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94대 황제 니키포로스 2세 Νικηφόρος Β΄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 (Νικηφόρος Φωκᾶς) |
출생 | 912년 |
동로마 제국 카파도키아 | |
사망 | 969년 12월 11일 (향년 57세)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963년 8월 16일 ~ 969년 12월 11일 (6년) | |
전임자 | 로마노스 2세 |
후임자 | 요안니스 1세 |
부모 | 아버지 : 대 바르다스 포카스 |
배우자 | 테오파노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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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연대기에서의 묘사 | 1961년에 그리스에서 크레타 탈환 1000주년 기념으로 만든 니키포로스 우표 |
니키포로스여, 그대는 모든 것을 정복했으나 여자만은 정복하지 못하였도다.[1]
니카포로스 2세의 묘비 문구
동로마 제국 제94대 황제이자 마케도니아 왕조의 제7대 황제로, 제위에 등극하기 전에는 제국 최고의 명장으로서 외적들을 물리치고 크레타 섬을 되찾아 수많은 인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황제로 집권한 후에도 사라센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이 붙혀질 정도로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등 정복군주였으나 외교적으로 여러 실책을 저질렀다. 수도원에 섣불리 세금을 메기다가 종교계의 반감을 샀으며, 그 밖에도 여러 세금 인상 등의 실정과 거듭되는 전쟁으로 신망을 잃었고 결국 조카에게 살해당했다.니카포로스 2세의 묘비 문구
2. 즉위 이전
2.1. 배경
포카스(Phokas)는 9세기 후반 등장한 카파도키아의 유력한 군인 가문이었다. 포카스 가문은 9세기 후반 주요 군관구장과 중앙군 총사령관(Domestic of Schools)을 역임한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시작으로 그 아들인 레온과 대 바르다스 포카스, 그리고 대 바르다스의 아들인 니키포로스, 레온, 콘스탄티노스에 이르기까지 제국군의 수많은 장성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마케도니아 왕조의 비호 아래 중앙군 총사령관과 동부 전선의 주요 관구장으로 복무하면서 군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콘스탄티노스 7세 재위 초기, 포카스 가문과 대립 관계였던 로마노스 1세 등 레카피노스 일족이 제국의 실권을 차지하자 잠시 영향력을 상실하는 일도 있었으나, 콘스탄티노스 7세가 실권을 되찾으면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2.2. 초기 생애
니키포로스 2세는 위에서 언급한 대 바르다스 포카스의 장남 니키포로스다. 어머니는 아나톨리아의 또 다른 유력 군인 가문인 말레이노스(Maleinos)가문의 일원이었다. 젊은 시절 니키포로스는 스테파노(Stephano)와 결혼했으나 스테파노는 니키포로스가 명성을 얻기 전 죽었다. 스테파노와의 사이에서 바르다스라는 아들을 두었지만 바르다스도 모친과 마찬가지로 요절하였다. 스테파노가 사망하자 죽을 때까지 금욕하기로 맹세했다.니키포로스는 이른 나이에 군대에 입대했다. 그의 뛰어난 자질은 그의 친구와 적 모두 인정했다. 그는 엄청난 힘과 냉철하고 두려움 없는 태도, 기회를 포착할 줄 아는 안목을 지닌 탁월한 군인이었고 휘하 병사들을 잘 배려한 탓에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병사들이 많았다. 군대 바깥에서는 오로지 종교에 관심을 집중했고 수도사처럼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성직자들과 대화하고 서신을 주고받았다.
콘스탄티노스 7세가 레카피노스 가문으로부터 실권을 되찾은 945년, 포카스 가문은 다시 국방의 일선에 복귀하였다. 이는 포카스 가문이 콘스탄티노스 7세의 실권 회복을 조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니키포로스도 요직에 보임되었다. 니키포로스는 동부군의 최고 요직 중 하나인 아나톨리콘 군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동시에 아버지인 대 바르다스는 중앙군 총사령관에, 동생들인 레온과 콘스탄티노스는 마찬가지로 요직인 각각 카파도키아와 셀레브키아의 군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955년 노인이며[2], 최근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패전을 기록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중앙군 총사령관에 제수되었다. 이 해는 기록적인 해라고 볼 수 있는데, 제국이 공격적인 대외 정복 활동을 본격적으로 개시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있었다.
