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9 07:45:02

이자겸

검교태사(檢校太師) 한양공(漢陽公) 이자겸
작위 한양공(漢陽公)[1]
검교직 검교태사(檢校太師)[2]
본관 경원 이씨(慶源 李氏) / 인천 이씨(仁川 李氏)
이름 이자겸(李資謙)
관저 의친궁(懿親宮) 숭덕부(崇德府)
아내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최씨[3]
아들 이지미, 이공의, 이지언, 이지보,
이지윤, 이지원, 의장[4]
아버지 경원백(慶源伯) 이호(李顥)
어머니 통의국대부인(通義國大夫人) 김씨(金氏)
생몰연도 ? ~ 1126년 12월 5일(음력)
"재앙이 궁궐에서 일어나 대역죄인이 부도하니, 충신과 의사들 덕분에 의로움을 들어 해악을 없앴도다."
“禍起蕭墻 大逆不道, 賴忠臣義士 擧義除害.”
인종이 마침내 이자겸을 체포하고 한 말. 사람들은 감격해 만세를 외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 개요2. 생애
2.1. 득세 이전2.2. 하늘을 찌르는 세도2.3. 이자겸의 난
2.3.1. 배경2.3.2. 왕당파의 선빵2.3.3. 분노한 무인2.3.4. 승평문 대치2.3.5. 황도(皇都)본궐, 불에 타다.2.3.6. 왕당파 패배2.3.7. 이자겸, 척준경의 학살2.3.8. 해동천자의 수모2.3.9. 이자겸과 척준경의 불화2.3.10. 연경궁 사변2.3.11. 결말2.3.12. 영향
3. 의문
3.1. 이자겸은 진짜 반역을 꾀했는가?3.2. 왜 연합이 깨졌나?
3.2.1. 민심의 이반
4. 이야깃거리

1. 개요

고려 왕조 중기의 권신.

대표적인 외척 세도가 집안 출신으로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참설을 최초로 퍼트린 인물이기도 하다. 十八子는 이자겸의 성씨인 李의 파자이다.

훗날 본관은 다르지만 성은 같은 어떤 무장이 진짜로 왕위를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꿔버렸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자겸의 작위는 위에서 언급한 한양공→조선국공. 실로 기묘한 우연의 일치이다.

작위는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에서 소성후(邵城侯), 한양의 공작에서 조선국의 공작으로 진작 됐으나 박탈당하고 사후 한양 공작으로 다시 추증됐다.

이자겸의 권세가 가장 강했을 땐 스스로를 지군국사(知軍國事)라 하고[5] 조선국 공작이 되어 지위를 태자와 같게 하였다. 그래서 절일을 정해 인수절(仁壽節)이라 하고 전문(箋文)을[6] 받았다고 한다.

송나라의 관리였던 서긍(徐兢)은 사신을 따라 고려에 방문하여 견문록인 고려도경을 남겼는데, 여기서 이자겸에 대하여 풍채가 맑고 온화한 인물이었다고 평하였다. 즉 미남에다가 겉으로 보기엔 성품도 부드럽게 보인듯 하다.

최소한 서긍의 묘사에 따르면 이자겸은 흔히 사악한 권신이라는 악명과는 다르게 단정한 외모에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외모가 그 사람의 성격이나 행적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사실 권력있는 간신은 이자겸 같은 타입, 즉 겉으로 보면 사람 좋고 호감가는 타입이 훨씬 많다. 무신정변의 시발점인 정중부 역시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좋아 겉보기엔 존경스러워 보이는 인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타입이 아니면 애초에 권력을 잡는 것 조차 힘들다. 남 듣기 안좋은 소리를 해서 어그로를 끌고 다니는 비호감 성향의 파이터 타입은, 오히려 유학에서 말하는 충신의 전형적인 모습에 가깝다.

2. 생애

2.1. 득세 이전

경원 이씨(慶源 李氏)는 인주(仁州)[7] 이씨, 인천 이씨라고 불리기도 한데 그 시조는 신라인이며 고려사에 기록될 정도로 가문의 세가 강해진 건 이자겸의 할아버지 상주국(上柱國) 경원군 개국공(慶源郡 開國公) 이자연(李子淵) 때부터이다.[8]

할아버지 이자연[9]현종 때 과거 장원 급제를 하며 커리어를 시작했고 문종 때 크게 활약해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에게 시집가는 쾌거를 이룬다.[10] 즉 이자겸은 고모 셋이 모두 왕후, 귀비인 셈.

이자겸의 여자 사촌 중 셋이 선종의 왕후, 귀비가 되며 헌종과도 외척 관계를 만든다.

아버지 상주국(上柱國) 경원백(慶源伯) 이호(李顥)는 이자연의 6남인 덕분에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다. 아들로 이자겸, 이자량이 있으며 딸로 순종의 후궁 장경궁주가 있다.

이자겸은 이자연의 손자, 장경궁주의 형제로서 관직에 쉽게 올라갔으나 장경궁주가 간통으로 퇴출되면서 그 역시 관직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헌종이 자리에서 위태해지고 선종의 귀비이자 이자겸의 사촌인 원신궁주의 오빠 이자의가 이자겸의 조카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만들려고 계림공 왕희[11]과 대립하던 중 암살당하는 바람에 조정으로 돌아오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드디어 그의 위세가 회복되는데 숙종의 아들 예종이 자신의 먼 친척[12]과 자신의 딸을 왕후로 삼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딸 자정문경왕태후가 왕태자 인종을 낳고 그가 왕이 되자 이자겸은 그야말로 막을 수 없는 폭주 기관차가 된다.

2.2. 하늘을 찌르는 세도

이자겸의 작위는 처음에는 한양공(漢陽公)이었는데,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올렸다.

당시는 국명이 고려이고 조선은 단지 '다르게 부르는 이름 중 하나'인 데다 국공이라는 작위 자체는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 의미심장한 작위명이다. 조선은 당시엔 주로 평양 일대를 따로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했으므로, 오등작 제도에 따라 평양 일대를 형식상의 봉지로 하사하는 의미의 작위. 분봉?

