비교 평가하는 방법이다.
아래에서는 이 두 가지 평가 방식의 차이가 평가 과정에서 순서의 차이에 있음을 자세히 설명한다. 즉, 전자의 방식은 “비대칭적 비교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전체 평가를 하는” 순서이며, 후자는 “전체 평가를 먼저 하고, 그 다음 비대칭적 비교를 하는” 순서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이 간극을 메울 수는 있지만, 동시에 베나타의 비대칭성 논증에는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모순)를 제기한다.
4.2.2. 비대칭적 비교를 먼저 하는 경우
베나타의 논증에서 ‘가치론적 비대칭성’은 해악과 이익을 비교하는 독특한 방식이다.해악이 있는 경우 | 존재하는 것이 비존재보다 나쁘다(불리하다). |
이익이 있는 경우 | 존재하는 것이 비존재보다 결코 낫지는 않다(이익이 존재해도 비존재에 비해 유리하지 않다). |
먼저, 이 비대칭적 비교를 ‘인생의 부분(예: 한 번의 고통, 한 번의 쾌락)’ 수준에서 수행해 보겠다. 여기서 “비대칭적 비교를 먼저 한다”는 말은, 각각의 고통과 쾌락 요소들을 비존재 상태와 비교해서 누적 평가한 뒤, 그 결과로 인생 전체가 비존재보다 어떤지 평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비대칭적 비교의 적용 결과:
2. 쾌락(이익): 인생에 아무리 많은 즐거움이 있어도, 그 쾌락 부분은 비존재 상태와 비교했을 때 특별히 유리한 점이 되지 않는다. 즉, 누군가가 차은우의 외모와 만수르의 부를 지니고 태어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린다 해도 "이 인생이 비존재보다 낫다"라고 판단할 수가 없다.
이렇게 각각의 부분을 비교해보면 인생 전체는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 만약 인생에 조금이라도 해악이 있다면, 그 인생은 비존재보다 불리하다. 쾌락이 아무리 많아도 그 불리함을 상쇄하지 못한다.
- 설사 인생에 해악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쾌락이 아무리 많아도 그 인생은 비존재보다 '더 나은' 인생이 되지 못한다. 최선의 경우 '비존재와 대등한(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 그러나 현실적으로 고통이 전혀 없는 인생은 존재하기 어렵다. 결국 모든 인생은 비존재보다 불리하게 된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해롭다는 반출생주의적 결론에 도달함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논리로 나아가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네 가지 비대칭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원래 베나타는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이 네 가지 널리 수용된 비대칭성을 잘 설명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방식으로 비교를 먼저 해버리면 결과적으로 모든 삶이 해롭다는 극단적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 비대칭성과 어긋나버린다. 각각의 비대칭성 사례와 이 논리에 따라 발생하는 비직관적 설명을 살펴본다.
- 재생산 의무의 비대칭성
우리는 비참한(불행한) 삶을 낳지 않을 의무가 있지만, 행복한 삶을 낳을 의무는 없다. 즉, 불행한 아이를 낳지 않도록 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로 여기지만, 행복한 아이를 낳는 것은 의무 사항이 아니다.
모든 삶이 해롭다면, 비참한 삶이든 행복한 삶이든 마찬가지로 비존재보다 나쁘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단순하다. 어떤 삶도 낳지 않는 것이 항상 옳다. 즉, 비참한 삶은 물론이고, 행복하다고 여겨지는 삶조차 낳지 않는 것이 옳다. 이때는 “행복한 사람을 낳을 의무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행복한 사람을 낳아도 안 된다”는 강한 결론이 나온다. 이는 원래 상식적 이해(비참한 삶을 낳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는 당연하지만, 행복한 삶에 대해서는 의무 없음)가 훨씬 더 극단적으로 치우친 모습이어서 상식적 비대칭성의 설명력을 상실한다.- 전망적 이익의 비대칭성
아이를 낳는 이유로 “그 아이가 이익(행복)을 얻을 것”을 드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다.[90] 반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로 “그 아이가 고통받을 것”을 드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모든 삶이 비존재보다 해롭다면, 심지어 행복한 삶도 불리하다. 따라서 "내가 낳을 아이는 행복할 것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도 이상하지 않게 된다. [91] 이익(쾌락)이 있어도 그 인생은 여전히 비존재보다 불리하기 때문이다. 즉, 이익이 존재해도 아무런 긍정적 근거가 되지 못하므로,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어떤 긍정적 이유도 제시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경우에 낳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원래 생각하던 “이익을 낳을 이유로 드는 것은 이상하다”는 상식적 판단과 완전히 충돌한다.- 회고적 이익의 비대칭성
고통받는 아이를 낳았을 경우 그 결정을 후회하는 것은 당연하다. 행복한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아이를 위해 후회하는 일은 없다.(=태어나지 않은 행복한 사람을 위해 후회하지 않는다.)
모든 삶이 비존재보다 해롭다면, 행복한 아이를 낳는 것도 해로운 행위다. 그렇다면 고통 받는 아이를 낳았을 때뿐만 아니라, ‘행복한’ 아이를 낳았을 때도 사실은 후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아무리 행복해도 비존재보다 불리한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한 아이를 낳지 않은 경우에도 전혀 후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아이를 낳았다 한들 결국 해로운 상황(비존재보다 못한 상태)을 만들 뿐이므로, 낳지 않은 것이 훨씬 낫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고통 받는 아이를 낳는 경우”를 넘어, 어떤 아이를 낳았든 그 결정을 후회해야 하며, 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하지 않게 된다. 이는 원래의 상식적 태도(고통 받는 아이일 경우만 후회, 행복한 아이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음)와 전혀 맞지 않는다.- 원거리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부재하는 사람들의 비대칭성
우리는 어디선가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반면 우리는 어디선가 사람이 없어서 행복을 느낄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에 슬퍼하진 않는다.
모든 삶이 비존재보다 해롭다면, 고통 받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히 슬픈 일이다. 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두고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만약 그들이 존재했다면 비존재보다 불리한 상태를 겪었을 테니,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기뻐해야 할 수도 있다. 즉, 원래는 “행복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그냥 슬퍼할 필요가 없는 중립적인 사실 정도로 봤는데, 여기서는 “행복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음”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사람이 없어도 굳이 슬퍼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다”라는 상식적 태도와 어긋난다.종합하자면, 만약 베나타가 간극을 메우는 첫 번째 방식을 택한다면,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은 다른 네 가지 비대칭성 사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뒷받침되지 않는다. 논리 전개의 결과 스스로 세웠던 상식이라는 전제를 공격하여 파괴하는 것이다.
4.2.3. 전체 평가를 먼저 하는 경우
이에 반해, 삶 전체를 평가하는 두 번째 방식은 먼저 비교 없이 전체로서의 삶을 평가한 뒤, 그 다음에 비대칭적 비교를 수행하는 것이다.전체 삶을 평가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기준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혹은 유익함)과 고통(혹은 해악)을 비교하는 공리주의적 방법이다. 삶에서 겪는 모든 즐거움이 해악보다 많다면 그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베나타(2006, 45)는 이러한 단순 계산에 반대한다.
사실 우리의 상식적 설명을 숙고해보면, 엄격한 계산 방법은 필수적이지 않다. 더 나아가 각 전체 삶의 가치를 숫자로 할당할 필요도 없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참한 삶과 행복한 삶을 존재하게 하는 것의 도덕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고려해보자. 상식적 대답은 “우리는 비참한 삶을 존재하게 하지 않을 도덕적 의무가 있으며, 행복한 사람을 존재하게 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이 답변이 바로 재생산 의무의 비대칭성이다. 또한 가치론적 비대칭성이 답해야 할 질문은 “왜 우리는 비참한 삶과 행복한 삶을 존재하게 하는 데 있어 이러한 의무를 갖는다고 생각하는가?”이다. 이 질문을 생각할 때, 우리가 비참한 삶과 행복한 삶의 개념 자체를 정교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또한 우리 대부분은 대략적으로라도 한 삶 전체가 얼마나 좋은지 또는 나쁜지에 대한 개념을 쉽게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이 항상(비교적으로) 해롭다는 주장을 들을 때 놀라는 이유 중 하나이다.
