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4 10:29:24

사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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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불가리아의 국영방송 BNT 1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위대한 불가리아인 10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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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2위13위14위1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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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니크의 크라크라 이벳 라로바 파나욧 히토프 오무르타그 아센 즐라타로브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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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무일.jpg
이름 사무일
(영어: Samuel, 불가리아어: Самуил)
출생 미상
사망 1014년 10월 15일
직위 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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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1제국 제 24대 차르. 동로마 제국 바실리오스 2세 황제의 불가리아 전쟁 최대의 강적이었다. 그러나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참패한 뒤 실의에 빠져 사망했다.

2. 생애

불가리아 귀족 니콜라 백작과 아르메니아 출신 여인의 넷째이자 막내 아들이다. 니콜라는 소피아의 백작으로 알려졌지만, 마케도니아의 백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970년 1월 30일 불가리아 차르 페터르 1세가 사망한 후, 불가리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는 이 때를 틈타 대군을 이끌고 불가리아를 침략하여 단숨에 공략하고 , 페터르 1세의 아들 보리스 2세를 차르로 삼고 꼭두각시로 부렸다.

스뱌토슬라프 1세는 여세를 몰아 동로마 제국까지 침공했지만,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요안니스 1세 황제의 부하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에게 참패했다. 그 후 요안니스 1세는 972년 친히 불가리아로 진격하여 골지마 캄지야에서 키예프군을 격파하고, 불가리아의 수도 프레슬라프를 함락한 뒤 보리스 2세를 포로로 잡았다. 스뱌토슬라프 1세가 패배를 인정하고 키예프로 돌아간 뒤, 요안니스 1세는 보리스 2세와 동생 로만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고 가 개선식에 참석시키고, 불가리아를 제국의 관할에 넣는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 서쪽 지방에까지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사무일은 이 공백을 틈타 형제 다비드, 모세, 아론과 함께 서부 불가리아에서 세력을 일으켜 동로마 제국에 맞섰다.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동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할 것을 제의하였고, 다비드에게 테살로니키와 테살리아 주변의 국경지대를 지키게 하였다. 또한 모세에게 에게해 연안과 세레스에 대한 공격의 전초기지가 될 스트루미차를 다스리게 하였고, 아론은 스레데츠를 통치하며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베오그라드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사무일 본인은 비딘의 강력한 요새에서부터 불가리아 북서부를 통치했으며, 장차 옛 수도 프레슬라프를 포함한 동부 불가리아 영토를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976년 1월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하고 바실리오스 2세가 즉위하자, 사무일은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군은 패배를 거듭하여 트라키아로 패주하였고, 동로마의 정복에 반대하지 않았던 불가리아 귀족과 관리들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당시 제국은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의 반란을 수습하느라 불가리아의 침략에 대처할 수 없었다. 이에 어린 황제를 대신해 실권을 쥐고 있던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음모를 통해 사무일을 실각시키기로 하고, 사무일의 형 아론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켜주고 트라키아의 지배자로 세워줄 테니, 사무일을 배신하라고 권유했다. 아론은 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양자는 긴밀한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무일은 아론을 공격했고, 976년 6월 14일 뒤프니차 인근에서 아론과 그의 부하들을 모조리 처단했다. 다만 아론의 아들인 이반 블라디슬라프만은 사무일의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가 간청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론을 이용한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전 차르인 보리스 2세와 로만을 불가리아로 돌려보내서 내분을 일으키게 하였다. 보리스 2세는 국경 근처의 숲을 지나가던 중 동로마 복장을 입은 것을 보고 오해한 불가리아 경비대에게 살해되었다. 조금 뒤쳐져서 걷던 로만은 경비대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로만은 비딘으로 끌려갔는데, 사무일은 의외로 그를 차르로 추대하고 자신은 장군을 자처했다. 당시 로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갔을 때 요안니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거세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식을 둘 수 없으니 사무일이 결국 그의 뒤를 이을 게 확실했다. 로만은 사무일에게 국정을 맡겼고, 자신은 신앙 생활에 전념했다.