2.3. 정복 활동
2.3.1. 배경
제국은 9세기 후반, 이슬람 세계와의 접경지대인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수백 년 전 상실한 영토에 대한 공세를 개시하였다. 지속적이고 강경한 원정이 이어졌고, 그 결과 934년 멜리티니(Melitene)를 수복할 수 있었다. 멜리티니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위치한 요새로, 유프라테스 강 상류 유역과 북부 시리아, 나아가 타우로스 산맥 전역을 관제할 수 있는 입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멜리티니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인지한 제국 정부는 멜리티니 일대를 강화하였다. 지역의 무슬림 인구는 추방되거나, 노예화되거나, 강제 개종을 당하거나, 징병되어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었다. 무슬림 인구가 떠난 자리는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기독교 시리아인, 아랍계 기독교인 등이 식민되었고, 멜리티니 자체는 견고하게 요새화되었다. 멜리티니 정복 이후에도 동방 원정은 계속되었다. 936년에는 사모사타(Samosata)가, 940년에는 아르사모사타(Arsamosata)가, 949년에는 테오도시우폴리(Theoudosiopolis)가 점령되었다. 제국의 영역은 유프라테스 강 상류 전역과 서아르메니아 일대로 확장되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알레포의 토후(Emir)이자, 함단 왕조의 군주인 사이프 앗 다울라(Sayf al-Dawla)가 제국에 맞서 상당한 수준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함단 전쟁), 950년대에도 여전히 유프라테스 상류에서 제국군을 축출하는 데는 실패한 상황이었다.그 결과, 부유하고 유력한 이슬람 도시들이 밀집한 킬리키아 평원 일대는 이제 동로마 제국의 위협을 두 방면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전에는 타우로스 산맥을 횡단하는 좁은 협로인 킬리키아 관문, 단 한 곳에서만 위협을 받았다면 이제는 타우로스 산맥을 우회할 수 있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 유역에서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킬리키아는 7세기 중반 이슬람 제국에 정복된 이후 이슬람 세력의 대(對) 동로마 제국 전선의 전초기지로 기능했다. 특히 당시 칼리파 직위를 차지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는 타르소스(Tarsos)를 중심으로 아다니(Adane), 예르마니키아(Germanikeia), 모프수에스티아(Mopsuestia), 아다타(Adata) 등의 도시들을 동로마 제국의 시리아 공격을 막는 방벽이자 킬리키아 관문을 통해 제국령 아나톨리아를 약탈하는 전초기지로 구축했다. 킬리키아에는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대(對) 기독교 전선에 투신하기를 원하는 무슬림 전사들이 몰려들어 영지를 하사받고,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기부금의 형태로 유입되는 막대한 자금을 보조 받았다. 이와 같은 전폭적 지원의 배후에는 아바스 왕조가 있었다.
알레포의 군주인 사이프 앗 다울라가 북부 시리아를 확보, 킬리키아 도시들을 복속시킴으로써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가 킬리키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자 이슬람 세계의 중심에서 유입되는 병력이나 기부금이 크게 감소했고 킬리키아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호전적인 성향을 버리고 평화를 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반응은 킬리키아의 도시들은 물론, 안티오키아에서도 나타난 것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제국 측의 접근에도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제국과의 관계를 쉽게 개선할 수 없었다. 통제가 다소 느슨하기는 하나 명목상 그들의 주군인 함단 왕조의 군주인 사이프 알 다울라는 여전히 제국에 호전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이프가 있어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도시들의 자주성이 지켜지고 있던지라 도시들이 반기를 들기도 뭣한 상황이었다.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앗 다울라는 자신의 토후국을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불안정으로부터 건사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의 성전(聖戰)을 이용하였다. '아바스 칼리프조의 수호자이자 검'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은 사이프에게 상당한 명성을 안겨주었다. 사이프는 지속적으로 킬리키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하는 제국군에 대항하였으며, 제국 영토로 대군을 이끌고 약탈 행진을 벌이기도 하였다. 작은 토후국의 군주치고 사이프의 분전은 나름 효과적이었다. 비록 제국 영토에 직접적인 타격을 안기지는 못하고 아다나와 예르마니키아 등 킬리키아의 도시들이 제국군의 약탈에 노출되기는 하였으나, 사이프는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은 앞서 언급했듯 955년 중앙군 총사령관을 대 바르다스에서 니키포로스 포카스로 교체하였다.
