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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C224><colbgcolor=#010131> 고려의 문하시중 이정 | |
시호 | 정헌(貞憲) |
작위 | 수태사(守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 |
출신지 | 양광도 수주 소성현 |
사망지 | 개경 불은사 |
묘지 | 양주 임진현 백악의 선영 근처 |
본관 | 인천 이씨(仁川 李氏)[1] |
이름 | 정(頲) |
자 | 백약(百藥) |
부모 | 부친 장화공 이자연 (尙書右僕射 李翰) 모친 계림국대부인 김씨[2] (雞林國大夫人 金氏) |
형제자매 | |
배우자 | 상당현군(上黨縣君) 왕씨[3] |
자녀 | |
생몰연도 | 1025년 ~ 1077년 음력 8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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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정종, 문종 시기의 문벌귀족.2. 생애
본관은 인천 이씨. 수주 소성현 출신이다. 이자연과 계림국대부인 김씨의 장남으로 현종 16년인 1025년에 출생했다. 본인의 묘지 비문에에 따르면 시 짓기를 취미로 삼아 과거로 급제할 만했지만 이자연이 과거 응시를 불허해 어쩔 수 없이 음서로 관직에 나간다. 정종 11년인 1045년 내고부사(內庫副使), 문종 2년인 1048년 예빈성주부(禮賓省主簿), 문종 4년 1050년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오른다.문종 7년인 1053년 상서고공원외랑(尙書考功員外郎)을 지내다가 양주(楊州)에 지방관으로 3년동안 파견되었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郎)을 지낸다. 문종 10년인 1056년 정랑(正郎)이 더해져 겸직하면서 붉은 어대[9]를 하사받았고, 같은 해 위위소경 지합문사(衛尉少卿 知閤門事)에 임명된다. 문종 13년인 1059년 상서우승(尙書右丞), 14년인 1060년 상서이부시랑(尙書吏部侍郎)에 임명되고 자금색 어대[10]를 받는다. 문종 16년인 1062년 전중감 지상서이부사(殿中監 知尙書吏部事)를 거쳐 문종 18년인 1064년 처음으로 중앙 정계의 동지중추원사 겸 삼사사(同知中樞院事 兼 三司使)의 요직에 오른다.
문종 22년인 1068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문종 24년인 1070년 호부상서 중추사 서경유수사(戶部尙書 中樞使 權西京留守使)에 임명되었고, 문종 25년인 1071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승진하였다. 문종 26년인 1072년 참지정사 판삼사사 주국(叅知政事 判三司事 柱國)에 임명되고 문종 28년인 1074년 권서경유수사(權西京留守使)에 임명된다. 문종 29년인 1075년 관직이 중대부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병부사 서북면병마사(中大夫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兵部事 西北面兵馬事)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西京留守使 上柱國)에 이른다. 관직 생활 30년만에 하급 관리에서 재상이 된 것이다.
문종 31년인 1077년 부인 왕씨가 죽고 얼마 뒤 다리에 병이 난다. 이정의 집은 문종이 보낸 어의를 비롯해 태자와 왕족 등 문병객이 드나드느라 북새통을 이룬다. 5월에 문종은 이정에게 수태사(守太師) 겸 문하시중(門下侍中) 벼슬을 내려 물러나게 했는데, 이정은 같은 날 개경 불은사(佛恩寺)에서 53세의 나이로 죽는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만큼 이정은 죽기 전까지도 아미타불을 외며 보살 팔계를 받는다. 문종은 정헌(貞憲) 시호를 추증했으며, 불교 장례법에 따라 그 달에 서기산(西畿山)에서 화장되고, 10월에 다시 양주(楊州) 임진현(臨津縣) 백악(白嶽)의 선산에서 다시 장례가 치러진다.
3. 문장
三五年來養病姿, 素喰君祿合人譏. 15년동안 병이 심해지는데, 임금이 내린 녹을 부질없이 먹으니 모두가 비웃는구나.
