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4-15 15:14:10

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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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Sacrum Imperium Romanum (라틴어)
Heiliges Römisches Reich (독일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Banner_of_the_Holy_Roman_Emperor_with_haloes_%281400-1806%29.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358px-Coat_of_Arms_of_Leopold_II_and_Francis_II%2C_Holy_Roman_Emperors-Or_shield_variant.svg.png
황제기 황제 문장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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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rolingian_empire_887.svg(색_수정).png
887년 카를 3세의 영토

파일:Holy_Roman_Empire_1190.svg.png
13세기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최대 강역

파일:2283px-Holy_Roman_Empire_1648.svg.png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분열된 영토
네덜란드스위스를 잃었다.
800년[1]/962년[2] ~ 1806년
국가 <colcolor=black,white><colbgcolor=#fff,#000>황제 찬가
위치 중부유럽
수도 (자문 회의, 1497년 ~ 1806년)
레겐스부르크 (의회, 1663년 ~ 1806년)
— 베츨라어 (대법원, 1689년 ~ 1806년)

(중심 도시 문단 참조)
정치체제 선거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주요 황제 카롤루스 1세
카를 3세
오토 1세
하인리히 4세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2세
카를 4세
카를 5세
요제프 2세
프란츠 2세
언어 공용어 <colbgcolor=#fff,#000> 라틴어
독일어[3]
기타 언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네덜란드어
저지 독일어
프랑스어
슬로베니아어
폴란드어
종교 가톨릭(국교)[4]
종족 독일인
이탈리아인
옥시타니아인
보헤미아인
슬로베니아인 등
주요사건 800년 프랑크 국왕 카롤루스의 황제 대관식
843년 베르됭 조약
924년 ~ 962년 궐위
962년 독일 국왕 오토 대제의 황제 대관식
1254년 ~ 1273년 대공위시대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황제 첫 선출
1356년 금인칙서 반포
1618년 ~ 1648년 30년 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1806년 레겐스부르크 제국 회의, 제국 해체
성립 이전 프랑크 왕국 (800년 이전)
독일 왕국 (962년 이전)
이탈리아 왕국 (962년 이전)
초기 구성국 독일 왕국 (962년 이후)
이탈리아 왕국 (962년 이후)
보헤미아 (1002년 이후)
아를 왕국 (1032년 이후)
중간 독립 교황령 (1177년)
네덜란드 (1648년)
스위스 (1648년)
해체 이후 라인 동맹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1. 개요2. 역사
2.1. 프랑크 제국
2.1.1. 오토 1세 이후의 제국과 별개라는 관점2.1.2. 별개론에 대한 반론
2.2. 오토 왕조2.3. 교황과의 갈등2.4. 대공위시대와 황권의 약화2.5. 합스부르크 왕조2.6. 제국의 해체
3. 국호4. 중심 도시5. 역대 황제6. 정치7. 군사8. 영향력9. 종교10. 오해와 반박11. 각종 매체
11.1. 신성 로마 제국을 모델로 한 것들
12. 둘러보기

언어별 명칭
라틴어 Sacrum Imperium Romanum
독일어 Heiliges Römisches Reich
이탈리아어 Sacro Romano Impero
체코어 Svatá říše římská
기타 언어별 명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colcolor=#232323,#fff> 바이에른어 <colcolor=#232323,#fff> Heiliges Remisches Reich
팔츠 프랑켄 Hailisch Reemisch Raisch
저지 독일어 Hillig Röömsch Riek
헝가리어 Német-római Birodalom
이디시어 הייליגע רוימישע אימפעריע
슬로베니아어 Sveto rimsko cesarstvo
크로아티아어 Sveto Rimsko Carstvo
프랑스어 Saint-Empire romain
네덜란드어 Heilige Roomse Rijk
폴란드어 Święte Cesarstwo Rzymskie
영어 Holy Roman Empire
중국어 神聖羅馬帝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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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은 중부유럽에 존재했던 다민족 국가 체제이다. 1512년의 칙령 반포에서는 정식 명칭을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 하였지만, 정작 이 명칭은 잘 사용되지 않고 그냥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독일 제국(Deutches Reich)이라 불린다. 자세한 건 아래 국호 설명 참조.

800년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1세교황 레오 3세에게 명목상의 '서로마 황제'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황제'라는 개념이 탄생하였으며, 924년 황제 베렝가리오 1세의 사망 이후 제위 계승이 중단되다가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이탈리아 왕국을 통합하고 교황 요한 12세에게 황제 대관을 받으면서 제위가 부활하여 본격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도중 1806년 황제 프란츠 2세가 퇴위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2. 역사

동프랑크 왕국부터 독일 제국까지 독일과 그 주변의 봉토들의 변천사.

2.1. 프랑크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에는 두 가지 중요한 시점이 있다. 첫 번째는 800년 카롤루스 1세교황 레오 3세으로부터 (서)로마 황제 대관을 받은 것이며, 두 번째는 962년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황제 대관을 받은 것이었다.