어쨌든 우리의 일상적 관념으로 볼 때, 비참한 삶도 존재하고 행복한 삶도 존재한다. 이를 바탕으로 재생산의무에 대해 가치론적 비대칭성을 적용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92]
시나리오 A (X가 존재) | 시나리오 B (X가 비존재) |
①비참한 삶의 존재 (나쁨) | ③비참한 삶의 부재 (좋음) |
②행복한 삶의 존재 (좋음) | ④행복한 삶의 부재 (나쁘지 않음) |
시나리오 A를 선택하면, 사람 X는 존재하게 되고, X의 삶은 해로운 부분과 이로운 부분을 모두 포함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삶의 부분들을 토대로 우리는 X의 삶 전체가 비참한 삶인지, 행복한 삶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만약 X의 삶이 비참하다면, 그 삶은 비교 없는(non-comparative) 관점에서 나쁜 것(1)으로 평가되며, 그 부재(3)에 비해 비교적으로 불리한 것으로 평가된다. 만약 X의 삶이 행복하다면, 그 삶은 비교 없는 관점에서 좋은 것(2)으로 평가되지만, 그 부재(4)에 비해 비교적으로 유리하지 않은(non-advantageous) 것으로 평가된다.
(1)에서 “나쁘다(bad)”는 평가는 “존재하게 하지 않을 의무(duty to avoid)”와 연결된다. 반면 (2)에서 “좋다(good)”는 (4)가 “나쁘지 않다(not bad)”일 뿐 “나쁘다(bad)”가 아니므로 “존재하게 해야 할 의무(duty to do)”와 연결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재생산 의무의 비대칭성에 대한 합당한 설명이다. 다른 세 가지 비대칭성도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으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중요한 것은 이같은 설명들에서는 삶의 부분과 전체 사이에 간극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나타의 가치 평가 방식과 먼저 삶 전체를 평가하는 대안적 방식의 차이는 평가 단계의 순서 차이일 뿐이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베나타는 “비대칭적 비교를 먼저 하고, 전체로서의 삶을 그 다음에 평가하는” 순서를 통해 “존재하는 것은 항상 해롭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반면 요시자와는 “전체로서의 평가를 먼저 하고, 비대칭적 비교를 그 다음에 하는” 순서를 취한다. 특별한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4.1.2.절에서 간극을 지적할 때 이미 밝혔듯, 최종 설명 단계에서는 어쨌든 삶 전체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차이점은 단지 요시자와가 제안하는 대안에서는 비대칭적 비교 이전에 X의 삶을 전체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 후 (1)과 (3), (2)와 (4)를 비교할 때, X의 삶이 전체적으로 나쁠 경우 비존재에 비해 불리한(해로운) 것으로 평가되며, X의 삶이 전체적으로 좋을 경우 비존재에 비해 유리하지 않은(이익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식으로 비대칭성을 설명한다면, “해로운 탄생” 결론이나 반출생주의 결론을 낳지 않는다. 우리에겐 불리한 삶을 만들지 않을 의무가 있지만, 유리하지 않은(non-advantageous) 삶에 대해서는 만들거나 만들지 말아야할 어떤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4.2.4. 결론
베나타의 비대칭성 논증에서 비롯되는 딜레마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 논증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전체로서의 가치를 얻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가치론적 비대칭성에 기반한 비교를 한 뒤에 삶 전체를 평가하거나, 그 전에 삶 전체를 평가한 뒤에 비교를 할 수도 있다.비교를 먼저 한 뒤 전체 평가를 하는 경우에는, 비존재에 비해 유리하지 않은 여러 이익 부분들이 있더라도, 해로운 부분들만이 전체 평가에 반영되므로 “존재하는 것은 항상 해롭다”는 베나타의 ‘해로운 탄생(harmful birth)’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가치론적 비대칭성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네 가지 비대칭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지를 받지 못한다.
다른 한편으로, 전체 평가를 먼저 하고 난 뒤 비대칭적 비교를 하는 경우에는 네 가지 비대칭성이 설명되므로 가치론적 비대칭성이 지지를 받지만, 이 경우에는 해로운 탄생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가치론적 비대칭성을 삶 전체에 적용하면 해로운 부분과 이로운 부분 모두 비비교적(non comparative) 전체 평가에 고려되므로, 불리한 삶과 유리하지 않은 삶 모두, 비존재와 비교해서 (존재를 반드시 선택하거나 권장할만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비슷한 지위를 갖게 된다.
결국 베나타 논리의 딜레마는 다음의 2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1. 네 가지 비대칭성 사례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에 가치론적 비대칭성의 근거가 사라진다 or 2. 가치론적 비대칭성이 반출생주의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베나타의 논증이 명시적으로 전제하는 모든 사실들을 받아들여도 이러한 딜레마는 발생한다. 따라서 반출생주의 논증은 타당하지 않다.
5. 관련 인물
해당 인물의 전반적인 언행 또는 작품 내용이 범인간적 차원에서 출산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선별적 출산 옹호가 아닌 경우)에 한하여 등재 바랍니다. 본 문단은 본 문단에 등재된 인물이 반출생주의자임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 독일 철학자. 반출생주의로 해석되는 언급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본능적 욕망으로 인해 고통이 생겨나고, 존재는 고통으로 가득하다. 세상은 쾌락보다 고통이 더 많고, 쾌락이 고통을 상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인생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며,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93]에 굴복하여 아이를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며 부도덕하다. 따라서 삶은 무의 축복받은 고요를 쓸데없이 방해하는 삽화(揷話)로 볼 수 있다. 유일한 행운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94]생식 행위가 어떤 욕구나 성적 쾌락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고 합리적인 숙고에 의해 일어난다고 한번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인류가 과연 존속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히려 태어나는 세대를 가엾이 여겨 생존이라는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하지 않을까? 또는 적어도 냉혹하게 그런 짐을 부과하는 것을 꺼리지 않을까?[95]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태어났다면 최대한 빨리 죽는 것이 차선이다."
정작 본인은 18세기에 72살까지 살긴 했다.- 데이비드 베나타(1966~):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96]. 그는 사회철학·응용윤리학·법철학·종교철학 분야 등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생식 윤리 및 의료 윤리, 그리고 인간 조건 등에 관하여 독특하면서도 정교한 논증을 담은 다수의 논문과 책을 써 왔다.[97] 베나타는 사상사에서 파편화 상태였던 반출생주의 통찰을 하나의 엄밀한 논증으로 체계화한 최초의 철학자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학술지와 매체에서 진지하면서도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인터뷰
- 에밀 시오랑(1911~1995): 루마니아 출신 프랑스 수필가, 철학자. 그는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출생주의적 발언을 남겼다.#,#2내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알아버렸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혼, 가족, 더 나아가 모든 사회 규범에 대한 내 두려움은 거기서 온다. 자기 자신의 결함을 자식에게 전달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겪었던 시련을, 어쩌면 더 지독한 시련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은 범죄 행위이다. 내 불행과 내 고통을 이어받을 사람을 낳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부모들이란 모두 무책임한 자들이거나 살인자들이다.[102]
- 페테르 베셀 삽페(1899~1990): 노르웨이 작가. 그는 인간의 의식이 과잉 진화한 탓에 지나친 인식 능력을 지니게 됐고, 그 탓에 존재하지 않는 정의와 의미에 대해 망상하며 버티는 비극적인 존재라고 파악했다. 그리고 이런 부자연스러운 현실 왜곡과 인간 초월에 대한 갈구를 끝낼 방법은 출산을 회피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에세이 《마지막 메시아》참고. 그는 두 번 결혼했지만 아이는 갖지 않았다.이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것은, 불난 집에 장작을 넣는 것과 같다.동전은 심사숙고 후에야 거지에게 주어지지만, 아이는 고민 없이 잔혹한 우주에 내던져진다.
- 테오필 드 지로(1968~): 벨기에 작가, 사회운동가.[103] 동지들과 함께 '비부모의 날'을 지정해 기념했다. 그는 태어나지 않을 권리, 그리고 이것이 침해될 경우 차선으로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이를 낳는 것 대신 입양을 권한다. 그의 저서 《De l’impertinence de procréer(The Impertinence of Procreation)》, 《L'art de guillotiner les procréateurs: Manifeste anti-nataliste(The Art of Guillotining Procreators: An Anti-Natalist Manifesto)》는 anti-natalism라는 단어가 통용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그의 웹사이트에서 그의 작품을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 카림 아케르마(1965~): 독일 철학자. 그는 인간이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선한 창조주를 가정하여 인위적인 고통 생산으로부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더 이상 무리라고 주장한다. 저서로 《Antinatalismus: Ein Handbuch(Antinatalism: A Handbook)》이 있다.