예종 사후, 자신의 외손자인 연소한 태자(훗날 고려 인종)를 즉위하게 하고, 부를 설치하여 이름을 숭덕부라 칭해 요속[13]을 두었다.

셋째딸과 넷째딸을 왕후로 삼게 하고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하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축재하였다. 그런데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는 이자겸의 둘째딸이며, 즉 이 두 사람은 인종의 이모다. 그야말로 개족보. 역사저널 그날 왈, 삼겹장인

아무리 고려 시대가 근친혼에 덜 엄격했던 사회라고 해도 3촌 간의 혼인은 고려 초에도 흔하지 않았던 만큼 당연히 반대가 상당했지만, 이자겸의 권력으로 묵살되었다.

일곱 아들들도 덕분에 높은 벼슬에 올라앉았다. 장남 이지미는 추밀원 부사, 차남 이공의와 3남 이지언과 4남 이지보는 각각 형부, 공부, 호부의 시랑과 낭중벼슬을 맡았다. 조선으로 따지면 참판, 지금의 차관직에 오른 것이다. 5남 이지윤은 전중내급사, 6남 이지원은 합문지후, 7남 이의장은 수좌[14]에 오르게 되었다.

굳이 현대 대한민국 정부 체제에 비유하면 아들들이 대통령 비서실장, 법무부/국토교통부/기획재정부 차관, 대통령 비서실 의전과장, (국교의) 교구 대주교 직을 모조리 장악한 격이다.

거기에다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서 군부의 핵심 인사로 떠오른 척준경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자신의 6남 이지원을 척준경의 사위로 맞게 했으며 이를 통해 권력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이자겸은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관직을 팔아 자기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스스로 국공(國公)[15] 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16]이라 하고, 국왕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그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왕에게 그 책봉식을 궁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게 했고, 시간까지 강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였다.
『고려사』 권127 이자겸 열전
이 외에도 세도가 어느 정도 였냐면, 군주의 생일이 아닌 이자겸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려 했다. 그 이름도 국왕, 태자의 생일에만 붙이는 절(節)을 붙여 인수절(仁壽節)이라 했을 정도. 김부식이 적극적으로 반대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자겸과 그의 무리들은 공공연하게 인수절 운운하며 위세를 과시했다.

또한 당시 국력이 급성장한 금나라(여진족)에서 고려에게 자신들에 대한 사대를 요구하자, 이자겸은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고려와 요나라(거란족)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며 사대 정책을 펴기로 결정했다. 여기엔 척준경도 동조했는데, 단순히 이자겸의 주장에 묻어갔을 가능성과,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보다는 사대가 더 낫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일 가능성이 공존한다.

2.3. 이자겸의 난

왕당파 이자겸파 척준경파
김찬 이지미[17] 척순[18]
안보린 이지의[19] 척준신[20]
지녹연 의장[21] 왕의[22]
고석 이지원[23] 전기상
권수 이지보[24] 최영
오탁 이지언[25] 김정분
최탁 학문
지호
* 이자겸의 난 시발점의 인물들만 기록.

인종 초기의 고려 왕조는 목종(고려), 천추태후 - 김치양, 강조(고려) 삼파전 이후로 가장 혼란스러운 정치 국면을 보였다. 이 국면 속, 먼저 손을 쓴 세력은 다름아닌 왕당파였다.

2.3.1. 배경

인종의 어머니는 이자겸의 둘째 딸, 인종의 두 왕후는 이자겸의 셋째, 넷째 딸이었다. 외척 중의 외척이 된 이자겸은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봉해졌고 그의 관저를 의친궁(懿親宮) 숭덕부(崇德府)[26]로 봉해졌다. 또한 그의 자택은 중흥택(重興宅)[27]으로 봉해져 그의 지위를 크게 올렸다. 그는 독자적으로 송나라와 교류했으며 자신을 지군국사(知軍國事)[28]라 칭했다.

당시 시대에 군주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타국과 교류한 건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후삼국 시대왕봉규, 견훤의 외교 활동이 부각되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당대 소문난 무인(武人)이자 무신(武臣) 척준경을 끌여들인다. 그는 자신의 아들 이지원을 척준경의 딸에게 장가를 보내고, 이지의를 척준경의 절친 왕자지의 딸에게 장가를 보내 그와 인척 관계를 다졌다. 군주에 대한 충심이 없는 척준경 또한 권신 이자겸의 호의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군부와 정권을 모두 잡은 이자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결국 국왕 인종을 분노케 하였다.

2.3.2. 왕당파의 선빵

중관(中官)[29]이었던 김찬과 안보린은 대표적 왕당파였다. 두 사람은 인종의 심기를 읽고 이자겸과 척준경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두사람은 상장군(上將軍) 오탁과 최탁, 대장군(大將軍) 권수, 장군 고석과 연합해 계획을 짠다. 장군 직위를 가진 자들은 원 척준경의 상관이었다가 척준경이 권력을 잡음에 따라 부하가 되버린 자들로 척준경을 매우 싫어했다.

인종 4년(1126년) 2월 왕당파는 움직였다.

왕당파는 저녁 시간에 본궐로 들어가 당시 궐에 있던 척순, 척준신 그리고 그들의 부하 전기상, 최영, 김정분을 죽였다. 그들의 시체는 본궐 궁성 밖으로 던져졌고 본궐은 폐쇄됐다.

2.3.3. 분노한 무인

이자겸파였던 신하 학문은 몰래 궁성을 넘어 다른 이자겸파 신하 지호에게 알려 지호는 곧장 이자겸에게 변란이 생겼음을 알렸다. 이자겸은 왕당파가 먼저 싸움을 걸거라고 생각치도 못한 듯 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자겸은 매우 당황해 장남 이지미와 척준경, 자신 당파 소속 신하들을 의친궁으로 불러 어떻게 할지를 의논했다.

워낙 급박하게 정세가 변하니 아무도 뾰족한 수를 못내고 있던 중 이자겸의 사돈이자 척준경의 인척인 왕의가 몰래 본궐을 빠져 나와 상세한 설명을 한다.