800년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1세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을 받자 동로마 제국은 로마의 정통 황제는 자신들의 황제뿐이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카롤루스 1세 본인도 교황의 대관으로 황제가 되는 것을 내켜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덕분에 카롤루스 1세는 카롤루스 대제가 되고, 프랑크 왕국도 제국이 되었다. 당대의 동로마 황제였던 여제 이리니와 카롤루스 1세가 혼인할 뻔한 일도 있었지만 무산되었고, 812년 미하일 1세가 카롤루스 1세를 황제로 승인하면서 유럽에는 두 명의 황제가 공존하게 되었다. 이것을 니키포로스의 평화(Pax Nicephori)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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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탈리아 왕국(중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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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카롤루스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과 황제위는 루도비쿠스 1세가 물려받았으며, 그 뒤 그의 장남 로타리우스 1세도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루도비쿠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이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분할된 후에는 로타리우스 1세가 물려받은 중프랑크 왕국과 그 후신인 이탈리아 왕국의 왕위를 얻는 자가 황제위에 올랐다. 동프랑크 국왕 카를 3세가 중프랑크와 서프랑크 왕위까지 접수하고 제위에도 오르면서 프랑크 왕국이 잠시 통일되었지만 888년 카를 3세가 사망하면서 제국의 영토는 다시 쪼개졌다. 이후 이탈리아 왕국에서는 여러 명이 군주를 자처하는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고, 교황이 이들에게 황제 대관을 해주면서 제위 역시 왔다 갔다 하였다.

북이탈리아의 국력은 서프랑크나 동프랑크보다 상대적으로 작았고, 이탈리아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동로마 황제의 영향력과 간섭도 심했다. 하지만 교황에게 인정받는 것은 여전히 명예로운 일이었으며,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와 프로방스 국왕 루이 3세(맹인왕 루이) 같은 다른 지역의 군주들도 이탈리아를 차지하고 교황의 대관을 받았다.

한편, 교황에게 대관 받는 수동적 이미지와는 반대로 이탈리아의 황제들은 교황권을 쥐락펴락하였다. 황제 귀도는 교황 포르모소에게 자기 아들 람베르토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라 강요하였고, 귀도 사후 람베르토는 로마로 가서 포르모소에게 자기의 제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는데 퇴짜를 맞자 포르모소를 감금하였다. 동프랑크 국왕 아르눌프가 이탈리아에 와서 포르모소를 구출하고 황제 대관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동프랑크로 돌아가고 포르모소도 죽자 다시 권력을 잡은 람베르토는 새 교황 스테파노 6세를 시켜 전임 교황 포르모소의 시체를 재판대에 앉혀놓고 능욕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로마노테오도로 2세 등 여러 교황이 쥐도 새도 모르게 의문사하였다. 부관참시 외에도 람베르토는 로타리우스 1세의 '로마 헌장(Constitutio Romana)'을 부활시켰는데, 이게 뭐냐 하면 교황의 선출에 황제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황제는 교회에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탈리아의 황제들은 이탈리아 밖에서도 어느 정도 권한이 남아있었는데, 일례로 이탈리아 국왕 베렝가리오 1세는 황제가 되고 나서 독일 왕국의 영토였던 리에주 교구의 대주교 선출에 분쟁이 생기자 자기가 직접 개입하여 대주교를 임명하였다.

이후 924년 베렝가리오 1세가 암살되면서 카롤루스 왕가에서 시작된 황제위는 완전히 대가 끊긴다.

2.1.1. 오토 1세 이후의 제국과 별개라는 관점

일반적으로 오토 1세의 대관(962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으로 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는 카롤루스 1세의 대관식(800년)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을 보기도 한다. 오토 1세가 대관을 받을 때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를 자처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러나 카롤루스 1세의 대관이 오토 1세 대관의 중요한 선례가 되기는 했지만, 카롤루스 1세의 대관이 오토 1세에게 직접 이어진 것이기 아니기 때문에 두 제국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우선 카롤루스 대제의 제위가 중간에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카롤루스 대제의 제위는 중프랑크로 계승되다가 924년 완전히 소멸되었다. 게다가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과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을 같은 나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중 하나로 영토상 차이가 있다. 비록 이후에 영토가 분할되었지만, 카롤루스 왕조 때 황제들은 명목상으로나마 프랑크 전역의 황제였다. 그러나 오토 1세 때에는 서프랑크와 아를 왕국은 황제의 영역 밖에 있었다. 아를 왕국은 후에 다시 제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서프랑크는 제국의 영역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또한 황제 선출 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카롤루스 왕조 시절 제위는 순수하게 혈통에 의한 상속이었다. 반면 카롤루스 왕조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세습과 제후들에 의한 선출이라는 두 가지 기준이 적용되었고 이 점은 단순히 혈통에 의한 상속과는 분명한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실권이 달랐다. 카롤루스 1세의 제위는 실권이 없는 완전한 명예직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업적은 전적으로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힘에 근거한 것이었다. 카룰루스 대제 시절 그의 제국 = 그의 직할 왕국이었으므로 자신의 직할 영지와 제국의 영역이 일치하지 않은 나중의 사례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손자인 로타리우스 1세 시절에 시작된다. 즉 로타리우스는 명목상 중프랑크, 서프랑크, 동프랑크를 아우르는 황제였지만 그의 직할 영지는 중프랑크에 한정된 것이다.

반면 오토 1세와 그의 직계인 작센 왕조 시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역시 명문화된 권한은 없었지만, 황제의 권위를 바탕으로 실제 제후들에게 영토를 빼앗거나 하사하고 작위와 통치권을 하사거나 빼앗는 등 큰 실권을 행사했다. 당장 오토 1세의 아들 오토 2세 때 제국 내 최대의 제후국인 바이에른과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 바이에른 공국을 쪼개 분할을 명했고 이를 시행에 옮겼다. 또 카롤루스 1세가 '서로마' 대관을 받은 것이라는 점도 거론된다. 이것은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이란 이름도 오토 1세 때부터 확립된 명칭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그 이름을 확립되었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오토 1세의 대관도 카롤루스 왕조 이후 흐지부지 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카롤루스 1세의 제국을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과 분리하여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궁예가 고구려를, 견훤이 백제를 계승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이들이 같은 나라가 아닌 것처럼 오토 1세가 카롤루스 대제의 후계자를 자처했다는 이유만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과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을 지속되는 하나의 연속체(continuum)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 때문에 서구에서도 카롤루스 1세의 제국을 오토 1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과 구별하여 '카롤루스 제국(Carolingian Empire)'(800년~888년)으로 부르기도 한다.