사무일은 동로마군이 바르디스 스클리로스의 반란군에 집중된 틈을 타 트라키아와 테살로니키, 테살리아, 헬라스, 펠로폰네소스 일대를 휩쓸었고, 많은 동로마 요새들을 공략했다. 977년 테살리아의 중요한 항구도시인 라리사를 포위하여 983년까지 공성전을 벌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구원군을 파견했으나 중도에 격파당했다. 결국 라리사 주민들은 항복하였고, 남자들은 불가리아 군에 강제 입대하고 여자와 노약자는 불가리아 내륙으로 끌려갔다. 985년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를 숙청하고 실권을 잡은 바실리오스 2세는 이대로 밀리기만 하면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98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출정하여 이흐티만 주변의 산맥지대를 지나 소피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20일 동안 공성전을 벌이고도 별 소득을 겪지 못하자 트라키아로 철수했다. 사무일은 트라야누스 관문 주변 계곡에 매복해 있다가 986년 8월 17일 그곳을 지나던 동로마군을 습격했다.(트라야누스 관문 전투) 바실리오스 2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군대는 와해되었고 그가 소유한 보물들은 모조리 사무일에게 돌아갔다. 바실리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뒤, 불가리아가 자신에게 항거했던 날을 뼈저리게 후회할 만큼 철저한 복수를 해주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바르다스 포카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동로마 제국이 또다시 내전에 휘말리자, 사무일은 테살로니키에 공세를 개시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레고리오스 타로니티스에게 군대를 맡겨서 테살로니키를 지키게 했지만, 989년까지 연전연패했다. 불가리아군은 동로마 제국 영역 깊숙이 침투하여 베로이아 등 여러 중요한 요새들을 점령했다. 또한 남쪽에서는 이피로스를 장악했고, 서쪽에서는 아드리아 해의 디라키움을 공략했다. 991년 바르다스 포카스와 스클리로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바실리오스 2세는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황제는 테살로니키로 진군하여 그곳의 방어망을 강화한 뒤, 도시의 수호 성인인 성 데메테리오스의 제단 앞에 기도를 올렸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사무일은 패배를 면치 못했고 로만은 포로로 잡혔다. 동로마 제국군은 베로이아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수복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후에도 불가리아를 꾸준히 공격했지만, 995년 아랍인들이 소아시아를 침략하자 많은 군대를 동방으로 보내야 했다. 사무일은 이 틈을 타 남진하였고, 996년 테살로니키 전투에서 적군을 섬멸해 그레고리오스 타로니티스를 죽이고 그레고리오스의 아들 아쇼트를 사로잡았다. 이후 테살리아를 약탈하고 테르모필레 관문을 넘어 헬라스 테마로 진입해 코린트까지 유린하고 약탈했다. 니키포로스 우라노스 휘하의 동로마군이 그들을 추격했고, 사무일은 군대의 방향을 돌려 이를 맞이했다. 양군은 스페르케이오스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봤는데, 마침 강이 범람해서 건너기 힘들었다. 그래서 불가리아군은 방심하고 있었으나, 우라노스는 996년 7월 19일 밤 극비리에 상류 쪽으로 강을 건너서 불가리아군을 급습했다. 사무일은 팔에 화살이 꽂힌 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는 아드리아 해의 주요 항구인 디라키움을 점령한 후 달마티아의 오지를 횡단하여 보스니아까지 행진해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9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로만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무일은 정식으로 차르에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5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차르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고, 불가리아에 가톨릭을 전파하고 싶어했던 교황은 긍정적인 답변을 해줬다. 998년, 세르비아의 두클랴 공국이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 하자, 그는 군대를 일으켜 두클랴를 침공했다. 요반 블라디미르 대공을 비롯한 적군이 두클랴 산성에 들어가자, 그는 일부 병력을 산기슭에 남겨두고 울치니의 해안 요새를 포위했다. 요반 블라디미르 대공은 항복을 거부했지만, 세르비아 귀족들이 불가리아군에 계속 투항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투항했다. 요반은 프레스파에 있는 사무일의 궁전으로 끌려갔다.

그 후 불가리아군은 달마티아를 통과하여 코토르를 공략하고, 뒤이어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해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주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또한 크로아티아를 침공하여 스플리트, 트로기르, 자다르까지 공략한 뒤 보스니아와 라슈카를 거쳐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딸 테오도라 코사라를 요반 블라디미르와 결혼시킨 뒤 두클랴로 돌려보냈고, 또다른 딸 미로슬라바 공주를 아쇼트와 결혼시킨 뒤 디라키움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장남이자 후계자인 가브릴 라도미르와 헝가리 대공 게저의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헝가리와의 결혼동맹을 성사시켰다.

