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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경종의 제3왕후 헌애왕후 | 獻哀王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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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964년 | ||
고려 황도 개주 (現 경기도 개성시) | |||
사망 | 1029년 1월 20일 (향년 66세) | ||
고려 개경 숭덕궁 (現 경기도 개성시) | |||
능묘 | 유릉(幽陵) | ||
재위기간 | 고려 제3왕후 | ||
979년 이후 ~ 981년 8월 13일 | |||
고려 왕태후 | |||
997년 11월 29일 ~ 1009년 3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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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왕 대종 모후 선의왕후 | ||
형제자매 | |||
배우자 | 부군 경종, 남총 김치양 |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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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불교 | ||
작호 | 왕후(王后) → 왕태후(王太后) | ||
궁호 | 숭덕궁(崇德宮) → 천추전(千秋殿) | ||
존호 | 응천계성정덕왕태후 (應天啓聖靜德王太后) | ||
시호 |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 | ||
별호 | 천추태후(千秋太后)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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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헌애왕후는 고려 왕조의 창업 군주 태조 왕건의 손녀, 고려 제5대 국왕인 경종의 제3비 그리고 제6대 국왕인 성종의 여동생, 제7대 국왕인 목종의 모후이다. 더불어 고려 제8대 국왕 현종의 이모이자 사촌누나이다.
생전 아들 목종에게 받은 공식 존호는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 그러나 비공식 존호로 관저였던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했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다.
사후 제8대 국왕 현종이 올린 시호는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이다. 남편 경종과 헌(獻)자 돌림 시호를 받았으며[2] 시호를 줄여 '헌애왕후(獻哀王后)'라고도 한다.
2. 생애
2.1. 고려의 공주에서 왕비가 되다
헌애왕후는 964년 태조의 아들인 추존왕 대종 왕욱과 선의왕후 류씨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대종과 어머니인 선의왕후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3] 형제자매들과 함께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그리고 경종 즉위후에 여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사촌인 경종과 결혼하게 된다.[4] 경종이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를 제3비, 제4비로 맞아들인 이유는 황주의 호족인 황보씨 가문의 영향력이 그때까지도 막강했기 때문이다.
2.2. 유일하게 아들을 낳다
경종에게는 이미 제1비 헌숙왕후, 제2비 헌의왕후[5], 그리고 후궁으로 대명궁부인[6]이 있었다.[7] 그런데 헌애왕후만이 경종의 유일한 후손인 아들 목종을 낳았다.2.3. 과부가 되다
목종이 태어난지 1년 만인 981년 6월에 경종이 붕어하자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의 동복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된다. 과부가 된 뒤 헌애왕후는 어린 아들과 함께 숭덕궁(崇德宮)에 머물렀는데 이때 동주(洞州) 사람으로 외족(外族)[8]인 김치양[9]을 만난다. 헌애왕후는 황주 황보씨[10]이니 김치양이 외족이라는 것은 황주 황보씨와 동주 김씨 사이에 혼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치양이 스님 모습이었다는 것을 보아 화엄종(華嚴宗)의 승려로 추정되는데 헌애왕후가 불교를 적극 지원했다는 점에서 불교 세력 중에 화엄종의 힘을 빌리려던 것으로 보인다. 황주 황보씨(黃州 皇甫氏)는 화엄종을 지원했으며 1006년 헌애왕후가 발원한 경전의 초교와 중교를 화엄종 승려가 맡았기 때문이다.2.4. 김치양과 사랑에 빠지다
