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還俗성직자가 성직(聖職)의 의무를 그만두고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것. 직역하면 '속세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일부 승려들은 환속을 비하하여 속퇴(俗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환속이 맞는 표현이다.
2. 설명
본래는 불교 용어로 출가했던 승려[1]가 승직에서 벗어나 속세의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는데 현재는 의미가 확장되어서 불교 이외에도 어느 종교든지 성직자가 일반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단, 여기에 해당하는 종교인은 보통 불교의 승려나 가톨릭의 사제, 정교회의 보제 이상 직위, 개신교(성공회 및 북유럽 루터교회 제외)를 제외한 기독교 종파들의 수도자[2] 등 가정을 꾸리지 않는 독신생활 등 계율이 있는 이들을 지칭한다. 한 예로 혼인하여 가정을 구성할 수 있는 개신교의 목사나 성공회의 신부 내지는 정교회의 보제 미만 직위, 그리고 이맘 등 이슬람 성직자나 유대교의 랍비와 힌두교의 브라만에게 '환속'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가끔 종교인으로서 규범을 어기는 파계[3]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물론 파계를 저지른 종교인은 자동으로 성직 신분에서 쭟겨나서 강제로 환속을 당하지만 파계를 저지르지 않았으나 자발적인 의지로 환속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쉽게 회사생활로 비유하자면 파계는 징계로 해고당하는 것, 환속은 스스로 퇴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징계받기 전에 권고사직을 요구받아 퇴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온전히 스스로 원해서 사직서 쓰고 나오는 경우도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실 출가하여 성직자나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신앙심을 통해 종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이므로 환속을 통해 이를 다시 되돌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환속한 사람들을 두고 심정이 나약하다는 등의 편견을 가질 가능성도 있을 수 있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은 매우 다양하고 이에 대한 생각과 행동은 개개인의 자유이므로 환속도 이상하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4]
상좌부 불교에서는 환속하는 방법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정하였는데 율장에 따르면 환속을 원하는 승려는 온전한 정신상태로 온전히 자기 의사에 따라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증인으로 삼아 환속하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요구한다. 몸짓이나 글로 의사를 표현해서는 안 되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람이 아닌 것을 증인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이러한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스스로는 환속하였다고 생각할지라도 이를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천주교에서도 성직자나 수도자가 정식으로 환속하려면 관할장상의 합법적인 절차를 따라야 한다. 특히 성직자는 유효하게 서품을 받았다면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 서품 자체는 취소되지 않는다.[5] 성직자는 환속했다고 하더라도 서품 자체는 인정하되 성직자로서의 의무를 면제하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천주교 신부가 성공회 신부로 이적하는 경우에도 환속 처리한다. 따라서 설령 사제가 환속한다고 해도 교황(사도좌)의 별도 관면 없이는 혼인성사를 받을 수는 없다.[6] 자세한 것은 신부(성직자) 항목 참조.
성공회와 북유럽 루터교회[7]에서는 천주교처럼 성직제도가 있지만 성직자가 퇴직하는 것을 환속이라고 하진 않는데 만인사제론이라는 개신교적 특성이 일부 있어 천주교처럼 성직과 세속을 엄격히 구분하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신품성사의 효력은 영원하다고 본다. 이와 별개로 성공회와 북유럽 루터교회도 성직자가 아닌 수도자가 퇴직하는 것은 환속이라고 한다.
3. 환속한 인물
3.1. 실존인물
- 강기갑: 가르멜 수도회의 수사였다가 퇴회했다.
- 거칠부
- 경허
- 고은: 일초(一超)라는 법명을 얻고 효봉 스님 밑에서 수행하다가 환속했다.
-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이방자 비의 할아버지. 본래 승려(대처승)였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환속했다.[8]
- 김구: 치하포 사건을 일으켜서 수감된 후 탈옥하여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지만 1년만에 환속했고 이후에는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 김시습: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여 결혼도 하고 고기를 먹었지만 아내가 일찍 죽자 다시 출가했다.
- 김연수: 봉사자이자 시인. '밥퍼 목사'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의 아내. 본래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소속의 수녀이자 계성여자중학교 국어교사였다. 개신교(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생이던 최일도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환속하여 최일도와 결혼하였다.
- 김영준(혜문):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로 법명은 혜문(慧門)으로, 조계종 봉선사와 시민단체 활동을 하다 흥국사 탱화 논란과 에이칸도 부처상을 관람한 계기로 2015년 환속하고 가정을 꾸렸다.
