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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슬람권에서 최고 종교지도자를 겸하는 보편 군주.2. 용례
아랍어로 할리파(خليفة / Khalīfah), 튀르키예어로는 할리페(Halife), 영미권에서는 칼리프(Caliph)로 통칭된다. 예전에는 회교 황제, 회교 교황, 회황(回皇), 회교주 등으로 번역되었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표현은 칼리파이다.카타르의 축구장 중 하나인 칼리파 인터내셔널 스타디움, 부르즈 할리파에서의 할리파가 바로 이 칼리파를 의미한다. 부르즈(برج / Burj)는 아랍어로 '탑'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부르즈 할리파는 '칼리파의 탑'이 된다. 할리파에서의 ㅎ에 해당하는 아랍문자 하(خ / Khāʾ)는 무성 연구개 마찰음(/x/) 또는 무성 구개수 마찰음(/χ/)을 나타낸다. 해당 음소는 〈외래어 표기법〉상의 국제 음성 기호와 한글 대조표에 따르면 ㅎ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할리파로 쓴 사례도 있다. 그러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칼리파가 등재돼 있으며 역사 용어로도 칼리파와 칼리프라는 표기가 굳어졌기 때문에 할리파라는 표기는 부르즈 할리파나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카타르의 전 아미르)처럼 현대 고유명사나 아랍인의 인명에서 쓰인다. 정식으로 공표되진 않았으나,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아랍어 자모와 한글 대조표에서는 h와 구분하기 위해서인지 kh도 그냥 ㅋ로 표기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 시안을 따를 경우 칼리파가 된다. 어디까지나 시안이긴 하지만 국립국어원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많은 출판사에서 이를 참고한다.
본래 아랍어 할리파는 '대리자' 또는 '계승자'라는 뜻을 가진 말로 초대 정통 칼리파였던 아부 바크르가 사용한 칭호인 할리파트 라술 알라(خليفة رسول الله, 신의 사도의 계승자)에서 유래했다.[1] 할리파트 알라(خليفة الله, 신의 대리인), 아미르 알무미닌(أمير المؤمنين, 신자들의 총사령관),[2] 이맘 알움마(إمام الامة, 이슬람 공동체의 인도자)의 별칭도 자주 쓰였다.
물론 맘루크 왕조와 같이 허수아비에 불과한 시절도 있었지만, 전근대 가톨릭의 교황과 마찬가지로 종교뿐 아니라 정치까지 맡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3] 그런데 사실 세계사에서 제정일치의 군주제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 일본의 천황이 그러했고 한국 역사를 보더라도 단군, 궁예 등 제정일치 시절이 있었다.
다만, '칼리파'의 경우, 동시대의 다른 제정일치 군주제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는 있다. 흔히 칼리파와 비교되는 가톨릭의 교황 같은 경우, 교황령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통치자였고, 가톨릭 세계의 주도권을 두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팽팽한 대결을 벌이기도 했지만 교황의 경우, 명목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모든 가톨릭 교권의 정치적 통치자는 아니었다. 설령 교황권의 전성기에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했을지언정, 속계(정치)의 제1인자는 황제였고, 교황은 종교계의 1인자로 그 영역이 명확히 갈려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칼리파는 원칙적으로는 종교와 정치를 모두 아우르는 이슬람 세계의 최고 지도자였고, 이슬람 제국의 전성기에는 실질적으로도 이러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4]
그리고, 다른 제정일치 군주제와 비교할 경우, 사실 조직화된 종교에서 제정일치 체제 그것도 교리적으로 공인된 제정일치 체제가 나타나는 사례 자체가 생각만큼 흔하지는 않다. 애초에 제정일치 체제가 제일 흔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성읍국가나 군장국가 수준의 초기 국가체제에서 사제나 제사장이 통치자를 겸하는 경우인데, 당시의 국가 단위[5]에서 제일 존경받고 똑똑한 웃어른인 제사장이 재판이나 분쟁조정 등의 세속적 정치 영역까지 담당하는 것이라, 세속적 권력이든 종교적 권위든 이후 시대의 국가나 종교만큼 체계화된 것이 아니었다.[6]