자신의 유일한 아들, 친동생이 죽었다는 걸 들은 당대 최강의 무력을 지닌 척준경은 그야말로 빡돌았다.
"일이 급하다.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척준경, 급보를 듣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은 윤한, 최식, 이후진 등 부하와 장졸 수십 명을 끌고 가 바로 황성(皇城)의 남문이자 정문인 주작문[30]에 도착했다. 하지만 봉쇄된 주작문을 열지 못하고 윤한을 시켜 성을 타고 넘어가 문을 강제로 열고 궁성(宮城)의 두번째 문 신봉문[31]에 도착해 땅이 흔들릴 정도로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왕당파는 척준경의 고함소리를 듣고 그가 대군을 끌고 왔다고 착각해 겁이나 신봉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자겸은 따로 움직여 왕당파의 집을 부쉬고 불태운 뒤, 처자식을 붙잡아 가두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났다.

2.3.4. 승평문 대치

다음날 아침, 척준경은 아들과 동생의 시체를 회수한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뻗친 척준경은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와 윤한, 최식, 이후진을 시켜 군대를 소환하고 무기고를 털어 자기 마음대로 장비시킨 뒤, 궁성의 정문 승평문[32]을 포위한다. 또한 이자겸의 아들 의장이 자신이 주지로 있던 현화사의 승병을 끌고와 가세하니 궁성 안의 병사들은 소극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척준경 - 이자겸파와 왕당파가 승평, 신봉문에서 대치하던 중, 인종이 직접 신봉문에 움직였다.

인종은 금색 일산을 든 호위대와 도착했고 척준경이 소환한 군대는 자신의 군주를 보자 대열를 갖춰 절(拜)을 하고 만세(萬歲)를 외쳤다.[33]

인종은 신하 이중을 보내 문답한다.
인종: "네 무리(輩)는 왜 병(兵)을 끌고 왔는가?"
척준경파: "듣자하니 적이 금중(禁中)[34]에 들어왔다하여 사직을 호위하기 위함입니다."
인종: "없다. 짐 역시 무상하다. 너희 등은 갑옷을 풀고 해산하라."
인종과 척준경, 승평문 대치 중에.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인종은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고 분노에 찬 척준경을 달래기 위해 이중을 시켜 은화를 나눠주고 무장을 해제 시켰다. 그러나 척준경은 멈추지 않고 군주의 명령을 받은 이중을 검으로 위협해 물러나게 하고 군대를 다시 무장시켜 고함을 지르게 했다.

결국 싸움이 시작됐다. 화살이 날라다녔고 심지어 인종에게까지 날라오자 호위대는 방패로 인종을 막으며 후퇴했고 의장의 승병은 신봉문의 기둥을 도끼로 찍어 무너뜨리려 했다. 인종의 호위대는 신봉루에서 승병의 머리를 활로 쏘아 뚝배기를 깨버리고 항전했다.

2.3.5. 황도(皇都)본궐, 불에 타다.

이자겸은 자신의 당파 소속 신하를 보내 인종에게 전한다.
"부디 금중(禁中)에 있는 난을 작당한 자들을 나오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금중(禁中)을 놀래킬까봐 두렵습니다."
이자겸, 인종을 협박하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
딱 봐도 매우 불손했고, 인종은 씹어버린다.

고려 본궐은 산 위에 있으며 매우 크기로 유명해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하루가 끝나가 밤이 다가오는데도 궁성 안을 들어 가질 못하자 속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척준경은 본인들 당파 소속 신하를 시켜 이자겸에게 이자겸마저도 머뭇거리게 할 말을 전한다.
"오늘이 끝나가고 있소. 적이 밤을 틈타 도망칠까 두려우니 궁문을 불태운 뒤 들어가 탐색하는 것이 어떻소?"
척준경, 분노에 빠진 상태로.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자겸은 이 말을 듣고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장남 이지미를 시켜 이공수란 신하에게 의견을 묻는다.
"궁우(宮宇)가 서로 붙어 있으니 연소되면 멈추질 못합니다. 심히 불가합니다."
이공수, 어처구니 없는 전언을 듣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 이공수란 신하는 이자겸이 자문을 구하는 걸 봐선 이자겸파로 보이는데 이 사건 이후 자기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상당히 친왕당파적인 행보를 보인다.

여하간 척준경은 이자겸의 대답을 기다릴 생각도 없었다. 이자겸의 답이 오기도 전 근처 정부 청사에서 땔감을 들고 와 동화문(東花門)을 태워 없애버린다. 국왕 인종이 안에 있는데도!

그래도 좀 쫄린건지 아님 주변에서 말린 건지 승평, 신봉 등 대문은 불태우지 않고 근처의 소문을 태웠다.[35] 어쨋든 미친 짓이긴 하지만. 동화문에서 시작된 불은 궁궐 깊숙히 들어가 국왕이 먹고 자는 내전(內殿)까지 태웠다.[36]

시간이 조금 흘러 척준경과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상태로 궁성 안에 들어간다. 그들은 춘덕문[37]을 통과 했는데 척준경이 문 안에 들어오자 인종의 호위부대 장교 송행충, 이작이 척준경을 공격했다. 당황한 척준경은 문 밖으로 물러났고 호위대는 문을 잠궈버린다. 척준경은 문 밖으로 나오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뒤 궁성을 수색한다.
"안에서 나오려는 자는 모두 죽여라."
척준경, 궁성 수색 중에 공격을 당한 뒤. 고려사 이자겸 열전.

2.3.6. 왕당파 패배

인종은 불을 피해 궁성 북쪽에 있고 호수가 있는 산호정이란 정자로 간다. 그는 직접 걸어 갔고 시종하는 신하들이 다 도망치고 호위대 열 몇명만이 남아있었다. 하다하다 불까지 질러 궁궐이 타버리자 인종은 자신이 정말 이자겸 - 척준경에게 죽을까봐 걱정되었고... 결국 이자겸에게 선위하겠다는 문서를 작성, 의친궁에 보낸다.