당시 헌애왕후가 바라던 것은 당연히 선왕 경종과 자신의 아들인 목종의 즉위였으며 김치양을 통해 목종의 즉위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치양의 유배에 대해서는 둘 사이에 추잡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인데 고려 초기 왕족 간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고려할 때 왕위를 노리던 왕족 세력들의 영향으로 보인다. 헌애왕후가 아이를 가진 것은 아들인 목종 즉위 이후라는 점과 고려 초기 왕실의 권력 쟁탈전을 고려할 때 이때는 처신을 조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990년 목종은 '개령군'으로 봉해졌으며 12월 책봉 의례 때 “성종은 조정에서 정치와 교화를 도와라.”는 교서를 내려는데 이는 목종이 성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공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997년 성종이 중병에 걸리자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줬으며 헌애왕후의 아들이 목종으로 즉위하면서 '응천개성정덕왕태후(應天啟聖靜德王太后)'로 높여지지만 천추전(千秋殿)[11]에 거처했다고 하여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다.2.5. 섭정 태후가 되다
목종이 즉위하면서 김치양은 중앙 정계에 뛰어들었는데 1006년 만들어진 대보적경(大寶積經) 사경 발문에는 김치양의 벼슬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판삼사(判三司)라 적혀 있다. 상서우복야는 상서성(尙書省)을 관할하며 삼사의 판사, 사는 전곡의 출납 회계를 관할하는 것으로 김치양은 행정권과 재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훗날 강조의 정변 때 김치양과 함께 죽은 사람들은 김치양의 친당(親黨)으로 보인다. 유행간[12]은 목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대량원군의 후계자 선정을 반대했다. 천추궁사(千秋宮司)를 맡은 문인위는 황주 인근 장연현(長淵縣) 출신이다. 이주정은 헌애왕후의 친속[13]으로 목종 12년에 유배되었는데 전중감(殿中監)이었으며 마찬가지로 고려 계통 패서호족으로 추정된다. 상서좌복야 이주헌은 동주 토산현 출신으로 삼사의 직임을 맡았는데 김치양이 동주 출신으로 삼사사를 겸한 걸 고려하면 연고로 가까워진 것으로 보이며 고속으로 승진한 것을 보아 목종 즉위의 공신으로 추정된다. 동주 토산현 출신인 안소광(安紹光)은 연고를 통해 접점이 생긴 것으로 보이며 무술이 뛰어나고 왕을 추대한 공이 있다는 기록을 보아 근위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선휘원(宣徽院)의 판관이었는데 선휘원은 내료(內僚)를 총괄하고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관부다. 황보유의는 국왕의 측근 보좌 기구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헌애왕후 집안인 황주 황보씨라 추정할 수 있다. 헌애왕후의 친당은 모두 고려 계통 패서호족이었으며 혈통 또는 지역적 연고를 가진 자들이었다. 목종 즉위 이후 헌애왕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한 명 낳았다.2.6. 왕위 계승을 노리다
1009년 정월 임오(壬午)일[14]에 천추전이 화재로 소실되어 헌애왕후는 거처를 장생전(長生殿)으로 옮기고 목종은 병을 얻어 정무를 보지 못했다. 이때 김치양이 헌애왕후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15]을 목종의 후계자로 책봉하려다 왕위를 넘본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데[16] 김치양은 유충정에게 뇌물을 주면서 도와달라고 했지만 유충정은 거절한다.2.7. 강조의 정변과 말년
유충정은 곧바로 목종에게 봉서를 올려 '김치양이 왕위를 엿보고 있으며 심복을 널리 벌려놓았다'라고 알린다. 이에 목종은 강조를 불러들이는데 오히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을 포함한 7명은 죽고 나머지는 귀양을 가게된다. 헌애왕후는 목종과 함께 폐위되었으며 아들 목종과 함께 충주로 가던 도중[17] 목종은 적성현에서 강조가 보낸 부하들에 의해 시해된다.결국 헌애왕후는 홀로 황주(黃州)로 갔으며 그곳에서 21년을 생활하다 말년에 현종의 배려로 개경으로 돌아와 1029년 숭덕궁에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무덤은 개성에 있는 유릉이다.[18] 다만, 목종과 달리 헌애왕후는 어떠한 위협도 없이 말년은 조용히 살았던 듯하다.[19]
3. 가족관계
태조의 손녀였음에도 할머니의 성 황보씨(皇甫氏)를 따랐다. 초기 고려 왕실은 남매간 근친혼[21]을 하면서도 일단 명목상은 같은 성씨의 결합을 피하려고 왕족 여성은 왕씨가 아닌 어머니나 할머니 쪽 성씨를 따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왕족들의 모계, 즉 각 지방에 근거한 유력 호족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효과도 있다.