稍同南國休文瘦, 徒羡西河子夏肥. 점점 남조의 휴문[11]처럼 여위니, 다만 부러운것은 서하[12]의 자하의 살찜이로다.
只學因縁精進切, 縱逢花酒極歡稀. 다만 인연을 배워 불도에 정진함이 간절하여, 설령 화주를 맞이하더라도 지극한 기쁨이 드물구나.
今春偶失糟糠伴, 梁上翻嫌雙燕飛. 올 봄 우연히 조강의 반려를 잃으니, 들보 위 나부끼는 제비 한 쌍을 미워하노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남긴 시
40년을 시를 썼다지만 남아있는 작품은 본인의 묘지명에 인용된 위의 시 한편 뿐이다.稍同南國休文瘦, 徒羡西河子夏肥. 점점 남조의 휴문[11]처럼 여위니, 다만 부러운것은 서하[12]의 자하의 살찜이로다.
只學因縁精進切, 縱逢花酒極歡稀. 다만 인연을 배워 불도에 정진함이 간절하여, 설령 화주를 맞이하더라도 지극한 기쁨이 드물구나.
今春偶失糟糠伴, 梁上翻嫌雙燕飛. 올 봄 우연히 조강의 반려를 잃으니, 들보 위 나부끼는 제비 한 쌍을 미워하노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남긴 시
4. 가족관계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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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이씨 이자림家 | 황려 민씨 민영모家 | 횡천 조씨 조영인家 | 파평 윤씨 윤관家 | 평양 조씨 조인규家 |
왕가도의 딸인 상당현군(上黨縣君) 왕씨와 사이에서 총 6남 4녀를 뒀다. 승려가 된 다섯째를 제외한 네 아들은 모두 음서로 어려서 관직에 나갔다. 이정의 묘지명이 쓰인 문종 31년인 1077년 기준으로 막내아들과 막내딸은 어렸고, 장녀를 제외한 두 딸은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이 훗날 선종의 후궁이 되어 한산후 왕윤을 낳았고, 차남 이자의가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즉위시키려고 모의하다 훗날 숙종으로 즉위하는 계림공(鷄林公)에게 제거된다.
왕원의 묘지명에 따르면 이정의 딸이 조선공 왕도와의 사이에서 왕원을 낳는다.
- 본인: 이정
- 부인: 상당현군(上黨縣君) 왕씨[13]
[1] 경원 이씨, 인주 이씨 라고도 불렀다. 인천의 과거 지명이 경원(慶源), 인주(仁州)였기 때문이다.[2] 경주 김씨 김인위의 딸[3] 사성 개성 왕씨 왕가도의 3녀[4] 현화사(玄化寺) 승려[5] 이정이 아들의 이름을 짓지 못하고 사망했다.[6] 광양 김씨(光陽 金氏) 김양감의 아들인 김의영(金義英)의 부인[7] 고려 선종의 후궁[8] 조선국양헌왕 왕도의 부인[9] 비어대(緋魚袋)[10] 자금어대(紫金魚袋). 물고기 모양의 장식이 붙어있는 주머니. 공복(公服)의 띠에 매달아 관직의 귀천을 구분하였다.[11] 양나라 심약(沈約)의 자로 친구에게 병세를 알린 서신으로 인해 알려졌다.[12] 공자의 제자 자하의 출신지[13] 사성 개성 왕씨 왕가도의 3녀[14] 왕석(王錫)의 딸. 시호로 보아 강릉 왕씨(江陵 王氏)로 추정된다.[15] 광양 김씨(光陽 金氏) 김양감의 아들. 묘지명에서는 마지막 글자가 결락되어 있으나 《고려사》 세가 숙종 편을 보면 이자의의 역모에 연루된 사람 중 “김의영의 처 이씨” 등을 개경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한다는 기록이 있다.