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 및 왕실의 구성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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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 천황 황태자 친왕,왕 | 황후 황태자비 친왕비,왕비 | 여성 천황 내친왕,여왕 | 황태후 | |
● 영국 | 왕 웨일스 공 HRH Prince | 왕비 웨일스 공비 공작부인 | 여왕 HRH Princess | Queen+이름 Prince+이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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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또는 빈칸은 동아시아 황실/왕실 체제에서 해당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거나 관련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 경우를 나타낸다. 당시에는 이러한 경우 특별한 호칭 없이 이름이나 관직명을 사용했다. 그러나 본 틀에서는 문헌 기록이 없더라도, '왕세녀', '국서'처럼 근현대에 새롭게 자리잡은 번역어의 경우 포함해 기재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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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男寵군주 등 고위 인물의 남첩(男妾). 지위 높은 여성이 남첩을 둔다고 생각하기 쉽고 실제로 그 사례도 많지만, 아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지위 높은 남성이 남첩을 둔 일도 생각보다 많아 어느 한 성별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군주의 남총은 유럽사에서는 로얄 미스트리스처럼 정부(情夫)에 불과했고, 동아시아사에서는 후궁과 달리 공식적인 작위가 없어서[1] 별개의 벼슬을 줘서 권력을 부여했다. 그래서 군주의 남총들은 그만한 능력도 없으면서 과분한 벼슬을 받아 정치를 잘못한 사례가 많다.
역사적으로 드물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용어라 현대의 한국산 창작물들에서는 군주의 남첩도 후궁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실존한 군주의 남총들은 후궁의 내명부 업무가 아닌 문관·무관 벼슬을 했기 때문에 후궁과는 차이가 있다.[2] 신첩(臣妾)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3] 남총의 경우 한 글자로 신(臣)으로 지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성 군주가 남총을 두는 것이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보수적이고 엄격했던 성관념도 원인이었고, 남녀 간 생식 기관의 차이도 원인이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적서를 엄격하게 따졌으므로 자식이 정실 소생인지 측실 소생인지가 매우 중요했고, 유럽에서는 아예 정식으로 혼인한 단 한 명의 배우자 이외에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모조리 사생아 취급이었다. 그런데 여성 군주가 여러 명의 남자를 거느릴 경우, 아이의 친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이를 '사생아의 딜레마'라 한다) 적서(또는 적자와 사생아)를 가리기 어렵다.
또한 남성 군주들이 후궁을 들인 명분 중 하나가 후계 생산이었는데, 여성 군주는 남총을 아무리 많이 거느려도 왕실의 후계자를 생산할 수 있는 몸이 여성 군주 본인의 몸 하나 뿐이다. 즉, 남총을 잔뜩 둔다 해서 그만큼 많은 자식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있어 봤자 국고만 탕진하는 남총을 굳이 여럿 거느릴 필요가 없었다.
남성의 발언권이 제한된 여성 중심 사회를 가정해 본다면 아이의 생물학적 친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냥 여성 군주가 지목하는 남성이 아이의 아버지 역할을 하게 되는 사회상이라든지, 여러 명의 남성들을 경쟁시켜 우수한 후계자를 얻을 목적으로 많은 남총을 두는 사회상 같은 것을 상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주요 문화권에서 이런 일이 존재했던 실제 사례는 없다.