경종은 신명순성왕태후의 아들과 신정왕후의 딸의 아들이고,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신정왕후의 아들과 정덕왕후의 딸의 딸들이므로 경종과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의 혼인은 친사촌(삼촌 광종)/고종사촌(고모 대목왕후)/외사촌(외삼촌 광종)간의 혼인이다. 게다가 부모끼리도 다 이복이 아니라 경종의 어머니인 대목왕후랑 헌애왕후의 아버지인 대종은 친남매 간이었다. 양쪽 사돈 안팎 어른들 모두 형제자매에다가 2명은 아예 친남매였던 셈.
4. 평가
지어미로서 음탕한 행동이 있거나 신하로서 반역하는 뜻이 있다면 이는 강상을 무너뜨리고 천리를 어지럽히므로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인 것이다. 황보씨가 김치양과 간통하고서 어찌 태후의 호를 가질 것인가?
《동사강목》
다만 고려사 등에서 내려오는 기록은 헌애왕후와 아들인 목종의 위신이 바로 다음 국왕인 현종의 정통성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보니[23],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사> 편찬 이전, 당대 고려가 남긴 기록에서부터 곡필이 있었을 개연성도 충분할 여지는 있다. 때문에 오늘날 일각에선 헌애왕후 재평가론도 나오기는 한데, 팔관회나 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유학의 정치 이념을 강조했던 성종에 맞서 전통 사상을 강조하고 서경을 중시하는 등 북진 정책을 수호하려 했던 여걸로 재평가하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유학은 사대주의, 전통 사상은 자주적 민족주의'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비판을 받는다. 게다가 당시 고려의 정치구도에서 고려 고유 전통이나 사상 및 불교를 중시한 것은 황실 중심의 화풍파에 맞선 호족들의 토풍파였기에, 황실 구성원인데다가 사실상의 섭정을 한 천추태후를 전통 사상의 수호자로 띄우는 것은 고려 초기 정치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무리한 주장이다. 이는 마치 여성 군주를 띄워주기 위해 기황후를 재평가 하며 미화하는 것처럼 헌애왕후를 재평가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동사강목》
한편, 그녀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를 하는 측에선 목종 재위 도중의 업적을[24] 당시 섭정을 맡은 헌애왕후의 공으로 돌려야 된다는 말도 나오나, 반박측에선 기록을 보면 종교 활동 관련 정도를 제외하면 목종이 재위 초기부터 스스로 친정을 했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많기에 헌애왕후의 공이라고 볼 수 없다고 여긴다. 목종이 헌애왕후에 의해 휘둘리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보이니 헌애왕후가 목종을 압도하는 권력을 쥐었다는 통념을 부정하기 이전에 목종이 유약한 왕이었다는 통념부터 극복해야 한다는 것.[25] 당시 기록들을 보면 목종과 헌애왕후의 권력 구도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26]
5. 기타
- 헌애왕후의 본관인 황주는 화엄종을 믿었고 헌애왕후의 아버지 대종은 선종(禪宗) 광자대사를 흠모해 그 제자가 될 정도로 선종을 선호했고 황주 승려 균여는 화엄종을 중심으로 유가종을 포섭하기를 원했다. 목종 2년 7월 진관사(眞觀寺)가 성남(城南)에 헌애왕후의 원찰, 3년 10월 숭교사(崇敎寺)가 목종의 원찰로 창건되었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목종 9년 7월 《대보적경》(大寶積經)의 글씨를 금으로 필사한 고려국 금자대장경 대보적경을 편찬했는데 고려 말 왜구가 약탈해 일본에 남아있는데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발원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연월 글 쓴 사람과 함께 초판을 쓴 승려는 화엄종이었다. 