이자겸은 자신의 당파 신하들과 문서를 받는다. 그러나 이자겸은 문서를 받고도 시원하게 답을 못했다. 그는 정부 관료와 민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이공수가 크게 외친다.
"상께서 비록 조칙을 내리셨으나 이공(李公)께서 어떻게 감히 받들겠습니까!"
이공수, 먼저 손을 쓰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이공수의 의미는 "우리 자겸이는 좋은 신하니까 당연히 선위 안받을 거임! 그치?"였고 자기 맘대로 답하기 힘들어진 이자겸은 바로 눈물을 흘리며 답했다.
"신은 두 마음을 먹지 않았습니다. 부디 거룩한 분께서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이자겸, 선위의 문서를 받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2.3.7. 이자겸, 척준경의 학살

사흘째 아침이 되었다. 인종은 계속 세지는 불을 피해 궁성 밖으로 나가려 했고 때마침 이자겸이 척준경의 부하 김향을 시켜 인종을 남궁으로 나가게 하였다. 인종은 나가면서 중간에 태조의 신전 경령전에 들러 태조의 어진을 우물 안에 숨긴 뒤, 말을 타고 남궁 연덕궁으로 간다.

이 때 상장군 오탁이 인종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된 척준경은 부하를 시켜 오탁을 끌어내 목을 자르고 그의 부하도 죽였다. 이어 중관 안보린, 상장군 최탁 등 왕당파 주동자들을 모두 찾아내 죽이고 그들의 부하들, 군사까지 모두 죽였다.

인종의 호위대가 남궁 가까이 오자 이자겸은 인종을 협박해 호위대원들을 내놓으라고 한다. 인종은 거부했으나 이자겸이 세번이나 계속 강요하자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고 넘겼다. 허나 이자겸의 아들 이지보가 호위대 장교 모두를 죽였다.

이자겸과 척준경은 서로 만나 의논하여 그 날 당시에 궁성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을 귀천을 논하지 않고 죽이려 했다. 허나 이공수가 계속 말리므로 결국 실행하진 않았다.

지녹원 등 왕당파 중관들은 모두 유배보내거나 중간에 죽였고, 그들의 처자식은 노예로 계급을 낮춰 버렸다.

2.3.8. 해동천자의 수모

인종 4년(1126년) 3월, 이자겸은 남궁 연덕궁에 있던 인종을 사택 중흥택 서원(西院)으로 소환했다.

인종은 이제 호위 장교라곤 세 사람 밖에 없었다. 인종이 북문으로 들어 올 때 이자겸과 척준경은 이 세 사람도 죽이려고 부하를 시켜 인종에게서 끌어 냈는데 그 중 한사람이 인종의 곤룡포를 붙잡고 부디 살려달라고 빌었다. 인종은 이자겸의 부하를 질타했으나 부하는 아랑곳없이 장교의 가슴을 발로 찼다.

하지만 장교가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아 인종의 곤룡포가 찢어지고 인종의 복두도 문에 걸려 찢어졌다. 이자겸의 아들 이지미와 이지보는 방문에 기대서서 섬돌 아래로 내려 오지 않고 인종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로지 한 신하만이 절을 올렸다. 이 신하는 이자겸의 부하에게 소릴 질렀는데:
"성지(聖旨)가 내려졌다. 네가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한 신하, 중흥택 서원에서. 고려사 이자겸 열전.

그제서야 부하는 멈추었고 장교는 겁에 질려 중흥택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결국 인종은 이 신하와 이자겸파 중관에게 부탁해 죽이지 말라고 요청했다.
"이 세 사람은 지성으로 임금을 사랑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대들은 부디 날 위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 말아주게나."
인종, 자신의 호위대를 지키기 위해. 고려사 이자겸 열전.

결국 척준경이 유배로 명령을 바꾼다.

인종이 집 안으로 들어와 이자겸, 이자겸의 부인과 마주하고 앉았다. 이자겸과 부인은 손으로 바닥을 치고 크게 울었다.
"황후(皇后)[38] 께서 입궁하실 때부터 늘 태자를 낳길 원했습니다. 결국 성인(聖人)[39]께서 태어나시니, 영원히 사시라고 하늘에 비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점이 없었습니다. 천지귀신이 제 지성을 알텐데 오늘날 적신을 믿어 골육을 해치려 하시다니요."
이자겸,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하며. 고려사 이자겸 열전.
여기서 황후는 이자겸의 둘째 딸, 인종의 모후 자정문경왕태후를 말한다. 이자겸의 말을 들은 인종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고 말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정말 부끄러워서인지 아님 화가 나서인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그렇게 두달동안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갇혀 모든게 제한당한다. 인종은 왕당파가 죽인 척순, 척준식 등에게 관직을 추증해주고 이자겸이 견제하는 기타 왕당파 중관을 내쫓고 모든 업무를 이자겸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진정한 이자겸의 세상이 왔다. 하지만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는 인종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2.3.9. 이자겸과 척준경의 불화

인종이 패배한 이유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인 척준경을 자극한 데 있다. 적어도 인종은 그렇게 생각했다. 인종은 몰래 자신의 주치의를 척준경에게 보내 살살 달랬다. 척준경이 조금씩 마음을 바꾸자 인종은 조칙을 선물해 척준경을 포섭하기 위해 밑밥을 깐다.
"생각건대 짐이 밝지 못하여 흉도가 일을 터뜨리게 하였다. 대신이 걱정하고 힘들게 했으니 모두 과인의 죄다.
이를 이용해 몸을 굽혀 잘못을 후회하고 하늘을 향해 마음을 다잡아 신민과 함께 새로운 덕을 만들고자 한다.
경은 스스로를 다잡는데 노력하고 옛 일을 염두에 두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해 보조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자."
인종, 척준경에게 하사한 조서. 고려사 이자겸 열전 중
대놓고 모든게 내 탓이니 서로 옛 감정을 버리고 같이 정권을 회복하자고 유도하고 있다. 척준경은 이자겸파보단 인종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는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노비와 척준경의 노비끼리 싸우며 나온 발언이 불을 붙였다.
"네 주인이 궁궐에 화살을 쏘고 불태우니 이는 죽음으로 갚을 죄다. 너도 정부 소속 노비가 될 꼴인데 어찌 날 모욕하는가!"

