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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이 위치한 섬 일대의 항공뷰
구도심 내의 전통 가옥들과 시계탑
1. 개요
불가리아어 | Несебър |
그리스어 | Νεσέμπαρ |
튀르키예어 | Nesebar |
불가리아 동부의 도시. 네세버르로도 표기되고, 인구는 약 3만명이다. 부르가스에서 동북쪽으로 30km, 바르나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전근대 시기의 메셈브리아 (Μεσημβρία)로써 동로마 제국 및 불가리아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현대 들어서는 흑해 최대의 휴양지로 개발되었고, 도시의 남북으로 해수욕장과 리조트들이 펼쳐져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슬란체브 브랴그 (Слънчев бряг) 혹은 '써니 비치'라 불리는 긴 모래사장 해변이 유명한데, 1958년부터 기존의 해안 사구를 관광지화 한 것이다. 방파제로 이어진 섬의 구도심에는 중세 시기 성벽과 성당들이 남아있고, 남쪽의 인접 도시 포모리에 (안키알로스) 역시 휴양 및 역사 도시이다. 20세기 초까지 주민 구성은 그리스인이 대다수였지만 발칸 전쟁 후 떠났고, 현재는 다수의 불가리아인과 4백여 튀르크인 등으로 구성된다.
2. 역사
메셈브리아 성벽 유적
고대 트라키아 인들이 마을을 형성했고, 기원전 6세기 초엽 메가라의 도리아인들이 식민 도시를 세웠다. 당시 창건자인 메나스 혹은 멜라스의 이름에서 메네브리아 (Μενεβρία) 혹은 멜셈브리아 (Μελσημβρία)로 명명되었으나, 결국 메셈브리아 (Μεσημβρία)로 굳어졌다. 기원전 5세기에는 이오니아 반란 후 아케메네스 제국을 피해 이주한 칼케돈 및 비잔티온 주민들이 유입되었다. 이오니아계 도시가 대부분이던 흑해의 유일한 도리아인 주도 폴리스였던 메셈브리아는 오데소스 (바르나), 토미스 (콘스탄차), 이스트리아, 아폴로니아 (소조폴)와 함께 에우히네의 펜타폴리스를 이루었다. 기원전 424년에는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에 가담했다.
그 무렵 메셈브리아는 자체 동전을 주조했고, 기원전 3세기에는 금화도 주조했다. 시가지는 아크로폴리스, 아폴론 신전, 아고라 등으로 구성되었고 구도심 북부에 일부 유구가 남아있다. 도시 규모는 작았지만 메셈브리아는 프톨레마이오스 및 포이팅거 지도에 모두 등장하는 등 지속되었고, 상업항으로써 아폴로니아와 경쟁 구도를 이루었다. 기원전 71년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의 흑해 연안 원정으로 로마 제국령이 된 후로도 메셈브리아는 동전 주조 등의 자치권을 유지했다. 소도시이던 메셈브리아는 그 최적의 방어 조건 덕에 4세기 들어 북방 민족의 침공에 노출된 주민들의 유입으로 성장했다.
2.1. 동로마 제국 & 불가리아 제1제국기
성 소피아 성당 (스타라 미트로폴리야, 옛 주교구)
성 스테판 성당 (노바 미트로폴리야, 신 주교구)의 내부 프레스코화
동로마 시기 메셈브리아는 흑해 연안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고, 680년 콘스탄티노스 4세가 아스파루흐의 불가리아 제1제국을 원정했다가 역병에 걸려 이곳에서 요양했다. 다만 황제의 부재가 전사 소식으로 퍼지자 동로마 원정군이 도주하며 붕괴되어 괴멸되는 참사가 벌어졌고, 불가리아 제국의 모에시아 정복 및 발칸 반도 정착으로 이어졌다. 774년 말엽, 불가리아 원정에 나선 콘스탄티노스 5세는 수륙 양면으로 진격하려 했지만 함대가 메셈브리아 근처에서 역풍을 맞아 나아가지 못하자 회군했다.