- 다닐로 1세: 몬테네그로 주교후국의 주교후[9]였으나 환속하여 세속 군주국인 몬테네그로 공국으로 전환하고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자손을 남기기 전에 암살당해서 조카인 니콜라 1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 로버트 W. 톰슨: 원래 목사였으나 생고무 타이어 발명을 계기로 환속했다.
- 마르틴 루터: 본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 수사신부였다.
- 마리 당티에르
- 마리아 폰 트랩: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모티브가 된 인물. 본래 수녀원에 있었으나[10] 원장 수녀의 지시로 트랩 일가의 엄마 잃은 7남매를 돌보는 가정교사가 되었고 이후 수녀원에서 퇴회하여 트랩 대령의 새 아내이자 7남매의 엄마가 되었다.
- 백남기: 가르멜 수도회의 수사였다.
- 사이토 도산
- 서영남: 인간극장에 소개된 바 있는 인천 소재 민들레국수집 대표. 본래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수사였다.
- 석행우: 소림사 승려 출신 액션배우.
- 선진규: 대한불교조계종 승려였다가 환속하여 결혼했지만 환속하여 가정을 꾸린 후에도 포교활동을 열심히 했다.
- 시메온 1세: 불가리아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칸[11] 보리스 1세의 3남으로, 첫째 형인 블라디미르 라사테에게 왕위가 돌아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성직자가 되어 주교 자리에 올랐지만 블라디미르가 보리스에게 양위받은 후 반기독교 정책을 펴면서 이전의 이교도 국가로 복귀하려는 정책을 펴자 보리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블라디미르를 폐위시키고 눈을 뽑아 버린 후 시메온을 환속시켜서 칸으로 옹립했다. 이후 시메온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차르 칭호를 사용하고 불가리아의 전성기를 이끌어 불가리아의 군주 가운데 유일하게 대제 칭호를 받은 인물이 되었다.
- 신돈: 본래는 승려였으나 공민왕의 개혁정책을 시행하면서 환속하여 관료가 되었다.
- 아시카가 요시노리: 원래는 승려였지만 다이묘들의 회의에서 차기 쇼군으로 추대되어 즉위하면서 환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환속한 후에 다이묘들의 권력을 견제하려고 나섰다가 대낮에 자객의 손에 암살되었다. 여담으로 요시노리 말고 이후의 쇼군 중에서도 한두 명 정도 환속한 인물이 있다.
- 알브레히트(프로이센): 독일 기사단국의 마지막 기사단장이자 프로이센 공국의 초대 공작. 목사의 결혼이 가능한 개신교(루터교회)로 개종함에 따라 자동으로 환속한 케이스다.
- 얀 후스
- 에이코인: 본래 비구니였으나 환속당하여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측실이 되었다.
- 엔히크 1세: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의 왕으로 본래 추기경이었으나 조카인 세바스티앙 1세가 모로코 원정에 나섰다가 전사하여 후손을 남기지 못하자, 환속하여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 역시 후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 그가 죽은 후 아비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포르투갈 왕위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서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 오귀스트 로댕
- 왕자: 충렬왕과 정화궁주의 아들.
- 울리히 츠빙글리
- 웅산: 재즈 가수. 3년간 비구니 생활을 하다가 환속하였다. 웅산은 비구니로서 쓰던 법명을 그대로 가수로서의 예명으로도 쓰는 것이다.
- 윤달선: 윤치성의 차남. 윤씨 일족은 대부분 개신교 신자였지만 유독 그만은 불교를 믿어 출가하여 승려까지 되었는데 환속하고 결혼하여 3남 3녀를 낳았다. 하지만 환속 이후에도 불교계의 존경을 받았다.
- 이마가와 요시모토
- 이이: 모친인 신사임당이 사망한 후 금강산의 한 사찰로 들어갔다. 삭발까지 하였는지는 불명이지만 의암(義庵)이라는 법명까지 받고 수행한 것으로 보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12] 그러나 우연히 유교 경전을 읽고 다시 하산해서 본업인 성리학자로 돌아갔지만 이런 경력 때문에 사후에도 반대파에게는 이 점으로 계속 공격받았다.
- 잔 데케르: 도미니코회 수녀였고 <도미니크>라는 노래로 유명해졌으나 환속했다.
- 조제프 푸셰
- 조제프 프랑수아 보들레르: 샤를 보들레르의 아버지. 본래 가톨릭 사제였다가 환속했다.
- 존 도미니크 크로산
- 체사레 보르자: 역대 추기경 중 최초로 스스로 추기경직을 사임하고 환속한 케이스다.
