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5-02 01:17:14

토도르 스베토슬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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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토도르 스베토슬라프.jpg
이름 토도르 스베토슬라프
(영어: Theodore Svetoslav, 불가리아어: Тодор Светослав)
출생 미상
사망 1322년
직위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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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2제국 18대 차르. 이반 아센 2세의 사망 이래 60년간 혼란스러웠던 불가리아를 재정비하고 발칸 반도의 강대국으로 각성시킨 명군이다.

2. 생애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와 마리아 황후의 아들로,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1270년대 초반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279년 이반 아센 3세동로마 제국의 도움으로 차르가 된 뒤,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는 데스포티스로 선임되는 조건으로 마리아와 이혼하고, 이반 아센 3세의 여동생 키라 마리아와 결혼했다. 그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인질로 니케아에 보내졌다. 1280년 이반 아센 3세가 이바일로의 연이은 공세에 겁을 먹고 동로마 제국으로 달아난 뒤,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가 보야르들의 추대를 받아 새 차르가 되었다. 그는 키라 마리아와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첫번째 아내와 아들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1284년 또는 1285년, 토도르는 부친에 의해 황위 계승권자로 선언되었다. 그는 여전히 인질이었지만 테살리아의 세바스토크라토르인 요안니스 앙겔로스의 딸과 약혼했다. 1284년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이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어머니 마리아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여전히 인질로 남았다. 불가리아 총대주교 요아킴 3세 등은 토도르의 석방을 주선했고, 결국 안드로니코스 2세는 키라 마리아를 동로마 제국에 돌려받는 대가로 토도르도 불가리아에 보냈다. 이렇게 해서 본국에 겨우 돌아온 그는 부친과 공동 통치자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1285년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이 불가리아를 침공하자, 게오르기는 노가이 칸의 봉신을 자처하고 토도르를 다시 킵차크 칸국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그는 그곳에서 15년간 인질 생활을 하였으며, 킵차크 칸국의 가신으로 인식되었다.

1292년 부친이 노가이 칸에 의해 폐위된 뒤, 그는 본국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해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노가이 칸의 아내 에우프로시나 팔레올로기나[1]는 그를 가엽게 여겨 부유한 상인 판도론의 손녀와 결혼을 주선했다. 이 손녀는 에우프로시나를 대모로 섬겼기 때문에 '에우프로시네'라고 불렸다. 토도르는 이 결혼 덕분에 부유한 처가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던 1299년, 노가이 칸이 토크타 칸과의 전쟁 도중 전사했다. 이에 노가이 칸의 아들 차카는 잔존 세력을 이끌고 토도르와 함께 불가리아로 향했다. 타르노보에 도착한 뒤 보야르들에게 뇌물을 주어 무혈 입성하였고, 보야르들로부터 불가리아의 차르로 추대받았다. 그러나 1300년, 토크타 칸이 노가이 칸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불가리아까지 쫓아와서 타르노보를 포위했다. 그러자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신속하게 음모를 꾸며 차카를 감옥에 가두었고, 곧 목을 졸라 죽였다. 차카의 수급은 토크타 칸에게 보내졌고, 토크타 칸은 만족하여 돌아갔다. 그 후 토도르 스베토슬라프가 보야르들의 추대로 새 차르로 즉위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 킵차크 칸국에서 오랜 세월 인질로 살아가야 했고, 부친이 별다른 이유없이 외세에 의해 강제 폐위되면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또한 여러 보야르들이 불가리아 각지에서 할거하며 차르를 좌지우지하고, 외세의 침략에 힘을 합쳐 대항하기보다는 기득권을 챙기는 데 급급한 모습도 지켜봤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고 오랜 혼란으로 파탄 국가로 전락한 불가리아를 재건하려면 강력한 황권을 갖춰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즉위 직후 황권에 위협이 되는 이들을 타타르와 밀접하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숙청했다. 심지어 불가리아 대주교인 요아킴 3세마저 타타르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타르노보에서 추방했다. 보야르들은 이에 반발해 130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한 미하일 아센 2세를 복위시키려 했지만, 토도르가 사전에 이를 간파하고 음모를 꾸민 보야르들을 모조리 처형하면서 실패했다.

