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레온 포카스 (영어: Leo Phokas, 그리스어: Λέων Φωκᾶς)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쿠로팔라테스 |
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장성. 형 니키포로스 2세와 함께 아랍인들을 상대로 맹활약한 인물이다. 형을 암살하고 황위를 찬탈한 요안니스 1세에 맞섰으나 끝내 실패했다.2. 행적
남이탈리아에서 아랍인들을 상대로 맹활약한 명장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손자이자 키예프 루스 대공 이고리 류리코비치의 흑해 침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대 바르다스 포카스의 차남이다. 형으로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있었으며, 동생으로 콘스탄티노스 포카스가 있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어머니는 비티니아의 올림푸스 산에 있는 킴니아스 수도원의 수도원장 미하일 말레노스의 누이였다. 여기에 동방 전선군 장성인 로마노스 쿠르쿠아스와 결혼한 누이도 있었는데, 그녀가 낳은 아들이 바로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였다.944년 콘스탄티노스 7세에 의해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아버지 대 바르다스 포카스 휘하에서 함단 왕조를 상대로 전쟁을 치렀다. 948년, 사이프 알 다울라가 이끄는 함단군이 아버지의 알레포 침공을 저지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유프라테스 강 연안의 수그르 지역의 주요 거점인 하다스를 약탈했다. 949년, 사이프 앗 다울라가 라칸도스 테마를 급습했으나 방비를 뚫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역공을 가해 게르마니케이아를 약탈하고 안티오키아까지 급습했다.
950년, 사이프는 대규모 함단군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라칸도스와 하시아논 테마로 쳐들어가 철저하게 약탈했다. 그러나 귀환하던 중 레온의 매복 공격을 당했다. 가즈와트 알-무시바(ghazwat al-musiba : 죽음의 원정)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사이프 앗 다울라는 8,000명의 병사를 잃은채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러나 그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협약을 맺기를 거부하고 라탄도스와 멜리테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겨울이 될 즈음 철수했다.
953년, 대 바르다스 포카스가 대군을 이끌고 킬리키아로 진군했다가 게르마니케아 인근의 마라쉬 전투에서 사이프에게 참패했다. 바르다스는 얼굴에 큰 부상을 입은 채 탈출했고, 레온의 동생 콘스탄티노스 포카스는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로 인해 위신을 잃은 바르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었고, 형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955년경 아나톨리아 방면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형의 지휘하에 함단 왕조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이어갔고, 959년 키루스 일대를 침공해 여러 요새를 약탈했다.
960년, 사이프 알 다울라는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한닥스 공방전을 치르기 위해 상당수의 아나톨리아 방면 로마군을 크레타 섬으로 이끌고 간 틈을 노리기로 했다. 그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 병력인 30,000명을 이끌고 제국의 국경을 넘어 타우로스 산맥 동쪽의 협곡들을 무사히 통과하여 멜리테네 부근의 샤르시아논 요새로 가서 동로마군 수비대를 죽이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대신하여 수비를 맡았고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정면 대결을 벌이는 건 무의미하다고 보고, 길고 험한 원정으로 지친 함단군을 상대로 매복 공격을 펼치기로 했다. 그는 산악 지대에 주둔하여 주요 길목에 병력을 세심하게 배치한 뒤 사이프가 본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960년 11월 초, 사이프 앗 다울라는 본국으로 귀환하다가 쿨린드로스 고개 전투에서 레온이 이끄는 동로마군의 기습을 받고 다수의 병력을 잃은채, 오직 300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함단군 병사들은 절반 가까이가 죽었고, 붙잡힌 병사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그 후 크레타 정복을 완수하고 귀환한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962년 초 동생 레온과 함께 7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킬리키아로 진군하여 불과 3주만에 킬리키아의 도시 55개를 공략했다. 또한 형과 함께 알레포로 진군하여 단숨에 공략하고 병사들이 지칠 때까지 학살을 자행하게 한 뒤 막대한 제물을 약탈한 후 귀환했다.
963년 황제 로마노스 2세가 급사하자, 형이 로마노스 2세의 두 아들 바실리오스 2세, 콘스탄티노스 8세와 함께 공동 황제에 등극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리하여 황위에 오른 니키포로스 2세는 동생을 쿠로팔라테스에 선임하고 가장 가까운 고문으로 삼았다. 니키포로스의 궁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크레모나 주교 리우트프란트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 사절단은 968년 6월 6일 레온과 접견했다. 이때 오토 1세가 로마 황제를 칭한 것에 분노해 "그는 '프랑크인의 왕'일 뿐이다"라고 깎아내렸다. 리우트프란트는 훗날 자신의 저서에 레온이 중간에서 훼방놓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다며 레온을 맹비난했다.
969년 12월 11일, 니키포로스 2세가 외조카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와 테오파노 황후, 미하일 부르체스 등 공모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형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역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한 뒤 맏아들 니키포로스 포카스와 함께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체포되어 곧 신분과 관직과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레스보스로 유배되었다. 레온 포카스의 둘째 아들 바르다스 포카스는 흑해 연안의 오지인 폰투스의 아마세이아로 보내졌다.
971년 초, 아마세이아에 유배되었던 바르다스 포카스가 탈출해 카이사레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참칭했다. 이에 호응해 맏아들 니키포로스와 함께 레스보스의 현지 주교를 통해 트라키아 각지에 바르다스 포카스에 호응해 제위 찬탈자에 맞서 봉기하라고 선동했다. 요안니스 1세는 즉각 신속하게 대응했다. 레온의 지시를 받고 선동 작업을 수행하고 있던 주교는 체포되어 모든 것을 털어놨고, 요안니스는 레온과 니키포로스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이내 눈을 멀게 한 후 영원히 추방해버리라고 지시했다가 다시 마음을 돌려 눈을 멀게 하지 말고 단지 유배만 보내라고 명령했다. 또한 바르다스 포카스는 요안니스 1세의 형부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에게 패배한 뒤 티로포이온 요새로 대피했다가 토벌군에게 포위되자 항복한 후 머리를 삭발한 후 가족과 함께 키오스 섬으로 보내졌다. 이후 레온 포카스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이름와 출신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장남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레온과 함께 요안니스 1세에 대항했다가 실패하고 유배되었다. 요안니스 1세 사후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수도로 소환된 뒤 파트리키오스 직책을 수행하다 989년에 사망했다. 차남 바르다스 포카스는 요안니스 1세 사후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의 반란에 직면한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토벌군 지휘관으로 선임된 후 스클리로스와 수 년간 전쟁을 벌인 끝에 물리쳤다. 이후 바실리오스 2세가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에서 사무일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에게 참패하면서 입지가 취약해지자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한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전에 두었다. 그러나 키예프 루스를 끌어들인 바실리오스 2세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딸 소피아 포카이나는 요안니스 1세의 처남인 콘스탄티노스 스클리로스와 결혼하여 테오파노 스클리나를 낳았다. 테오파노는 972년 4월 신성 로마 황제 오토 2세와 결혼해 오토 3세를 낳았고, 983년 오토 2세가 갑작스럽게 죽자 당시 3살이던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맡아 994년까지 제국을 이끌었다. 한편, 사생아로 페트루스 포카스와 마누일 포카스를 두었다. 페트로스 포카스는 환관으로서 니키포로스 2세부터 바실리오스 2세까지 3대 황제를 섬겼고, 스뱌토슬라프 전쟁 때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와 함께 스뱌토슬라프 1세의 키예프 루스군을 격파했다. 마누일 포카스는 파트리키오스 직책을 맡았고, 964년 시칠리아의 로메타에서 이슬람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