2. 남총 기록이 있는 고위 여성
상술한 이유들로 남총이 공식 제도화되지 못한 만큼, 남총을 두는 것은 일반적인 여성들에게는 불가능했고 남편보다 강한 (혹은 사회 통념을 거슬러도 뒤탈이 없을 만큼 강한) 권력을 가진 여성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도 허용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권력이 있으니 할 수 있었던 것뿐이었다.[4] 그래서 남총을 둔 여성은 사회의 성윤리를 위배한,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음란한 요부로 간주되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선태후(진) - 위추부
- 관도장공주(전한) - 동언
- 문성문명황후 풍씨(북위) - 이혁, 왕예, 이충, 유찬
- 선무영황후 호씨(북위) - 양백화, 원역, 정엄, 이신궤
- 산음공주(유송)
- 왕보명(남제)
- 측천무후(무주) - 설회의, 심남구, 장역지, 장창종 등
- 예지황후(요나라) - 한덕양
- 진성여왕(신라)
- 헌애왕후(고려) - 김치양
- 고켄 덴노(일본) - 도쿄
- 우라카(레온 왕국, 카스티야 왕국) - 고메스 곤살레스, 페드로 곤살레스
- 테레사 데 레온(포르투갈 백국) - 페르난도 페레스
- 조반나 2세(나폴리 왕국) - 판돌펠로 알로포, 조반니 카라촐로
- 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 왕국) - 로버트 더들리
- 안나 이바노브나(러시아 제국) - 에른스트 비론
-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러시아 제국) - 알렉세이 라주모프스키, 이반 슈발로프
- 예카테리나 2세(러시아 제국) - 그리고리 포템킨 등
- 은징가 여왕(은동고 왕국, 마탐바 왕국)
- 라나발로나 1세(메리나 왕국) - 안드리아미하자
- 하트셉수트(이집트 신왕국) - 세넨무트
3. 남총 기록이 있는 고위 남성
동성애 또는 양성애 성향을 가진 고위 남성들도 남총을 두었다.- 위영공(위) - 미자하[5]
- 위안희왕(위) - 용양군
- 애제(전한) - 동현
- 조예(조위) - 조조
- 조효성왕(조) - 건신군
- 조도양왕(조) - 춘평군
- 부견(전진) - 모용충
- 문제(남진) - 한자고[6]
- 이승건(당나라) - 칭심
- 목종(고려) - 유행간
- 충선왕(고려) - 원충
- 공민왕(고려)[7] - 홍륜 등 자제위
- 고시라카와 덴노(일본) -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 다리우스 3세(페르시아 제국) - 바고아스
- 알렉산드로스 대왕(헬레니즘 제국) - 헤파이스티온, 바고아스
- 네로(로마 제국) - 스포루스
- 갈바(로마 제국) - 이켈루스
- 하드리아누스(로마 제국) - 안티노우스
-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토스카나 대공국) - 줄리아노 다미 등 루스판티
- 프리드리히 2세(프로이센 왕국) - 한스 헤르만 폰 카테, 미하엘 가브리엘 프레더스도르프
4. 남총 캐릭터
- 롯테의 장난감 - 토우하라 나오야
- 승은이 망극하옵니다 - 차승은
- 시녀로 살아남기 - 유르겔
- 왕의 남자 - 공길[8]
- 얼음과 불의 노래 - 다리오 나하리스
- 여황의 침실 - 에녹
- 천년호 ~간보「수신기」에서~ - 만상
- 하렘의 남자들 - 라나문 브로트샤 드 아트락시, 클라인 아비시너, 타시르 앙제스, 게스타 로르드, 칼라인
[1] 남총을 두는 공식적인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공식적인 작위도 있을 수 없다.[2] 간혹 역사 지식이 부족한 한국의 로판 작가들이 국서/남총이 왕비/후궁처럼 내명부(유럽풍일 경우 사교계) 업무를 하는 황당한 묘사를 하는데, 실제론 동아시아사든 유럽사든 군주의 국서/남총은 문관·무관 벼슬을 받아 군주와 맞벌이를 했다. 다만 로판은 애초에 '판타지'가 끼어 있는 장르인 만큼 '작중 세계관에서는 국서/남총이 내명부를 관리한다'라는 설정이 개연성 있게 잘 짜여 있으면 고증 반영이 중요한 역사소설에 비해서는 문제가 적다.[3] 신첩은 남녀노비, 넓게 잡아 백성, 신민이라는 뜻이다. 고대에 신의 경우 한자로 남자 노비를 뜻했으며, 첩의 경우 여자 노비를 뜻한다. 그래서 나중에 이것이 확대되어 중국이나 한국에서 극히 윗 사람에게 자기를 낮춰부를 때(주로 군주나 황태후, 승려 등) 남자는 신, 여자는 주로 스스로 첩이라고 말했다. 고전소설이나 창작물에서 여성이 신첩이라고 자칭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실제로 잘 쓰이지 않았다.[4] 예를 들어 아래의 측천무후는 본인이 황제로 재위한 만큼 당대 제일의 권력자였고, 산음공주 같은 경우는 폭군 남동생을 뒷배로 두었다.[5] 사자성어 여도지죄의 주인공이다.[6] 정사에서는 매우 총애했다고만 나오며, 후대의 연극들에서 이 둘을 동성 연인으로 묘사했다.[7] 우창비왕설을 성립시키기 위한 후대의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8] 다만 작중의 연산군과 공길의 관계가 성애적 사랑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원작 연극에서는 영화에 비해 남총의 성격이 더 강한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