목종 10년 2월 창건된 진관사 9층탑에는 보협인경이 안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총지사는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홍철의 보현인경 제작은 헌애왕후 내지 목종의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헌애왕후는 본인 원찰인 진관사의 종파가 화엄종이고 발원해 제작한 대보적경을 화엄종 승려가 맡은 것으로 보아 화엄종 신도로 보인다. 또 목종의 원찰인 숭교사가 유가종이고 대보적경 일부에 미륵신앙이 있는 점과 김치양의 시왕신앙이 지장보살과 관련이 있고 지장보살은 유가종과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유가종 내지는 미륵보살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자처하면서도 화엄종의 지지를 받은 측천무후의 불교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 경종 사후 헌애왕후의 관저는 '숭덕궁(崇德宮)'이었다. 아들 목종은 즉위 전, 성종에게 '숭덕궁 적자(崇德宮 嫡子)'로 불렸다. 이후 태후가 된 헌애왕후의 새 관저는 그 유명한 본궐 내 천추전(千秋殿)이었다. 헌애왕후가 천추전에서 김치양과 대놓고 사통하여 김치양의 관저로 불리기도 했다. 강조의 정변 이후 자신의 고향인 황주[27]로 갔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숭덕궁(崇德宮)에서 죽었다. 숭덕궁에서 출발해 숭덕궁에서 죽은 것이다.
- 고려사 이자겸 열전에 따르면 헌애왕후의 관저는 먼 후손인 인종에 의해 다시 언급되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관저를 정해줄 때 부의 이름을 숭덕부(崇德府)로 한 것이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헌애왕후의 관저는 김치양의 관저로 취급되기도 했는데 인종이 싫어했던 이자겸을 엿먹일려고 일부러 안좋은 유래를 가진 이름을 준 것이다. 정작 이자겸은 이를 몰랐는데, 워낙 오래된 일이라 인종과 같이 왕실 내부의 역사를 속속히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인종이 이자겸의 사병을 숭덕부군(崇德府軍)이라고 부른 기록이 남아있다.
-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어머니 황보씨를 높여 왕태후(王太后)로 삼고 함께 청정했다."고 나오는데 즉위 당시 목종의 나이가 18세였다는 점과 초기 목종의 활동이 활발했다는 점에서 헌애왕후가 섭정이 아닌 청정을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청정은 임금의 뒤에서 발을 내리고(수렴)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청정) 수렴청정(垂簾聽政), 동궁(東宮)이 대신 듣는 대리청정(代理聽政)과 같은 명칭으로 섭정(攝政)과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섭정 제도는 여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를 한데서 비롯되었는데 조회에 참석하고 황제의 명령과 같이 황태후의 명령을 제(制)라고 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임조칭제는 고려 헌종의 임조칭제를 맡았던 고려 시대 모후의 섭정을 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명분부터 모후가 임금을 대신하는 임조칭제와 선왕의 후비로서 임금을 보좌하는 것으로 달랐고 임금과 청정 대상이 특정 날짜에 동행해 조언하거나 반문하는 형식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막후정치를 보면 알겠지만 후비의 청정은 정전에 가는 일은 드물고 평시에는 신하들과 임금의 논의를 듣고 결정하거나 정전(正殿)과 자전(慈殿)을 오가며 하인이나 문서를 통해 결정하는 막후정치였다. 천추전에서 청정을 했다는 것은 임조칭제보다 수렴청정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수렴청정의 경우 전면에 나서는게 아니라 자신의 거처에서 막후정치를 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헌애왕후는 정사에 직접 관여한 것 치고는 의외로 세력이 매우 약한 편이었는데, 이에 섭정이 아닌 어머니로서 왕을 도와주고 이런저런 사회 활동을 한 수준이 아니었겠냐는 소리이다.