2.3.2. 크레타 탈환
959년, 니키포로스와 동생 레온 포카스는 황제 로마노스 2세의 명령을 받들어 각각 동부와 서부 군대에 배치되었다. 960년, 니키포로스는 크레타를 정벌하기 위해 2만 7천명의 해군 및 선원들을 징집하고 5만 명의 군대를 태우기 위한 308척의 함대를 소집했다. 장관 요세프 브링가스의 권고에 따라, 니키포로스는 이슬람교도인 크레타 섬의 에미레트가 이 원정을 감독하게 했다. 니키포로스는 7월 13일에 성공적으로 그의 함대를 크레타에 상륙시켰고 아랍군의 반격을 격파했다.그는 곧 크레타 최대의 도시 한닥스 요새를 9개월 동안 포위 공격했다.(한닥스 공방전) 포위 공격하는 동안에는 섬 내 다른 이슬람군을 진압하고 그 시체에서 벤 머리를 공성병기에 담아 성내로 투하할 정도로 잔혹하게 싸웠다.[3] 이 끈질긴 포위 공격 끝에, 한닥스는 마침내 961년 3월 6일 함락되었고 요새에 피난 가 있던 여자들은 모두 윤간당하고 아이들은 모조리 살해당했다. 애초에 동로마 제국은 무슬림 신민을 통치한 경험이 없었고, 새로운 점령지 중 도회지의 무슬림 신민들은 추방이나 학살, 강제개종 등의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다만 크레타 섬의 농촌 지역의 경우 당시 공교육 제도가 있던 것도 아니고 원래 기독교도였던 섬 주민들은 무슬림들의 정복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하되 정교회 신앙이나 문화 상당부분을 이중신앙 형태로 그대로 공유하던 상황이었고, 다시 정교회로 개종시키기 쉬웠다.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이들을 다시 개종시키면서 정교회 신도로 재개종하였다. 그런데 아미르인 압둘 아지즈 빈 슈아이브는 죽이지 않았고 오히려 선물과 정착할 토지를 받았다고 한다. 개종 후 원로원 의원을 시켜주려고도 했었지만 개종을 완강히 거부해서 무산되었고, 대신 그 아들은 개종하고 군에 들어갔다. 이후에 등장하는 귀족 가문인 아네마스 가문이 그의 후손이라는 학설도 있다고 한다.[4] 여하튼 이로써 크레타 섬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한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당당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로마노스 2세와 환관 요세포스 브링가스는 그를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고 개선식을 치러주지 않고 원형 경기장에서 시민들에게 갈채와 환영을 받는[5] 것만 허용했다.
2.3.3. 함단 전쟁
니키포로스는 잘 갖춰진 그의 군단과 함께 제국의 동방 영토로 진군해 동생 레온 포카스와 함께 킬리키아로 진군했다. 962년 2월, 그는 아나자르보스(Anazarbos)를 점령했고 3월에 킬리키아의 성곽 도시 55개를 되찾았다. 그후 부활절에 잠시 휴식을 취한 그의 군대는 알렉산드레타 근처의 시리아 성문을 통과하여 도상의 촌락들을 불태우고 약탈했다.몇달 뒤, 그들은 알레포를 포위하여 알레포의 궁전 알할라바를 약탈해 보물을 모조리 턴 뒤 궁궐을 불태웠다. 또한 군대는 알레포 시를 습격해 아랍 역사가들의 표현에 따르면 "지칠 때까지 살육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니키포로스는 39만 디나르의 은, 낙타 2천 마리, 노새 1400마리, 수많은 아랍산 종마들을 획득했다.
3. 황제
3.1. 즉위과정
963년 3월 15일, 로마노스 2세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근대와 현대의 역사가들은 젊은 황제가 과도한 음주와 무분별한 성생활을 보내다가 건강을 망친 것으로 판단하지만, 어떤 이들은 황후 테오파노가 그를 독살했다고 의심한다. 테오파노는 지성적이고 야심이 많은 여성으로서 악명이 높았고 후기의 역사가들은 그녀를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무자비한 여성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남편을 독살했음을 입증할 단서는 없다.로마노스 2세는 그의 두 아들 바실리오스와 콘스탄티노스를 공동 황제로 선정했다. 로마노스 2세가 죽었을 때, 바실리오스는 5살이었고 콘스탄티노스는 겨우 3살이었으므로 테오파노는 섭정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테오파노는 혼자서 지배할 수 없었고 로마노스의 수석 참사관이자 환관 요세프 브랑가스와 함께 힘을 합쳐야 했다. 브랑가스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으며 니키포로스의 힘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브랑가스는 니키포로스가 군대와 귀족의 지지를 받아 왕좌를 주장할까봐 두려워했다.
브링가스는 뒤늦은 개선식을 벌이며 백성들의 찬사를 받는 니키포로스를 제거하기 위해 황궁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했다.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이 환관의 의도를 눈치채고 소피아 대성당에 가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고 고발했다. 이에 시민들은 들고 일어났고 결국 브링가스는 원로원이 자신의 동의도 없이 니키포로스를 사령관에 유임시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나톨리아로 돌아간 니키포로스는 테오파노와 밀약[6]을 맺고 킬리키아 원정에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소집한 뒤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이에 브링가스는 니키포로스의 부하 로마노스 쿠르쿠아스와 요안니스 치미스케스에게 서신을 보내 그들의 상관을 배신하는 대가로 각각 동방과 서방의 최고 사령관직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서신을 니키포로스에게 보이며 결단을 촉구했고, 결국 니키포로스는 963년 7월 2일 카이사레아에서 황제를 자칭했다. 그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자신을 공동 황제로 받아들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브링가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비를 강화하고 니키포로스의 아버지 바르다스를 인질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바르다스를 잡으려는 이들을 공격해 죽여버렸고, 결국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플에 무혈 입성해 제국의 황제로 떠받들어졌다.