현재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962년을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으로 표기해 놓고, 800년을 각주 표기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와 미국의 고등학교 교과서, SAT 교재, AP 교재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나라의 교과서에도 962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2.1.2. 별개론에 대한 반론

파일:Albrecht_Dürer_-_Emperor_Charlemagne_and_Emperor_Sigismund_-_WGA06997.jpg
카롤루스 대제와 황제 지기스문트(Karl der Große und Kaiser Sigismund) – 알브레히트 뒤러
왼쪽 그림은 카롤루스 대제 이야기할 때 많이 쓰는 그 그림이다. 당대 사람들이 카롤루스 대제를 신성 로마 황제로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연속성만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을 설명할 수 없다. 연속성이 끊긴 대공위시대 이전과 이후의 제국을 완전한 별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이처럼 오토 1세 대관 이전의 공백기도 대공위 시대처럼 일시적인 계승 중단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서로마의 멸망 이후 오도아케르가 동로마 황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 깃발과 의복 등을 갖다 바치며 자신은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를 받음으로써 명목상 동로마의 신하로 들어갔으며 교황에게는 카롤루스 1세에게 서로마 제위를 수여할 권한 따위는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제를 자칭하다가 동로마와 전쟁을 통해 인정받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토 왕조 역시 동로마의 황제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았기에 가문의 교체만 있었을 뿐 제위는 그대로였다.

사실 독일 왕국에서 시작된 신성 로마 제국과 옛 카롤루스 제국과의 연관성이 크게 강조된 것이 룩셈부르크 왕조 때의 일이다. 위에 나와 있는 카롤루스 대제와 지기스문트의 초상화를 함께 그린 것도 룩셈부르크 왕조이며, 황제 넘버링을 할 때, 카롤루스 대제를 1세로 시작하여 서프랑크왕인 대머리왕 샤를을 소급하여 카를 2세라 하고 동프랑크왕인 비만왕 카를을 카를 3세로 만들고 나서 자신을 카를 4세로 칭했던 황제 역시 룩셈부르크 왕조 출신이다. 대머리왕 샤를이나 비만왕 카를은 당대는 물론, 지금도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2세, 3세 넘버링 없이 부르는 경우가 많다.

2.2. 오토 왕조

파일:external/jettandjahn.com/ottopope.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독일 왕국 문서
번째 문단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카롤루스 대제 사후 843년 프랑크 왕국은 베르됭 조약으로 3분할되었다. 그중 독일 지역은 동프랑크 왕국이 차지하였다. 911년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4세(유아왕 루트비히)가 후사없이 죽으면서 카롤루스 왕조의 대가 끊기자 귀족들은 루트비히의 친척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콘라트 1세 역시 후사없이 죽었고, 후계자로 당시 가장 유력한 세력을 보유했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를 지명했다. 그러나 5대 공작령 중 슈바벤바이에른이 하인리히 1세의 선출에 반대했기 때문에 한동안 하인리히 1세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정치적 협상을 통해서 슈바벤과 바이에른도 하인리히 1세를 국왕으로 인정했다. 일반적으로 하인리히 1세 시절부터 독일 왕국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된 이후 독일 왕국의 왕들은 5대 공작령 대표들의 선출에 의해 왕위를 물러받게 된다. 콘라트 1세와 하인리히 1세의 경우 이전 왕들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라 치더라도, 하인리히 1세의 아들인 오토 1세 역시 선출을 통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전통은 고대 게르만족으로 부터 이어온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오토 1세부터 시작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선출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귀족들이 선출한 것은 독일왕(로마왕)이며, 독일왕(로마왕)으로 선출된 이후 교황으로부터 대관을 받아야 정식으로 황제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 교황이 대관하는 절차를 없애고, 선제후들의 선출만으로 바로 황제위에 오르게 된 것은 1493년 막시밀리안 1세 황제 때 부터다.

프랑크 왕국의 분열 및 영토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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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프랑스 왕국

중프랑크 왕국
로타링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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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고지 부르군트 아를 왕국
신성 로마 제국
저지 부르군트 저지 부르군트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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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오토 1세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1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슬라브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962년 이탈리아 왕국의 군주 베렝가리오 2세가 교황령을 침략하자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왕국을 정벌하고 그 공로로 동년에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게 되었다. 교황 입장에서는 명목상으로나마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권위로써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는 판이었는데, 이때 큰 활약을 보이는 오토 1세를 (서)로마의 황제(정확히는, '로마인의 왕')로 내세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토 1세 때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보다는 그냥 "제국(Imperium)"으로 불렸다. 이후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 때부터 로마 제국이라 칭했고, 로마 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왕위를 받아낸 오토 3세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이라 불리게 된다. 오토 1세가 황제의 대관을 받은 후 제위는 (중간에 끊긴 적도 많았지만) 대대로 계승되어갔다. 하인리히 공에 의해서 시작된 작센 왕조는 오토 1세부터 이어지다 잘리어(Salier) 왕조로 계승되었고 잘리어 왕조는 다시 호엔슈타우펜 왕조로 계승되었다.