6. 대중매체
6.1. 드라마
6.1.1. 강감찬
- 1973년 KBS 일일 사극드라마 《강감찬》에서는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28]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김치양과 간통을 하고 목종에게 강감찬과 서희를 거세시키자는 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6.1.2. 무인시대
2003년 KBS1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고려 후대의 시대를 다룬 만큼 언급으로만 나온다. 공예태후가 무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왕위 계승을 방해하자 이의방이나 정중부가 직접 찾아와 "천추태후처럼 왕실을 농단할 생각이냐"며 윽박을 질렀다. 공예태후는 이 말을 듣고 분노하지만 천추태후의 폐단을 결국 무시못해 한 발 물러서고 만다.6.1.3. 천추태후
2009년 KBS2 드라마《천추태후》에서는 배우 김소은이 연기한 어린 시절(2화~8화) 헌애왕후의 모습은 츤데레에 가까워서 나름대로 인기를 얻었으며[29] 배우 채시라가 연기한 성인 시절은 고려를 지키기 위해 거란과 맞서 싸우고 정치 전면에 나서는 등 의로운 모습이 돋보인다.강조, 천향비를 어릴적부터 거두었으며 김치양을 여진족 마을에서 처음 만났었고 아들을 뺏긴 이후 성종과 대립각이 심했는데 자신의 동생 설이 현종을 낳다가 사망한 아픔도 겪고 자신의 아들이 볼모로 잡혀갈까봐 1차 여요전쟁때 참전해 안융진 전투때 무리하다가 김치양과 같이 잡혀 거란에서 곤욕을 치르기도 해 겨우 살아남았다. 소태후가 그나마 마음에 들어해 봐준 정도.
겨우 돌아와 역천을 도모한단 이후로 무리하게 일을 저지르려다 이현운이 몰래 성종에게 발설하는 바람에 명복궁의 식구들이 또 희생되고 귀향까지 갔었다가 사망하기 전의 성종과 겨우 화해한다.
성종 사후 문화왕후와 척을 지고 자신의 아들 목종이 왕위에 오른 후 섭정을 나선 이후 아들 목종의 업적을 거의 다 가져온 데다 점점 김치양과 애인 사이가 된 후에도 매우 떳떳했는데 아들이 신경 쓰인 건지 "목종이 정 싫어한다면 김치양을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이후 어린 시절 현종의 머리를 깎아서 절로 보냈는데 "미워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조카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30]
후반부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자는 각종 유혹도 번번히 거절했으며 김치양의 반란과 강조의 정변 때에 어쩔 수 없이 김치양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는 했지만 극 중 모습을 보면 결국 끝까지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마냥 천사처럼 착하다가 중반에 약간 악해지는 모습을 보이자 시청자들이 주인공을 악역으로 만들지 말라고 반발했다는 말도 있는데 진실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태후 때 섭정 시절에도 나라를 잘 다스렸으며 비록 김치양과 강조의 분쟁 때문에 나라의 혼란이라는 결과를 초래했으나 그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왕권을 차기 국왕인 현종에게 넘기고 목종마저 잃은 후 사가문,사일라의 희생으로 겨우 살아남은 김치양의 아들 금준은 독연이 여진족 마을로 데리고 가 따로 자랐으며 천추태후 78화 그때 천추태후가 눈을 감았다는 나레이션과 함께 말년의 에피소드까지 다뤄진다.
6.1.4. 고려 거란 전쟁
자세한 내용은 천추태후(고려 거란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2023년 KBS2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 이민영이 맡아 강조의 정변을 다루는 극 초반부에만 등장한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의 묘사와는 달리 노골적으로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 현을 차기 후계자로 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아들 목종과도 대립하는 양상이다. 심지어 조카인 현종의 어린 시절에 출가를 명령한 것 역시 천추태후의 짓이었으며 아들을 대신해 관료들을 궐내로 불러 들여 김치양과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려는 행보를 보인다. 그러다가 결국 3화에서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면서 김치양과 현이 살해당하고, 폐위된 목종과 함께 유배길을 가다가 눈앞에서 목종마저 강조의 군사들에게 살해당하는 걸 보고 절규하며 퇴장한다.