3.2. 외정
니키포로스는 964년 4만의 군대를 일으켜 965년 여름에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또한 킬리키아의 정복을 본격적으로 감행하여 타르수스를 포위해 2주일만인 8월 16일에 공략하고 트리폴리로 진군하면서 주변의 대부분의 요새를 공략했다. 또한 알레포를 보호령으로 삼았고 안티오키아에서 알렉산드레타로 가는 길에 있는 바그라스 요새에 1500명의 병사들을 배치했다. 이렇듯 니키포로스는 황제 즉위 후에도 아랍인들에 대한 일방적인 공세를 지속해 "사라센인의 저승사자"라는 별칭이 부여되었다.동방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둔 것에 자만해진 탓인지 그는 서방과의 외교를 그르치는 바람에 위기를 초래한다. 965년 초, 불가리아 차르 페터르 1세는 일찍이 제국과 맺은 조약에 따라 제국의 공물을 받기 위해 대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사 앞에서 불가리아인들을 혐오스럽고 더러운 거지 민족이라고 비난하고[7] 불가리아 왕은 짐승 가죽 옷이나 입는다고 욕한 뒤 내쫓았다. 그후 니키포로스는 군대를 일으켜 불가리아 변방으로 쳐들어가 국경 요새 몇 곳을 함락시켰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막대한 금을 건네며 불가리아 공격을 사주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당장엔 제국의 위세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지만, 스뱌토슬라프가 단시일에 불가리아를 제압한 뒤 동로마 제국까지 노리면서 문제가 발생했고(스뱌토슬라프 전쟁), 향후 수십년간 제국이 불가리아의 침략으로 몸살을 앓게 만든 근시안적인 정책이었다.
962년 이슬람군이 시칠리아 섬에 몇 안 남은 로마 요새들 중 하나인 타오르미나(Taormina) 시를 점령했다. 타오르미나는 902년에 뺏겼지만 통제력이 제대로 닿지 못했는지 어찌저찌해서 동로마령으로 넘어와 있었는데 다시 뺏긴 것. 영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크레타를 뺏긴 것에 대한 보복조치일 수 있다고 한다.[8] 이에 시칠리아에 있는 마지막 주요 로마 요새인 로메타는 니키포로스 황제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황제는 환관이었던 니키타스 아발란티스[9]를 총사령관 겸 해군사령관으로, 본인의 조카인 마누일 포카스를 그 산하의 상륙군 사령관으로 하여 4만여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시칠리아로 파견했다.[10]
상륙하고서 메시나, 시라쿠사, 히메라, 타오르미나, 레온티니 등 시칠리아 북동부(Val Demone)의 여러 곳을 쉽게 탈환했지만, 너무 의기양양해져서 쉽게 생각하고 로메타를 구원하러 들어갔다가 매복당해서 크게 패하고 마누일까지 죽었다. 구원군이 끊긴 로메타는 이내 항복했다.[11]
이렇게 되어 그 패잔병은 메시나로 후퇴하였고, 이들을 증원해 주려고 메시나 해협의 이탈리아 본토 쪽에서 이륙한 동로마 함대를 파티마 함대가 타이밍 좋게 덮쳤다. 선상에서 뛰어내린 잠수부가 적선 하단에 그리스의 불(...)이 담긴 토기를 던져 적선 자체를 하단에서부터 파괴하는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파티마 해군은 동로마 해군에게 (메시나)해협의 해전(Battle of the Straits)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아발란티스 및 주요 간부들은 파티마 왕조에 포로로 잡혔다. [12] 이렇게 되어 동로마는 점령한 것을 다 토해내게 되고 시칠리아 전역이 이슬람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후 967년, 니키포로스는 파티마의 시칠리아 영유를 인정하며, 또한 칼라브리아에 대한 약탈을 더 이상 못 하게 해주는 대가로[13] 연공을 바치는 것으로 하는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당시 파티마는 이집트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동로마 제국은 함단 왕조 문제 때문에 시칠리아에서 다툴 여력이 적어서 평화 협정 체결이 가능했다.[14] 실제로 얼마 안 있고 나서 969년에 사이좋게(?) 파티마는 이집트를, 동로마는 안티오키아 등의 시리아 북부를 정복했다. 630년대 후반에 잃은 지 약 330년만의 탈환이었다.