사실 이슬람 세계에서 칼리파의 정치적인 위치는 설명하기가 매우 복잡한데 초기 이슬람 시대만 하더라도 칼리파는 말 그대로 이슬람 세계의 최고 지도자로서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가장 높은 위치의 존재였다. 그러나 아바스 제국이 우마이야 제국을 멸망시키고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후우마이야 제국을 세우면서 이슬람 세계에서의 칼리파가 둘로 나뉘었고, 다시 시아파의 압둘라 알마흐디 빌라가 파티마 제국을 세우면서 이슬람 세계에는 3명의 칼리파가 공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바스 칼리파가 실질적인 세속 권력을 잃고 살라흐 앗딘이 파티마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이슬람 세계는 크게 둘로 나뉘게 되는데, 동부 이슬람 세계에서의 칼리파는 이때부터 점차 종교적이자 상징적인 존재로 변하는 반면, 서부 이슬람 세계에서의 칼리파는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모두 가진 존재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13세기 동부 이슬람 세계에서는 일 칸국의 창건자인 훌라구 칸이 바그다드를 정복해 아바스 칼리파조가 세속 영토를 모두 상실했고, 서부 이슬람 세계에서는 무와히드 왕조가 멸망하면서 칼리파는 완전히 이집트 술탄의 꼭두각시이자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여러모로 볼 때 이슬람 세계의 칼리파는 일본의 천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본래 정치적, 종교적으로 최고 지도자였으나 이후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7]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둘은 매우 비슷하다. 다만 중세 후기의 아바스 칼리파와 술탄의 관계는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의 대립이라는 점에서 볼 때 서유럽의 교황과 황제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3. 칼리파의 계승(수니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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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트 6세 | 압뒬메지트 2세 | }}} 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으나 하산도 잠깐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 |
3.1. 정통 칼리파(632년~661년)
처음에는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 움마를 통치할 지도자를 지명하기 위해 선출되었으며, 세습제를 체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거군주제의 형태를 띄었다.[8][9] 그러나 4대 정통 칼리파인 알리가 암살되면서 수니파와 시아파 등이 본격적으로 분열하게 된다.3.2. 우마이야 칼리파(661년~750년)
알리가 암살된 후, 무아위야 1세가 칼리파 자리를 차지하고 세운 우마이야 왕조부터는 직위가 세습되기 시작했지만 선출의 관례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있어서 칼리파 세습제 전환을 완강히 반대하는 신도들이 후세인 이븐 알리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허나 결국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에 의해 후세인이 살해당하면서 세습 반대파는 완전히 진압당했고 이후 세습제가 정착되었다.3.3. 아바스 칼리파(750년~1258년, 1261년~1517년)
그러다 우마이야 왕조를 타도한 아바스 왕조 때부턴, 수니파의 경우, 무하마드의 일족이었던 쿠라이쉬 가문에서 칼리파를 세습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시아파는 알리의 자손에게 칼리파의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고, 하와지리파는 사도의 혈통에 구애되지 않고 정통 칼리파 시대처럼 신앙의 독실함에 따라 선출해야 한다고 여겼다.허나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가 지나가는 9세기 말 이후부터는 칼리파 자체가 정치적 권력을 상실하고 명목화되었다. 즉, 술탄이나 샤, 아미르들이 땅을 차지하고 나면 확인 도장 찍어주는 역할로, 일본의 막부 시절 천황과 비슷한 꼭두각시 신세였다. 그러다 12세기 셀주크 왕조가 몰락한 뒤 잠시나마 권력을 되찾는 듯 보였으나, 곧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아바스 왕조는 일단 멸망하게 된다.
그러다가 맘루크 왕조가 아바스 왕조의 혈통 중에 꼭두각시를 한 명 데려다가 칼리파랍시고 카이로에 모셔 놓았다. 노예 왕조였기에 정통성이 취약하여, 서로 죽고 죽이는 군벌간의 다툼이 많았던지라 정통성 강화 차원에서 얼굴 마담이 하나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꼭두각시가 되어 살다가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맘루크 왕조를 정복한 후엔 오스만 술탄에게 칼리파 직위가 넘어가게 되었다.