6.2. 예능
- 2016년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천추태후를 주제로 다뤘을 때 당시에는 천추태후를 다룬 사극이 드라마 《천추태후》 밖에 없어서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드라마 내용 중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부분들만 편집해서 보여주었다. 출연진들도 드라마의 막장성을 아는지 은연 중에 "무슨 고려를 부흥시키려던 영웅까지는 아니지만..."이라는 언급을 했다. 그래도 마냥 평면적인 악녀로만 볼 수도 없고 나름대로 추구한 사회 모습이나[31] 야심도 있었던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의미로서의 권력 기반이 어디인지를 까먹은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7. 관련 문서
[1]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성[2] 경종 獻화대왕과 獻애왕태후[3] 헌애왕후와 성종의 아버지인 대종의 경우 969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때 헌애왕후의 나이는 고작 5살이었다.[4] 언니인 헌애왕후의 나이와 동생인 목종의 출생년도를 감안하면 978년이나 979년에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5] 문원대왕과 문혜왕후(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의 딸)의 딸[6] 원장태자(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의 아들)과 흥방궁주(태조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의 딸)의 딸[7] 참고로 경종의 부인 5명 중 4명이 모두 경종의 사촌이다. 헌숙왕후가 경순왕의 딸인데, 만약 어머니가 낙랑공주라면 경종의 부인 5명이 전부 사촌이 된다(...).[8] 외족은 어머니의 일족으로 어머니의 부모, 형제자매와 배우자, 어머니 형제자매의 자녀가 여기에 해당한다.[9] 동주 출신에 김씨(金氏)인 것을 보아 태조의 후궁 대서원부인과 소서원부인의 아버지 김행파(金行波)의 후손이자 동주 김씨로 추정되고 있다. 동주 김씨는 관향이 똑같이 황해도 서흥군인 서흥 김씨와 헷갈리기도 하는데 이쪽은 경순왕계인 김보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고 그 반면 동주 김씨는 김행파가 왕건에게 처음으로 김씨를 사성받아 시작한 가문이다.[10] 목종이 죽은 후 내려간 곳도 어머니의 고향인 정주가 아닌 할머니의 고향인 황주였다.[11] 고려 초기 문원대왕과 문혜왕후의 아들인 천추전군(千秋殿君)과 혼인한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의 장녀이자 성종 제1비 문덕왕후 유씨의 언니인 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이 거처한 곳이다.[12] 고려 초기 중앙에서 활동하던 유씨는 평주 뿐이기에 헌애왕후의 고향 황주(黃州)나 김치양의 집안 동주(洞州)와 같은 패서호족(浿西豪族) 평주 유씨(平州 庾氏)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고려 계통 패서호족 간의 연고로 뭉친 것이다.[13] 촌수가 가까운 일가[14] 16일[15] 김치양과 헌애왕후의 아들은 부계가 김씨이므로 왕조 교체를 기도한 것이나 다름없다.[16] 일단 헌애왕후는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의 후비들에 대한 열전 중 헌애왕후에 대한 기록에서도 김치양이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고 했다고만 나올 뿐 헌애왕후의 동조여부는 나오지 않는다. 헌애왕후에 대한 평가가 결코 좋을 리 없는 조선시대에 고려사가 편찬된 것을 감안했을 때, 이렇게까지 언급이 없다면 사실상 헌애왕후는 연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17] 고려사에 보면 목종은 폐위돼 양국공이 된 후 유배나 귀양을 간 게 아니라 시골로 돌아가 늙는 것을 원한다하여 자진해서 충주로 가려했다.[18] 참고로, 유릉에서 유(幽)라는 시호는 상당히 좋지 않은 단어로써, 헌애왕후에 대한 후손들의 평가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幽)라는 시호의 뜻은 動察難常(동찰난상)으로 '나라가 크게 어지럽다'라는 뜻이다.[19] 현종은 고려사에서 손꼽히는 성군인 만큼 인품이 대단한 인물이였고, 그런 현종이 다시 모셔온 만큼 과거의 과는 묻어두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20] 헌애왕후의 언니이자 성종의 누나일 확률도 있다. 