이 다툼을 전해들은 척준경은 대노하여 바로 중흥택으로 뛰어갔다. 옷과 관을 벗어 던진 뒤 외쳤다.
"내 죄가 크다, 마땅히 관청으로 하여금 판결을 내리게 하라!"
척준경, 성질이 급하다는 것이 보인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리니 사람들이 말렸다. 그러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자겸은 아들 이지미, 이지의를 보내 화해를 구했지만 척준경은 도리어 그들에게 질타한다.
"전일의 난은 모두 너희 등이 한 짓이다. 왜 내 죄만 죽어 마땅하다 하는가?"

그리고는 그들을 만나보지 않았다. 냅다 또 선언하니
"내 고향으로 돌아가 늙을 것이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말만 골라서 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척준경이 정말 자신의 권력을 버리고 귀향해 버릴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이자겸과 척준경이 난 이후 사이가 매우 틀어졌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난의 잘못을 돌리고 있는 걸 보면 그들이 난의 후폭풍을 감당하기 버거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자겸의 권세가 달랑 두 달밖에 유지되지 못한 듯하다.

인종은 이를 듣고 또 척준경에게 시그널을 보내며 자신의 명마 한 필을 선물한다. 노비 분쟁 사건 이후 이자겸은 대충 누가 뭘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하다.

2.3.10. 연경궁 사변

인종 4년(1126년) 4월 이자겸은 인종을 데리고 안화사에 간다. 절에 가던 도중 인종은 타버린 옛 본궐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안화사에 도착한 뒤, 안화사의 승려, 일꾼들은 인종에게 절을 올린다. 이자겸은 말 위에서 이것을 바라보았다.

다음 달 인종 4년(1126년) 5월 1일, 인종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낀 이자겸은 연경궁으로 인종의 처소를 바꾼다. 그는 자신의 관저 의친궁 숭덕부를 연경궁 남쪽으로 옮겼고 의친궁 북쪽에 있는 연경궁 남쪽 성벽을 부숴 길을 바로 통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신의 사병을 국가의 무기고에서 무장시켜 늘 데리고 다니니 인종은 어이가 없어 한번은 혼자 북쪽 뒤뜰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오랫동안 운 적도 있었다.

인종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이자겸을 감시, 척준경을 끌어당겼다. 결국 척준경은 이자겸을 배신, 인종에게 붙는다. 척준경의 충성 문서를 본 인종은 답한다.
"국공(國公)은 비록 참적이나, 반역의 시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짐이 먼저 손을 쓰면 먼저 친족을 해치게 되는 꼴이니 나중의 변란을 기다리는 것도 늦지 않다."
인종, 척준경에게. 고려사 이자겸 열전.

인종은 늘 자기 휘하의 중관을 시켜 이자겸을 몰래 관찰하고 있었다. 1126년 5월 20일, 인종은 이자겸의 이상행동을 포착한다.

인종의 중관이 인종이 직접 쓴 쪽지를 장교들과 회의 중이던 척준경에게 전달했다. 이 쪽지엔 척준경마저도 망설이게 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늘 숭덕부군(崇德府軍)이 병(兵)을 끌고와 전각의 북쪽에서 침전의 문을 부수려 한다. 짐이 만약 피해를 입는다면 내 덕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다.
단지 내가 아파하는 것은 태조가 업을 세우고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왔는데, 과인 때에 이르러 이성(異姓)이 갈아버리려 하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짐의 죄뿐만 아니라 보상대신(輔相大臣)[40]들도 심히 부끄러워 할 일인 것이다. 부디 경은 잘 생각해보길 바란다."
인종,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은 이를 보고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제 고려국왕과 조선국공 중 한 쪽을 고르면 절대 되돌릴 수는 없다. 척준경은 자신의 부하 김향에게 묻는다. 김향은 울면서 무릎을 꿇고 임금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마음을 잡은 척준경은 즉각 움직였다. 휘하 장교 7명과 20여 명의 장정을 이끌고 바로 자신이 불질렀던 본궐로 향했다. 황성의 동문 광화문(廣化門)[41]에 도착한 척준경은 왕당파 중관과 이공수가 몰래 쪽문을 열어 주어 잽싸게 들어 갔고 본궐 무기고에 먼저 도착한 척준경의 부하는 100명의 군사를 뽑고 그들을 무장시켰다.

그렇게 무장을 마친 척준경은 곧장 연경궁으로 갔는데 가던 중 이자겸파 신하 하나를 만났다. 그가 척준경의 군세를 보고 불손한 말을 하자 즉시 죽였다.

척준경이 군대를 끌고 연경궁의 천성전문(天成殿門)에 도착하자 미리 나와있던 인종이 그를 반겼다. 숭덕부군이 인종과 척준경을 향해 화살을 쐈지만 척준경이 으르렁거리며 칼을 휘두르자 기세가 밀렸다.

척준경은 인종을 데리고 본궐 무기고로 향했고, 호위를 강화했다. 척준경이 부하를 시켜 이자겸을 부르자 이자겸은 이미 모든 게 끝났음을 직감했는지 소복을 입은 채로 왔다고 한다. 척준경은 이자겸을 팔관보(八觀寶)[42]에 가두었고 그의 처자식을 모두 찾아 역시 팔관보에 가두었다.

척준경은 본보기로 이자겸을 호위하던 장교 두어 명을 죽였고 군졸을 체포했다.

드디어 복수에 성공한 인종은 광화문에서 선언했다.
"재앙이 궁궐에서 일어나 대역죄인이 부도하니, 충신과 의사들 덕분에 의로움을 들어 해악을 없앴도다!"
“禍起蕭墻 大逆不道, 賴忠臣義士 擧義除害.”
인종, 드디어 정권을 회복하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그제서야 해동천자가 귀환했다는 걸 알게된 개경의 시민들은 모두 만세를 외치고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렸다.