3.4. 오스만 칼리파(1517년~1924년)
오스만 제국은 칼리파의 정통성을 얻어 사용했지만 큰 의미를 두진 않았고 이미 자칭하고 있었다. 칼리파는 룸 술탄(رُّومُ سلطان)을 비롯한 그저 술탄의 수많은 칭호 중 하나 정도로 취급되었다.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이 의미를 둔 칭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후 자신이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칭하며 칭한 '룸 카이세리(Rum Kayseri)', 즉 '로마 황제'라는 칭호였다.하지만 18세기 말부터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 내 정교회 신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오스만 제국에서도 이에 대항해 자국내 무슬림 밀레트[10]의 대표자로써 칼리파라는 호칭을 재부각시켰고, 이를테면 러시아와 맺은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에서도 오스만측 국가원수를 '칼리파'로 칭하였다.
이후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고 있는 이슬람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칼리파를 그들의 대표자 혹은 정신적 지주로 여기도록 외교활동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오스만 제국에서 보낸 밀사들은 영국령 인도, 청나라, 일본 같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바깥에 있는 이슬람 지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11] 또한 칼리파를 오스만 제국이 계승하면서부터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도 한동안은 무슬림들이 메카를 순례할 때, 고향을 떠나서 제일 먼저 칼리파가 살고 있는 이스탄불을 순례한 다음에 메카로 떠나는 풍습도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이자 칼리파였던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이 1922년 케말 파샤에 의해 퇴위당하면서 술탄제는 폐지되었지만, 칼리파 직위만은 사촌 압뒬메지트 2세가 이어받았다. 그러나 킬라파트 운동[12] 회원들이 당시 총리였던 이스메트 이뇌뉘 명의 앞으로 오스만 황실을 복원하고 칼리파 신정체제 수립을 요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사건이 터지면서 칼리파 제도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한 튀르키예 정부는 불과 1년 4개월 뒤인 1924년 3월 3일 칼리파 제도를 완전 폐지하였고, 결국 칼리파 직위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헤자즈 왕국의 군주이자 하심 가문의 수장인 후세인 빈 알리가 칼리파를 칭하기도 했다.
4. 병행 칼리파
4.1. 파티마 칼리파(909년~1171년)
시아파 중 이스마일파에 속한다.4.2. 코르도바 칼리파(929년~1031년)
후우마이야 왕조는 당초 안달루스 지방의 아미르를 자칭했으나, 서기 900년대 초에는 파티마 왕조 칼리파가 나타나서 북아프리카로 세력을 확장해오자 이에 대항하여 자신들도 칼리파를 자칭하게 된다.
4.3. 무와히드 왕조(1147년~1269년)
이쪽도 종교 조직에서 시작한 만큼 종교적 권위를 빌리기 위해 칼리파 칭호를 자칭했다. 특히 후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계가 타이파 공위 시대로 접어든 만큼 이런 고위 직위의 권리를 빌리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러나 무와히드 왕조가 멸망한 이후 마린 술탄국 때부터는 마그레브 및 안달루스 지역의 이슬람 정권들은 칼리파라는 칭호를 쓰지 않았다.5. 현대의 칼리파: 부활 논란?
튀르키예의 칼리파 폐지 이후로는 실권과 영토를 가진 정통성 있는 칼리파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군소 교파나 이슬람계 이단 교파에서 칼리파를 자칭하는 실정이다.혈통만 따진다면 무함마드의 출신 가문인 하심 가문이나 칼리파제 폐지 이전까지 칼리파직을 세습하던 오스만 가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리파라는 직위가 꼭 혈통만 따지는 건 아니며,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인 만큼 그 영향력도 중요하고, 적어도 이슬람 3대 성지(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의 지배 여부도 봐야 한다. 후술할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가문조차 칼리파를 칭하지 못함을 고려해야 한다.
현대 이슬람주의자들의 목표 중 하나가 바로 칼리파를 새로이 뽑는 것이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칼리파가 다스리는 체제를 원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반대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도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가하는 정신 오염이나 전통 파괴, 종교 권위에 대한 도전 등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주 목표는 이슬람 세계의 단결이기 때문에 그 단결의 상징으로서 칼리파를 세우고 그 아래 단결하자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강고한 국민국가 민족주의 체제 하에서는 거의 가망이 없는 소리다.