- 토머스 리고티(1953~): 미국 공포 소설 작가. 그는 《인간종에 대한 음모: 공포의 모략》에서 부모는 자신이 살아갔다는 증거를 남긴다는 허황된 꿈에 대한 이기적인 강박이 있거나, 아이들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종의 사치품·장신구 등으로 취급한다고 말한다. 그는 재생산이 사회인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혈제(血祭)와 같으며, 모든 부모는 그 손에 피를 묻히고 있다고 말한다.
- 훌리오 카브레라(1944~): 아르헨티나 출신 브라질 철학자. 그는 비존재를 막연히 나쁘게 보는 긍정적 윤리의 모순을 지적하며, 보다 도덕적 일관성이 있는 '부정적 윤리(negative ethics)'를 제시한다.블로그 그는 인간의 삶은 구조적 부정성으로 인해 여러 고통 요소를 지니고, 살면서 누군가를 조작하고 해를 끼칠 수밖에 없기에 근본적으로 도덕적 실격 상태라고 본다. 또한 사람들이 아이들을 단순히 미적 대상으로 여기며, 아이는 부모를 위해 구조적으로 부정적인 세상에 던져진다고 본다. 그리고 아이를 만드는 행위는 최악의 가해 행위이자 자율성 훼손 행위라고 주장한다.
- 쇼나 시프린: UCLA 철학 교수. 시프린은 출산이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익과 해악의 공약불가능성(통약불가능성)과 비대칭성을 들어 논증한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생물학적 부모에게 출산의 부정적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을 도덕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104]
- 알 마아리(أبو العلاء المعري, 973~1057): 이슬람 황금기가 끝나갈 무렵에 활동했던 아랍 고전 시인, 염세주의적 자유사상가. 그는 반종교적·금욕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채식주의(비건)와 비출산을 권했으며, 이를 내포하는 비가(悲歌) 등을 남겼다. 그의 자작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이것은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지었으나 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짓지 않은 죄다.
- 오토 바이닝거(1880~1903): 오스트리아 철학자. 그는 《성과 성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모든 형태의 다산은 혐오스럽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은 인류종의 연속을 제공할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 어떤 이차적인 이유로 아이를 낳아 (...) 인간성의 한계 속으로 한 존재를 끌어들이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
- 미셸 옹프레(1959~): 프랑스의 철학자. 테오필 드 지로와 달리 'anti-natalism'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확인된 바 없지만, 저작을 보면 테오필 드 지로와 사상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쾌락주의적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먼저 요청한 적 없는 사람에게 존재를 포함한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오직 가장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들의 미래를 볼 수 있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들에게 내리는 사형 선고에 서명하면 발생하는 결과에 대해 궁금해할 수 있다.
-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 독일의 시인. 자신이 반출생주의자라고 단언하지는 않았지만 위에도 적힌 "물론 가장 좋은 거야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라는 말을 남겼다. 생전 결혼은 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 자코모 레오파르디(1798~1837): 위에서도 언급된 "태어난 생물에게 생일은 한탄해야 하는 날이다."와 같은 반출생주의적 문장을 남겼다.
- 주나 반스(1892~1982): 미국의 작가. 그녀의 삶을 다룬 제임스 B. 스콧의 저서 《Djuna Barnes》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삶과 삶의 영속은 오류다. 이 오류는 살게 되어, 그 후 출산을 통해, 오류를 심화시키고 더 많은 비극과 고통을 생산한다.삶이 고통임을 고려하면, 출산은 최악의 범죄고, 인류의 멸종을 촉진하는 동성애는 우위점이 있는 좋은 생활방식 같다.
- 사뮈엘 베케트(1906~1989): 아일랜드의 작가. 존 칼더가 저술한 《The Philosophy of Samuel Beckett》에 따르면, 그의 몇몇 작품에서 부모를 비판하는 인물이 등장하고, 자식을 원한 적이 있었냐는 질문에 대해 "없다. 그것이 내가 자랑스러워 하는 것 중 하나다."라고 답한 바 있다.#
- 케르테스 임레[106](1929~2016): 헝가리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자, 홀로코스트 생존자.# 그의 소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에 대한 작품 해석은 다음과 같다. 케르테스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의 죽음에 대한 위령 기도를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신의 명령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는 홀로코스트 같은 비인간적 실체를 허락했음에도 여전히 그러한 비인간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겪은 비극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없으므로 인류 역사의 지속 가능성인 생식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 페르난도 발레조(1942~): 콜롬비아의 소설가, 영화 제작자, 수필가. 그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사람을 평화로운 비존재로부터 빼낼 권리는 없다.#
- 마루야마 겐지(1943~): 일본의 작가. 국내에도 번역된 자신의 산문집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 쇼펜하우어와 유사한 염세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그는 생명에게 냉혹한 이 세상이 곧 지옥이며, 비참하고 연약한 생명끼리 추악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옥에 자식을 태어나게 하는 부모의 이기심과 무책임함, 이를 미화하는 사회적 세뇌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 레스 나이트(1947~): 미국의 환경운동가. 그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들을 위해, 사람들이 자발적 인류 멸종 운동(Voluntary Human Extinction Movement, VHEMT)#에 동참하길 원한다. 참여 방법은 그냥 비출산을 다짐하는 것이다.
- 잉그리드 뉴커크(1949~): 세계 최대 동물 보호 단체 PETA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자 대표. 그는 스스로 불임수술을 받았으며,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나는 단지 아이를 갖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아이를 갖는 것에 반대한다. 순종의 인간 아기를 갖는 것은 순종의 개를 갖는 것과 같다. 이것은 허영, 인간의 허영에 불과하다.#
- 로버트 스미스(1959~): 영국 록 밴드 더 큐어의 메인 보컬. 그는 결혼했지만 자녀를 가지지 않았으며,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아이를 만들지 않은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이 점에 있어 내 마음은 변한 적이 없다. 나는 태어나기를 바란 적 없고, 타인에게 삶을 강요하는 것을 거부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끔찍한 일이다. 삶의 허무함과 존재의 무의미함을 말하면서 가족을 만들 수는 없다.#
- 아만다 올판 수크닉(1983~): 반출생주의 국제 비정부 단체 Antinatalism International의 설립자 중 한 명이자 영화 제작자, 조각가.
- 이한(이민열, 1978~):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 교수, 변호사, 시민교육센터 대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서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철인왕은 없다》, 《중간착취자의 나라》, 《삶은 왜 의미 있는가》,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이것이 공부다》, 《너의 의무를 묻는다》, 《철학이 있는 콜버그의 호프집》, 《탈학교의 상상력》, 《학교를 넘어서》등이 있다. 역서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자유의 법》, 《법복 입은 정의》, 《사치 열병》, 《포스트민주주의》, 《계급론》, 《성장을 멈춰라》등이 있다. 그는 베나타의 논증을 검토했을 때 유의미한 결함을 찾지 못하였으므로, 반출생주의를 잠정적인 진리로 받아들인다고 댓글로 답한 바 있다.
- 마광수(1951~2017): 대한민국의 교수, 국문학자, 작가. 1997년의 시 《낳은 죄》 등에서 출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가족 관계가 가진 치명성을 지적하며 여러 차례 탈가족주의, 철저한 개인주의를 주장한 바 있다.#
- 김영하(1968~): 대한민국의 소설가. 그는 《글쓰기의 최소원칙》에 수록된 김수이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허무주의적 관점을 드러내며 30대 초반에 비출산을 결심했음을 밝힌 바 있다.[108] 또한 그는 그의 소설 《작별 인사》에서 작가의 말을 통해 작중 '달마'의 말[109]은 데이비드 베나타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참고했음을 밝혔다. 다만, 직설적으로 출산이 잘못이라고 선언한 적은 확인된 바 없기 때문에 반출생주의자로 단언할 수는 없다.
- 리 코토미(리 친펑)(1989~): 반출생주의 작가로 소개되었다.
- 라파엘 새뮤얼(1992~): 인도의 남성으로 동의 없이 자신을 낳은 것으로 부모를 고소해 화재가 되었다.