812년 11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리던 불가리아의 칸 크룸이 동로마 측에서 이탈한 아랍 공성 기술자들을 고용하고 2주 간의 포위를 가한 끝에 메셈브리아를 함락했다. 이때 성내에 있던 그리스의 불 무기가 크룸에게 넘어갔고, 자신감을 얻은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지만 격퇴된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미하일 1세 랑가베스가 813년에 베르시니키아 전투에서 크룸과 정면 대결하지만 대패하고 퇴위했다. 배신을 통해 즉위한 레온 5세는 크룸 암살을 시도했고, 분노한 그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1만을 학살하자 보복으로 메셈브리아를 습격해 불가르 수비대를 학살했다. 더욱 분노한 크룸은 재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나 병사했다.
816년 레온 5세가 파견한 동로마 해군은 재차 메셈브리아를 점령했다. 다만 크룸의 후계자 오무르타크와 맺은 휴전에서 도시는 불가리아 령으로 남게 되었다가, 864년에 내우외환의 위기에 몰린 불가리아의 칸 보리스 1세가 동로마에 반환했다. 반세기가 지나 917년에 후자의 아들이자 역사상 첫 차르인 시메온 1세가 앙킹알로스 전투에서 대 레온 포카스의 동로마 원정군을 괴멸시킨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남하하며 메셈브리아를 재차 점령했다. 927년 차르 페터르 1세가 메셈브리아에서 동로마 측과 평화 회담을 한 후 휴전 조약을 체결한다.
2.2. 동로마 제국 & 불가리아 제2제국기
판토크라토르 성당
동로마-불가리아 시기에 보강된 성벽
11세기 들어 동로마 제국이 불가리아 1제국을 멸망시키며 도시를 재정복했다. 이 무렵 불가르식 지명인 메세바르 혹은 네세바르가 병용되기 시작했고, 지중해 각지와 다뉴브 하구를 이어주는 무역 거점으로써 번영했다. 1201년 메셈브리아는 다시 불가리아 제2제국에게 정복되었다. 1257년 콘스탄틴 아센 1세에게 찬탈당한 기존의 차르 미초 아센은 메셈브리아로 피신해 독자적으로 화폐를 주조하며 내전을 벌이다가 1263년, 콘스탄틴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동로마 제국에 영토를 넘기며 망명했다. 따라서 메셈브리아는 약 반세기 만에 동로마 령이 되었다. 13세기에도 도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안코나, 두브로브니크 등과 교역했다.
1280년에는 잠깐 차르가 되었다가 이바일로에게 축출된 이반 아센 3세가 메셈브리아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1304년, 차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가 쇠퇴기에 접어든 안드로니코스 2세의 동로마 제국을 공격해 메셈브리아를 재점령했다. 1330년경 안드로니코스 3세가 수복하며 다시 동로마 령이 되었고, 이로써 차르 이반 스테판이 폐위되었다가 그 후계자인 이반 알렉산더르가 다시 메셈브리아를 점령했다. 이반 알렉산더르의 치세에 메셈브리아에는 많은 정교회 성당들이 세워져 종교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던 1366년 동로마 황실 혈통인 사보이아 백국의 아메데오 6세가 친척이자 불가리아에 포로로 잡혀 있던 요안니스 5세의 석방을 위해 십자군을 일으켜 불가리아 해안을 공격했다. 그해 10월, 사부아 십자군은 격전 끝에 많은 사상자를 내며 메셈브리아를 점령했고 그 보복으로 주민들에 남녀노소 구분 없는 학살을 행했다. 십자군이 바르나까지 공격하자 이반 알렉산더르는 요안니스를 석방했고, 아마데오 6세는 요안니스와 함께 메셈브리아에서 월동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1371년,이반 시슈만의 즉위와 함께 불가리아 제2제국이 분열되며 일대는 도브루자 친왕국 (혹은 그대로 동로마) 령이 되었다. 1390년경 메셈브리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되었으나, 앙카라 전투 이후 제국이 약해진 틈에 1403년의 갈리폴리 조약으로 동로마 제국에게 양도되었다.