2.3. 교황과의 갈등

오토 1세는 늘 분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던 제국을 안정시키고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황제가 성직자를 영주로 임명하는 소위 "제국교회정책"을 시행하였다. 황제가 임명하는 고위 성직자가 각 지역의 영주를 겸하는 구조로서 이는 황제가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서임권을 전제로 한 구조였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 분쟁에 들어가고 뒤이어 카노사의 굴욕(1077) 사건이 일어난다. 서임권 논쟁으로 촉발된 분쟁은 보름스 협약(1122)으로 수습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의 각 지역 영주들과 도시들이 각자의 영지의 지배권을 강화하여 분열의 길로 나아갔다. 이를 영방국가 체제라 부른다.

2.4. 대공위시대와 황권의 약화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들어선 후 프리드리히 1세프리드리히 2세는 황권의 강화를 시도했고, 진정한 로마 제국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이탈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호엔슈타우펜 황제들의 이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황권의 약화와 제국의 분권화를 촉진시켰고 결국 대공위시대를 야기하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1세(제위 1155~1190)는 "신성 제국"을 칭하며, 황제이면서 동시에 남독일을 중심으로 영지를 확장하는 황제영방국가 정책을 취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프리드리히 1세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아 도리어 황권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 정벌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패주하면서 망신을 당하고 명성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획득한 시칠리아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 2세(왕위 1212~1220, 제위 1220~1250)는 시칠리아에 자신의 궁궐을 가지고, 신성 로마 제국의 역대 그 어떤 황제보다도 이탈리아 경략에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토대로 황권을 강화를 시도했으나 교황과의 잦은 대립으로 여러 차례 파문을 당하고 이에 따른 각지의 반란에 직면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사후 1254년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고, 대공위시대의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1256년 대립왕 홀란트 백작 빌헬름이 죽자 제국의 정세가 불안해지게 된다. 라인 지방의 영주들은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3세의 영향으로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공작 리처드를 황제로 추대했고, 다른 세력은 프랑스 왕국 국왕의 지지 아래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를 옹립하여, 제위가 비는 사태가 발생한다. 대공위시대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요청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선제후 회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루돌프 1세를 황제로 뽑음으로써 종식된다.

대공위시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영주들의 투표에 의해 뽑히게 되었고 황제는 자기 영지 외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돼버린다. 특히 1356년 카를 4세에 의해 공포된 금인칙서는 황제를 투표에 의해 선출하고, 선제후(選帝侯)들에게 사실상 자신의 영지를 독립국가처럼 다스릴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했는데, 선제후들에게 부여된 특권은 나중에 가서는 모든 영주들과 도시들에게 적용되어 결정적으로 독일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2.5. 합스부르크 왕조

15세기 중반에 가서는 여러 행운들이 겹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황제위를 계속 이어받는다. 막시밀리안 1세의 혼인동맹정책의 결과 최전성기인 16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의 판도는 스페인나폴리 왕국까지 포괄하며 역대 최대를 자랑하였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이건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이 넓어진 건 아니다. 카를 5세는 신성 로마 제위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왕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카를 5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는 땅이 늘었을 뿐. 그래서 카를 5세 사후에 황제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해외 식민지나 스페인 왕위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 제국은 다시 찢어진다. 하여튼 카를 5세 시절 황제의 권위는 대단해서 사코 디 로마 등의 수난으로 인해 교황조차 그 권위 밑에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독일 정체성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벌어진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제국은 대내적 분열과 대외적 충돌로 홍역을 치르게 됐으며 그 결정판인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 지역의 영방들이 독립국가에 가까운 자립이 허용됨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조는 지방 통제력을 사실상 상실하였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왕조는 구 제국 영토보다는 보헤미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동유럽 지역으로의 확대를 주로 꾀했으며, 합스부르크 왕조의 실제 왕권 및 국력의 수준과는 별개로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영향력 자체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러다 보니 17세기 이후 이렇듯 부침을 겪는 모습에 볼테르는 형식밖에 없는 이 제국을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다' (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 라고 평할 정도로 위상이 추락했다. 볼테르가 살았던 18세기의 독일 지역 내 영방국가들은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세계국가적인 분위기가 자신들의 존속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시기의 제국을 지탱한 것은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인데 제국대법원은 권한의 행사에 일부 제한이 있긴 했지만 제국의 유지 및 로마법의 확산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2.6. 제국의 해체

그렇게 명맥을 이어오던 중 프랑스가 대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필두로 호기롭게 프랑스를 침공하였으나 역으로 프랑스한테 털려버리고 라인 강 서안의 제국 영토를 몽땅 잃어버린다. 그 와중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코르시카 촌놈이 프랑스 권력을 잡고 여러 차례 대프랑스 동맹군을 박살내버리면서 그 결과 1801년 뤼네빌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라인 강 서안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였다. 더군다나 나폴레옹에 줄선 제국 내 군소국가들이 황제를 지지하는 주요 세력인 주교령 및 기사단령을 갈라먹으면서 황제 프란츠 2세는 제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데다가 1804년 레겐스부르크에서 나폴레옹이 선제후 자리가 대거 비었다는 이유로 나폴레옹에 충성하는 군소 위성국들을 선제후로 대거 임명하면서 차기 황제위는 나폴레옹이나 나폴레옹의 하수인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아진다.[5]

그런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는 법적으로 하나의 나라도 아니고 그냥 영지들이 모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표 작위조차 오스트리아 대공에 불과 하기 때문에 차기 황제 선거에서 패배하면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괴뢰인 독일 듣보잡 제후의 신하로 전락할 위험에 쳐했다. 이에 합스부르크는 제위를 잃더라도 자신이 보유한 영지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대표 타이틀이 필요해졌고, 이에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해서 보험으로 삼았다.