- 황지운(1995~2018): 사회운동가. 그는 Efilism 커뮤니티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노르웨이의 스발바르를 근거지로 하여 무비자·무심사 난민 커뮤니티인 'Refugee Island'를 창설했고트위터 게스트 칼럼, 2017년 9월 The Antinatlism Magazine를 창간했으며, 2018년 5월 프라하에서 개최된 반출생주의 국제학술대회 'Anti-Natalism Under Fire'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2018년 본인의 신념인 친죽음주의의 실천을 위해 자살했다.논문 개인 웹사이트 @ 추모영상 추모글
6. 관련 매체물
7. 관련 웹사이트
7.1. 국문 웹사이트
7.2. 영문 웹사이트
- 인터넷 철학 백과/반출생주의
-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부모됨과 출산
- 반출생주의 레딧
- Stop Having Kids
- An Antinatalist Handbook
- Antinatalism Argument Guide
8. 관련 문서
[1] Arthur Schopenhauer, Nachträge zur Lehre vom Leiden in der Welt, Parerga und Paralipomena[2] Schopenhauer, Arthur (1942). On the Sufferings of the World in Complete Essays of Schopenhauer, New York,: Willey Book Company. Edited by T. Bailey Saunders.[3] 이한(이민열) 역#[이역] 혹자는 또한 우리의 삶을 무(無)의 축복받은 고요를 쓸데없이 훼방 놓는 에피소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5] 기존 일본어 번역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일본어 위키[6] 인간 외 동물의 생식(reproduction)에도 부정적 가치를 부여하나, 동물에게 생식에 관한 윤리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7] 인공 유산과 배아를 이용한 연구 등에 대해서는 반출생주의자 간에도 허용 기한 등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인간은 단순한 생식 세포에서 도덕적 지위를 갖는 인격체가 되기까지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베나타는 유정성(有情性, sentience)을 아직 가지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임신 초기 태아(통상 임신 6개월 이전)의 경우 임신중절이 낫다고 본다.참고 자료[8] 반대로 중국의 계획생육정책을 비롯해 한국·태국·이란·인도·페루 등에서 산아제한정책을 시행한 적이 있는데, 이 경우는 맬서스 트랩과 우생학이 결부되어 있는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결국 해당 이론에 결함이 발견되고 고령화 문제에 직면하면서 출산장려정책으로 전환됐다.[9] [10] 가령 장기이식을 위해 복제인간을 만들거나, 먼저 태어난 형제의 골수이식을 위해 맞춤아기를 낳는 것(기사)은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모든 출산은 따지고 보면 그로 인해 태어나는 존재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이미 태어난 존재를 위한 행위이다.[11] 출산의 위험성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하고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은 분명한 도덕적 잘못이다. 현대에도 언제든 출산 과정에서 산모사망과 사산의 위험이 있으며, 산모나 신생아의 신체 손상과 산후 우울증 등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다.[12] 베나타의 핵심 논증은 박애주의(philanthropy)적 관점에 기반한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그는 염인주의적 관점 역시 반출생주의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인류 역사 내내 인간은 다른 인간과 동물에게 엄청난 양의 고통과 죽음을 야기해 왔고 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해악을 야기할 인간을 굳이 새로 탄생시키지 않을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흡연의 중독성·과음의 위험성 등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행하는 등 신뢰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지적·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정의를 실현하기보다는 권력에 순응하며, 의인보다는 학살자 같은 악인이 최고의 권세를 누려 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지도자들은 제재 없이 장기간 권세를 누리다가 의인들보다 안락한 최후를 맞았다. 인류 역사 내내 숱한 집단이 부당하게 말살당했다. 인간은 온갖 방식의 살인을 포함한 온갖 잔학 행위와 비열한 일상적 악행을 저질러 왔으며 저지르고 있다. 만약 인간이 아닌 종이 이만큼 해악적인 종이었다면, 그 종을 증식시키려는 인간은 크게 비난받고 제재당했을 것이다.[13] 기존의 출생주의적 가치관을 부정하고 삶의 고통과 허무함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면 때문에 반출생주의를 허무주의와 연결하기도 하고, 허무주의적 반출생주의자(nihilistic anti-natalist)도 존재한다. 그런데 허무주의가 말 그대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허무주의 그 자체 역시 부정해야 하므로 진정한 허무주의자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생각을 허무주의라고 말할 때에는 기존의 어떤 가치를 부정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봐야 이치에 닿을 것이다. 반출생주의는 기존의 도덕관을 준수하는 가운데에 친출생 편향을 배제함으로써 도출되는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14] 피임법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성욕과 번식욕이 엄밀하게 구분되기 시작했다. 고대에도 동물의 내장을 콘돔처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벌레를 막기 위함인 등 그 용도가 피임과는 무관했다. 또한 기근 등을 이유로 아이를 원치 않아 임신중절을 원하더라도 그 효능이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방법만이 존재했으며, 직접적인 영아 살해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영아 사망도 빈번했다.[15] 비동일성 문제는 우리에게 부모의 자격과 후손에 대한 도리의 근거와 기준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어떤 부모의 경우 자녀를 낳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된다면, 그 생각이 다른 모든 부모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16] 부모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자격 수준을 상정하는 사고 방식 자체는 반출생주의자가 아닌 출생주의자들도 상당수 갖고 있으며, 임마누엘 칸트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에 법제화된 입양 자격 제한, 애니멀 호더 처벌 등도 이러한 사고 방식과 관련이 있다. 또한 비장애인의 70%는 직접 양육이 어려운 장애인의 임신 및 출산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통계가 있으며#, 마약중독자의 불임수술을 유도하기 위해 현금을 지원하는 비정부 단체도 있다.# #2 2010년대부터는 저소득층·장애인·다자녀 부모에 대한 혐오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17] 데이비드 베나타의 책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7장 결론에서 인용된다.# 다만, 해당 구절이 반출생주의를 지지한다고 보기에는 그 의미가 불분명하며, 드문 상황에 놓인 특정인에 대해 예외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성서비평학적 반론이 있다.#[18] 각색된 것으로, 확인 가능한 최고(最古) 원전은 Aristotle, Eudemus (354 BCE), surviving fragment quoted in Plutarch, Moralia. Consolatio ad Apollonium, sec. xxvii (1st century CE) (S. H. transl.)[19]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는 "마케도니아인 이야기에 의하면 이 정원에서 실레노스가 포로로 잡혔다"라고만 전한다.#[후략] 이것은 진실이라네!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 눈 멀고 파멸한 이에게도 마찬가지일세. 격동하는 파도가, 사방에서 부는 겨울 강풍 속에서 이리저리 시달리며 흐르는 어느 북쪽의 해안을 생각해 보게. 그에게도 마찬가지. 그 사나운 잔해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영원히 그를 덮쳐 부서져 내리지. 더러는 해가 지는 곳에서, 때로는 해가 뜨는 곳에서, 더러는 한낮의 이글거리는 햇빛 속에서, 때로는 한밤 중에 어둠이 내린 북쪽에서.[21] 영문 위키백과에 따르면 자녀가 없었다. His wife Mathilde survived him, dying in 1883. The couple had no children.[22] Sammons, Jeffrey L. (1979). Heinrich Heine: A Modern Biography.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23] 마광수 교수가 1978년에 쓴 시 《효도에》에는 "어차피 저도 또 늙어 자식을 낳아 / 서로가 서로에 얽혀 살아가게 마련일 테니까요"처럼 출산에 부정적이지 않은 듯한 구절이 있고, 이 때문에 그가 단지 효 사상에 부정적인 것이지 반출생주의자까지는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인 1979년에 쓴 시 《업》에서는 "정말 자식은 낳지 말아야지 / (...) / 적어도, 나 때문에, 내 성욕 때문에 / (...) / 한 생명을 이 땅 위에 떨어뜨려 놓지는 말아야지"라는 구절을 통해 반출생주의적 사고를 분명하게 밝혔으며, 1997년에 쓴 시 《낳은 죄》에서는 직접적으로 "부모들은 다 죽어 마땅해 / 정말 대역죄(大逆罪)인 '낳은 죄'를 저질렀으니까"라고 강하게 표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본인도 끝까지 자식을 갖지 않았다. 따라서 최소한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반출생주의적 입장으로 돌아섰다고 볼 수 있다.[24] 자이나교와 고대 불교, 그 외 고행을 중시한 인도 종교들은 금욕주의 성향이 강하다. 특히 석가모니와 같은 시대에 살아간 인물이자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유명한 자이나교의 실질적인 교조(敎祖) 마하비라는 걸식을 위한 그릇조차 거부하여 손을 모아 받아먹고 성욕에서 비롯하는 행위 자체를 금했다고 전해진다.[25] 스토아 학파(아파테이아)는 물론이고, 에피쿠로스(아타락시아) 역시 쾌락도 결국은 고통으로 바뀐다는 것에 인식을 같이 했다. 쾌락주의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에피쿠로스는 금욕적인 삶을 살았으며, 쾌락을 적극적으로 획득하기보다는 소극적으로 고통을 줄이는 방향의 안분지족을 중시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등장하는 《향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성교는 인간에게 이득을 준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운이 좋다."