모든 이슬람 세계를 아우르는 지도자인 칼리파를 다시 세우자는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론이지만, 이슬람의 발원지이자 중심지인 중동-아랍권에 한정한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다. 복잡한 정치 상황은 어쩔 수 없더라도, 아랍 지역의 민족주의는 통일된 아랍국가를 지향하는 범아랍주의 성향이 강하다. 제국주의 전성기였던 19세기 이후부터 통일 아랍국가 운동은 아랍 민족주의 내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이런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근대국가(세속국가)를 지향했다는 점 때문에 이슬람주의 운동과 서로 충돌했지만, 반 서구라는 공감대가 있는 이상,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가 결부된 (칼리파를 구심점으로 한) 통합된 아랍국가를 지향하는 운동이 나타나는 것 자체는 (성공이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아랍 역시 여러 국가들로 갈려있고, 그 안에서도 세속적인 범아랍주의랑 종교적 이슬람주의가 대립하기 때문에 미래가 영 예측 불가능한 줄거리다.
수니파와 시아파 양대 교파가 칼리파를 자칭하려면 아무래도 《3대 성지(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의 수호자》라는 실질적인 지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우디아라비아(아랍인 종교국가)가 메카와 메디나를 다스리는 반면에 이스라엘(유대인 세속국가)이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현실이다. 가까운 미래에 모두가 인정하는 정통파 칼리파가 등장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이리하여 메카와 메디나를 다스리면서 수니파 이슬람 세계의 패권국가로 군림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스스로를 두 성지의 수호자라고만 칭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도 가능성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 실제로 혼란스러운 중동정세를 틈타 2014년 발흥한 사이비 테러리스트 집단 ISIL이 이슬람 제국의 부활을 주장하며 그 우두머리가 칼리파를 자칭했지만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한채 현재는 몰락했다.
6. 비주류(공인받지 못한) 칼리파
6.1. 아흐마디야 칼리파
아흐마디야 칼리파 직은 1908년 5월 창립되었다. 미르자 마스루르 아흐마드(Mirza Masroor Ahmad, 1950~)는 아흐마디야의 5대째 칼리파로, 2003년에 계승했다. 원래 칼리파 좌는 파키스탄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파키스탄의 지아 울 하크 장군의 쿠데타(1979년) 이후 수립된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에서 아흐마디야를 탄압했다.[13] 결국 1984년에 런던으로 망명했고, 현재 칼리파 좌는 영국에 있다.
6.2. IS 칼리파
2014년, 흔히 IS라 불리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멸칭 '다에쉬'에서 90여 년 만에 칼리파제 부활과 칼리파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칼리파로 취임한 인물은 악질 테러리스트이자 조직 지도자인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였다. 다만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칼리파는 전세계의 어떤 정식 이슬람 공동체나 국가에서조차 단 한 곳도 공인받지 못한 참칭 칼리파로 취급받는다.6.2.1. 보코 하람 칼리파
나이지리아의 이슬람 테러조직인 보코하람 역시 창설 이후 한 때 칼리파 국가를 자칭했으나, 단체 차원에서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충성맹세를 한 뒤 이슬람 국가 서아프리카 주(Islamic State West Africa Province)라는 새로운 조직 이름을 받음으로서 칼리파제를 스스로 취소했다.7. 칼리파국
칼리파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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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연대 | 비고 |
정통 칼리파 시대 | 632~661 | · 최초의 칼리파[14] · 선출 칼리파 |
우마이야 왕조 | 661~750 | · 최초의 세습 칼리파 |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 | 750~1258 | ·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칼리파국 · 동서 이슬람 분열 |
파티마 왕조 | 909~1171 | · 시아파 왕조 |
후우마이야 왕조 | 929[15]~1031 | ·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 |
무와히드 왕조 | 1147~1269 | · 베르베르인 왕조 |