이 평화 협정으로 아발란티스를 포함한 포로들이 몸값과 교환되어 석방되었다. 이 아발란티스는 포로생활 동안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받았는지, 4세기의 3대 카파도키아인 교부들 중 두 명인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오스(대 바실리오스) 및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설교집(Homilies)을 필사했고[15] 그 필사본은 지금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16]
한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는 남부 이탈리아 문제로 크레모나 주교 리우트프란트를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오토가 감히 황제를 칭하고 자신을 그리스 황제로 칭한 것에 열받은 데다 남부 이탈리아를 멋대로 넘보는 것도 화가 났기에 오토를 왕이라 부르고 사신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급기야 억류하기까지 했다. 그후 양측은 수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이 리우트프란트가 남긴 기록은 중요한 사료로 취급되고 있으나, 당시 그가 당한 박대 때문인지 동로마의 풍습을 야만적이라고 비하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17] 그런데 리우트프란트가 이전에 동로마에 왔을 때는 호화스러운 대접을 받고 제국 궁정의 화려함에 감탄하는 내용을 남겼다. 리우트프란트는 본인의 저술에서 '로마인은 최악의 모욕 중 하나로 여겨진다'고도 했는데[18], 이 로마인은 동로마인 및 로마 시의 주민 둘 다를 중의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19]
3.3. 모두가 싫어하는 황제
니키포로스의 인기는 주로 그의 정복 전쟁에 바탕을 두었다. 그래서 니키포로스는 군대에 할당한 막대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엄격한 경제 정책을 실행했다. 그는 성직자의 면책권을 축소시키고 고행 처분을 자주 내렸으며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을 금지했다. 또한 제국의 중앙 집권 제도를 추진하는 동시에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해 귀족들과 백성들이 반발하게 되었으며 대중의 인기를 잃었고 곳곳에서 폭동이 발발했다. 또한 니키포로스는 신학적인 문제에서 교회와 마찰을 빛었다. 그는 교회가 사라센인과의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을 순교자의 위치로 높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교회는 이 요구에 난색을 보였고 황제가 성직 서임권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역사 유튜브 Kings and Generals의 'Byzantine Reconquista - Cilicia and Aleppo 961-962'에 의하면, 군과 민간이 부딪치는 각종 영역들에서[20] 대부분 군의 편을 들어주었던 점 또한 군부 밖 민간에서의 인기 하락에 한 몫 했다고 한다.따지고 보면 전 시대의 이라클리오스(헤라클리우스)가 622년에 몸소 원정을 나가기 전 12년간 원정을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먼 지역은 어쩔 수 없이 내주더라도 가까운 지역은 최대한 지켰고, 군대를 건사하면서 훈련시켰으며, 또한 쿠데타로 제위에 오른 본인이 원정을 나가며 수도를 비워도 될 정도로 수도의 지도층들과의 유대를 쌓았고, 그 중에서도 제국 교회 측 및 그 대표자인 세르기우스 총대주교를 특히 잘 신경써주였으며 그러면서 동시에 본인의 요구사항(교회의 재물을 전비로 내어줄 것)을 요청하여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각계 지도층과의 관계에 시간과 공을 들여야 국정협조를 잘 받고 원활하게 굴러가게 되는데 니키포로스는 이러한 정치적 수완이 부족하여 그 군공을 갖고도 인망을 쌓지 못하고 급기야 매우 나쁜 최후를 맞았다.
그러던 967년 부활절에 대형 참사가 터졌다. 이날 아르메니아 경비병과 트라키아 선원들 간의 다툼이 있었는데 이것이 대규모 폭동으로 번져 수십명이 부상당했고 일부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원형 경기장에서 부활절 경주가 시작되려 할 때 황제가 자신의 불쾌함을 표시하기 위해 관중 가운데서 아무나 골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시민들은 불안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휴식 시간에 그는 무장 병사들에게 경기장으로 내려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이 돌연 경기장에 내려가는 걸 본 시민들은 소문대로 황제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판단해 앞다퉈 달아났다.
그 결과 아비규환이 일어났다. 수천 명의 군중들이 출구로 몰리다가 발에 깔려 죽임을 당했다. 그러다가 시민들은 경기장의 병사들이 가만히 있고 황제도 황제석에 차분하게 앉아있다는 걸 깨달아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니키포로스가 이 사태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두달 후인 예수 승천 대축일에 니키포로스는 성모 성당에서 아침 기도를 마친 뒤 거리를 지나가던 중 부활절 때 가족을 잃은 것에 격노한 군중들에게 포위되었다. 하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길을 앞에 고정시킨 채 군중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이튿날 아침엔 어느 모녀가 황궁 근처의 저택 지붕 위에서 황제를 향해 벽돌을 던졌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이렇듯 백성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게 되자 황제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황궁의 담을 튼튼히 보강하라는 명을 내리고 가족과 함께 부콜레온의 요새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병적으로 종교에 빠져들었고 침대에서 잠을 자지 않고 침실 한 귀퉁이에 깔아 놓은 표범 가죽 위에서 잤다. 이렇듯 공포에 몸을 떨던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3.4. 최후