[26] 고락(苦樂)을 느낄 수 있는. 쾌고감수능력이 있음을 말한다. 불교와 감각중심주의(sentientism, sentiocentrism)에서 중요하게 다루며, 쾌락보다 고통 여부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을 두고 고통중심주의(pathocentrism)로 칭하기도 한다.[27] '생명학'을 제창한 일본 철학자 모리오카 마사히로 교수는 반출생주의 관련 대담에서 원시 불교는 출생에 대해 긍정이면서 부정인 양면성을 가진다고 본다. 다만, 자신은 관련 전문가가 아니라서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인다.#[28] 이는 살생이 항시 발생한다 한들 고의로는 살생하지 말라는 가르침과 같다. 석가모니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집착을 경계했지, 이를 핑계로 실천을 회피하라 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르마를 말하고 실천을 요구했다.#[29] 이후 석가모니에게 6~9세가 된 아들 라훌라가 찾아오자 라훌라를 그 자리에서 출가시켰다. 결국 정반왕의 후계는 사촌 마하나마가 이었고, 그의 대에 카필라국은 멸망한다.[30] 《마하승기율(摩訶僧祈律)》에서, 걸식하다 어미에게 붙잡혀 환속하지 않을 거면 손자라도 남기고 가라는 간청을 못 이기고 아들을 만든 야사에게 석가모니는 "비구들 중 처음으로 죄악의 문을 열어놓은 자"라고 강하게 꾸짖고, "차라리 칼로 남근을 베어버리거나 독사의 입에 집어넣는 한이 있더라도 음행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설법한다. 이는 음행이 4종의 바라이죄(波羅夷罪) 중 하나로 정해진 유래이다. 바라이죄는 비구가 자격이 박탈되고 승단에서 추방되는, 불교 계율상 최악의 중죄에 해당한다. 조계종, 천태종 등은 출가자에게 독신 생활을 요구한다.[31] 원시 불교의 세계관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데이비드 베나타 등 여러 반출생주의 철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쇼펜하우어는 무신론자였으며, 불교를 포함한 동양 철학을 진지하게 연구하여 서양에 알린 최초의 서양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인도 법학자 하리 싱 구어는 구시대의 현학적 문체를 고려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재해석하고,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인간은 삶의 고통을 망각하여 출산하고, 이것이 늙음과 죽음의 원인이다. 출산이 고통을 더하는 행동임을 깨닫기만 한다면 출산할 수 없을 것이며, 그리하여 늙음과 죽음 생산을 중단해야 한다.[32] Robert Kritzer, 2014. 현존하는 중국어·티베트어 판본(각 3종 총 6종. 범어 원전은 소실됨.)을 두루 비교하고 종합한 영역본이다. 2021년 기준 국내에서는 그 중 일개 판본의 현대적 해석본 《佛說入胎經今釋(불설입태경금석)》의 역본 하나만이 검색된다.#[33] Nanda, I do not extol the production of a new existence even a little bit; nor do I extol the production of a new existence for even a moment. Why? The production of a new existence is suffering. For example, even a little (bit of) vomit stinks. In the same way, Nanda, the production of a new existence, even a little bit, even for a moment, is suffering. Therefore, Nanda, whatever comprises birth, (namely) the arising of matter, its subsistence, its growth, and its emergence, the arising, subsistence, growth, and emergence of feeling, conceptualization, conditioning forces, and consciousness, (all of that) is suffering. Subsistence is illness. Growth is old age and death. Therefore, Nanda, what contentment is there for one who is in the mother's womb wishing for existence?[34] 한국불교 근본경전 《능엄경》에서는 육도중생의 마음이 음란하지 않다면 생사를 상속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35] 그러나 윤회 회전율(?)을 높이므로 출산이 시혜적 행위라는 주장은 결국 동물(축생도→인간도)에게도 적용되므로 공장식 축산도 사실 시혜적 행위라는 주장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으며, 자녀의 삶의 질이 열악하든 말든 일단 무작정 많이 낳고 보는 게 옳다는 불교판 "당혹스러운 결론"을 야기할 수 있다. 또한 고영섭 교수는 낙태 반대 논리와 출산 장려 논리를 오류적으로 동일시하기도 한다.[36] 탈레스는 누이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으며, 왜 아이를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전해진다. 플라톤은 여자와의 사랑은 번식 본능에서 나오는 불순한 사랑이고, 번식이 불가능한 미소년과의 사랑이야말로 본능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플라톤은 80세까지 살았으나, 평생 독신이었고 자녀도 없었다.[37] 에세파 또는 에센파라고도 한다. 유대교의 금욕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유파로, '쿰란 공동체'는 에세네파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필론·플리니우스 등에 의하면, 이들은 스스로를 빛의 아들들·언약의 성도들·의로운 남은 자들 등으로 칭했으며, 정의·절제·성적 금욕 등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이들은 광야에서 재산 공유·공동 식사·공동 노동 등을 수행하며 살았다. 이들은 결혼을 기피했고 돈과 노예를 금했으며, 고아와 병자 등을 돌보는 등 경건하고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토라 연구와 정결 의식를 중시하였고 유혈제를 거부했으며,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같은 당대 유대교 주류와 예루살렘 성전이 부패했다고 인식했다. 이들은 이원론적 시각을 바탕으로 죽음을 환영했으며, 묵시(默示)적 종말론을 바탕으로 유대교 유파 중 가장 진보적인 성경 해석을 남겼다.[38] 당대 문헌 중에는 이들을 성적 쾌락과 정욕을 죄악시한 결과 여성이 없고 아이를 낳지 않으며 입양만 하는 독신 남성 공동체로 묘사하는 문헌도 있다. 이는 자기 생전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믿은 집단 내의 일부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일생일혼의 원칙과 정회원이 되기 위한 3년 간의 수습 과정 등이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이후 열심당의 항쟁과 관련되어 로마 제국에 의해 궤멸된 것으로 여겨진다.[39] 금욕주의 종교가 지배층·민중의 욕구에 영합·타협하지 않을 경우 해당 종교를 지탱할 하부 신도(평신도)를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교세를 확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신도가 아이를 많이 낳도록 유도하는 것이다.[40] 2세기 경 활동했던 영지주의 계파. 로마 제국은 이들에 대한 척살령을 내렸다. Apostolici 또는 Apotactitae, Tatianites, Messalian, Euchites 등에 영향을 끼쳤다.[41] 항문성교를 뜻하는 단어 중 buggery는 보고밀파가 기원했던 불가리아에서 유래한 말로 알려져 있다.[42] 순결파 또는 순수파라고도 한다.[43] 기독교 이단 교파 여호와의 증인은 사랑과 공의의 신이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고초를 겪게 내버려 둘 리 없다면서 그러한 '불타는 지옥'의 존재를 부정한다.# 다만, 여호와의 증인이 내세우는 애매한 구절들보다 더 많은 성경 구절들이 '불타는 지옥'의 존재를 암시 또는 명시하고 있다. 지옥(기독교) 문서 참조. 이처럼 악의 문제와 지옥의 문제는 '무신론의 암초(the rock of atheism)' 역할만이 아니라 수많은 이단을 발생시키는 '이단의 암초' 역할 역시 수행한다.[44] 생일 역시 저주하는데, 사실 고대 히브리인은 생일을 기념하지 않고 기일만 기념했다. 그리스도교인이 생일을 기념하고, 그리스도교 내에서 크리스마스의 위상이 부활절에 준하는 것은 로마 문화의 영향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생일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성경 구절과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생일을 기념하지 않는다.#[45] 욥과 예레미야는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느니 어미의 자궁에 있을 때 죽임당하는 게 나았다고 말하는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도 이와 흡사한 대사가 있다. 그리고 예수는 유다가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고 말한다.[46] 그 유명한 보헤미안 랩소디에도 "난 가끔 내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요(I sometimes wish I'd never been born at all)"라는 가사가 있지만, 이를 두고 반출생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과 같다.[47] 단, 밀라노 칙령(313년) 이전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격을 반출생주의적으로 규정한 테오필 드 지로(Théophile de Giraud) 등의 연구도 존재한다. La grande supercherie chrétienne : De l’oubli que le christianisme des origines était un antinatalisme (2019) , The Childfree Christ: Antinatalism in Early Christianity (2021) 참고.[48] 시편 127:3-5, 요한의 복음서 16:21 등[49] Hybels, B. & Wilkins, R. (1993). Tender Love: God's Gift of Sexual Intimacy. Moody Pub.#[50] 마태오의 복음서 19:12[51]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7:25-40[52] 적어도 고린토서 집필 시점의 바울로는 자기 생전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처럼 독신인 사람은 굳이 결혼하지 말고 독신 그대로, 결혼한 사람은 이혼할 생각 말고 결혼한 그대로 사는 것이 그들 자신을 위해 낫다고 보았다. 단, 그렇다고 결혼이 죄라거나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며, 정욕이 왕성해서 힘이 들면 그냥 결혼 또는 재혼해도 무방하다고 첨언한다.[53] 예레미야 16:1-2[54] 야훼가 직접 예레미야 자신에게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둘 생각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한다.[55] 로마서 8:15, 에페소서 1:5[56] 베나타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스스로를 의무론자로 규정한 적이 있다. 