카이로 아바스 왕조 | 1261~1517 | · 맘루크 술탄국에 위치 |
오스만 왕조 | 1517[16]~1924[17] | · 최후의 칼리파 · 칼리파제 폐지 · 해당 역할은 튀르키예 공화국 종교부에 이관 |
소코토 칼리파국 | 1804~1903 | · 서아프리카 나이지리아와 니제르에 위치 |
헤자즈 왕국 | 1924[18]~1925 | · 샤리프 칼리파 |
[1] 여성형 명사를 나타내는 아랍 문자 '타 마르부타'(ة)가 끝에 붙어 있기 때문에 연결형 문법에서는 '할리파트'(خَلِيفَة / Khalīfat)로 발음교체가 발생한다.[2] 이 칭호는 일부 세속 군주들도 사용하는데 과거에는 무굴 제국의 황제 아우랑제브가 쓰기도 했고, 현재는 모로코 국왕, 소코토 토후국(나이지리아에 소속)의 아미르가 사용하고 있다.[3] 게다가 잘 나갔을 무렵의 교황령은 이탈리아 반도 중부 대부분을 영유하는 대국이었다. 그리고 칼리파국도 우마이야 왕조나 아바스 칼리파조 전성기 시기까지 그 교황령도 우습게 볼만큼 넓은 영토를 지니고 있었다.[4] 교황이 교황령을 통치하는 세속 군주로서의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가톨릭 세계의 일부분에 대한 세속 군주의 측면도 가진 것을 종교 뿐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도 이슬람권 전역의 최고 지배자로 여겨지던 초기 칼리파의 권력과 비교하기는 어렵다.[5] 솔직히, 현대 기준으로는 그냥 동네 하나와 별로 다를 바 없다고 할 정도로 작은 경우가 많다.[6] 위에 제시된 사례 중에는 대략 단군 정도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궁예와 같은 사례를 본다면 솔직히 불교 교리 어디에도 궁예를 미륵불로 인정하는 부분은 없다. 이건 말하자면 궁예가 일방적으로 미륵불을 자처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종교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이를 통하여 권력을 강화한 사례이지, 공식적인 교리로 보장되는 제정일치 체제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이슬람 세계에서야 '난 너 칼리파로 인정 안 해!' 라고 생깔지언정 칼리파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기는 힘들었던 데 비해,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한다고 태봉 사람 말고 누가 그걸 인정해 줬겠는가를 생각해보면 된다.[7] 중동의 아미르와 일본의 무가정권은 모두 지방의 군벌 세력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점 역시 공통적인 점이다.[8] 이때는 현대의 민주주의와는 다르게 임기제의 개념이 없었고 신도들이 직접 지도자를 선출해서 뽑는 방식이 아니라 각 부족장들과 이맘들이 협의를 거쳐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과두제적인 성격이 있었다. 애초에 이때는 민주주의 공화정 자체가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던 제도였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여하튼 칼리파가 원래 선출제였던 덕택에 칼리파 세습제가 도입되자 현대의 민주주의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시대를 앞서나가던 종파도 생겨났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 사멸당해버렸다.[9] 정통 칼리파 항목 참조.[10] Millet. 일종의 종교 공동체로, 오늘날 일부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소수민족자치구가 민족 대신 종교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면 된다. 다만 '소수'종교만이 아니라 이슬람을 포함한 모든 종교별로 만들어졌는데, 러시아의 개입도 '너네 투르크가 밀레트인가 뭔가 만들어서 기독교도도 보호한다는데 못 믿겠으니 투르크 황제와 그 꼭두각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대신 우리가 정교도의 보호자 역할을 맡겠다' 라고 선언했던 것. 참고로 프랑스는 한참 전부터 라틴 밀레트, 즉 가톨릭의 보호자 역할을 해왔다.[11] 이때 밀사로 파견된 사람 중에서 크림 반도 출신의 압뒤레시트 이브라힘(Abdürreşid İbrahim)은 중국에 거주하는 위구르를 비롯한 무슬림들에게 파견되는 와중에 조선과 일본을 들러 이 지역의 상황을 오스만 제국에 보고하기도 했다.[1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시작되어 오스만 황실과 칼리파 제도의 유지를 요구하던 범이슬람 운동이다.[13] 수니파·시아파를 막론하고 이슬람 주류에서는 아흐마디야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14] 칼리파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지칭하므로 무함마드는 제외이다.[15] 칼리파를 칭함[16] 아바스 가문이 오스만 제국에게 칼리파직을 정식으로 선양한 해가 이 해인데, 오스만 측 기록에 따르면 무라드 1세(재위 1362~1389)가 처음으로 칼리파를 자칭했다.[17] 군주제는 1922년에 폐지됐으나 칼리파직은 2년 후인 1924년에 폐지되었다.[18] 칼리파를 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