니키포로스가 인기를 잃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황후 테오파노는 황제의 부하이자 외조카이며 빼어난 미남이었던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와 사랑에 빠졌다. 니키포로스는 황후가 조카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요안니스가 위협적인 존재라고 판단해 965년 말에 군대 사령관직을 박탈하고 아나톨리아의 자기 영지로 돌려보냈다. 이에 테오파노 황후는 남편에게 요안니스에 대한 처벌이 과하다고 설득했고 니키포로스는 이에 흔들려서 요안니스를 불려들었지만 대신 칼케돈에 있는 그의 집에만 머물고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는 별도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그후 요안니스는 한밤 중에 해협을 건너 황궁의 외딴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테오파노 황후와 만나 정을 나누었다. 그후 두 사람은 니키포로스를 죽이자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에는 지난날 안티오키아를 포위 공격하다가 황명에 불순종했다는 이유로 해임당한 미카일 부르체스도 포함되었다. 그 후 음모가들은 여자로 변장하고 옷 안에 칼을 숨긴 채 황후를 만나러 온 척하면서 황궁의 규방으로 들어갔다. 황후는 그들을 여러 작은 방에 분산시키고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참고로 부르체스의 황명 불순종이란 다음과 같다. 역사 유튜브 Kings and Generals의 'Byzantine Reconquista - Cilicia and Aleppo 961-962'에 의하면, 안티오키아가 옛 총대주교좌로 워낙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 직접 공성하여 도시를 훼손시켜 가면서 점령하기보다는 주변에 구원군과 식량 보급을 막는 요새를 깔고서 천천히 말려죽이려는 것이 니키포로스의 의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장군으로서 정복활동으로 인기를 얻어 황통을 갈아치우지는 않으면서도 어린 황제(바실리오스 2세)의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어린 황제를 제끼고서 본인이 선임 황제로 올라선 니키포로스의 모델은 다른 장군들에게도 욕심나는 롤모델로 다가왔고, 안티오키아는 콘스탄티노플과 거리가 제법 멀어서 황제 및 중앙정부가 바로바로 군의 움직임을 컨트롤하기가 어려워 결국 현지 사령관에게 어느 정도 재량권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부르체스는 황명을 정면으로 어기지는 않았지만 본인의 공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찌어찌하여 안티오키아를 공략하여 점령했다.
969년 12월 11일, 날씨가 몹시 춥고 눈이 많이 내리며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음모가들은 황궁을 떠나 보스포루스를 건너 황제가 있는 요새로 가려 했지만 폭풍이 워낙 거세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요안니스는 친구 세 명과 함께 칼케돈에서 배를 타고 죽을 고생을 하며 해협을 건너 밤 11시에 요새 바로 앞에 도착했다. 이윽고 황후 처소의 창문에서 밧줄 하나가 소리없이 내려오자, 음모자들은 한 명씩 차례로 밧줄을 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사전에 내통하여 대기하고 있던 환관 한 명이 황제의 침실로 안내했다.
음모가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자, 바닥에서 표범 가죽을 깔고 자고 있던 니키포로스는 인기척에 잠을 깨고 일어났다. 그 순간 레온 발란테스라는 자가 달려들어 그를 칼로 찔렀다. 이 칼은 니키포로스의 얼굴을 스쳤고 황제는 피투성이가 된 채 비명을 지르고 큰 소리로 성모 마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며 침대 발치로 기어갔다. 그러나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그를 침대 바깥으로 끌어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다음 음모가들은 황제의 부정과 배은망덕을 비난하고는 그의 몸을 무자비하게 걷어차면서 머리털과 수염을 잡아뜯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황제의 턱을 부수었고 다른 사람은 칼집으로 그의 앞니를 후려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고 굽은 칼이 황제의 목숨을 끊었다. 그 후 자객들은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비병들한테 그들의 정체를 밝히며 권력으로 위협하자 경비병들이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고 니키포로스의 머리를 잘라 시신을 창문 아래에 내던졌다. 이리하여 크레타 탈환의 영웅이자 사라센인의 저승사자였던 니키포로스는 아내와 외조카의 배신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위에서 나온 사이프 알-다울라가 967년에 죽고 나서 함단 왕조가 자중지란에 빠졌던 기회를 포착한 페트로스는, 니키포로스가 최후를 맞았던 때와 거의 비슷한 시간대였던 969년 12월에서 970년 1월 사이, 아마도 중앙으로부터의 지시가 없이[21] 그 수도 알레포로 접근해서 막타를 쳤다.(...) 그리고 나서 함단 왕조를 속국으로 삼는 사파르 조약을 맺었다. 아미르 지명 권한, 연공 바치기, 동로마로부터의 수입품에 10% 관세를 매기고 그것을 집행 및 감독하기 위한 관원 파견, 다른 이슬람 군대가 함단 왕조의 영토를 넘나드는 것을 금지, 시리아 지역에서의 동로마군대의 활동을 지원할 것, 함단 왕조 내 기독교인 지위 인정, 동로마 출신 탈주자 및 다른 이슬람 세력의 스파이 송환 등 조약 내용은 상당히 빡빡했다.[22]
4. 참고 문헌과 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 관련 시대 및 인물들의 영어 위키백과
[1] 니키포로스 2세의 통치를 잘 표현한 문구라고 할수있다[2] 878년생으로, 968년 90세의 나이로 사망[3] 유튜브 채널 'Kings and Generals'의 영상 Byzantine Reconquista Siege of Chandax 960-961에 나온다.[4] 영어 위키백과 Abd al-Aziz ibn Shu'ayb 중 'After the capture of Chandax, Abd al-Aziz was taken captive with his family to Constantinople, where they were paraded at Nikephoros Phokas' triumphal procession. They were then given rich presents and an estate to settle by Romanos II. The Byzantine sources report that the emperor considered making Abd al-Aziz a senator, but the latter refused to convert to Christianity. One of his sons, however, al-Nu'man, or Anemas in Greek, converted and entered Byzantine service, until he was killed at the Siege of Dorostolon in 971. Some modern researchers consider it possible that the later Byzantine aristocratic family of the same name descended from him.', Anemas 중 'An-Nu'mān ibn ʿAbd al-ʿAzīz ibn Shuʿayb ibn ʿUmar al-Qurṭubī, known by the Byzantines as Anemas (Greek: Ἀνεμᾶς), was the son of the last Emir of Crete, Abd al-Aziz ibn Shu'ayb.' 