또한 자신은 공리주의자, 특히 부정적 공리주의자가 아니라고 수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다만, 그는 자신이 공리주의(가 옳을 가능성)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가령 그는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의 원조 의무 논증(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그것을 방지함으로써 그것만큼 도덕적으로 중요한 다른 일이 희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절대빈곤은 나쁜 일이며, 그것만큼 도덕적으로 중요한 다른 일이 희생되지 않는 경우 방지해야 한다.)이 반출생주의와 연결점이 있다고 본다. 베나타의 반출생주의 논증은 비존재라는 특수한 위치에 놓인 미래 세대 문제에 대해 응용윤리학적 접근법을 취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해서 논증을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반출생주의적 결론 자체는 의무론·소극적 공리주의(negative utilitarianism)·규칙 결과주의(rule consequentialism) 등을 통해 개인적(personal)·비개인적(impersonal)으로 각각 도출될 수 있다.[57] 직접 구체적 정보를 제공하고 확인을 받는 절차를 거치는 사전 동의(informed consent)와 묵시적 동의(implied consent) 등을 모두 포함한다.[58] 동의 개념은 정치학(정치철학), 사회학(사회철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계약주의(contractarianism)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계약주의는 홉스·로크·칸트·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스캔론의 계약론(contractualism)에 이르기까지, 호혜성(互惠性)의 원리와 묵시적(암묵적) 동의, 원초적 입장(무지의 장막) 이론과 인접 세대 간 계약의 연쇄, 정당화가능성(justifiability) 또는 합당한 거절가능성(reasonable rejectability)을 기반으로 하는 상호정당화 이론 등 많은 보완책이 제안돼 왔고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 세대에 대한 엄밀한 적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 중이며 미완인 상태다.[59] 여기서 심각하다는 것은 도덕적 고려(검토)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가령 인간의 죽음은 일반적으로 사소하게 넘겨선 안 될, 심각한 문제로 간주된다.[60] 반출생주의가 제기하는 동의 문제에 대해 미성년자 같은 제한능력자를 위한 행위는 동의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동의가 필수적인 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그러지 않을 경우 발생 가능한 심각한 피해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일방적으로 심각한 피해 위험을 야기하는 출산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의 자율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는 현실 역시 반출생주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61]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당사자의 가상적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따를 경우 이미 통용되고 있는 미래 세대의 도덕적 지위와 세대간 정의 개념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반출생주의보다 더 반직관적인 결론이 도출된다.[62] 베나타는 위 저서에서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반론을 일일이 짚으며 치밀하게 재반론하고 있고, 보충 논문들도 있다. 일례로, 고통과 쾌락의 비대칭성(기본적 비대칭성)은 가치론적 주장이므로, 해당 주장을 거부하려면 해당 주장으로 설명되는 사례들(하위 비대칭성) 모두를 반론에 맞는 다른 방식으로 해명할 필요성이 생긴다.[63] 베나타는 가능적 존재(잠재적 존재)의 자체적 유무 대신 두 가능세계를 상대적으로 비교한다.[64] 전혀 존재한 적이 없고 존재할 일도 없음을 의미한다. 즉 존재했다가 없어지는 것(죽음)과는 다르다.[65]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음)으로 바꿀 수도 있다. (나쁘지 않음)은 베나타가 보다 선명한 대비를 위해 택한 표현이다.[66] 아래 사례로 드러나는 가치 직관에 대한 수용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해당 가치 직관이 속한 가치 네트워크가 훼손된다는 점에서 반출생주의보다 더 반직관적인 결론이 도출된다.[67] 해악금지(non-maleficence) 원칙은 강력한 기본 윤리 원칙이다. 쇼펜하우어는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에서, 동정심을 도덕의 기초로 삼아 "누구도 해치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를 도와라"를 윤리학의 최고 원리로 제시한다.# 이는 황금률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떤 고통·해악·문제도 경험할 일이 없었다는 반사실주의(counterfactualism)적 직관, 어떤 피해 예방 조치를 수행하면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아 감사받을 일이 없더라도 사후 조치보다 사전 예방이 더 중요하다는 예방주의(preventionism)적 직관 역시 강력한 기본 직관이다.[68] 비동일성 문제 해결을 위해 공리주의적으로 접근할 때 발생하는 '당혹스러운 결론'이다.[69] optimism bias. 일종의 인지적 착각으로, 국가·언어·인종·문화와 무관하게 사람들의 약 80%가 가지고 있다.(낙관주의 편향에 관한 TED talk) 베나타는 이를 'Pollyannaism' 또는 '낙관주의 망상(optimism delusion)'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인류의 낙관주의 편향은 진화적 본성이며, 이러한 편향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만큼 번성하지 못했거나 진작 멸종했을 것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욕구에 기대서 타자의 고통을 적당히 외면할 때 비로소 인생을 낙관할 수 있고, 다음 세대를 만들어 고통과 낙관을 유전할 수 있다. 생존자 편향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70] 위의 삶의 질 평가 이론들은 유서 깊은 결과주의·비결과주의 논쟁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논쟁 중에 있으며, 각자가 가진 약점에 대해 지속적인 비판과 수정이 가해지고 있다.#[71] 박탈주의(deprivationism), 박탈 이론(deprivation account)은 죽음이 나쁜 이유에 대해 죽음이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72] 베나타는 다음과 같은 유대인 속담을 인용하며,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극도로 희박한 확률을 뚫고 태어날 정도로 불운하고, 태어나지 않을 정도로 운이 좋았던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삶은 너무나 끔찍해서 아예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운이 좋은가? 십만 명 중에서 한 명도 찾을 수 없다!" 유대교 바리사이파의 계파 간 논쟁 중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는 인간이 창조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진보적인 힐렐 학파 역시 이에 합의한 바 있다. 이는 출산을 축복이자 의무로 여기는 유대교 전통이 유대교의 전부는 아니라는 증거이며, (아브라함계)종교가 반출생주의와 꼭 대치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73] 일례로, 미 공군 조종사이자 변호사였던 도날드 코와트는 가스 폭발 사고로 눈과 손을 잃고 전신 화상의 고통을 겪었으며,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화상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는 치료를 거부하고 안락사를 원했지만 의료계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끔찍한 고통을 대가로 2019년까지 생존하여 71세까지 장수하게 됐다. 그는 치료 후 댁스 코와트로 개명하고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했지만, 죽을 때까지 자신이 옳았다는 신념을 견지(堅持)하며 환자권리 운동가로 살았다.#[74] 베나타는 인간에게서 갑자기 모든 도구적 가치를 지닌 고통이 사라진다면 삶의 질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주장 자체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 자체가 우리 삶의 끔찍한 속성이며, 만약 고통이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인간의 삶은 더 좋았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사지가 절단되는 대신 양 팔만 절단된 것이 낫다고 해서, 그로 인한 고통 자체가 나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고통에 도구적 가치가 있다 한들 고통은 여전히 나쁘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고통이 도구적 가치를 지니는 것도 아니며, 개인의 삶을 돌이킬 수 없게 파괴하는 수준의 고통도 존재한다.[75] 베나타는 인간의 삶이 충분히 나쁘고, 사람들이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듯 의미를 추구해 주관적 삶의 질을 끌어올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꺼이 여러 위험을 감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개인이 의미를 추구할 목적으로 자식을 낳는 것은 의미를 찾지 못할 위험을 자신이 아닌 자식에게 전가하는 일이라고 비판한다. 삶의 의미 또는 실존적 의미는 인간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태어나지 않는 그에게서 박탈될 수 없으므로, 존재하지 않아서 의미를 찾지 못하더라도 그에게 나쁠 것이 없으며, 인간을 낳아 그로 하여금 의미를 찾게 하는 것은 인간을 낳지 않는 것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76] 인간의 공장식 사육 덕분에 원래라면 태어나지 못했을 해당 동물 개체가 잔뜩 태어날 수 있었고, 해당 종이 번성할 수 있었으므로 오히려 시혜적 행위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 베나타는 고통스럽고 짧은 삶을 산 후 도축될 동물을 대량 생산하는 것은 가해 행위라고 반론한다. 베나타는 저러한 자기합리화가 인간의 사고 방식 중 가장 악질에 속한다고 보며, 만일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선택할 수 있다면 태어나지 않는 대신 고통스럽고 짧은 가축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묻는다. 그 외 유사한 사례로 강아지 공장 등이 있다.