그리고 1806년 6월, 신성 로마 제국을 그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에 불과하다고 여긴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향해 3개월 안에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지 않으면 선전포고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7월 파리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16개 영방들마저 나폴레옹을 보호자로 하는 라인 동맹을 결성하였으며 이들은 8월 1일을 기해 제국을 탈퇴해버렸다. 결국 더이상 버틸 수가 없던 프란츠 2세는 8월 6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위 및 제국에서의 기타 지위를 포기한다고 선언했고, 이로서 840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신성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후일담으로 이 시기 제국의 해체를 두고 괴테는 "나의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일보다 더 관심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무늬만 제국이었던 체제라 해도 독일인들의 애착은 생각보다 대단했던 듯하다. 제국의 전직 판사이자 프로이센의 총리였던 카를 폼 슈타인은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제안했고, 훗날 오토 폰 비스마르크 역시 독일의 재통합을 완수한 후 이를 계승한 독일 제국을 만들었을 정도였다.

3. 국호

962 ~ Imperium (제국) / Regnum Teutonicus (독일 왕국)
999 ? ~ Imperium Romanum / Römisches Reich (로마 제국)
1157 ~ Heiliges Reich (신성 제국)
1184 ~ Sacrum Romanum Imperium / Heiliges Römisches Reich (신성 로마 제국)
1485 ~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6]

신성 로마 제국 초기 오토 1세와 그의 아들 오토 2세 때에는 특별한 국명 없이 단지 '제국(Imperium)'이라고 칭했다. 특별한 국명을 명시해야 할 때는 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전신이자 여전히 제국 내 제후 왕국으로 존재하는 독일 왕국의 라틴어 국명 'Regnum Teutonicus'을 그대로 사용했다. 주변 프랑스 등지에서도 아직은 자기네들이 독일 왕국을 지칭하는 표현인 동프랑크 왕국, 알레만 왕국[7] 등으로 불렀다.

황제를 지칭하는 명칭으로는 오토 2세가 이탈리아 원정 중인 982년 'Romanorum imperator Augustus(Emperor of the Romans,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독일인과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8]

초기 황제들이 '제국'이라고만 칭했던 것은 당시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중흥기의 정점에 있었다. 800년대 프랑크의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서 교황에 의해 서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았다가 동로마 제국의 항의로 인해 타협의 결실로 임페라토르바실레우스의 칭호를 받고 서로마 제국이 아닌 서유럽의 최고자로 인정해준 예가 있기에 그저 '제국', '독일인과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오토 1세의 손자이자 제국의 세 번째 황제인 오토 3세(제위 980년~1002년) 때부터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과 '로마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오토 3세 사망 후 제위를 이어받은 하인리히 2세는 당시 동로마 제국 중흥기의 절정을 장식했던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호전적이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의식하여 '로마'라는 표기를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기도 했다. 11세기 중반 이후 동로마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들자[9][10] 하인리히 2세 사후 제위를 이어받은 잘리어 왕조의 콘라트 2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 / Römisches Reich)'이라는 국명을 사용하면서 이것이 확립되었고 주변국에서도 더이상 동프랑크 왕국이라 부르지 않게 되었다. 콘라트 2세의 아들 하인리히 3세는 즉위 후 아직 황제 대관을 받기 전 상태에 있던 1039년 'Rex Romanorum(로마인들의 왕, 로마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대관 전 황제를 칭하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1157년 프리드리히 1세는 국명에서 로마를 빼고 대신 신성을 넣어 '신성 제국(Heiliges Reich)'이라고 국명을 바꾸었다.

1184년 라틴어로 '신성 로마 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이라는 국호가 처음 사용되었다.[11]

이후 이탈리아와 아를 왕국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상실되었고, 사실상 독일과 체코, 네덜란드(베네룩스)로 영역이 축소되었다. 이후 1442년 합스부르크 왕조 때 '독일 국민의 로마 제국'을 사용했고, 1474년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라는 국호가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국호는 1485년부터 프리드리히 3세가 본격적으로 사용했으며, 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에 의해 1512년 쾰른 제국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공식 국호로 사용되었다.

약자로는 Heiliges Römisches Reich을 줄인 HRR이 주로 사용되며, 영어권에서는 Holy Roman Empire의 약자인 HRE도 많이 사용된다. 그 외에도 독일 제국(Deutches Reich)라고도 불린다. 이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존재했던 민족 국가의 공식 국호이지만, 신성 로마 제국을 지칭하는 의미로도 쓰이는 말이다.

4. 중심 도시

17세기 초, 신성 로마 제국 내지 중부유럽은 약 1900만-2000만으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특히, 당시 중부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5만 명)이자[12] 경제적, 지성적 중심지(빈 대학, 1365년 설립)였던 과, 정치적 (1582년 황제 루돌프 2세의 거주지), 문화/예술적, 지성적 중심지(프라하 대학, 1348년 설립)였던 프라하, 상업적 교차로인 쾰른 (인구 4만 명) 등을 수용해, 유럽의 핵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15세기 이전에는 공식적인 통치기구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수도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황제가 사는 곳이 곧 수도였으므로 황제가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 그에 따라 수도도 같이 따라다니던 셈이었다. 그래도 고정적인 수도 역할을 했던 도시들을 들자면 아래와 같다.
의회 (777년 ~ 1806년)
황제의 통치 거처 (794년 ~ 1806년)
황제 대관식

교황 대관식 (800년 ~ 1530년)
선출황제 대관식
로마왕 대관식
황제 선거 (1273년 ~ 1792년)
대법원 (1495년 ~ 1806년)
자문 회의 (1497년 ~ 1806년)
  • (1497년 ~ 1806년)