및, 'Upon settling in Constantinople, Anemas converted to Christianity and joined the Byzantine army as a member of the imperial bodyguard.' 및, 'It is possible that the Anemas family that appears in the Byzantine aristocracy in the 11th–12th centuries were his descendants.'[5] 정식 개선식보다 한 급 낮은 이것을 Ovation이라고 한다.[6] 바실리우스와 콘스탄티누스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대신 그 자신도 공동 황제가 된다는 약속이었다.[7] 기독교화 이전이라면 모르겠지만 불가리아도 정교회를 도입한 지 100년 되었다. 무작정 기독교화 이전의 전통 종교가 미개하며 정교회는 문명적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자국이 전파해 주어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문화권으로 묶이게 된 지 100년이 됐는데도 상대국의 사절 면전에서 국가단위로 싸잡아 미개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외교적으로도 현명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거니와, 나아가서 제 살 깎아먹기로도 볼 수 있다.[8] Muslim conquest of Sicily 중, 'Taormina itself threw off Muslim control soon after 902, and it was not until 962, possibly in response to the Byzantine reconquest of Crete the previous year, that the Fatimids retook the town, following a 30-week siege.'[9] Niketas Abalantes 중, 'According to the contemporary historian Leo the Deacon, Niketas was a eunuch, but also a pious and god-fearing man.'[10] Battle of the Straits 중, 'The garrison of the latter sent for aid to Emperor Nikephoros II Phokas, who prepared a major expedition, led by the patrikios Niketas Abalantes and his own nephew, Manuel Phokas.' 및, Niketas Abalantes 중, 'Niketas was the commander of the fleet and overall commander-in-chief, while the land forces were led by the Emperor's nephew, Manuel Phokas.'[11] Battle of the Straits 중, 'The Byzantine force landed in October 964 and quickly captured Messina and other forts in the Val Demone, but its attempt to relieve Rometta was decisively defeated, with Manuel Phokas among the dead. Left without hope of relief, Rometta fell in spring 965.' 및, Niketas Abalantes 중, 'According to Leo the Deacon, upon arriving in Sicily, the Byzantines were able to capture Syracuse and Himera, while Taormina and Leontini surrendered without resistance. Encouraged by this success, the army under Manuel Phokas advanced heedlessly into the interior to relieve Rometta, but was ambushed in October 964 and destroyed by the Fatimid troops.'[12] Battle of the Straits 중, 'Following their defeat before Rometta, the remaining Byzantine forces were forced to withdraw to Messina. Niketas with the Byzantine fleet tried to cross over the Straits of Messina from the Italian mainland, but he was intercepted by the Fatimid fleet under Ahmad al-Kalbi. In the ensuing battle, known in the Arabic sources (Ibn al-Athir, al-Maqrizi, Abu'l-Fida) as the "Battle of the Straits" (waq‘at al-majāz), the Fatimid governor employed divers equipped to attack the Byzantine ships: in the description of Heinz Halm, "they would dive from their own ship and swim over to the enemy ship; they would fasten ropes to its rudder, along which earthenware pots containing Grecian fire were then made to slide over to the enemy ship, and shattered on the sternpost". This tactic succeeded in destroying many Byzantine vessels, and the battle ended in a major Fatimid victory; according to the Arab historians, a thousand prisoners were taken, including the Byzantine admiral, Niketas, with many of his officers, as well as a heavy Indian sword which bore an inscription indicating that it had once belonged to Muhammad.' 및, Muslim conquest of Sicily 중, 'In the next year, they tried to resume their offensive, but were annihilated in the "Battle of the Straits" (waqʿat al-majāz) off Messina.'