[77] 인간은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한 동물 착취와 환경 파괴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채식주의자나 환경운동가조차도 일반인에 비해 기여도가 낮을 뿐 예외는 아니며, 아이를 낳을 경우 아이를 낳지 않은 일반인보다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78] 비록 수의학계에서는 질병 예방과 스트레스 경감 차원에서 중성화수술을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긴 하지만, 강제로 동물을 붙잡아다 거세하는 것은 동물권 침해 소지가 있으며 특히 야생 동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동물을 피임하도록 설득하는 것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반출생주의자들은 설득 가능성이 있는 동시에 가축·반려동물 등의 번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간의 출산 문제에 우선적으로 집중하는 편이다.[79] 보호자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는 지적장애인은 대부분 보호자에 의해 생식이 통제되는데, 이를 비난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80] 인터넷 커뮤니티, 특히 중장년·남초 커뮤니티에서는 반출생주의자에 대한 조롱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고, 그 과정에서 인신공격의 오류나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경우도 많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은연중에 번식 반대는 곧 생존 반대라고 주장하거나, 반출생주의에 한해 도덕적 상대주의(윤리적 상대주의)를 강변하는 식으로 선택적 무력화를 시도한다. 이러한 거부 반응은 도덕적 추론에 대한 몰이해 또는 엄밀한 도덕적 검토 없이 이미 행해진 자신의 출생이나 출산에 대한 인지부조화 때문일 수 있다.[81] 부정적 공리주의로도 번역된다. 소극적 공리주의는 공리주의의 한 분파로서, 모두의 최소 고통, 고통의 최소화를 추구한다. 칼 포퍼가 소극적 공리주의의 시조로 유명하다. 소극적 공리주의에 대한 주요 비판점으로는 소극적 공리주의를 사례에 강하게 적용하여 행복의 가치를 무시하면 상황이 더 악화되거나 고전 공리주의 이상의 끔찍한 결론(학살 정당화 등)이 도출된다는 점, 이를 피하기 위해 약화된 형태로 행복의 가치를 인정할수록 고전 공리주의와 구분할 의미가 사라진다는 점 등이 있다.[82] 염세주의 철학자 필립 마인랜더(필립 바츠)는 비존재와 죽음의 무가 숭고하다고 여겼고, 자살을 찬미하며 결국 자살했다.[83] 일반적인 공리주의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행복의 최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행복 생산을 멈추게 만들 반출생주의에 동조하기 어렵다. 단, 행복의 최대화에 필요한 인구 조절 측면에서 반출생주의를 효용으로 인식할 수는 있다.[84] 예컨대 소극적 공리주의자는 고통의 최소화(생명의 절멸)라는 목적을 위해 출산이라는 수단이 필요하다면 이를 옹호할 수 있다. 반면, 반출생주의자는 출산이 항상 옳지 않기 때문에 이에 반대해야 하며, 단지 인류가 자발적으로 출산을 거부한 결과 점진적으로 멸종하게 되더라도 나쁘지 않고, 어차피 언젠가는 멸종할 인류가 좀 더 이른 멸종을 맞이하더라도 그보다 나중에 멸종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할 뿐이지, 신속한 멸종을 최우선으로 하여 과정상의 희생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설령 출산을 장려하여 인구를 증가시켜야 멸종을 앞당길 수 있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출산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출산을 장려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반출생주의라는 것이다.[85] 그의 저서《인간의 곤경》에서 더 자세하게 논의한다.일부 번역[86] 예컨대 노년기와 이로 인한 병사 문제 등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폐경 후에는 아이를 낳을 수 없으므로, 부모는 인생에서 최악인 부분을 체험하기도 전에 아이를 낳는 셈이다.[87] 에피쿠로스는 《주요 교설(Κυρίαι Δόξαι)》과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등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있는데, 죽으면 감각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그의 제자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태어나기 전의 비존재 상태와 죽은 후의 비존재 상태를 같은 것으로 보고 태어나기 전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 슬프지 않은 것처럼 죽음 역시 슬퍼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베나타는 이를 박탈 논증을 통해 거부한다.[88] 동의 없이 사람을 납치한 후 납치된 게 불만이면 자살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고 태어난 사람이 선하며 지적인 사람일수록 행복을 혼자서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인간이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은 항상 존재하는 타자의 불행과 고통을 잊거나 외면하고 자신의 행복에 집중하는 순간이기도 하다.[89] 해당 일화는 영화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 헤이틀런(Brooks Hatlen)"을 통해 그 심리를 엿볼 수 있다.[90] 사실 아이가 행복할 것을 기대하며 아이를 낳는 것이 왜 어색한지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 여기선 베네타의 설명이 맞다고 가정한다.[91]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내가 낳을 아이는 행복할 것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말이 안된다. 위 주장을 이론적 결론으로 제시하려면 그 증명의 책임은 베네타가 져야 한다. 또한 이 경우, 비대칭성 논증을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순환논증일 것이다.[92] 가치론적 비대칭성은 고통과 쾌락 사이의 것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삶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베나타(2012, 131–132) 또한 David Spurrett의 비판에 대한 응답에서, 무가치한(valueless) 삶과 가치 있는(valuable) 삶도 해악과 이익의 한 예로 인정한 바 있다.[93] Wille zum Leben(Will to live). 생의지, 생존 의지 등으로도 번역된다. 생존 의지는 인간이 생식(번식)과 연애에 비이성적으로 집착하게 만든다. 자연 선택에 기초한 진화론을 정립한 찰스 다윈도 이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94] 그의 여러 위선적 면모 중 하나로써, 그에게 사산된 또는 영아일 때 죽은 두 명의 사생아 딸이 있었다고 추론 가능한 문헌이 있다.관련 문헌 모음 비록 그의 사생아가 아들이라거나, 그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부정했다는 문헌 등 불확실성을 더하는 문헌이 있으나(Philosophers Who Changed History, 2024 등), 적어도 그가 임신 가능성을 신경 쓰지 않고 성교했다는 것만은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95]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3(개정 증보판), p.266.[96] 2024년 은퇴. 그가 그의 저서 《The Fall of The University of Cape Town》에서 고발하는 캠퍼스 실태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97] 비단 반출생주의뿐만 아니라 《"어퍼머티브 액션"은 불의를 저지하는 길이 아니다("Affirmative Action" Not the Way to Tackle Injustice)》#, 《제2의 성차별: 남자와 소년에 대한 차별(The Second Sexism: Discrimination Against Men and Boys)》# 등 학계 풍토에 반하는 저작물이 많다.[전략] 인간의 곤경(human predicament)은 사실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곤경(inhuman predicament)이다. 이는 주로 간접적(은유적) 의미에서 그러한데, "비인간(inhuman)"은 잔인성(cruelty)을 의미하고, 잔인성은 행위자성(agency)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곤경은, 거시적으로 봤을 때, 근본적으로 그리고 압도적으로 어떤 행위자의 산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관심하고 맹목적인 진화의 힘(evolutionary forces)의 산물이다. 물론 일단 행위자성이 진화한 끝에 잔인성이 인간의 곤경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악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엄청난 양의 고통과 죽음을 가한다. 예컨대 기만, 비하, 배신, 착취, 강간, 고문, 그리고 살인 등은 개별 인간의 곤경을 악화시킨다.[99] agency. 주체성, 선택의지 등으로도 번역된다.[100]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서도 "삶이란 성교로 전염되는 불치병"이라는 농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101] 《인간의 곤경: 인생의 가장 큰 질문에 대한 솔직한 안내서(The Human Predicament: A Candid Guide to Life's Biggest Questions)》8장 결론 중 발췌 번역. 다른 문단에서는 출산을 폰지 사기에 빗대기도 한다.[102] 부모는 자신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언젠가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낳는다는 것을 의미한다.[103] 2008년 레오폴드 2세의 동상에 빨갛게 페인트칠을 한 적이 있다.사진[104] 시프린은 부자가 마을 상공에서 금괴를 뿌려 어떤 불운한 사람을 다치게 만들었을 때, 설령 그것이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었을지라도 부자는 다친 사람에게 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비유를 든다. 그리고 출산은 새로 가해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실행해야 할 구조 행위가 아니며, 실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태어나지 못해 아쉬운 당사자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위의 부자의 기행보다도 정당화하기 어렵다. 적어도 부자의 기행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당장 금괴가 더 아쉬운 당사자들의 존재에 의해 정당화될 여지는 있기 때문이다. [105] David Benatar, 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 (Clarendon Press, 2008), 93.[106] Kertész Imre. 본디 헝가리 이름은 동양권 이름처럼 성씨가 이름 앞에 오기 때문에 Kertész가 성이다. 이름 문서를 참조할 것. 다만, 헝가리 밖에서는 대부분 서양식 성명 순서를 따라 'Imre Kertész'로 표기하는 편이며, 한국어 구글에서도 '임레 케르테스'가 '케르테스 임레'보다 더 많이 검색된다.[107] 생명(life)를 거꾸로 적은 후 -주의(-ism)를 붙인 조어이다.