5. 역대 황제

파일:Iron_Crown.jpg 파일:Holy_Roman_Empire_Crown_(Imperial_Treasury)2.jpg
롬바르디아 철관 황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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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color=#000,#e5e5e5> 카롤루스 왕조
카롤루스 1세
(카를 1세)
루도비쿠스 1세
(루트비히 1세)
로타리우스 1세
(로타르 1세)
루도비코 2세
(루트비히 2세)
샤를 2세
(카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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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도 왕조 카롤루스 왕조 보종 왕조 운로크 왕조 오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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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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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가르)
오토 1세
오토 왕조 잘리어 왕조
오토 2세 오토 3세 하인리히 2세 콘라트 2세 하인리히 3세 하인리히 4세
잘리어 왕조 주플린부르크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
하인리히 5세 로타르 3세 콘라트 3세 프리드리히 1세 하인리히 6세 필리프
벨프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나사우 왕조 합스부르크 왕조
오토 4세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4세 루돌프 1세 아돌프 알브레히트 1세
룩셈부르크 왕조 비텔스바흐 왕조 룩셈부르크 왕조 비텔스바흐 왕조 룩셈부르크 왕조
하인리히 7세 루트비히 4세 카를 4세 벤첼 루프레히트 지기스문트
합스부르크 왕조
알브레히트 2세 프리드리히 3세 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 마티아스 페르디난트 2세 페르디난트 3세 레오폴트 1세 요제프 1세
합스부르크 왕조 비텔스바흐 왕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
카를 6세 카를 7세 프란츠 1세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프란츠 2세
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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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치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는 대대로 황제와 제후들 간의 대립, 대외적으로 타국의 국왕이나 [13] 아니면 교황과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신성 로마 제국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로는 제국 의회와 국가교회정책, 작센 왕조 시기의 동유럽 및 이탈리아 반도로의 진출, 황제 선출과 선제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많은 작위와 영방국가들이 특징이다.

"기독교의 변호자이자 일시적 지도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권력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성직의 권리(Jura sacra)' 즉 성직자들에게 특권을 지급할 권리, '수여의 권리(Jura gratialia)' 즉 귀족들에게 특권을 지급할 권리, '봉토의 권리(Jura feudalia)' 즉 최고위 군주로써 직속 봉토를 관리/세금을 징수할 권리 세 가지뿐이었다. 그 외, 제국 의회(Reichstag)를 건의할 권리(Jura comitalia)가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기관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기관들은 독자적이거나 황제를 견제하는 세력보다는, 법적으로, 또 실제로 황제를 보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재상 사무국 (Archchancelor(영), Erzkanzler (독)), 제국 법원 (Reichsgericht), 궁정 회의 (Reichshofrat), 제국 의회 (Reichstag)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재상 사무국은 행정적 업무를 도맡아 했고, 제국 법원과 궁정 회의는 사법권을 행사했다. 제국 의회는 비정기적으로 열린다는 점에서, 또 정치적 혼란이 도래할 때 열린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세 기관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제국 의회는 입법 겸 각 계층을 대표하는 선거인단 (선제후 인단, 제후 인단, 도시 인단)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7. 군사


신성 로마 제국은 따로 상비군을 두지 않았고 제국 의회의 결정에 따라 제국전쟁(Reichskrieg)을 수행할 일이 있으면 각 영방국가들에서 일정한 지원군을 파견해 이들로 구성된 연합군을 결성해서 싸웠다. 물론 제국군의 총지휘는 황제가 하였다. 그 외에 황제의 사병인 근황군도 있었는데 이들이 황제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친위대였다. 근황군은 주로 황제의 가문인 합스부르크 영지의 병력이었지만 타 지역에서의 지원군도 받았다.

제국이 외적에 침공당할 일이 있으면 황제와 제후들은 병력을 동원해서 구원해야만 했다. 사실 이러한 봉건적 체재는 독일이 잘개 갈라져 있어도 각개격파 되지 않는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외침이 발생하면 황제와 주변 제후들이 병력을 동원해 달려왔기 때문이다. 특히 오스만 제국이 대규모로 침공해왔을 때 방어군인 신성동맹의 주력도 신성로마제국 각지에서 모여든 연합군이었다.

봉건적으로 동원되는 제국군은 Reichsarmee 이고, 황제의 사병인 근황군은 Kaiserliche Armee 인데, 영어로는 둘 다 Imperial (= 제국의, 황제의) 이라고 번역되기에 독일어 원문의 확인이 필요하다. 유사 사례로 독일 제국군의 해군 역시 Kaiserliche Marine(= 황제의 해군, 황립해군) 였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군이 오히려 Reichsmarine (= 제국=국가의 해군) 였다.

8. 영향력

라틴 제국의 정식 국호인 '로마니아 제국('로마인들의 땅'의 제국, '로마 땅'의 제국)' 및 황제의 직함(임페라토르 로마노움, 로마 황제), 이탈리아인이 제작한 요안니스 8세 메달의 문구('로마인들의 왕이자 황제')에서 볼 수 있듯이 서유럽인들 역시 동로마 제국을 정식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다. 다만 신성 로마 황제는 교황에게 인정받은 서로마 제국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로마 코무네의 폭도들처럼 동로마 황제뿐만 아니라 신성 로마 황제 역시 로마 황제라고 본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옛 서로마 제국의 강역 전체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다고 주장했지만, 구 서로마 영토에 있는 국가들 모두가 이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제위는 교황이 인정한 것이었던 만큼 제국 그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 국제적인 공식석상에서는 황제와 선제후를 상석에 앉히는 등 나름대로 예우를 해주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종교법 학자들을 동원해서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다", 즉 동양 버전으로는 외왕내제식의 이론을 펼쳐서 황제의 영향력이 자국으로 침투하는 것은 철저히 배제했다.[14]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이런 무리한 발언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역은 자연스럽게 황제 본인과 실질적인 봉건계약이 맺어져 있는 독일과 플랑드르, 북부 이탈리아로 좁혀졌다.