[13] 파티마가 시칠리아를 꽉 쥐고서 직할통치했던 것이 아니라, 시칠리아 내 이슬람계 세력간의 내부 투쟁에서 승리한 알 하산 알 칼비(al-Hasan al-Kalbi)에게 948년에 파티마가 시칠리아 총독(아미르) 직함을 제수해 주고 그 세습을 인정 내지는 묵인해주어, 이 아미르 이름의 '칼비'에서 따온 (사실상의)칼비드 왕조(Kalbids)가 세워진 게 당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충분히 서로 다를 수 있었고, 파티마는 이들의 이탈리아 본토에 대한 경략 의지를 단념시켰다는 이야기이다.[14] Battle of the Straits 중, 'This defeat led the Byzantines to once more request a truce in 966/7, resulting in a peace treaty leaving Sicily in Fatimid hands, and renewing the Byzantine obligation to pay tribute in exchange for the cessation of raids in Calabria. Both powers were willing to come to terms, as both were occupied elsewhere: Phokas with his wars against the Hamdanids and the conquest of Cilicia, and the Fatimids with their planned invasion of Egypt. The caliph al-Mu'izz li-Din Allah refortified a number of towns in Sicily during this time, and built Friday mosques and settled Muslims in hitherto Christian-dominated towns in the Val Demone. Taormina, however, was razed, perhaps as part of the terms of the peace treaty, and not resettled until 976.[15] 기독교 자료 필사하면서 포로생활을 보내는 것을 이슬람 국가인 파티마 왕조에서 허용받았다는 이야기도 된다.[16] Battle of the Straits 중, 'As part of the peace treaty, the Byzantine captives, including Niketas, were ransomed by the Empire. Niketas had spent his captivity in Ifriqiya copying the homilies of Basil the Great and Gregory of Nazianzus in a fine calligraphic manuscript, which after his release he donated to a monastery, and which is now in the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in Paris (Par. gr. 947).'[17] 한 예로 리우트프란트는 니키포로스가 주최한 연회에 나온 음식들마다 참을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피시 소스가 잔뜩 뿌려져 있어서 도저히 먹지 못하고 그냥 굶었다고 한다(...) 여기서 리우트프란트가 언급한 피시 소스는 바로 로마인들이 즐겨먹었던 생선 액젓인 가룸이었다. 로마인들은 이 가룸을 굉장히 좋아하여 음식들마다 잔뜩 뿌려서 먹는 걸로 유명했는데, 이게 리우트프란트의 입맛에는 도저히 맞지 않았던 듯하다.[18] "로마의 이름을 따온 로물루스는 형제 살해자였고 간통자의 자식이었소. 이는 역사가 증명하오. 또한 그는 망명지를 세워서 지불 능력이 없는 채무자와 도망친 노예, 살인자, 사형수를 받아들였소. 그리고 이런 무리에 둘러싸여서 이들을 로마인이라고 불렀소. 이 모든 것이 역사가 말하고 있는 바이오. 바로 이 무리의 귀족계급으로부터 당신들이 코스모크라토레스(황제)라고 칭한 자들이 생겨났던 것이오. 우리 롬바르드인, 색슨인, 프랑크인, 로렌인, 바바로인, 수에비인, 부르군트인들은 그들을 경멸한 나머지 화났을 때 적에게 '이 로마놈!'하고 욕하지요. 로마인이라는 하나의 이름 속에는 온갖 비천함, 비겁함, 탐욕, 방탕함, 위선이 담겨 있고 심지어 이는 모든 악의 줄임말이오." 출처: 비잔틴 제국/ 미셸 카플란 지음/ 노대명 번역/ 시공사/ 135쪽. 단 이 말은 니키포로스가 너희는 로마인이 아닌 랑고바르드족이라고 깠을 때 받아친 말이다.[19]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9p, 원문: 'As Liudprand of Cremona put it in the tenth century: 'We regard "Roman!" as one of the worst insults.' 및 이 각주의 'For the bad reputation of the citizens of Rome, see the contribution by Paolo Delogu, in this volume.'[20] 오늘날 한국으로 따지면 군 주요시설 근처의 고도제한 등이 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은 둔전병제를 시행하였기에 이러한 상황이 더 많았을 것이다.[21] 이 니키포로스의 죽음으로 혼란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22] 영어 위키백과 Treaty of Safar 중, 'The Byzantine emperor would recognize Qarquya as the rightful emir, and his lieutenant Bakjur as his heir. Subsequently, however, the emperor would name both the emir and the qadi from the city's inhabitants. In return, however, Aleppo and its territory became tributary to Byzantium to the order of 700,000 silver dirhams annually, or a head tax of one gold dinar (equivalent to 16 dirham). Furthermore, an imperial official was installed in the city to collect a 10% tax on all goods imported from Byzantine territory, and the emirs of Aleppo were forced to prohibit armies from other Muslim states to pass through their territory, provide intelligence on any such armies moving against Byzantium, and render military assistance to any Byzantine army operating in Syria. The legal standing of Christians in Aleppine territory was guaranteed, and any slave or robber who fled from Byzantine territory had to be returned, along with any Muslim spy who came to gather intelligence on the Byzanti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