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2:41:25

시메온 대제

시메온 1세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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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불가리아의 국영방송 BNT 1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불가리아인 10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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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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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시메온 대제.jpg
불가리아의 화가 디미터르 아타나소프 규제노프(Димитър Атанасов Гюдженов, 1891~1979)가 그린 시메온 대제의 상상화
이름 시메온
(영어: Simeon, 불가리아어: Симео̀н)
출생 864년 또는 865년
사망 927년 5월 27일
직위 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

1. 개요2. 즉위 이전3. 즉위 이후4.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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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1제국 제 20대 군주. 세계 최초로 차르를 칭했으며[1], 불가리아를 발칸 반도 최강의 국가로 육성시키고 동로마 제국을 압도한 명군이다.

2. 즉위 이전

역사상 최초로 차르 칭호를 사용한 불가리아시메온 대제가 칭제한 것에는 그의 아버지인 [2] 보리스 1세개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보리스는 외교적 고립[3]에서 벗어나는 것과 종교적 통합[4]이라는 2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었는데, 밀라노 칙령 이래 로마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세속 군주 가운데 서열 1위였기에, 기독교, 특히 제국 정부에서 공의회를 열어 교리를 정리해 온 정통파(니케아-칼케돈파)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형식상으로나마 불가리아의 칸에 대한 로마 황제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5] 결국 이 점을 우려했던 이들에 의해 기독교화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 저항운동의 중심에 선 인물은 바로 보리스의 장남 블라디미르였다. 블라디미르는 보리스의 재위 기간 중에는 기독교화 정책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자신에게 양위하자 본색을 드러내고 반기독교 정책을 펴며 이교도 국가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보리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장남을 폐위하고 눈을 뽑아버린 후, 주교였던 삼남을 환속시켜 즉위하도록 했으니 그가 바로 시메온 1세였다.

3. 즉위 이후

블라디미르의 폐위와 시메온 1세의 즉위는 불가리아의 기독교화가 더이상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시메온 대제에게 한 가지 과제를 던져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동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라는 명분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한 해결책은 바로 프랑크 왕국카롤루스가 했던 것처럼, 로마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었고, 913년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면서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의 칭제는 기독교 세계의 성직자 서열 1위였던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은 카롤루스의 칭제보다도 명분이 떨어졌기에, 그는 동로마의 어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딸을 시집보내서 황제의 장인으로서 공동 황제가 됨으로써 진짜 로마 황제가 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동로마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섭정단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니콜라오스와의 밀약을 맺음으로써 실현되는 듯했으나, 니콜라오스가 쿠데타로 실각[6]하면서 무산되었다.

그러자 시메온 대제은 또다시 동로마를 군사적으로 압박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동로마 해군 제독 출신의 로마노스 레카피노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콘스탄티노스 7세의 장인이 되어 공동 황제 로마노스 1세로 즉위한 뒤에는 더더욱 그 야망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 시메온 대제는 무력으로 로마노스 1세를 축출하기 위해 이슬람 세력파티마 왕조를 끌어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로마노스가 파티마 왕조의 사신을 회유하면서 실행하지 못했고, 더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시메온 대제는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것을 포기하고, 로마노스의 제위를 인정하는 대신, 로마노스는 시메온 1세불가리아인의 황제를 칭하는 것은 묵인하게 되었다. 이로써 시메온 대제은 비록 진짜 로마 황제가 되진 못했지만, 황제 칭호를 인정받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로마 황제와 대등한 관계가 된다는 목표는 달성하게 되었고,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919년 대제라는 칭호를 받은 유일한 불가리아 군주가 되었다. 그렇다고 전쟁을 바로 그만둔 것은 아니고 그 이후로도 92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동로마와 계속 전쟁을 벌여 불가리아의 영토는 이 유튜브 지도 영상에 의하면 남쪽으로는 코린토스 지협을 넘어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정복했다. 이 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면 영어 위키백과Byzantine–Bulgarian war of 913–927을 참고하면 된다.

4. 업적

시메온 1세는 그리스 방면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였다.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로마노스 1세는 시메온 1세에게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황제(차르)의 제관을 씌워주었고, 로마 제국프랑크 왕국 다음의 세 번째 유럽 제국인 불가리아 제국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고대 후기 때의 5대 총대주교 이후 최초의 총대주교좌인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창설되어 종교적으로도 큰 위신을 얻었다.

당시 불가리아 제국의 위세는 실로 대단한 것으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던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에 의해 키릴 문자가 만들어졌으며, 이 키릴 문자를 바탕으로 성립된 교회 슬라브어와 이를 바탕으로 향유된 불가리아 문학은 정교회 슬라브권으로 퍼져나갔다. 이 고대 교회 슬라브어는 동유럽권의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불가리아는 러시아 이전의 슬라브 세계의 실질적인 맹주 역할을 하는 국가가 된다.

이렇게 불가리아는 동유럽권의 양대 강국이었던 동로마 제국과의 오랜 투쟁에서 승리하며, 경쟁자를 탈락시키고 서부와 북부로 계속해서 팽창해 나가며 발칸 반도의 대국으로 번영할 수 있었다.
[1] 여담으로, 세계 최후의 차르 역시 같은 이름의 불가리아 차르 시메온 2세다. 실제로 불가리아 왕국의 역대 군주는 그를 포함해 셋뿐이고 시메온이라는 이름을 쓰는 차르 역시 그 혼자이지만, 넘버링은 시메온 대제의 것을 이어서 2세를 칭했다.[2] 지금의 불가리아슬라브계 국가가 되었지만, 본래 불가리아를 세운 불가르족은 튀르크계 유목민이었고, 불가리아의 군주들은 유목 사회의 전통에 따라 칸을 칭했다.[3] 당시 불가리아는 서쪽의 대 모라비아 왕국과 남쪽의 동로마 제국에게 동시에 압박받으며 양면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었다.[4] 불가리아의 원주민인 트라키아인은 트라키아가 로마령이었던 시절 로마기독교 국교화에 의해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주민인 슬라브족은 슬라브 신화의 신들을 믿었으며, 또다른 이주민이자 지배 계급인 불가르족은 텡그리 신앙을 믿었기에, 당시 불가리아에는 3가지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5] 더 예전으로 거슬러가면, 고대 후기~중세 초기에 게르만족 왕, 왕족, 귀족들이 아리우스파를 믿었던 이유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신심이 유달리 깊어서라기보다는, 정통파는 곧 로마 국교회라서 로마 황제를 종교적으로도 상급자로 인정하고 들어가야 됐기 때문에 일부러 최대한 피해보려고 한 것이다.[6] 총대주교직은 유지했으나 섭정 자격은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