[108] 김수이: 지금까지 하신 말씀을 제가 이해하기로는, 선생님의 소설 문학세계는 오롯이 자신의 개인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고, 선생님은 '메마르고 쿨한' 사람으로서 이 세계와 섞일 수 없는 지점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 세계가 흘러가는 운명을 수긍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게는 상당히 아이러니컬하게 받아들여지는데요. 세계와 삶에 대한 이중적인 지점에서 선생님은 한 존재로서 어떻게 살아가시는지. 하루하루의 일상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영하: 저는 삼십대 초반에 이미 결정을 내렸어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요. 그러면 내 삶이라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냥 살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살아지는 것이라면, 그럼 세계는 뭐냐? 세계는 우리와는 전혀 관계 없이 존재하는 것이죠. 저는 우주에 관한 책을 굉장히 좋아해요. 빅뱅 같은 천체물리학에 관한 책들을 좋아하고, 스티븐 호킹의 책도 좋아해요. 그 책들을 보면서 우주에서 신성을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냥 인간이라는 것은 우주의 한 점 먼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휴머니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죠. 인간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세계도 바꿀 수 있고, 그밖에 어떤 의미 있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 반면, 저는 그 반대편에 있어요. 저는 인간들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어리둥절한 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은 죽어 사라지는 존재라고 봐요. 물론 여러 가지 영생에 대한 관념들도 있지만, 저는 그런 관념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그것에 관해서는 뭐랄까, 아주 오래 전부터 도저한 허무주의를 갖고 있었어요. 제가 이십대 후반에 쓴 소설에 나타난 허무주의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젊어서 그럴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계속 보신 분들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거예요. 앞으로도 저는 별로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그러나 딱 한 가지 믿는 것은 있어요. 그것은 이야기라는 것의 영속성이에요.[109] 저는 의식을 가진 존재, 특히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존재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바다의 물고기든 하늘의 새든,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든 휴머노이드들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고통도 없었을 테니까요. / 태어났다면 느낄 기쁨을 태어나지 않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그게 참으로 손해일까요? 손해라 느낄 존재가 아예 없는데요? /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고통의 근원인 자아가 아예 없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태어나게 되어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은 해악입니다. 태어나지 않는 쪽이 분명히 낫습니다. 기쁨도 느끼니까 그 유익으로 고통의 해악이 상쇄될까요? 어떤 사람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너무 억울하겠죠. 감옥에서는 간수와 수감자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끔찍한 것들을 먹고, 겨우 몸 하나 누일 수 있는 공간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마음에 맞는 친구도 사귀게 되고, 감옥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가끔 소소한 즐거움도 누립니다. 그러다 몇십 년 후 재심이 열려 그가 무죄였음이 밝혀지고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참으로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에게 감옥 생활은 괴로움도 크지만 기쁨도 있다, 그러니 경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래요. 고통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건 의미가 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이 우주에 태어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어요. 의식과 충분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줄일 의무가 있어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더 높은 지성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110] 이용자의 자살 사건으로 한 차례 자진 폐쇄한 적이 있다. 이후 마이너 갤러리 개설 정책이 완화되면서 새로운 주소로 부활하였다. 커뮤니티 규모 대비 분탕이 과도한 편이며, 관리자의 운영 태도 역시 윤리적 적절성이 의심되는 면이 있다.# #2 엄밀한 사상으로서의 반출생주의 관련 정보를 찾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보인다.[111] 구 출산 혐오 마이너 갤러리. 디시인사이드 측에 의해 강제로 개명당했다고 한다.# 사상적 엄밀성보다는 출산자 혐오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김영하: 저는 삼십대 초반에 이미 결정을 내렸어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요. 그러면 내 삶이라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냥 살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살아지는 것이라면, 그럼 세계는 뭐냐? 세계는 우리와는 전혀 관계 없이 존재하는 것이죠. 저는 우주에 관한 책을 굉장히 좋아해요. 빅뱅 같은 천체물리학에 관한 책들을 좋아하고, 스티븐 호킹의 책도 좋아해요. 그 책들을 보면서 우주에서 신성을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냥 인간이라는 것은 우주의 한 점 먼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휴머니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죠. 인간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세계도 바꿀 수 있고, 그밖에 어떤 의미 있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 반면, 저는 그 반대편에 있어요. 저는 인간들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어리둥절한 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은 죽어 사라지는 존재라고 봐요. 물론 여러 가지 영생에 대한 관념들도 있지만, 저는 그런 관념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그것에 관해서는 뭐랄까, 아주 오래 전부터 도저한 허무주의를 갖고 있었어요. 제가 이십대 후반에 쓴 소설에 나타난 허무주의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젊어서 그럴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계속 보신 분들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거예요. 앞으로도 저는 별로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그러나 딱 한 가지 믿는 것은 있어요. 그것은 이야기라는 것의 영속성이에요.[109] 저는 의식을 가진 존재, 특히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진 존재들,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바다의 물고기든 하늘의 새든,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든 휴머노이드들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고통도 없었을 테니까요. / 태어났다면 느낄 기쁨을 태어나지 않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그게 참으로 손해일까요? 손해라 느낄 존재가 아예 없는데요? /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고통의 근원인 자아가 아예 없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태어나게 되어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은 해악입니다. 태어나지 않는 쪽이 분명히 낫습니다. 기쁨도 느끼니까 그 유익으로 고통의 해악이 상쇄될까요? 어떤 사람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너무 억울하겠죠. 감옥에서는 간수와 수감자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끔찍한 것들을 먹고, 겨우 몸 하나 누일 수 있는 공간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마음에 맞는 친구도 사귀게 되고, 감옥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가끔 소소한 즐거움도 누립니다. 그러다 몇십 년 후 재심이 열려 그가 무죄였음이 밝혀지고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참으로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에게 감옥 생활은 괴로움도 크지만 기쁨도 있다, 그러니 경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래요. 고통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건 의미가 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이 우주에 태어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어요. 의식과 충분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줄일 의무가 있어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더 높은 지성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110] 이용자의 자살 사건으로 한 차례 자진 폐쇄한 적이 있다. 이후 마이너 갤러리 개설 정책이 완화되면서 새로운 주소로 부활하였다. 커뮤니티 규모 대비 분탕이 과도한 편이며, 관리자의 운영 태도 역시 윤리적 적절성이 의심되는 면이 있다.# #2 엄밀한 사상으로서의 반출생주의 관련 정보를 찾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보인다.[111] 구 출산 혐오 마이너 갤러리. 디시인사이드 측에 의해 강제로 개명당했다고 한다.# 사상적 엄밀성보다는 출산자 혐오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