(서로마) 교황의 위엄이 닿지 않는 정교회 문화권에선 이 나라를 로마 제국의 후예로조차 보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 서쪽에서 '서방(인)의 황제', 또는 '프랑크 인의 황제'를 칭하는 것까지는 인정하였으나 '로마인의 황제'라고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 문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이 나라는 당연히 '로마'라고 불렸으며, 다른 국가들도 이를 당연한 사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애초에 고대 로마제국에서 단절없이 쭉 이어져 내려온 동로마 제국과 몇 백 년 후에 갑툭튀해서 로마 제국의 후예(심지어 로마 제국이 아직 동반부에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를 지칭하는 "프랑크 족이 세운 왕국" 간의 정통성 차이는 그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봐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따라서 정교회 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성 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는 근거가 없으므로 신성 로마 제국이 '새로운 제국'일 수는 있어도 '로마 제국'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또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이라클리오스를 '로마의 군주'라고 지칭한 편지, 경전 쿠란의 여러 챕터들 중 하나인 '로마장'의 존재, 룸 술탄국이라는 국명,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오스만 제국 군주 메흐메트 2세의 '로마 황제(룸 카이세리)'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를 '로마 제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파르티아사산 왕조의 지배 시절부터 수백년 간 자신들과 투닥거린 동로마 제국을 당연히 '로마 제국'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 신성 로마 제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

9. 종교

신성 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가톨릭은 단순히 국교 '따위'의 레벨이 아니며 동로마의 정교회처럼 국가 정체성의 한 축을 이루는 핵심 요소다. 오히려 동로마의 경우 나라의 중심이 되는 국교라는 입장일 뿐이지만,[15] 신성 로마 제국은 애초에 나라의 시작부터가 교황이 (서)로마 황제관을 준 것이 계기이며, 심지어 이 당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문서가 위조임이 발각되어서 교황이 없으면 신성 로마 제국이 더 이상 정당한 로마 제국의 후예로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가톨릭과 신성 로마 제국의 관계는 가톨릭이 우위인 관계였다. 현대인의 시각이야 어떻든, 당시 서유럽인의 인식 속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마의 후계자이며, 동방의 정교회 제국인 동로마 제국과 대비되는 서방의 가톨릭 제국이었다. 그리고 개신교가 출현하여 제국의 신앙이 분열되는 순간, 제국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16]

10. 오해와 반박

"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볼테르, 나라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글(Essai sur l'histoire générale et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6) 중 챕터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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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들어서 개신교의 출현과 교회의 분열등이 시작되고 30년전쟁까지 겪은 18세기엔 실제로 볼테르가 말한대로 주변 왕국들을 휘어잡지도 못하고 종교계에서도 영향력이 약해지는데다가 나라로서의 명분마저 빈약해 볼테르만이 아니라 여러 지식인들이 비슷한 논조로 신성 로마 제국을 무시하게 되는 여론이 조성되었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제국은 비교적으로 조용한 확장으로 외적으로 번영을 이루었으나 금인칙서로 인하여 외교권이 각 제후들에게 넘어감으로써 제국 내의 제후들이 성장해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브란덴부르크 공국, 작센 왕국 등으로 성장하게 된다. 특이하게도 신성 로마 제국은 중세 초기 ~ 중반까지는 봉건제답지 않은 강력한 왕권을 지니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황제들이 정말로 (봉건제가 유명무실해질 정도로) 왕권을 강화할 때마다 귀신같이 어린 왕이 등극하거나 아예 혈통이 끊겨 버리는 사태가 계속 발생한다. 특히 결정적인 게 대공위시대. 덕분에 다른 나라들이 중앙집권을 향해 나아갈 때 (설령 그 가문의 힘이 강력할 지언정)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점점 허수아비에 가까워지다가 30년 전쟁으로 결정적으로 몰락하고 만다.

11. 각종 매체

당연하게도 중세를 다루는 역사·전쟁 비디오 게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세력이다. 많은 게임 커뮤니티 안에서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같은 짧은 이름들에 비해 너무 긴 국호 때문에 "독일"로 불리거나 "신롬, 신로제, 롬" 같은 약칭으로 지칭된다, 영어로는 "HRE"로 줄여서 칭하며, 우스갯소리로 짝퉁 로마란 뜻으로 "짭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17]

국명에 '신성'이 붙은 게 왠지 간지를 더해줘서(...) 그런지 보통 서브컬처, 판타지물에서 신성 ○○ 제국이 주구장창 나오는데, 단연 신성 로마 제국의 명칭의 영향이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5신성 그리핀 제국, 코드 기아스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워해머 판타지의 주인공 팩션인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을 모티브로 했다.