장남 이지미는 뒤늦게 변고가 생겼다는 걸 듣고 휘하 장정 100명을 끌고 광화문에 가려 했지만 폐쇄된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병부(兵部) 청사에 주둔했다. 당시 이지미는 아버지가 잡힌 줄 모르고 있었는데 병부의 군대와 척준경의 군대가 와 그들을 모두 잡아갔다.

2.3.11. 결말

"짐이 어리고 충동적이어서 조업(祖業)을 이어 받았으나 외가(外家)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일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위임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난폭하니 민(民)을 다치게 하고 나라(國)를 해쳤다. 짐은 비록 이를 알고 있었으나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금월 20일 창졸을 시켜 환란을 일으켰으니 판병부사(判兵部事) 척준경이 의를 들어 난을 평정했다. 공을 잊을 수 없으니 관사에 명령해 상을 주도록 한다. 군기소감(軍器少監) 최사전(崔思全)[43]도 마음을 다해 크게 보조했으니, 같이 상을 준다."
인종의 선지(宣旨), 고려사 인종 세가.

인종은 다시 연경궁에 돌아갔다. 가기 전 중관들이 궁을 청소했는데 내전에서 이자겸의 아들, 현화사의 주지 의장이 발각됐다. 의장 역시 아버지를 따라 팔관보에 갇혔다.

인종은 이어 이자겸파 사람을 하나하나 없애기 시작한다. 이자겸파 소속 신하는 그 노비까지 모조리 사형을 받거나, 수장 되거나, 섬에 유배 되거나, 길거리에 칼을 씌어 조롱당했다.
유배 보냈고 아들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죽었다.

이자겸의 딸인 두 왕후는 이자겸 실각 이후 당연히 폐비되었으나 인종을 독살하려는 시도를 막기도 한 걸 감안해서인지 그 이후로도 인종이 나름대로 집과 노비들을 하사하는 등 챙겨줬다고 한다.

이자겸의 아내는 3년 뒤 1129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미 위협도 안되니 외척을 우대한다는 이유로 봐준 듯 하다.

이자겸은 인종 재위 4년째인 1126년 12월 5일, 영광서 총 7개월간 유배 생활을 하다 죽었다. 한 때 지군국사 겸 조선국공으로 군림한 권신 치고는 허무한 죽음이다.

척준경은 인종에 붙어
  •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공신호를,
  • 삼중대광(三重大匡)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품계를,
  • 검교태사(檢校太師) 검교직을,
  • 수태보(守太保) 수직을,
  •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호부사(判戶部事) 겸(兼) 서경 유수사(西京 留守使) 직위를,
  • 상주국(上柱國) 훈위를 받았다.

또한 척준경의 아내를 제안군대부인(齊安郡大夫人) 작위에 봉했다.

그러나 인종이 본궐에 화살을 쏘고 태워먹어 자신을 죽이려한 미치광이를 냅둘 생각은 전무했고 1127년 3월, 정지상의 탄핵문을 빌미로 전남 신안으로, 후 자신을 도왔다는 걸 참작해 자기 고향 황해북도 곡산면에 옮겨 유배보내준다.

척준경은 인종 재위 22년 째인 1144년, 곡산서 총 17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죽는다. 자기가 선언했던대로 본인 고향에 돌아가 늙은 셈이다.

1127년 10월, 이자겸이 수탈한 땅과 노비를 원 주인에게 돌려 주었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을 전각에 기록해둔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인종이었다.

2.3.12. 영향

이자겸이 폭주 기관차가 됐을 때 그를 그나마 막아낸 김부식은 개경 귀족 출신이다.

이자겸 난의 시발점인 중관 김찬은 서경 출신 인물이었다. 척준경 탄핵에 앞장선 정지상도 서경 출신이다. 이미 숙, 예종이 서경을 상당히 좋아해 서경 출신 인물이 늘어났는데 인종은 이자겸의 난 이후 본격적으로 서경 세력 육성에 나섰다.

이렇듯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 출신 귀족과 서경 출신 귀족이 나뉘어졌으며 중앙 집권층 사이의 분열로 그 동안 고려의 문벌귀족 사회의 붕괴의 조짐이 나타났다.

당장의 영향만 보아도 훗날 묘청의 난무신정권의 성립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의민 역시 십팔자위왕설 드립을 참 좋아했다.

3. 의문

3.1. 이자겸은 진짜 반역을 꾀했는가?

주동자로 지목된 이자겸이 고작 유배로만 끝난 것을 들어 그가 진짜 반역을 꾀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는 시각도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자겸이 반역의 뜻을 품은 건 인종의 친위 쿠데타를 진압한 이후인데 항간에 십팔자위왕이라는 참설이 퍼지자 그가 반역을 꾀했다는 것.

기록에 따르면, 인종은 이자겸 척살시도가 실패하자, 두려워하는 마음을 못 이기고 이자겸에게 순순히 선양할 생각이었지만, 이자겸 쪽에서 자신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며 확실하게 거절했다.[44]

그런데 난데없이 '십팔자위왕'의 소문이 나오며 이자겸이 인종을 죽이고 왕위를 뺏으려 했고(라는 식의 기록이 적히고), 얼마안가 이자겸은 연경궁 사태로 유배되게 된다.

그러나 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기록은, 그의 딸인 인종비가 독이 든 떡을 까마귀에게 먹였더니 그 까마귀가 죽었다는 기록과, 독이 든 그릇을 엎질렀다는 기록밖에 없다. 근데 흉조인 까마귀라는 존재의 사용과 이와 비슷한 기록이 고려 현종과 관련된 기록에도 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창작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이자겸의 입장에서 실제로 쿠데타를 일으킬 거라면, 애매하게 독살을 시도하면서 툭툭 건드릴 게 아니라 그냥 건장한 하인 몇명을 보내면 땡이었고, 실제로 척준경과 틀어질 때까지만 해도 그 당시 이자겸의 행적을 보면, 되면 좋고 안 되면 그냥 그런대로 살자는 식으로 왕을 상대로 간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양반이, 척준경이 치러가기 직전도 아니고, 척준경에게 다 털리고 벌받을 때가 되어서야 갑자기 난데없이 쿠데타 계획했단 소리나 들었으니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위에서 언급된 하인 간의 언쟁을 보더라도, 이지언 하인의 발언은 단순한 하인의 헛소리가 아니라면 기묘하다.