1304년, 토도르는 본격적으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일찍이 킵차크 칸국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노가이 칸의 원정에 항상 따라갔으며,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전투 기술은 물론이고 전쟁술과 전략 등을 익혔다. 그는 이를 잘 활용해 동로마 제국에게 빼앗겼던 트라키아 북부에 대한 탈환 작전을 성공리에 펼쳤다. 메셈브리아, 안키알루스, 소조폴, 아흐토폴 등이 이 시기에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의 아들 미하일 9세는 이에 맞서 군대를 일으켜 스카피다 강 인근에서 불가리아군과 마주쳤다. 초기의 전투 후 불가리아군이 후퇴하자, 동로마군은 추격에 나섰지만 강 위의 다리가 돌연 허물어졌다. 그 순간 불가리아군은 반격하였고, 동로마군은 속절 없이 붕괴되었다. 미하일 9세는 가까스로 빠져나왔고, 토도르는 흑해 연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1304년 8월, 미하일 9세는 전 재산을 털어서 군대를 재조직한 뒤 슬리벤 주변의 일대를 공격하여 황폐화시켰다. 이리하여 흑해 연안을 재확보했지만, 그해 가을에 토도르가 다시 반격하여 흑해 연안을 공략하고, 소조폴을 확실히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2세 코스마스를 체포했다. 또한 크란의 데스포티스 알디미르는 토도르의 지시에 따라 트라키아 일대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토도르가 이대로 강성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전 차르 스밀레츠의 형제이며 스레드나 고라 산맥 일대에서 독립된 세력을 꾸리고 있던 라도슬라프, 보이실을 후원해 내전을 일으키려 했다.

라도슬라프는 동로마군의 지원을 받고 크란의 데스포티스이자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형제인 알다미르와 공모하여 토도르를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토도르는 이 음모를 간파하고, 1305년 알다미르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라도슬라프의 군대를 격파해 라도슬라프 및 13명의 동로마 장성을 붙잡았다. 라도슬라프는 실명형에 처해진 뒤 감옥에 갇혔고, 13명의 동로마 장성은 여전히 동로마 제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토도르의 부친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와 교환되었다. 토도르는 돌아온 부친이 정해진 도시에서 호화롭게 지내도록 배려하면서, 그 대가로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도록 하였다.

1306년, 알란 병사 16,000명은 동로마 제국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토도르에게 불가리아 망명을 허가해 달라고 호소했다. 토도르는 즉시 1,000명의 분견대를 보내 그들의 탈출을 도왔다. 그러나 알란족은 불가리아 영토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카탈루냐 용병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다. 카탈루냐 용병의 전투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은 토도르는 그들이 동로마 제국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는 걸 고려하여 용병대 지도자인 베렝가르 데 로카포르트에게 불가리아로 건너올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여동생이자 카라 쿠위크(Kara Küçük)[2]의 미망인인 엘레나 테르테르를 결혼시키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협상은 좌절되었고, 카탈루냐 용병대는 아테네 공국을 정복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1306년 말, 토도르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흑해 연안 도시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결정을 연기했다. 이에 토도르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곡물을 가득 실은 갤리선 2척을 보냈다. 이에 시민들은 황제에게 불가리아와 평화 협약을 맺으라고 압박했다. 결국 1307년 양국의 평화 협약이 맺어졌고, 미하일 9세의 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와 토도르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리하여 토도르는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얻어낸 영역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그 후 토도르는 남은 통치 기간 동안 이웃 국가들과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지 카파와는 1315년과 1316년 사이에 무역 분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지만 이듬해 회복되었다. 또한 1310년에서 1311년 사이에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슈 2세 밀루틴이 타르노보에 방문했을 때 국빈으로 대접하였고, 이 덕분에 양국간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한편 북쪽의 헝가리아 아르파드 왕조가 단절된 이후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세베른 바나트를 회복했다.

1320년 동로마 제국에서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와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간의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안드로니코스 3세를 지원했다. 1320년과 1321년 두 차례에 걸쳐 트라키아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면서 안드로니코스 2세를 압박하였고, 결국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손자와 화해하여 제국을 공동으로 다스리기로 하였다. 1322년경 토도르는 평안하게 사망하였고, 아들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가 새 차르에 옹립되었다.

[1] 미하일 8세의 사생아이다.[2] 차카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