2.3. 오스만 제국기
해안 성벽 유구와 오스만 시기 저택
오스만 시기에 세워진 시계탑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및 동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메셈브리아도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고, 이후 쇠퇴했지만 농산물 수출로 명맥을 유지했다. 오스만 지배기에 메셈브리아 혹은 네세바르는 '미시브리'로 불렸고, 이슬리미예 (슬리벤) 산작에 속한 카자 (읍)였다. 도시는 1611년, 1613년, 1651년 세 차례에 걸쳐 코사크 해적의 습격을 받았고 마지막의 경우 시가지 대부분이 불탔다. 19세기 들어서는 흑해 불가리아 양식의 목재 주택들이 세워졌고, 일부 유력자들은 그리스 독립 전쟁의 불씨가 된 필리키 에테리아에 동조했다. 일부 청년들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부대에 참여했다. 1829년 6월, 러시아 제국군이 도시를 점령했고 오스만 함선을 나포하여 올가라 명명해 해군에 편입시켰다. 다만 이후 불가리아 독립이 논의될 때에도 메셈브리아는 그리스 다수 도시였기에 제외되었다.
2.4. 근현대
1880년에 세워진 성모 승천 성당과 구도심
1960년대 들어 개발된 써니 비치 일대
1878년 도시는 러시아 제국의 점령을 거쳐 오스만 제국의 자치주인 동루멜리아 령이 되었고, 1885년 불가리아 공국에 합류했다. 당시 메셈브리아는 그리스계 어부 및 포도 농부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고, 1900년 기준 2천여명이 거주했다. 그중 그리스계는 90%에 달했으나, 발칸 전쟁 후 대부분 자의 혹은 타의로 이주했고 불가리아계가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1934년에는 기존의 메셈브리아 (Месемврия) 지명도 네세바르로 바뀌며 불가르화가 진행되었다. 1958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은 관광 산업 육성을 위해 네세바르 북쪽의 슬런체프 브랴크 (써니 비치)를 개발했고, 20세기 말에 이르면 흑해 연안 최대의 휴양지가 되었다. 따라서 네세바르 구도심에도 관광객이 많이 유입되었고, 1983년에는 구도심이 위치한 섬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3. 볼거리
해안 성벽과 구도심
육지와 연결된 성문 일대
육지와의 연결로에 있는 옛 풍차
- 판토크라토르 성당 (църква „Христос Пантократор“)
14세기에 세워진 비잔틴 양식의 성당으로, 외벽의 터키석 장식과 스바스티카 문양이 두드러진다.
파일:네세바르 14.jpg
- 성 스테판 성당 (Храм „Свети Стефан“)
비교적 이른 시기인 11세기에 세워진 성당으로, 내부의 프레스코화가 잘 남아있다. 현재는 박물관이다.
-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 성당 (църква „Свети архангели Михаил и Гавраил“)
14세기에 판토크라토르 성당과 비슷한 양식으로 세워졌다.
- 성 소피아 성당 (Храм „Света София“)
이른 시기인 6세기에 세워져 9세기에 확장되었으나, 1257년 베네치아 군에게 약탈된 후 18세기에 버려졌다.
- 성 요한 알리투르게토스 성당 (или „Свети Йоан Алитургетос“)
14세기에 세워진 십자가 꼴의 성당으로, 남서쪽 성벽에 접한다.
- 세례 요한 성당 (Църква "Свети Йоан Кръстител")
비교적 이른 시기인 11세기에 세워진 성당.
- 성스러운 구원자 성당 (Възнесение Господне)
비교적 늦은 시기인 1609년에 세워진 성당
- 고대 극장 (Античен театър)
일부 남은 유적지에 재건된 고대 극장. 가끔 공연이 열린다.
* 동정녀 엘레우사 성당 (Базилика „Богородица Елеуса“)
5세기에 세워져 14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 수도원 겸 성당 (바실리카). 옆의 탑은 풍차 유적
- 성 파라스케바 성당 (Църква "Света Параскева")
11세기의 성녀 파라스케바를 기리는 성당으로, 14세기에 세워졌다.
- 동로마 시기 목욕탕 (Ранновизантийски терми)
흔하지 않은 동로마 제국기 목욕탕 유적
구도심의 고즈넉한 골목
전통 양식의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