바실리오스 2세는 아드리아 해에 면한 제국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와 협의한 끝에 1000년경 그를 달마치야 대공에 임명하여 달마치야 해안 지대 전체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로써 해안의 그리스어권 도시들의 안전을 확보한 뒤, 황제는 불가리아를 확실히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1001년 여름, 그는 베로이아 요새를 공략했고, 테살리아에서 불가리아 수비대를 격파했다. 또한 니키포로스 시피아스 휘하의 군대를 발칸 산맥의 북쪽으로 파견하여 프레슬라프와 플리스카를 탈환했다. 이로써 불가리아 북동부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에 들어갔다. 사무일은 적의 수가 워낙 많아서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매복이나 기습 공격으로 일관했지만,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의 전훈을 뼈저리게 익힌 바실리오스 2세가 워낙 철저하게 대비했기 때문에 통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003년 불가리아와 헝가리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당시 헝가리 대공 게저가 사망하자, 사무일은 게저의 아들 이슈트반 1세 대신 줄러와 코파니를 헝가리 왕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1세가 내전에서 승리했고, 자신의 정적들을 도운 것에 보복하고자 불가리아 제국의 북쪽 영역인 다뉴브 강 북서쪽을 침략했다. 이로 인해 불가리아는 헝가리와 동로마 제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고, 전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 때를 틈타 불가리아 북서부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비딘을 포위 공격해 8개월만에 함락시켰다. 사무일은 보복으로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공격해 그 일대를 약탈했다. 1004년, 바실리오스 2세는 스코페로 이동한 뒤 바르다르 강 반대편에서 야영을 하고 있던 적을 야습해 큰 타격을 입혔다. 그 후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페르니크 요새를 포위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트라키아로 철수했다. 사무일은 보복 차원에서 테살로니키를 공격하여 테살로니키 총독 요안니스 샬두스를 생포했다.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불가리아는 내분을 겪기 시작했다. 디라키움 총독 아쇼트는 사무일의 장인인 요안니스 크리셀리오스, 아내이자 사무일의 딸 미로슬라바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아쇼트와 미로슬라바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하였고, 크리셀리오스는 동로마 제국 사령관 유스타시오스 다프노멜리스에게 디라키움을 내주었다. 1006~1007년,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영역 깊숙히 침투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1009년 테살로니카 근방의 크레타에서 사무일의 군대를 괴멸시켰다. 황제는 이후에도 불가리아의 영토에 매년 침공하여 진군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사무일은 이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소모전을 지속한다면, 동로마 제국에 비해 국력이 현저히 약한 불가리아는 패망하고 말 것이었다. 매복 공격으로는 아무런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바실리오스 2세가 영토를 침략하기 전에 길목을 차단하기로 했다. 1014년, 그는 클레이디온 협곡을 점거하여 두꺼운 나무 벽을 세우고, 적이 길고 위험한 우회로로 가도록 유도했다. 그해 여름 클레이디온 협곡에 도착한 황제는 나무벽을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자만 기록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사무일은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네스토리차 장군에게 테살로니키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차 장군은 클류치 인근에서 동로마군에게 패배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나무벽을 어떻게 뚫을 지를 놓고 고심했다. 이때 니키포로스 시피아스가 일부 병력을 몰래 숲이 우거진 언덕 사면으로 보내자는 제안을 했다. 능선을 따라 불가리아군의 뒤까지 가서 협곡으로 내려간 다음 후방을 기습하자는 것이었다. 황제가 승낙하자, 시피아스는 엄선된 병사들을 이끌고 몰래 본진을 빠져나간 뒤 숲을 가로질러 가다가 협곡의 반대편 끝, 즉 불가리아군의 후위까지 간 뒤 숲에서 나왔다. 7월 29일, 그는 공격을 개시했고 황제도 동시에 나무벽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불가리아군은 협공을 견디지 못하고 패주했다. 이때 사로잡힌 병사는 14,000~15,000명에 달했다. 사무일 역시 잠시 포로로 잡혔다가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의 활약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바실리오스 2세는 바르다르 계곡을 완전히 점령하려면 스트루미차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에게 스트루미차 주변의 요새와 성곽들을 정리하도록 했다. 자신은 직접 스트루미차를 공격하기로 했다. 테오필락토스는 요새들을 손에 넣었지만 곧이어 가브릴 라도미르의 복병을 만나 대패하고, 테오필락토스 본인도 전사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가브릴 라도미르가 직접 창으로 테오필락토스를 찔러 살해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 적지 않았는지 바실리오스 2세도 스트루미차의 포위를 풀고 철군했다.

에드워드 기번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바실리오스 2세는 1만 5천 명의 포로를 100명씩 150개조로 나눠서 99명은 두 눈을 모두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나머지 1명은 한 눈만 뽑은 뒤 애꾸 한 명이 나머지 99명을 인솔해서 돌아가게 했다고 한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이것은 과장되어 전해진 이야기로 간주하지만, 불가리아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건 사실이다. 사무일은 전투 직후 쇠약해졌고, 1014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가브릴 라도미르가 차르가 되었지만, 동로마 제국의 거듭된 공세로 영토를 계속 잃다가 1016년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살해당했다. 1018년 2월 이반 블라디슬라프 마저 디라키움 전투에서 전사한 뒤, 불가리아인들은 바실리오스 2세에게 항복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 제1제국은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