- 쵸주인 모리아츠
- 측천무후: 본래 당나라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태종이 죽자 태종의 다른 후궁들과 함께 감업사(感業寺)로 보내져 비구니가 되었지만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무씨를 환속시켜 궁으로 데려와서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 최항
- 치지와 미겔(千々石ミゲル): 덴쇼 소년사절단원 중 하나. 예수회에서 퇴회했다.
- 카타리나 폰 보라: 수녀 출신으로, 환속하여 마르틴 루터와 혼인하였다.
-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서강대학교 초대 학장. 예수회 신부였으나, 서강대 학생이던 조안 리와 사랑에 빠져 환속하여 그녀와 결혼했다.
- 테오도르 준 박
- 프랑수아 라블레
- 한동일: 바티칸 공소원(로타 로마나) 변호사
- 행창(김창규)
- 현종(고려): 이 케이스는 왕위를 이을 왕자가 아니면 절에 보내는 고려 시대의 관습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현종은 천추태후의 견제로 인해 신혈사에 들어간 경우다.
- 후지와라노 테이시
3.2. 가상인물
- 나는 친구가 적다 - 타카야마 케이트: 작중 내내 수녀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했고[13] 하세가와 하야토에게 반한 후 코다카에게 '새엄마를 갖는 건 어떠냐'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고 11권에서 환속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결혼생활을 위한 지식을 얻고 있다.[14]
-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 토도 노리미치(藤堂准至), 사사하라 유리아(笹原ユリア): 토도 시마코의 부모. 노리미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승려 수업을 받고 있었고 유리아는 수녀원에서 수련 중이었으나 서로 좋아하게 되어 환속하여 결혼하고는 시마코를 낳았다. 토도 가문은 대대로 대처승 가문이라서 (유리아와 달리) 노리미치는 승려로 살면서도 결혼할 수 있었지만 가톨릭 신자인 유리아가 '승려의 아내'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노리미치는 승려 신분을 포기했이다. 노리미치와 유리아는 서로의 종교를 완전히 포기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했지만 둘 다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몰래 염주와 묵주를 하나씩 숨겨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린 딸 시마코를 남겨두고 요절했고 나중에 시마코가 부모님의 유품 상자 속에서 염주와 묵주를 발견하게 된다.
- 센고쿠히메 3 - 우에스기 겐신: 연인이 된 아마기 소우마가 겐신에 대한 암살 위협으로부터 구해주고 쓰러져 중태에 빠지자 절망하여 출가했지만,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기에 환속하여 소우마가 깨어나 재회할 때까지 딸을 낳아 키우며 영주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1] 대처승도 포함된다. 대처승이 되는 순간부터 단지 비구승과 달리 결혼하고 아이를 얻을 수만 있을 뿐 일반인 수준의 자유로운 성생활은 못 하게 되기 때문이다.[2] 남자 수도자는 수사(修士), 여자 수도자는 수녀(修女).[3] 역시 불교 용어지만 다른 종교에 사용하기도 한다.[4] 사실 종교인 역시 직업의 하나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매우 간단한 문제다. 종교인이라는 직업을 자의로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가지고자 하는 일종의 전직이라고 생각하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5] 따라서 환속사제는 미사와 성사를 합법적으로 집전할 권한을 박탈당하지만 일단 환속사제가 집전한 성사는 불법이지만 유효한 것이 된다. 세례성사와 마찬가지로 성품성사도 근본적으로는 그 자체가 취소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6]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와 조안 리 같은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7] 서유럽과 동유럽의 루터교회는 성직제도가 없고 대다수의 개신교처럼 목사가 있다.[8]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 황족들은 승려(대처승) 생활을 했지만 유신 이후에는 승려 대신 군인이 되었다.[9] 정교회 주교라서 결혼을 할 수 없었지만 페트로비치네고시 가문이 대대로 세습했는데 결혼 없이 세습을 이어가기 위해 삼촌이 조카에게 물려주는 숙질계승이라는 독특한 계승법을 채택했다.[10] 아직 정식 수도자는 되지 못하고, 지원자 정도.[11] 지금의 불가리아는 슬라브계 국가가 되었지만 본래 불가리아를 세운 불가르족은 투르크계 유목민으로서 불가리아의 군주들은 유목 사회의 전통에 따라 칸을 칭했다.[12] 이걸 밝혀낸 이가 사학자 이병도였다. 당시 조선의 세태를 생각하면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것은 아니었을 거고 평신도인 거사였을 확률이 높다.[13] 하세가와 코다카에게 고백한다거나, 코다카의 아버지인 하야토에 반한다거나 등등.[14] 하야토와 이어져 하세가와 코바토, 하세가와 코다카의 새엄마가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은 상태로 결말지었기 때문에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