사서의 내용대로라면 척준경이 이자겸의 지휘 하에 왕과 싸웠고 이자겸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준비하고 있다.

근데 이자겸 아들의 하인이 척준경이 왕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욕 보이면 이는 결국 자신의 주인인 이지언의 아버지이자 그 당시 고려의 실세인 이자겸까지 싸그리 매도하는 발언이었기 때문.

즉 저 발언이 진짜라면 이지언의 그 하인은 척준경 이전에 이씨 가문에게 맞아 죽지 않는 게 신기한 상황이었다.

이지언의 하인의 발언과 이자겸의 쿠데타 시도가 사실이라고 치기엔 여러모로 이상한 점이 많다.

상술했듯이 굳이 좋은 기회를 내버려 두고 쿠데타를 일으킬 이유도 없었고 실제로 이지언의 하인 때문에 척준경과 틀어지는 상황이면 이자겸은 척준경과 마냥 틀어지기보다 이지언의 하인을 족쳐서라도 척준경을 붙잡는게 더 낫다.

무엇보다 실제로 쿠데타를 준비한다기엔 그 당시 이자겸의 권력에 비해서 너무 준비가 느린 등 의문점이 많다.

결국 확실한 건 모종의 이유로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이고 인종이 척준경을 이자겸 처리하는 데 썼다는 것 정도.

3.2. 왜 연합이 깨졌나?

1126년 3월 ~ 5월 20일까진 완전한 세력을 구축했지만 2달 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척준경파와의 연합이 깨져 버린게 가장 크다.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3.2.1. 민심의 이반

연합이 깨진 가장 큰 이유는 민심이 이 - 척 연합을 싫어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파의 수탈. 고려사 이자겸 열전.
상술한 고려사 이자겸 열전의 일부 글이다. 이자겸은 오랫동안 자신의 재물을 축적하는데 열중했고 그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개경 시민이나 백성들이 이자겸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홍입공(洪立功)이란 무신이 있었다. 원 직위는 유한경이란 장군 밑에 소속된 중랑장(中郞將)이었는데 유한경은 이자겸파였고 이자겸은 홍입공을 차장군(借將軍)으로 승진 시켜 준 뒤 척준경에게 보낸다.

척준경이 개경 본궐을 불지르려 할 때 홍입공을 보내 땔감을 가져오게 시켰다. 홍입공은 조용히 이를 따랐으나 나성 밖으로 나갔을 때 자신의 군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와 너희 등은 모두 왕신(王臣)이다. 이제 땔감을 지고 궁을 태우려 하는 짓은 신자(臣子)의 의(義)가 아니다."

이 말에 설득된 홍입공의 군졸들은 땔감을 버리고 선의문을 통해 들어가 인종에게 간다. 인종을 만난 홍입공은 대열을 갖춰 절한다. 누군지 의아해한 인종에게 홍입공은 자신이 누군지 설명하고 곧 기뻐한 인종은 그들에게 자신의 숙위를 맏긴다.

이 일화는 고려사 이자겸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인종의 정당성을 위해 조작된 일화일 수도 있다. 허나 동시에 이자겸파 내에서도 궁에다 불지르는 건 너무 심했다는 의견이 많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인종을 중흥택, 이어 연경궁에 감금한 이자겸은 자신의 넷째 딸인 인종의 후궁을 시켜 인종을 독살하려한다.

처음엔 독이 든 떡을 진상했으나 넷째 딸이 몰래 인종에게 알렸고 인종은 떡을 까마귀에게 던졌다. 보란듯이 떡을 먹은 까마귀는 쓰러졌다.

두번째론 넷째 딸을 직접 시켜 독이 든 술을 올렸는데 딸은 술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지며 술을 바닥에 흘려버린다. 결국 두번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이 두 일화는 역시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자겸의 딸마저도 아버지의 거사 참여에 거부한 일화는 이자겸의 민심 장악이 그닥 성공적이진 않다는 반증 일 수도 있다.

척준경은 기어코 본궐에다가 불을 질러 다 태워먹었다. 본궐이 워낙 커 인종이 피신한 산호정까지 불이 닥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인종을 죽일 뻔했다.[45]

이 사건은 여파가 매우 컸다. 비록 이자겸과 척준경은 무시하려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양자간 탓을 돌리는 것으로 드러난다.
"네 주인이 궁궐에 화살을 쏘고 불태우니 이는 죽음으로 갚을 죄다. 너도 정부 소속 노비가 될 꼴인데 어찌 날 모욕하는가!"
이지언의 노비가 척준경의 노비에게. 고려사 이자겸 열전.
"전일의 난은 모두 너희 등이 한 짓이다. 왜 내 죄만 죽어 마땅하다 하는가?"
척준경이 이지미와 이지보의 수하에게. 고려사 이자겸 열전.

자세히 보면 이지언의 노비가 해선 안 될 말을 한 게 보인다. 노비의 말을 보면 이미 누가 궁궐을 불태웠는지 다 알려졌고 척준경의 행위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당황한 척준경은 분노해서 두문불출했고 하야까지 선언한다. 이지미, 이지보가 척준경과 화해하려 했지만 척준경은 도리어 난의 주동자를 이자겸으로 몰아갔다. 척준경의 말을 보면 몸통은 따로 있는데 욕을 먹을 대로 먹으니 역으로 억울해진 감이 있는 듯하다.

척준경 입장에선 아무리 자신이 권신이 됐더라도 자기 아들, 동생, 부하가 다 죽었는데 복수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려의 상징과 같은 본궐을 연소시킨 건 당대나 지금이나 욕을 먹을 것이다.

