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니키포로스 포카스 (영어: Nikephoros Phokas, 그리스어: Νικηφόρος Φωκᾶς) |
출생 | 미상 |
사망 | 895년 또는 896년 또는 900년 |
직위 | 중앙군 총사령관(Domestic of Schools) |
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장군. 9~10세기 동로마 제국의 핵심 군사귀족으로서 명성을 떨친 포카스 가문의 첫번째 주요 인물로, 남부 이탈리아 전선, 아랍 전선, 불가리아 전선에서 활약했다. 후대 니키포로스 2세의 친조부이다.2. 행적
872년경 투르마체스(tourmarches: 군마 관리자이자 특정 지역에서 재정, 사법적 임무를 수행하는 감독관)를 역임했던 카파도키아 출신의 포카스라는 인물의 아들이다. 바실리오스 1세 치세 때 망글라비타이(Manglabitai) 근위대에 편입되었고, 873년 바실리오스 1세의 사모사타 원정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프로토스트라토르(protostrator) 계급에 발탁되었고, 차르시아논(Charsianon) 테마의 스트라테고스(strategos: 특정 테마의 총사령관)의 지위로 승진했다.그 후 885년 이탈리아 남부 전선으로 보내져서 아랍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펼쳤다. 그는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케팔레니아, 칼라브리아 등 서부 테마의 군대를 총괄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테오파네스 콘티나토스는 그가 소아시아의 테마들로부터 파울리아 분견대를 포함한 추가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기술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으로 인해 시칠리아 대부분을 상실했고, 847년 바리를 빼앗기고 873년경 오트란토를 빼앗기는 등 이탈리아 남부의 영유권 상당수도 아랍인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그는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기 위한 전쟁을 감행해 타란토, 바리, 산타 세베리나, 레기온, 타오르미나, 트로파이 등 여러 도시를 탈환했다. 한편, 그는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이탈리아 남부로 이주시켜서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아만티아를 포위 공격하던 그는 레온 6세로부터 소환령을 받았다. 그는 일단 이 사실을 비밀로 해두고, 아랍 수비대에게 본국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게 해줄 테니 항복하라고 제안했고, 아랍 수비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아민티아를 마저 탈환한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11세기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에 따르면, 그는 동로마 병사들이 동방에서 노예로 팔기 위해 이탈리아인들을 납치하는 관행을 종식시키고 현지 주민들을 학대하는 자들을 엄벌에 처했다. 이에 감격한 이탈리아인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교회를 헌정했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은 니키포로스의 활약 덕분에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대부분을 점유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892년 롱고바르디아 테마를 창설했다.
레온 6세가 남부 이탈리아에서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벌이던 그를 소환한 것은 시메온 전쟁 때문이었다. 당시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1세는 894년 트라키아를 침공해 아드리아노폴리스 인근의 마케도니아 평원에서 프로코피우스 크레니테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을 섬멸했고, 많은 마을들이 불가리아군에게 짓밟히고 수많은 백성이 학살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후 파트리키오스로 승진한 후 중앙군 총사령관(Domestic of Schools)에 선임되었다.
895년, 니키포로스는 대군을 이끌고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여기에 마자르족이 레온 6세로부터 막대한 선물을 받고 동로마군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들은 동로마 함대에 올라타서 다뉴브 강을 거슬러 내려갔다. 불가리아군은 쇠사슬로 강을 차단했지만, 리엔티카가 이끄는 마자르군이 강 남쪽 기슭으로 건너가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 당시 시메온 1세는 니키포로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불가리아와 동로마 국경 지대에 있다가 마자르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도브루자 인근에서 패배한 뒤 드리스트라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농성했다. 마자르인들은 공성 기술을 몰랐기 때문에 요새를 함락시킬 수 없었고, 그 대신 드리스트라 주변 마을들을 모조리 약탈하고 파괴한 뒤 불가리아의 수도 프리슬라프로 이동하여 역시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에 불가리아 포로를 팔아넘긴 후 다뉴브 강 북쪽 지역으로 돌아갔다.
시메온 1세는 마자르족이 떠난 후 레온 6세에게 포로 교환 협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알렸다. 이에 레온 6세는 니키포로스에게 군사 작전을 자제하라고 명령하고 레온 조이노스파크테스를 프리슬라프로 보냈다. 그러나 시메온은 새 병력을 모을 시간을 벌 용도로 협상을 했을 뿐이었기에, 온갖 구실을 대며 사절의 접견을 지연했다. 이와 동시에, 마자르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페체네그인들과 동맹을 맺었다. 896년 초, 불가리아군과 페체네그 연합군이 마자르를 협공해 큰 타격을 입혔고, 마자르족은 적의 공세를 피해 카르파티아 고개를 넘어 판노니아 대평원으로 들어갔으니, 이 지역이 바로 헝가리다.
그렇게 마자르족을 몰아낸 뒤, 시메온 1세는 동로마 제국과 전면전을 벌이기로 했다. 시메온 로고테테스에 따르면, 하필이면 이 시기인 895년 또는 896년에 니키포로스가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중앙군 총사령관에 선임된 레온 카타칼론은 시메온을 상대로 불가로피곤 전투를 치렀다가 참패했고, 불가리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며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수많은 동로마인들을 잡았다. 결국 레온 6세는 시메온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흑해와 스트란자 산맥 사이의 영토를 불가리아가 가지는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테오파네스 콘티나토스의 역사서 후기 사본에 따르면, 니키포로스는 레온 6세의 최측근인 스틸리아노스 자우치스의 결혼 동맹 제안을 거절한 후 해임되었다. 그 후 차르시아논 또는 트라키아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인명되어 900년 사망할 때까지 아랍인과 싸웠다고 한다. 또한 일부 사료에서는 아나톨리아 테마의 미스티아 요새에 대한 아랍의 습격으로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에 분노한 레온 6세의 명령에 따라 아랍의 킬리키아 지역을 공격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테오파네스 콘티나토스의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며, 니키포로스가 895년 또는 896년에 사망했다는 시메온 로고테테스의 기록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본다.
훗날 두 아들 대 레온 포카스, 대 바르다스 포카스와 손자 니키포로스 포카스, 레온 포카스도 동로마 장성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