현화사비에 나오는 구절 成宗大王之次姉也에 손위 누이 자(姉)가 있어 풀이를 하면 성종대왕의 둘째 누나다. 또 고려사 왕비 열전을 보면 왕비의 혼인날이 아닌 후사나 중요도에 따라 실었기 때문에 경종 왕비 열전에 헌애왕후 다음으로 4번째에 실렸다 하여 헌정왕후를 손아래로 볼 수도 없다. 다만 오늘날 누나의 남편을 자형(姉兄)이 아니라 손아래 누이 매(妹)자를 써서 매형(妹兄)이라 한다던가 누나나 여동생 상관없이 남매(男妹)라고 하는 것을 보면 손위 누이 자(姉)를 그냥 여자 형제 단순히 누이 의미로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21] 특히 왕족 여성의 경우엔 전부 근친혼을 했는데 고귀한 혈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본 목적에다 태조의 후손들 중엔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많았던 탓이다. 기록에 남겨진 태조의 공식적인 34명 자식들 중 딸은 9명 뿐이고 나머지 25명은 모두 아들이다.[22] 그 짐들은 전부 조카인 현종이 짊어지고 나아갔다. 현종이 한국사 역대급의 명군이니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지 웬만한 범군은 불가능한 일이였다.[23] 현종은 부모가 모두 태조 왕건의 후손으로 이른바 용손이긴 하나, 부친 안종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어찌됐든 바람난 연인들 사이에 난 사생아 출신으로 완벽한 정통성을 가졌다고 보긴 어려웠기에, 현종 옹위 세력은 더더욱 목종은 어머니 헌애왕후에 의해 허수아비가 된 유약한 임금으로, 헌애왕후는 불타는 권력욕으로 아들인 목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외간 남자와 간통을 저지르며 온갖 악행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다 최후에는 아들 목종을 폐위당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몬 원인이 된 사악한 악녀로 만들어야 할 필요는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현종 본인의 속마음은 알 수 없으나, 일단 기록상으론 현종은 본인 암살 시도까지 한 전력이 있는 이모 헌애왕후를 어느정도 대접해주긴 했다.[24] 항목에도 나오지만, 목종 재위 중반까지 보여준 정치적 행보와 업적은 상당한 수준으로 여요전쟁 승리에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 다만 효심 때문인지 뭔지 헌애왕후 세력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 점과 본인도 남색에 빠져 월권도 묵인해주면서 재위 후반기를 망친 점은 비판점.[25] 사실 목종이 유약하다는건 본인이 친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친정을 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왕권 유지를 위해 다다익선으로 모계의 지원을 받았고, 그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애초 세력이 약해 왕권에 위협이 되지 못하던 자신의 친척 황족에 대한 암살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지 못해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측면도 있다.[26]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도 목종이 힘이 없는 군주로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어머니를 과하게 품고 가려 했던 것.[27] 현 황해도 황주[28] 당시에는 필름을 아끼기 위해서 방영 후 다른 촬영에 재사용했다.[29] 아역 시절이 시청률도 높은 편이었다.[30] 사실 누구로부터 보호하느냐 하면 그것부터 웃기는 설정이다. 신혈사의 스님들은 헌애왕후나 김치양으로부터 현종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 승방 지하 땅도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31] 신라 말기 신흥 유학 세력이 내세운 유교적 질서의 사회와 대비되는 개국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고려 본연의 사회를 추구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