4. 이야깃거리

  • 이자겸은 붙잡혔으나 왕의 장인에다 외조부란 이유로 죽이진 못 했고, 영광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지에서 비굴하지 말자는 각오로 염장한 조기에게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민간어원이며, 굴비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링크굴비 문서를 참고.
  • 이 사람 때문에 인천 이씨가 그대로 몰락했다...곤 할 순 없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으로 경원 이씨가 여전히 언급되고, 실제로 이자겸계 외의 경원 이씨가 같이 제거되진 않았다. 오히려 경원 이씨가 상당히 타격을 입은 사건은 바로 이징옥의 난.

    2000년 인구조사에서 전국에 약 68,000명이 사는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과거 화려하던 시절을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적은 숫자. 김해 김씨가 그 조사에서 412만 5,000명이 보고된 것과 비교한다면 더더욱 안습해진다. 이자겸 시대를 기점으로 너무 몰락한 바람에, 조선 후기 이후에 시작된 족보 세탁 바람에서 별 관심을 못 받은 양반 가문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전체에서 문과 급제가 9명밖에 안 된다면 양반이라고 하기도 뭣한 가문.
  • 웅진출판사의 "한국의 역사" 만화에서는, 권력을 휘어잡은 이자겸이 지나가면서 손짓 한번 하자 날아가던 새들이 비 오듯 우수수 떨어지고, 동네 똥개들도 알아서 설설 기며 모시는 모습으로 그 하늘 높은 권세를 묘사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져 있는데, 권력을 상징하는 감투를 아들들에게 사이 좋게 나눠 가지라면서 휙휙 던져주고, 위에서 언급한 7남 이의장이 의기양양하게 수좌를 맡으면서 불교계까지 손아귀에 넣게 되자, 그걸 본 스님들이 "이러다가 자기 집 강아지한테도 벼슬을 내릴 판국"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린다.


[1] 추증된 공식 작위.[2] 사후 추증된 마지막 공식 검교직.[3] 사후 추증된 마지막 공식 작위.[4] 법명. 승려이다.[5] 군권을 왕 대신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자겸은 지군국사가 되기위해 인종을 불러다가 '언제 몇시에 날 책봉하라!'고 했지만 결국 정말 책봉되진 않았다. 왕조차 마음대로 다룬 그의 권세를 알려주는 일화다.[6] 황태자, 제후에게 신하가 올리는 글이다. 황제는 표문(表文).[7] 인천의 옛 이름.[8] 이자겸의 증조할아버지이자 이자연의 아버지는 인천 이씨의 시조인 이허겸(李許謙)이다.[9] 그에 대한 남은 기록은 이자연 묘지명, 고려사가 있다.[10] 각각 순종, 선종, 숙종의 모후인 효목성선인예순덕태후, 조선국 양헌왕의 모비 인경현비, 인절현비.[11] 후의 숙종.[12] 경화왕후 이씨.[13] 僚屬, 딸린 무리.[14] 고려의 모든 승려를 관장하는 승통 다음 가는 자리[15] 고려 오등봉작제 중 최고 작위.[16] 절일로 천자 및 직계 가족의 생일에만 붙이는 이름.[17] 이자겸의 아들.[18] 척준경의 아들.[19] 이자겸의 아들, 척준경의 친구 왕자지의 사위.[20] 척준경의 동생.[21] 이자겸의 아들, 출가한 승려, 현화사의 주지. 현화사는 현종이 세운 영향력이 매우 큰 절이다.[22] 척준경의 친구 왕자지의 아들.[23] 이자겸의 아들, 척준경의 사위.[24] 이자겸의 아들, 김향의 사위.[25] 이자겸의 아들.[26] 인종은 부를 설치해줄 때 엿을 넣어 선물했는데 바로 부의 이름을 숭덕(崇德), 즉 천추태후김치양의 부 이름을 따왔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 아무도 이걸 몰랐고 나중에야 숭덕부가 누구의 관저였는지 알려진다.[27] 원 이름은 개명택(開明宅)인데 이자겸의 선대, 즉 이자연 세대가 살던 곳이었다. 고려사엔 인종이 개수하고 이름을 바꿔 주었다는데 누가 압력을 넣었는진 자명하다.[28] 군대와 국가를 (국왕 대신) 돌보는 사람.[29] 환관의 다른 말.[30] 궁성을 둘러싼 황성의 남문. 자세한 정보는 만월대 문서 참조.[31] 궁성 남문이자 정문인 승평문 뒤에 있다. 자세한 정보는 만월대 문서 참조.[32] 이 문은 경복궁의 광화문 같이 생각하면 된다. 만월대 문서 참조.[33] 이 고려사의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척준경이 권세가 강했어도 결국 군대는 인종에게 충실했다는 것.[34] 궁궐의 다른 말.[35] 동화문은 궁성의 동문이다. 정남쪽에 위치한 승평, 신봉 등 문보단 중요도가 떨어진다.[36] 이 때 화마로 무너진 본궐은 인종이 6년을 걸쳐서야 수리를 끝낸다.[37] 태자궁인 좌우춘궁으로 가는 대문. 태자궁은 만월대 내 별궁이다.[38] 당시 고려는 외왕내제 국가 답게 황후 칭호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39] 인종을 의미함.[40] 왕을 보좌한 재상과 대신들.[41] 황성의 동문. 경복궁 광화문과 용도가 다르다. 자세한 정보는 만월대 문서 참조.[42] 고려시대 팔관회 개설을 담당한 부서.[43] 척준경에게 계속 인종의 말을 전한 인종의 주치의.[44] 물론 전근대 동아시아의 예법 특성상 준다고 한 번만에 덥석 받기도 좀 뭣했을 것이다. 최대한 모양 좋게 받고자 예의상 한 번쯤 사양했을 가능성이 있다. 상술했던 이공수의 기지도 있었고.[45] 산호정까지 불이 안갔지만 불안감을 느낀 인종은 본궐을 떠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