11.1. 신성 로마 제국을 모델로 한 것들

다만 이름만 따온 것들도 있다는 것을 염두해둘 것.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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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 기준. 오토 1세에 이르기까지 제위 단절이 있었고, 제국으로 보기에는 느슨한 형태였기에 아직까지 소수 의견에 그친다. 다만 룩셈부르크 왕조 이래 19세기까지 이어지는 신성 로마 황제들은 카롤루스 대제를 독일의 첫 왕이자 제국의 첫 황제로 인식해왔다. 오토 1세 이전에 카를을 제호로 쓴 카롤루스 대제를 1세로 보고 그의 후계인 카롤루스 왕조에서 2세와 3세까지 배출했기 때문에 오토 1세 이후 카를을 제호로 쓴 카를 4세카를 5세가 각각 카를 1세나 카를 2세라고 불리지 않고 4세와 5세가 되는 것이다.[2] 오토 1세의 대관 기준. 일반적인 교과과정에서는 대부분 본격적인 제국의 형태를 갖추게 된 962년을 명시한다. 대한민국의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나 미국 고등학교 교과서, SAT, AT 교재에도 962년으로 서술한다.[3] 1784년 요제프 2세에 의해 변경[4] 지방 제후 차원에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루터교회가 허용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칼뱅파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제국 차원의 국교는 언제나 가톨릭이었으며, 가톨릭은 국교 정도가 아니라 제국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5] 팔츠 선제후는 18세기에 바이에른에 통합되면서 이미 소멸하였으며 친합스부르크인 쾰른, 마인츠, 트리어 선제후는 영지를 프랑스가 먹어치우면서 소멸했고 반프랑스파인 영국 국왕이 가지고 있는 하노버 선제후는 프로이센이 하노버를 먹어치우면서 사라져버렸다. 얘들을 대신하여 나폴레옹이 선제후로 임명한 애들이 바로 친프랑스파인 레겐스부르크, 헤센-카셀, 바덴, 뷔르템베르크, 잘츠부르크이다. 남아있는 선제후들도 친합스부르크인 것은 아니라서 바이에른은 프랑스 편으로 갈아탔고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밀약으로 하노버를 먹어치운 후 입 딱 다문 상태이며 작센은 어디에 붙을까 눈치만 보고 있다. 때문에 보헤미아 선제후 딱 하나만 가지고 있는 프란츠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다.[6] 단, 이 칭호는 13세기경 처음 공문서에서 등장했다.[7] Alemani에서 유래하는 단어. 원류로는 알자스, 로렌, 스위스 등에서 분포한 고지대 게르만족의 연맹체를 뜻하고, 프랑스, 스페인 등의 라틴 문화권에선 그대로 "독일"이라는 의미로 쓰인다.(현대 프랑스어로 독일은 Allemagne) 사실 저 말이 쓰일 당시의 프랑스는 라틴 문화권의 국가라기보다 게르만의 일파인 프랑크족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다. 당시 저지대 독일에서 그나마 문명화된쪽이 프랑크였고 그 북쪽의 작센(색슨)은 이제 막 기독교를 받아들이거나 정복하는 도중인 상태였다. 고로 "프랑크를 제외한 문명화된 게르만"의 통칭은 그 나머지인 알레마니=독일 이 된다.[8] 전신인 독일 왕국 시절 왕명이 '독일인의 왕'이었던 것을 확장한 것이다.[9] 동쪽으로는 만지케르트 전투, 서쪽으로는 바리 공성전과 디라히온 공방전을 거치며 이탈리아와 소아시아 내륙을 잃고 에게 해 연안으로 축소되었다.[10] 노르만과 투르크와의 조우 전까지는 서쪽으로 로마 시 턱밑까지, 동쪽으로 안티오크 등 레반트 북부와 테오도시오폴리스, 반 호수, 바스푸라칸 등 아르메니아까지 뻗쳐 있어, 로마 교황에게 실질적인 억제기가 되었음은 물론, 압바스 왕조의 쇠퇴 속에서 일어난 마르완, 함단 등의 아랍 반(半)독립국들을 속국으로 두었었는데, 불과 몇십 년 만에 제 몸 추스리기도 힘든 수준으로 떨어졌다.[11] 기존에는 1254년 대공위시대 때 대립왕 중 한 명이었던 홀란트 백작 빌헬름(빌렘) 3세가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이라는 국명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서 1184년에 처음 사용된 것이 밝혀졌다.[12] 북이탈리아에는 베네치아, 밀라노 등 빈보다 인구가 많은 도시가 소수 있었다.[13] 특히나 황제는 거의 항상 프랑스 왕과 대립했다[14] 사실 저 논리는 서유럽의 지배적인 체제였던 봉건제 시스템에선 당연한 논리였다. 자세한건 봉건제 문서 참고.[15] 로마는 나라가 훨씬 먼저부터 있었고 기독교 국교화는 그 훨씬 뒤였다.[16]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는 지금도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매우 높다.[17] 마냥 우스갯소리만은 아닌게, 위에 적힌 대로 "신성"이라는 명칭은 몰라도 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을 둘 다 국호에 넣기에는 정통성이 빈약했다. 굳이 했다면 로마제국중 하나를 빼야만 했다. 신성이야 교황이 해결해줄 수 있지만 로마와 제국은 동쪽으로 이사간 진짜 로마 제국이 있는데 이건 교황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18] 초기 한정. 현재는 잉글랜드 7왕국으로 모티브가 변경되었다. 애시당초 소설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 장미전쟁이니 만큼 이쪽이 더 어울릴지도...[19] 다만 이름만 따왔고 딱히 신성 로마 제국이 연상시키는 부분은 전혀 없다. 에당초 여기는 기원이 나폴레옹한테 개관광 당해서 본토까지 탈탈 털리다가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토낀 영국왕실이랑 정부다.[20] 마이트 앤 매직 레거시 이후로 지배계층인 황가와 6개의 대공가들이 중첩적인 근친혼을 맺었다는 설정이 추가되었는데 왠지 신성 로마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을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